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5일 일요일

성인(聖人)은 있는가

혼란스러운 세상이다. 혼란스러운 시절이다.
세상의 발전 속도가 빠르다고는 하지만, 그냥 빠른게 아니라 가속도가 붙어서 점점 빨라지는 듯 하다.

지식의 발전은 인공지능이라는 꿈 같았던 기술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미래를 예측하기가 어려워질 정도이다.
열역학 제 2법칙처럼 인간들의 개개인의 자유도에 대한 욕망도 증가하면서 국가를 비롯한 다양한 집단들의 분열은 단지 시간의 문제가 되어 버린 듯 하다.
이런 급격한 변화들은 전반적인 사회의 변화 속도에도 영향을 끼쳐서,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만연해 있던 관습들은 구태(舊態)와 악습(惡習)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아마도 과거에는 최소한 한세대인 30년 정도의 간격을 두고 진행되지 않았을까 싶은 정도의 가치관 변화, 그래서 구태와 악습의 주체를 처벌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서 죄를 묻기 어려운 정도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한 평생을 살면서 몇번씩은 잠재적 범죄자가 된 마음으로 살아야 되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이제는 누구든 자신이 일상적인 생활의 한 부분으로 행했던 것들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죄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과연 그런 걱정들을 안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는 미투(Me too) 운동의 원인은 성폭행, 성추행, 성희롱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다.

가장 큰 변화는 성적 피해를 입은 여성(혹은 남성?)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이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변화, 그에 따라서 남성과 여성의 권리가 이전보다 평등해 졌으며, 소위 갑질에 대한 비판으로 강자와 약자의 관계에서도 지켜야할 최소한의 인권에 대한 인식 변화도 영향을 끼졌다 생각한다.

모든 미투 운동의 사례를 자세히 보지는 않았기에, 개별 사건들에 대한 피해자들의 폭로와 가해자들의 사죄를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은근히 나 또한 죄인은 아니더라도 비난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이런 속도의 변화라면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나도 죄인이 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하는 건 아닐지...


이 와중에도 사람들의 행태는 다분히 내로남불인 경우가 많고, 자기 모순적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간혹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청렴과 도덕을 요구하는 듯이 잠재적 가해자(아직 사실 관계가 드러나지 않은 경우도 많기에 이렇게 썼음)에게 비난을 쏟아 붓고 있지만, 그 정도의 철저한 도덕성을 지닌 사람이 익명성의 뒤에 숨어서 타인에게 인격적 살인에 가까운 모욕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내가 자주 접하는 인터넷의 공간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런 불편한 마음의 끝에 들었던 생각은 이러했다.
"아마도 부처님과 예수님이 현 시대에 나셨다 하더라도, 이 악플에 쫓겨서 세상을 등 지셨겠구나."
하기야 부처님도 예수님도 당 시대에는 일부 지역 내에서만 유명하셨을테고, 추종자들 만큼이나 많은 비판론자들이 있었으리라는 추론은 충분히 가능하니, 지금과 별반 다르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어쩌면 지금도 과거의 성인만큼이나 뛰어나고 훌륭한 인물이 어딘가에는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과연 우리는 성인이 나타나면 그가 성인인지 알아 볼 수는 있겠는가?
아니, 어쩌면 부처님 예수님 같은 성인은 단지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기로 결정(?)했기에 성인의 지위에 오른 것은 아닐까?

2018년 2월 11일 일요일

시기와 질투

시기와 질투는 비슷해 보이는 데, 과연 무엇이 다를까?

우연히 읽은 인터넷의 정보에 이런 것이 있었다.

시기는 envy, 질투는 jealousy
고대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기와 질투에 대해서 구분을 하고 있었는데,
시기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느끼는 슬픔'
질투는 '누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느끼는 슬픔'
이라고 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시기는 '상대방'에 대해 느끼는 슬픈 감정이고, 질투는 '나'에 대해 느끼는 슬픈 감정이라는 것이다.


번역에 관해서는 조금 다른 의견들도 있다.
envy가 <시기>, jealousy는 <샘>으로 번역하고, 우리말의 질투는 시기와 샘을 다 아우르는 단어라는 것이다.


