근자에 스포츠 스타들에 대한 뉴스가 유난히 많았다.
메이저 리그 야구 선수인 류현진과 추신수는 지난 성적과 트레이드로, 여기에 이대호와 오승환도 가세하고,
다가온 월드컵에 대한 관심으로 축구 대표팀과 대표 선수, 감독에 대한 소식들,
또한 동계 올림픽의 유망주인 김연아와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들, 소외 종목 선수들...
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둔 스타들에 대한 얘기이긴 하지만,
그들의 사회적인 명성과 위상, 그리고 수입은 가히 어떤 부류의 직업에도 뒤지지 않는다.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 아닐까 싶다.
공을 잘 던지고 잘 쳐내는 것이, 공을 잘 차는 것이, 얼음 위에서 빨리 달리는 것이 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냐고 반문했어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었다.
때문에 모두가 공부가 성공의 가장 확실한 투자였다고 생각했으며,
당시에는 정말 맞는 얘기었다.
하긴 지금도, 그들이 야구를 잘하고 축구를 잘해서 쌀을 만들지는 못하고 고기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단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프츠에서 뛰어난 실력을 가졌기에, 그 많은 관중들이 투자한 금전과 시간에 비례해서, 그리고 그 종목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례해서 보상을 받고 있을 다름이다.
지금은 그 성장세가 주춤하지만, 십여년 전 부터 프로 게이머라는 직업이 생겨났다.
그 당시엔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 보였다.
누구나 다 즐겨하는 게임을, 그걸 조금 더 잘한다고, 직업을 삼는다는 건 쉽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관연 그게 돈벌이가 될까하는 의심도 들었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순수한 놀이의 결정체인 게임을 하는데, 그게 어떻게 직업이 되겠는가?
저들이 게임하면서 즐기는데 왜 관중들이 돈을 지불하겠는가 하는 생각...
이제는 프로 게이머가 다분히 적업적인 면모도 많이 갖추고 있는 듯 하다.
꾸준한 훈련, 이기기 위한 끊임없는 연구와 실험, 갖가지 전략과 기술의 습득 및 연마...
물론 이 프로게이머 또한 여기에 관심을 가지는 관중들이 투자하는 금전과 시간에 비례하여 수익이 늘어나며, 실력에 비례하여 수익이 늘어나므로, 스포츠와 전혀 다르지 않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어디 이 뿐이랴,
가수와 배우 등의 연예인들 또한 같은 속성을 지닌 직업군이지 않겠는가.
단지 아직은 프로 게이머가 사회적인 위상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이는 생겨난지 얼마 되지 않은 직업군이기도 하고, 그 중심에 있는 스타들의 연령이 낮으며, 이들을 환호하는 연령층 또한 일부에 편중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이상의 얘기는 누구나 다 알고 인정하는 바가 아닐까 싶고,
정작 하고 싶었던 얘기는 여기 부터다.
어째서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처음 생겼을 때, 그걸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걸까?
어째서 아직도 프로게이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이렇게 떨어지는 것일까?
어째서 김연아는 그 성적 뿐이 아니라, 인성적인 측면까지 기사로 다루면서 호들갑을 떨고 대단한 천재이고 대단히 신뢰를 받을 만한 존재로 칭송을 하는가?
반면에 임요환 같은 선수는 아무리 잘해도 껨 잘해서 돈 많이 번 사람...정도로 끝날 뿐이다.
김연아는 나중에 나이가 좀 들어서 IOC 위원이 될지도 모르겠고, 국회의원 비례대표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임요환은 아파트 주민대표 정도나 할 수 있을까?
스포츠도 게임도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놀이에서 시작되었다.
하면 즐거운 것이고 뛰어난 사람이 하는 것은 보는 것도 즐거운 것이다.
물론 세계 정상에 서기 위해서는 어떤 분야든 뼈를 깎는 고통과 인내가 필요한 것이지만 말이다.
어린 아이가 축구가 좋아서 축구 선수가 되겠다고 하면 장차 국가대표를 꿈꾸고 각종 프로리그 선수가 될 것을 희망하며 반길 것이다.
어린 아이가 게임이 좋아서 프로게이머가 되겠다고 하면 잘 해봐야 돈 좀 벌지만 대게는 게임폐인되고 집밖에는 나가지도 않는 은둔형 외톨이가 되겠다고 걱정부터 할 것이다.
과연 스포츠와 게임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나는 그걸 즐기는 관중이 넓게 마련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상대적으로 아직은 좁다는 것이다.
