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일 목요일

우리는 합리적인가? 이성적인가? 논리적인가?

나를 비롯해 내 친구와 가족들, 친치들, 직장 동료와 선후배들, 동네 이웃들 등등

그리고 그 사람들을 통해 (들어서)알게된 더 많은 사람들.

과연 나 혹은 내 주변 혹은 주변의 지인들 가운데 충분히 합리적/이성적/논리적인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몇% 정도의 사람들이 그런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까?

*----------------------------------------------------------
근원적으로 따지자면 인간으로서 그 누군들 합리적/이성적/논리적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아는 것이 너무 얕아서 그런 판단을 한다는 자체가 우스운 일일 것이다.
단지, 우리 현 시대의 평균적인 성인들이 아는 것을 기준으로 삼자.
여기서 제기하는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기반으로 하는 합리적/이성적/논리적 수준임을 가정한다.
-----------------------------------------------------------*

최근의 정치적인 혼란 상황에서, 제반 문제점들에 대해서 근본에서의 재고찰이 필요해 보이며, 몇가지를 생각하다 보니 우리들이 너무 직관적/감정적이지 않았던가 하는 반성을 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몇가지 예를 들어 보일 것인데, 각 사례에 대해 우리들이 어떤식으로 판단을 했던 것인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 정치적인 입장(진보/보수 가 아니라 각 정책 사안에 따른 개별적인 판단이 필요)
2. 선거에 나선 후보에 대한 판단(여당/야당이 아니라 후보의 공약 자질에 대한 판단)
3. 뉴스의 사건 보도(선입견을 배제하고 보도한 내용을 기반으로 진실이 무엇인지 판단)
4. 자동차의 선택(브랜드/광고에 현혹되기 보다는 용도에 따른 기능,성능,가격으로 판단)
5. 스마트폰의 선택(상동)
6. 아날로그-디지털의 논쟁(디지털의 대중화에 대한 반발로 아날로그에 대한 장점이 부각되기도 하지만 그게 정말 꼭 필요한 것인지)
7. 좌-우 이념에 대한 가치의 혼동 (좌우익은 진보와 보수로 대변되는 것인데 언제부턴지 대한민국에서는 좌익=종북이라는 프레임이 당연시. 북한 내부에도 좌-우익이 있을거 같지 않은지?)
8. 마찬가지로 좌우익 = 자본주의&공산주의 등식 고착화.(이게 과연 맞을지. 자본주의 자체가 계속 변하고 있는 마당에...)


최근의 상황은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에 민심의 무게가 실리는 상황이다.
아마도 역대 최다 국민이 참가한 시위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 와중에 정 반대의 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있다.
대통령의 탄핵이나 하야에 반대한다는 시위도 있는데, 그 수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고 대부분은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이다.
또한, 국회 내에서도 대규모의 국민들이 집회를 하는 것에 대해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거나, '촛불 집회에 종북 좌파 세력이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식으로 폄하하거나 음모론을 제기하는 국회의원도 있었다.

대다수 국민들과는 반대의 의견을 가진 이들은 꽤 뿌리 깊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공산주의, 빨갱이, 인민, 좌파, 좌익, 종북, 친북이라는 단어에 대한 발작에 가까운 두려움을 말이다.
그리고 이 분들 대다수가 60대 이상의 노년층이기에 적어도 직접적으로 6.25를 겪으며 트라우마를 갖게 되셨거나 혹은 군사 독재 정권이 장기 집권을 위해 세뇌에 가까울 정도로 반복해서 심어준 후천적인 두려움에 온전히 세뇌된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노년층의 이러한 무조건적인 반공 사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후 세대를 다시 무조건적인 반-반공 사상에 빠지게 만들었다.
즉, 반공이라는 단어 자체를 매우 혐오스럽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젊은 세대로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약 30년 정도만 지나면 대한민국은 극좌파적인 사회가 되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다.

매우 불행한 현상인데, 이러한 극과 극으로의 전이 현상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과정이 이성적/합리적/논리적으로 추구되지 않았다는 점이 그러하다.
공포-두려움에 의한 무조건적인 반발과 회피 본능이 발현되었고, 두려움을 강요당한 세대들은 다시 그 강요를 두려워하게 되어 반발하고 회피하는...


그런데, 이런 현상이 비단 정치적인 분야에서만 일어나난 것이 아니란 점.
국내에서 굳건한 입지를 다지고 있는 현대자동차는 그 동안 매우 많은 비난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해외와 국내의 차별적인 품질/가격//서비스와 소비자를 대하는 마인드가 매우 고압적이라는 점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동안 밝혀진 자동차 자체의 문제점들, 소극적인 리콜, 품질이나 가격의 역차별 등등이 사실임이 밝혀진 후에도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의 점유율은 상대적으로 낙폭이 적었다.(떨어지긴 했으나 밝혀진 사실들에 비하면 적다는...다분히 주관적인 의견)
왜일까?
물론 드러난 단점들이 감점 요인이긴 하지만, 그 동안 현대차가 쌓아온 신뢰가 있었던 건 아닐까?
몇가지 단점들 때문에 타사의 차를 구매했더니, 현대차에서는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단점이 등장할 가능성도 있고...
일부 반-현대차 주의자들은 여전히 현대차를 구매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는다. 잘못된 걸 뻔히 알면서도 구매해 주니까 현대차가 시정을 하지 않는 거라고. 사실로 밝혀진 것들조차 믿지 않거나 모르는 척 외면한다고.
과연 어느 쪽의 주장이 맞을까?