혹자는, 자주 사용되는 상황으로 구분한 경우도 있다.
질투는 주로 애정 - 특히 남녀간의 애정에 쓰이는 단어이고 시기는 그 이외의 상황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가면서 나 자신을 객관화 하게 되는 경우가 점점 늘어 가는데,
그것이 조금식 연습이 되자 내가 느끼는 감정이 과연 무엇이고, 왜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지에 대해 굼금해 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여러 경로를 통해 보거나 듣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데, 대체적으로 어떤 사람에 대한 잠깐의 소개(?)만을 접한 상황에서도 극적인 호불호(好不好)를 결정 짓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도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면 별 문제는 없겠지만, 이상스러울만큼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고,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한 어떤 형식의 조우(遭遇)에도 기분이 좋지 않게 되는 것을 느꼈다.
과연 이런 감정은 왜 생기는 것일까를 고민하다보니, 그것이 잠재적인 시기와 질투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는 사뭇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이지만, 그가 자신의 영역에서 이룬 성과를 바탕으로 누구나 원하는 보편적인 가치(돈,명예,권력,권위)에 접근하는 것에 대해 '보편적인' 시기나 질투를 느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 것이다.

너무 억지스러운 가정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저 나를 질투심/시기심이/시샘이 많은 성격의 소유자라고 하면 더 쉬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서는 내가 종종 느끼게 되는 그 불쾌한 기분, 불안한 기분으로 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아직은 명확하게 내 감정의 근원을 파악하지 못하였지만, 이 포스팅은 그 여정의 한 부분이며 언젠가는 스스로 만족할 만한 답을 찾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기와 질투에 관한 또 한가지 의문은, 아주 원초적인 감정일 듯한 이 시기와 질투가, 불교의 7정(七情) - 喜 怒 哀 樂 愛 惡 辱 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2018년 2월 6일 화요일

마피아 게임

직접 해 보진 않았지만, 마피아 게임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함께 하는 게임인데, 모종의 방법으로 마피아를 선정하고, 누가 마피아 인지는 마피아 자신만이 아는 상태.
게임이 진행되면서 마피아는 일반 시민을 제거하고, 모든 시민들이 제거 당하기 전에 마피아를 찾아 내야만 하는 게임이라고 한다.
링크 - 마피아 게임 (위키피디아)
링크 - 마피아 게임 (나무위키)


아마도 이를 컴퓨터 게임으로 만든 것도 여러가지가 있을 듯 한데, 최근에 온라인으로 여러 사람이 참여해 즐기는 게임으로 Deceit라는 게임도 있다.
게임 참가자 중 누군가는 흡혈귀이고 어둠을 틈타 사람들을 해치운다.
일반인은 흡혈귀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의심스러운 사람을 총으로 죽이거나 폐쇄된 공간에서 탈출해야 하는 게임.


뜬금없이 이런 게임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최근의 정치적인 문제들과 그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들을 들으며 느낀 것이, 마치 이 게임의 상황과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ICBM 개발과 실험.
미국의 THAAD 한반도 배치
THAAD 배치에 따른 중국의 반발과 그에 따른 각종 보복성 조치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
대북 제재에 대한 전세계적 공조 가운데 미국과 중국의 미묘한 이견
평창 동계 올림픽 개최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한 조급한 조치들
이 조치들과 대북 제재의 충돌, 급격한 화해 모드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


내부의 정치적 상황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 측근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 되자, 이제는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각종 비리 캐기가 시작되었다.
MB의 재임 당시에도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많은 것들이 묻혀버렸고, 그게 살아있는 권력의 힘 때문이라 생각했을 수 있었던 것들. 너무 사소한 부분까지 들추는게 아니냐는 지적과 사소한 것으로부터 큰 비리의 실마리를 찾을 수 밖에 없다는 옹호론이 상존하고 있다.

비트코인으로 대표되는 가상화폐 혹은 암호화폐의 과열된 거래와 부작용에 대해 정부에서는 오락가락 정책을 발표해서 스스로의 신뢰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최순실 등에 의한 국정 농단 사태에 대한 재판은 아직까지 진행 중인 가운데,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2심 재판에서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집행유예 판결이 내려져서 이재용 부회장은 오랜 옥중 생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여검사가 상급자로 부터 성추행을 당하고,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문제는 흐지부지되고 오히려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았다는 폭로가 나오자, 한편으로는 법조계에서마저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논란과 전세계에 불고 있는 "미투"의 바람이 대한민국에도 불게 되었다.