하나는 주로 몸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로 머리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가 장 큰 차이는 그걸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고정관념이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는 '좋은 것' 다른 하나는 '나쁜 것'
조금만 더 의식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보자.
소위 '돈벌이'로써의 직업에 대한 관념에는 <힘든 것> <괴로운 것> <하기 싫은 것>이라는 의식이 깔려 있지는 않을까?
누군가 힘을 들이지 않고, 너무 즐거워 하면서, 아무런 강제가 없이도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돈벌이가 된다면,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은 백이면 구십구는 허탈하고 황당하며 심지어는 화가 날 것이다.
왜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그건 자신이 '돈벌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저변의 의식(힘든 것, 괴로운 것, 하기 싫은 것)과 전혀 들어맞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힘들며, 괴로우며, 하기 싫은 것을 해야 겨우 돈벌이가 되는 자신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어릴 적에, 내가 꿈꾸었던 직업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경계를 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좋아하는 것도 직업이 되면 싫어질 것이다, 좋아하는 일은 돈벌이가 되기 힘들다,는 등의 이유였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달라졌다.
근본적인 생계에 직접 연관된 일은 극히 적다.(직접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지 않는 한..)
대개의 직업을 차지하는 일은 대규모 공장의 근로자나 건설 현장의 근로자, 물건을 판매하거나 사무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등의 개성이 없고 보편적으로 즐겁지 않은 일임은 사실이다.
하지만 즐거움에 종사하는 직업군이 상당히 늘어나고 있으며, 더 이상 나의 괴로움과 돈을 맞바꾸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괴롭기 때문에 돈벌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즐거움과 괴로움, 돈벌이는 이제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세상엔 즐거운 돈벌이도 있으며, 괴로운 돈벌이도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단지 선택일 뿐이다.
2014년 1월 9일 목요일
2014년 1월 2일 목요일
남자에게 여자란
여성들이 들으면 분노하겠지만, 혹은 다르다고 부인하겠지만,
남성인 내가 보기엔,
남성에게 아름다운 여인은, 여성에게 새로 나온 명품 백이나 구두외 비슷한 듯 해.
여성들은 종종 자신의 배우자나 남자 친구가,
지나가는 여성들을 흘끔거린다고들 불만을 토로하지만,
그건 여성들이 백화점 쇼윈도우에 비치된,
새로 나온 명품 백과 구두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야.
어째서 남성에게 여성이란 존재는 백이나 구두 밖에 안되냐고 묻지는 말았으면 해.
그건 여성들 스스로 백이나 구두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거나,
그런 하찮은 것에 집착하는 자신들을 비하하는 것이거나,
왜 자신들은 그런 것에 집착하는지 모르면서 남성들 탓만 하는 것으로 보이니까.
남성들도 잘 모르겠어.
만약에 누군가가 미치도록 좋아진다면,
그 사랑이 오래가지는 못하리라는 건 예상해야 해.
마치 아주 잘 맞고, 잘 어울리고, 나를 한껏 빛나게 해 줄 날개와 같은 옷과 비슷하거든.
아주 좋아서 아끼고 아끼다가 몇 번 입지도 못한채로 입을 수 없는 시간이 오기도 하고,
너무 좋아서 자주 입다가 닳고 헤져서 못 입게 되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리고, 실제로 그런 옷들이 어울리는 장소는 제한적이고,
집에서 편하게 쉬거나 잠을 잘 때에 입을 수 없다는 것도 명심을 해 두어야 겠지.
남성인 내가 보기엔,
남성에게 아름다운 여인은, 여성에게 새로 나온 명품 백이나 구두외 비슷한 듯 해.
여성들은 종종 자신의 배우자나 남자 친구가,
지나가는 여성들을 흘끔거린다고들 불만을 토로하지만,
그건 여성들이 백화점 쇼윈도우에 비치된,
새로 나온 명품 백과 구두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야.
어째서 남성에게 여성이란 존재는 백이나 구두 밖에 안되냐고 묻지는 말았으면 해.
그건 여성들 스스로 백이나 구두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거나,
그런 하찮은 것에 집착하는 자신들을 비하하는 것이거나,
왜 자신들은 그런 것에 집착하는지 모르면서 남성들 탓만 하는 것으로 보이니까.
남성들도 잘 모르겠어.
만약에 누군가가 미치도록 좋아진다면,
그 사랑이 오래가지는 못하리라는 건 예상해야 해.
마치 아주 잘 맞고, 잘 어울리고, 나를 한껏 빛나게 해 줄 날개와 같은 옷과 비슷하거든.