이런 저런 논란거리가 많은 요즈음이다.
진보와 보수로 나뉘던 국론은, 다시 대북 강경론자와 유화론자로, 구세대와 신세대로 사분오열되고 있다보니, 이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저 의견은 달리하는 경우가 너무나 당연시될 정도이다. 어쩌면 이런 다양한 문제에 놓인 지금이, 우리들 서로가 다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풍토를 만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와중에 벌어지는 현상이 글의 처음에 소개한 마피아 게임과도 같은 비슷한 면이 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여론몰이를 하거나 상대방에 대한 비방을 일삼는 것이다. 단지 이런 정도면 다양한 소리 가운데 하나라 생각하겠지만, 온라인이라는 특성을 이용해서 마치 자신의 세(勢)를 과도하게 부풀리는 거짓을 하고 있어 보인다.
여러가지 방법을 이용해서 한 사람 혹은 소수의 인원이 온라인에서 가명의 여러 사람 행세를 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반복해서 노출시키고, 자신의 의견에 대해서는 호응하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조작하며, 반대 의견에 대해서는 거부 반응이 많은 것처럼 조작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 사람들은 이런 조작된 의견과 조작된 호응도를 보면서 어떤 것이 진실된 것이고 어떤 것이 거짓된 것인지 구별해 내야만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2018년 1월 23일 화요일

가위 눌릴 때의 느낌

종종 가위에 눌리던 때가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온 직후였는데, 잠자리가 바뀌고 익숙해지지 않은 상태라 예민한 상태여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당시에 주변 사람들에게 가위 눌리는 것에 대해 설명을 하려고 해도, 그걸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는데 아주 좋은 표현을 얻게 된 것 같다.


통상, 나의 경우, 잠을 잘 때 똑바로 누워서 잠을 자곤 하는데, 가위가 눌리는 시점은 막 잠이 들려는 순간이다.
몸이 약간 붕 뜨는 느낌이 들고, 바닥에 밀착되지 않은 느낌이라 어느쪽으로 미끄러져 움직일지 몰라 불안감이 든다.
이런 느낌이 싫어서 깨어나려고 애를 쓰면 깰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다.
이렇게 움직이려 하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게 자신을 더 두렵게 만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 상태에서 심한 경우에는 몸이 순간적으로 미끄러지듯이 움직인다고 생각하게 된다.
대체로 매우 빠른 속도이고, 한쪽으로만 움직인다기 보다는 방향도 급격히 바뀌면서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려면, 대야에 물을 받아 두고 그 위에 스티로폼, 나무, 종이 따위의 조각을 띄워 놓았다고 생각해 보면 된다.
이제 대야를 들고 왼쪽 오른쪽 혹은 앞 뒤로 기울이면, 그리고 방향을 바꿔가며 기울이면 물위 떠 있는 조각은 아무 저항도 없이 이리 저리 움직이게 될 것이다.

가위에 눌렸을 때의 느낌은, 마치 대야의 물 위에 떠 있는 조각이 된 것과 같은 느낌이다.
누가 대야를 흔드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물 위에서 이리 저리 움직이게 된다. 멀미가 날 것 같은 그런 상황이다.


가위 눌림에 대한 얘기가 나왔으니, 잠시 가위에 눌렸다가 경험한 황당한 사건 몇가지를 적어 보겠다.

잠이 얼핏 들었다 생각했는데, 머리맡의 창문에서 엄청난 천둥과 번개, 폭우가 쏟아지는 징후를 느꼈다. 천둥 소리, 번개의 번쩍임, 빗소리 등등. 필시 요란한 폭우가 있구나. 다시 잠이 들었다가 얼마가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새벽에 눈이 떠졌고, 빗소리 기억이 나서 밖을 봤지만 밖은 아주 조용하고 맑았다. 비라고는 온 흔적도 없었다.

어느 날 가위에 눌렸는지 괴롭 던 중이었나 보다. 깨어나려 애쓰다 포기하다 보니 그냥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잠이 깬거였는지 눈이 떠지고 천장이 보였다. 그리고 천장의 한 모서리에 웬 여자가 매달려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건 최근에 겪은 가위 눌림인데, 좀 색달랐다.
작년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허리가 많이 아파서, 예전처럼 똑바로 누우면 오래 자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옆으로 누워 자는 경우가 많았다. 옆으로 누워자면 가위에 눌리는 경우가 없었던 것 같아서 이상하다는 것인데...
왼쪽으로 누워서 몸을 약간 웅크리고 잤다.
겨울이라 이불을 잔뜩 끌어 당겼기에 얼굴의 반은 이불에 덮인 상황.
잠이 들었는데, 너무도 선명하게 무언가가 내 광대뼈 부근을 꾹꾹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곤 이어서 오른쪽 갈비뼈 부근을 무언가가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가위 눌림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새로운 느낌이라 많이 황당했다.

아, 이와 비슷한 시기에 겪은 또 하나는..이 경우와 비슷한 자세로 자고 있었는데, 꽤 거슬리게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윗집이나 아랫집에서 누군가 예의도 없이 새벽에 발망치질을 하나보다 했는데 기다려봐도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화가 나서 일어나려고 웅크린 몸을 펴는 순간 쿵쿵거리는 소리가 사라졌다.
가만 보니 최근에 심장이 유난스럽게 두근거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잠자는 중임에도 심장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웅크리고 있었으니 이 소리가 더 잘들려 그랬나보다 싶기는 하지만 그 때 들었던 소리는 심장소리라 하기엔 너무나 크게 들렸었는데, 이것도 가위 눌림으로 인한 환청이었는지 싶다.

2017년 12월 6일 수요일

성취(成就)의 조건

1. 욕망, 하고자 하는 마음, 발심

2. 능력, 일을 처리할 수 있는 힘, 문제나 장애를 해결하는 방법이나 기술에 대한 지식

3. 환경, 시기나 위치 혹은 자연적인 조건. 일이 진행되는 것에 도움이 되는 주변의 갖가지 상황들. 혹은 일의 진행에 방해가 되는 상황을 벗어난 상태 등.


1번은 사람마다 각자가 원하는 바가 다르고, 자신이 하고자 마음을 먹는 순간 부터 자연스럽게 욕망을 가지게 되므로 특별한 방법은 필요하지 않다.
단지 얼마나 절실하게 원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할 따름이다.

3번은 그 요소가 너무 다양하고 예측이 어려운 점도 많아서 종종 운(運)이라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게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그치지 않으니 운에 의존하는 요소들이 점점 줄어들 것이라 생각한다.

2번이 인간이 인위적인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다.
대부분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이런 능력을 끌어 올리기 위함이고, 누군가에게 배우고 듣고 경험하는 것도 이를 위한 것이다.

2017년 11월 18일 토요일

화(火)의 전염

어느 일요일.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식구들이 모여서 가족 식사를 하기로 했다.
본가에 미리 도착해서 주차장에 주차를 하려 했는데, 골목 안쪽의 집에 누군가 이사를 하는건지 이삿짐 트럭이 주차장을 막고 한참 작업 중이었다.
차를 잠시 빼달라고 부탁하려고 보았는데, 한참 작업 중인 것이 보여서 번거롭겠다 싶었다.
아버지께서 이 상황을 보시고 차를 조금만 빼달라고 말씀하시려는 것을 내가 그만 두시라고 말렸다.
식사하러 가는 곳이 멀지 않지만, 그곳에도 주차장이 있으니 식사하고 와보면 상황이 달라져 있으리란 임시 대책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동하고 식사를 하고 다시 돌아왔는데, 상황은 더 악화되어 있었다.
큰길에서 집 앞의 주차장까지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이삿짐 차량이 점유하고 있었던 것.
그렇다고 1차선인 큰길을 막고 있을 수는 없으니 인도를 가로막고라도 우선 큰길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바로 골목안으로 들어가서 이삿짐 차량과 이사하는 집 주인인듯한 사람에게 부탁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어떤 노인이 한손에는 화장지 한더미를 들고 지나가면서 내 차가 인도를 가로질러 막고 있는 것에 매우 화를 내는 것이었다. '차를 이렇게 대면 어쩌자는거여'. 혼자하는 말이 아니라 나를 쳐다보며 자신이 화난 것을 알아달라는 듯이...그걸 참지 못하고 나도 변명을 했다. '여기 차들이 가로 막고 있어서 그래요' 공손하지는 않았더랬다. 그러자 그 노인은 가던 방향에서 멈추어 나를 돌아보고 더 큰 소리로 윽박을 질렀다. '그럼 이리로 더 들어와서 세우던가!' 완전 짜증이 났다. '지금 막 왔어요'. 그리고 노인은 씩씩거리며 가던 길로 갔지만, 그 노인이나 나나 화를 가라 앉히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는 곧 골목으로 들어가서 이사하는 집의 집주인인 듯한 사람이 보이길래 화가 난 상태로 말을 했다. '이 차들 좀 어떻게 해주세요!' 집주인은 그냥 멀뚱멀뚱 쳐다 볼 뿐이었다.