아주 좋아서 아끼고 아끼다가 몇 번 입지도 못한채로 입을 수 없는 시간이 오기도 하고,
너무 좋아서 자주 입다가 닳고 헤져서 못 입게 되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리고, 실제로 그런 옷들이 어울리는 장소는 제한적이고,
집에서 편하게 쉬거나 잠을 잘 때에 입을 수 없다는 것도 명심을 해 두어야 겠지.
2013년 12월 22일 일요일
아주 큰 것은 보이지 않는다.
곧잘 자신의 꿈과 희망을 늘어 놓던 젊은 날에는,
정작 큰 꿈은 보이지 않기 마련이다. 작은 꿈들만 보일 뿐...
시간이 한참 지나고,
작은 꿈들이 사라지고,
걸어온 길의 자취를 더듬어 보면,
그제서야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꿈이 무엇이었는지
보이게 된다.
그러고 나면 비로서
그 때, 왜 그런 선택을 했었는지,
왜 그것이 그리도 싫었는지,
어째서 무작정 그걸 좇았는지,
이해가 된다.
좀 더 빨리 큰 꿈을 보았더라면
후회가 들기도 하지만,
큰 꿈을 보기 위해선,
거기에서 멀리 떨어져 봐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지금 내가 알았다는
이것조차
더 큰 것의 일부 일 수 있다는 생각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본다.
정작 큰 꿈은 보이지 않기 마련이다. 작은 꿈들만 보일 뿐...
시간이 한참 지나고,
작은 꿈들이 사라지고,
걸어온 길의 자취를 더듬어 보면,
그제서야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꿈이 무엇이었는지
보이게 된다.
그러고 나면 비로서
그 때, 왜 그런 선택을 했었는지,
왜 그것이 그리도 싫었는지,
어째서 무작정 그걸 좇았는지,
이해가 된다.
좀 더 빨리 큰 꿈을 보았더라면
후회가 들기도 하지만,
큰 꿈을 보기 위해선,
거기에서 멀리 떨어져 봐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지금 내가 알았다는
이것조차
더 큰 것의 일부 일 수 있다는 생각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본다.
2013년 9월 30일 월요일
바꾸기 전에 살펴보아야
한 개인 또는 민족, 나아가 인류가 발전을 위해 잘못된 것을 고쳐나갈 때에는
반드시 왜 그것이 잘못되었던 것인지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한다.
잘못된 옛것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며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잘못되었음에도 만들어지고 유지된 이유에 대해서 알아야만,
변증법의 무한 반복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왜 그것이 잘못되었던 것인지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한다.
잘못된 옛것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며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잘못되었음에도 만들어지고 유지된 이유에 대해서 알아야만,
변증법의 무한 반복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2013년 9월 22일 일요일
현실과 꿈 속의 나
"나"라는 인식,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분별을 만들고 분별이 고통을 만든다....고 한다.
문득, 꿈에 대한 많은 이들의 인식, 혹은 어렴풋한 나 자신의 느낌으로 보건데,
현실과 꿈은 서로를 비추는 반영이기도 하면서 간혹 영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신비로운 현상이다.
계시적인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프로이트의 꿈에 대한 해석이 아직은 정설처럼 받아들여 지고 있다.
따라서 현실의 반영도 당연한 현상이며 현실과는 정 반대되는 꿈도 당연한 현상이 된다.
이런 결과는 종종 무의식의 반영으로 해석되기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한편으로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도 따져보면 모호하기 짝이 없지 아니한가?
무의식은 제쳐두고라도, 의식이라도 뚜렷하게 정의하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정신적인 활동 가운데 의식을 제외한 것이 무의식이요, 무의식을 제외한 것이 의식이라 설명하는 것이 부족하나마 정확한 설명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정신적 활동을, 그 범위를 정의할 수 없다면 이 또한 결국은 같은 모호함일 뿐이다.
이야기가 또 옆으로 새었으니 다시 본 주제로 돌아와보자.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고, 무의식 또한 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과연 무의식이 무엇인지, 무의식을 포함하고 있는 기저의 마음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방법으로, 꿈과 현실에서의 차이를 비교하면 되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나"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면,
꿈 속에서 "나"를 인식 하고 있는지, 꿈 속에서의 "나"는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그 인식을 감시하고 관찰하는 것은 "무엇"인지 쫓아가면 되지 않을까?
문득, 꿈에 대한 많은 이들의 인식, 혹은 어렴풋한 나 자신의 느낌으로 보건데,
현실과 꿈은 서로를 비추는 반영이기도 하면서 간혹 영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신비로운 현상이다.