결국은 큰길과 인도 사이의 턱에 개구리 주차를 해서 임시변통을 했다.
본가에서 몇시간을 더 머물렀는데, 아버지께서 밖의 상황을 보시고는 차가 다 빠졌다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나는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물론 나가서 다시 주차장에 주차해도 또 금방 차를 빼서 나가야 하니 그럴 필요가 없던 것이었지만 그걸 아버지께 설명하면서 그 상황이 떠 오르는 것도 짜증났고, 내 짜증을 알아차리셨는지 계속 이사 차량에 신경을 쓰시는 아버지의 행동도 짜증이 났던 것이다.

나중에 차를 빼서 운전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해보니, 참으로 부끄러운 짓을 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받은 화(노인으로 부터 받은)를 누군가에게(아버지와 이사하는 집 주인)에게 전가했던 것이 참으로 후회스러웠다.

먼저, 나에게 화를 낸 노인의 행동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노인이야 전후 사정을 몰랐던 것이고, 차가 인도를 완전히 막고 있어서 불편하게 돌아가야 한다면 화가 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내가 공손하지 못하니 더 화가 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사하는 집의 주인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안하무인격이었다. 이사라는 큰 일을 치르고 있더라도 그것이 타인에게 어떤 불편을 주어도 되는 면죄부는 아닌 것이다.

아마도 내가 화를 낸 원인은, 타인으로부터 질책을 받는 것에 대해 꽤 두려움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누구든 실수도 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미움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인데, 나는 그런 것에 매우 민간하게 반응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자기 반성은 별도의 문제이고, 이 문제보다 더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그건 화의 전염이었다. 그리고 그 화의 전염의 진짜 모습은 책임의 전가이며, 자기 변명이었던 것이다.

나는 노인으로부터 질타를 받자마자 그것이 나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에게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사하는 집의 주인에게 화를 내었던 것이다.
이런 즉각적인 행동은 내가 가해자였던 사건을 순식간에 내가 피해자인 사건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런 즉각적인 반응은 물론 가해자와 피해자 같은 계산을 하기도 전에 거의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듯 하다. 아마도 오래전부터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심판관(?)을 헷갈리게 만든다는 것을 터득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주 나쁜 습관(?)과도 같다.


가만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모여 생활하는 곳곳에서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했던 것 같다.
누군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가장 그럴듯한 희생자를 찾아내고, 자신의 책임거리와 희생자의 연관 관계를 부각시킴으로써, 자신은 단지 연결고리였다고 빠져 나가는 것.

어쩌면 이런 식의 무책임한 행동들에 대해서 명확하게 판단하지 못했던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과 같은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사회를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인간이라는 개채들이 스스로의 판단력을 지니고 있는 이상, 어떤 일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한 마디씩은 각 개체에게 종속된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단지 그 마디 마디들의 연관 관계도 고려해야 하기에 전체적인 원인과 결과 가운데 각 마디는 일정 부분만을 담당하고 있음도 고려해야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2017년 11월 3일 금요일

각인(刻印)된 기억

얼마전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어 지하철을 타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 변두리에서 시내로 향하는 차량 안에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어찌하다보니 맨 끝의 차량이었고, 빈자리는 없었고, 대략 20~30명의 사람들은 서 있었다.
조금 먼 거리라 준비해 온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었으며, 출입문과 좌석의 끝이 만나는 모서리에 몸을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
어느 역에선가 정차하고 사람들이 내리고 타는 와중에 눈을 들어 보니 저만치 통로 중간에 젊은 여성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약간 쌀쌀해지긴 했지만 조금은 더워 보이는 흰색 터틀넥의 상의에 검정색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모르긴해도 데이트나 설레이는 약속이 있어보이는 차림새였다. 약간 덥다는 듯이 터틀넥의 목을 당겨서 공기가 드나들게 하던 그녀는 마침 내 맞은편의 모서리를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나는 책을 읽었고 열차는 출발했다.
잠시 후에 나를 향하고 모서리에 기대어 있던 그녀가 방향을 슬쩍 바꾸어 출입문쪽으로 몸을 돌리는 듯 하더니 스르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듯 했다. 그리곤 바로 무언가가 내 정강에 쪽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느껴졌다.
책을 덮고 보니 그녀가 눕듯이 쓰러져서 내 정강이 부근에 어깨와 머리를 두고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으니 정신을 잃은 듯 했다. 급히 자리를 비키면서 그녀의 머리를 손을 받쳤다. 그리곤 어찌해야 할 지 몰라 당황하는 사이에 주위에서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급한대로 똑바로 눕히기 위해 그녀의 상반신을 통로쪽으로 약간 끌어내서 바닥에 반듯이 눕혔다.
다행히 열차에는 다른 여성분들도 많아서 내가 무리하게 손을 대지는 않아도 되었다. 여성을 부축해서 바로 옆의 좌석에 앉힐 때 즈음에는 다행히도 정신은 돌아온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어디에 전화를 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그 연락을 받은 열차 기관사는 다음 정차역에서 한동안 정차한 상태였고, 기관사였을지 역무원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직원분이 와서 다음역에 119 앰뷸런스를 호출해서 대기시키겠다고 설명을 하셨다. 좌석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의 옆에서 돌보시던 아주머니는 그녀의 작은 목소리를 전해 듣고는 "이제 괜찮대요. 119를 부르지 않으셔도 된대요"라고 직원분에게 전달을 했다.
정말 괜찮은걸까?
좌석에 앉은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힘없이 무릎위 가방에 올려 놓은 손이 유난히가 하얗게 보였다. 어느덧 몇개 역이 지나고 그녀 옆에 있던 아주머니도 그녀를 두고 내렸으며, 나도 내릴 때가 되었다.
차량 안에는 그녀의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계속 줄어들었고, 이 상황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많이 붐비게 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상태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열차에서 내리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좀 어떤 걸까, 누군가에게 연락 좀 하라고 말해 줘야 하는게 아닐까, 지금 가는 방향은 집일까 약속장소일까, 내가 말을 거는 것도 이상한걸까...

그리고 약속으로 만난 사람들에게 이 얘기를 해 주기도 했고, 다음 날에 또 만난 사람들에게도 얘기를 해 주었지만, 정작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던 건 아주 다른 무엇이었고, 나는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내가 만난 사람들에게 얘기해 주지도 못했다.

며칠이 지난 후에도 이 상황은 계속 내 머리속에 남아 있었다.
왜 그게 머리속에 계속 남아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 상황은 사진처럼 머리에 박혀 있고, 그 당시의, 특히 그녀가 힘없이 자리에 앉아 있는 상황에서 내가 열차에서 내리는 순간의 마음은 뭐라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가슴속에 둥그런 쇠공 같은 것이 박힌 듯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대체 이게 무엇인걸까 고민을 하면서, 연상되어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었다.


고등학교 등교하던 버스 안에서 우연히 목격했던 치한. 그 치한은 우산의 손잡이를 아래로 내리고 손잡이의 둥근 고리를 이용해서 여학생의 치마를 올리던 장면. 그 불의와 관음의 복합심리.
중학교시절 학교에서 단체관람으로 보게된 청불영화의 장면. 세명의 남자 친구 가운데 날라리같은 학생이 주인공의 짝사랑의 순결을 빼앗는 장면의 기억과 그 우울감.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 같은 동네의 삼형제가 아버지거라며 보여준 음란서적의 믿을 수 없는 사진을 본 기억.
어린 시절에 비가 내리면, 비를 맞으며 물이 고인 웅덩이에 신발 신은 채로 첨벙거리던 느낌.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집에 돌아와 옷을 다 벗고 아랫목에 이불 속에 들어가 있던 느낌.
재수하던 시절, 우연히 보게 된 여학생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은 못 걸지만 항상 그녀를 보기 위해 기다리던 지하철 역사의 기억.

이상한 기억, 충격적인 기억, 처음 느껴본 느낌...
그러고 보니 대부분 성(性)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들이었군.
나는 아무래도 성(性)적인 것에 대해 매우 민감한 사람인거였군.
그래서 그것들이 나에게 쉽게 잊혀지지 않을 기억들로 각인되는 것이었나보군.

그러면 그 지하철의 여성에 대해서도 성적인 무언가를 느꼈다는 말인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단순히 인도적인 차원에서 그녀를 도와주어야 하는가 그러지 않아도 되는가라는 문제였다면, 상황을 조금 바꾸어서 그게 남자였다면, 뇌리에 깊이 남지 않았을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