계시적인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프로이트의 꿈에 대한 해석이 아직은 정설처럼 받아들여 지고 있다.
따라서 현실의 반영도 당연한 현상이며 현실과는 정 반대되는 꿈도 당연한 현상이 된다.
이런 결과는 종종 무의식의 반영으로 해석되기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한편으로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도 따져보면 모호하기 짝이 없지 아니한가?
무의식은 제쳐두고라도, 의식이라도 뚜렷하게 정의하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정신적인 활동 가운데 의식을 제외한 것이 무의식이요, 무의식을 제외한 것이 의식이라 설명하는 것이 부족하나마 정확한 설명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정신적 활동을, 그 범위를 정의할 수 없다면 이 또한 결국은 같은 모호함일 뿐이다.
이야기가 또 옆으로 새었으니 다시 본 주제로 돌아와보자.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고, 무의식 또한 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과연 무의식이 무엇인지, 무의식을 포함하고 있는 기저의 마음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방법으로, 꿈과 현실에서의 차이를 비교하면 되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나"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면,
꿈 속에서 "나"를 인식 하고 있는지, 꿈 속에서의 "나"는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그 인식을 감시하고 관찰하는 것은 "무엇"인지 쫓아가면 되지 않을까?
2013년 9월 20일 금요일
인간의 자기 인식
영화 [매트릭스]에서,
스미스 요원이 모피어스를 심문하는 중,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 자기 존재를 인식하는 것 같아."
[매트릭스2:리로디드]에서,
아키텍트가 네오에게 매트릭스에 관해 설명하던 중,
"인간은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선택할 권리가 주어지는 걸 선호하더군. 그게 무의식적인 선택이라도 말이야"
스미스 요원이 모피어스를 심문하는 중,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 자기 존재를 인식하는 것 같아."
[매트릭스2:리로디드]에서,
아키텍트가 네오에게 매트릭스에 관해 설명하던 중,
"인간은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선택할 권리가 주어지는 걸 선호하더군. 그게 무의식적인 선택이라도 말이야"
곰스크로 가는 기차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 대한 감상이,
문득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곰스크>는 꿈이고 이상이며 마음에 간직한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것이었다.
처음 이 작품을 접했을 당시엔 남성과 여성의 인생관에 대한 작품이라 생각했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는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선뜻 결정을 하지 못하는 인간의 딜레마에 대한 작품이라 생각을 했다.
혹자는 <곰스크>를 상징적인 대명사로 사용하며,
서로의 "곰스크"를 묻고, 점점 잊혀져가는 자신의 "곰스크"에 우울해하기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그가 <곰스크>에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해 보았다.
과연 곰스크는 그가 기대한 대로, 혹은 그 이상 이었을까? 아니면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까?
아니, 기대 이상이라 한들, 그는 곰스크에 만족하고 거기에 정착했을까?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곰스크>는 도달할 수 없는 [저기]에 존재하는 무엇이었다. [여기]가 아니란 말이다.
여자는 [여기]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곳이라고 남자를 설득하고 붙잡았지만,
남자는 [여기]는 불충분한 곳이며 [저기]만이 충분할거라 생각한다.
그 남자는 끊임없이 행복을 쫓지만 행복해 질 수 없는 불행한 존재였으며,
그 여자는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도 그 순간의 행복을 찾아 누리는 존재였던 것이다.
문득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곰스크>는 꿈이고 이상이며 마음에 간직한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것이었다.
처음 이 작품을 접했을 당시엔 남성과 여성의 인생관에 대한 작품이라 생각했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는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선뜻 결정을 하지 못하는 인간의 딜레마에 대한 작품이라 생각을 했다.
혹자는 <곰스크>를 상징적인 대명사로 사용하며,
서로의 "곰스크"를 묻고, 점점 잊혀져가는 자신의 "곰스크"에 우울해하기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그가 <곰스크>에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해 보았다.
과연 곰스크는 그가 기대한 대로, 혹은 그 이상 이었을까? 아니면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까?
아니, 기대 이상이라 한들, 그는 곰스크에 만족하고 거기에 정착했을까?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곰스크>는 도달할 수 없는 [저기]에 존재하는 무엇이었다. [여기]가 아니란 말이다.
여자는 [여기]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곳이라고 남자를 설득하고 붙잡았지만,
남자는 [여기]는 불충분한 곳이며 [저기]만이 충분할거라 생각한다.
그 남자는 끊임없이 행복을 쫓지만 행복해 질 수 없는 불행한 존재였으며,
그 여자는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도 그 순간의 행복을 찾아 누리는 존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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