삼성의 갤럭시 스마트폰과 애플의 아이폰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서로가 상대방을 비방하고 자신의 장점을 자랑하면서 언쟁하기 일쑤다.
과연 맞는 주장이 있기는 한걸까?


이런 일련의 갈등에서 현명한 판단이 많이 아쉽기도 하지만,
과연 우리는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까?

2016년 11월 19일 토요일

[도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제목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
저자 : 코맥 매카시 (Cormac McCarthy)
역자 : 임재서
출판사 : 사피엔스21


국내에서는 영화로 더 잘 알려진 원작의 소설.

나도 영화를 먼저 본 후, 한참이 지나서 원작이 있음을 알았고, 또 한참이 지나서 책으로 읽게 되었다.

원작은 2005년 발표, 영화는 2008년 개봉.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영화 개봉 당시에는 매우 잘 만든 영화라는 호평이 자자했는데, 생각보다 그닥 재미있지는 않았다.

이 또한 수입 배급사의 과장 홍보 때문이었을까?
하비에르 바르뎀, 토미 리 존스 등 주연급 배우들의 연기는 매우 좋았다.
감독은 코엔 형제.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간의 긴장감, 그리고 이들의 뒤를 한 발 늦게 따라가며 수사하는 보안관의 절망감.
안톤 쉬거의 냉혈함이 주는 섬뜩함.
모스의 능숙함과 영리함, 그러나 쪽기는 자로서의 긴장감.
벨 보안관의 절망감.


소설을 읽어 보면, 코엔 형제가 왜 뛰어난 감독인지를 알 수 있다.
소설을 영화화 한 것인지, 영화를 소설로 펴 낸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
작품의 재미가 떨어지는 것은, 작품의 배경과 소재가 우리에겐 그다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의 가치는 세밀한 묘사에 있다.
하지만 나로써는 글자만으로 상상해내기 어려운 장면의 묘사들이 많았기에, 코엔 형제의 재현에 감탄을 했으며, 원작만을 보았다면 많은 부분이 어렵게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벨 보안관의 독백과 같은 생각들은, 이 책이 단순한 액션 스릴러가 아님을 보여준다.


책의 일부를 스캔해서 올려 두는 것이 저작권법에 위배 될 수도 있지만, 이 책의 느낌을 활자화된 상태로 보여주는 것이 제일 적절하다 생각했다.
매우 제한된 양이기에 양해를 구하는 바이며, 문제가 될 시에는 바로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타이틀, 공공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


제목의 유래가 된 싯구의 소개. 예이츠의 비잔티움으로의 항해中.


첫 페이지. 이 부분은 벨 보안관의 얘기이며 이 책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초반부, 이 책의 재미있는 주석. 핏자국 주석.


노쇠한 보안관 벨은 점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을 버거워하며 한탄을 한다.
그리고 전쟁 영웅으로 훈장을 받았던 일의 뒤에 숨겨진 진실로 자책을 한다.

책의 말미는 조금 의아한데, 영화화 되지 않은 부분들이 벨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책에서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인물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와서 당혹하게 만들며, 구체적 설명이 없었던 모 사건의 증인으로 출석을 하는 부분 등이 나온다.
연작 소설의 한 부분만을 떼어낸 듯이 참으로 이해가 쉽지 않은 부분이며, 역자의 주석이 없었다면 내내 궁금했을 것이어서 아쉬움도 있다.

흔히들 노인들이 젊은 세대를 보며 한탄하는 일은 로마시대부터 줄곧 이어진 일이라고 치부한다.
한편으로는 세상은 결국 돌고 도는 것이라며, 지금 일어난 일이 과거에도 있었던 일이라며 위안으로 삼는다.
과연 노인들의 경고는 그저 꼰대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벨 보안관의 한탄처럼 세상은 점점 나락으로 치닫고 있는 것일까.

2016년 11월 4일 금요일

세태무상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은 연일 급락하고 있으며, 지리멸렬해 보이던 야당과 야당의 대선주자들은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상태이다.

드러난 것만으로도 불법적인 것이 명확해 보이고, 드러나지 않았으나 대통령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정황은 명약관화하다.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가 2차례 있었지만 모두 미흡했던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때마다 검찰에게 수사 가이드를 지시한 듯이 보이는 대통령의 언급으로 미루어, 두번째 대국민 사과에서 '검찰의 수사와 특검까지도 수용하겠다'는 말은 특검까지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로까지 의심될 지경이다.

한마디로, 대통령의 말이라면 이제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 3년의 모든 것마저 의심스러우며, 대통령이 배신자였다는 분노도 숨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나 자신의 이러한 감정적인 격정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감정적으로 큰 변화가 있는 경우에, 이성적인 판단은 그만큼 약해지기 마련이고, 또 그래서 쉬이 잊혀지기도 하는 법이다.

약해지는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서 몇가지 기억나는 것들을 적어 보려 한다.


불과 1,2개월 전만 해도 '종북좌파'라는 단어는 낙인처럼 사용되었다.
주로 보수 여당의 진영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에게 달아주던 꼬리표 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이런 짓들이 어떻게 힘을 가질 수 있었을까? 정부가 꾸준히 북한의 위험함을 강조했고, 북한은 미사일과 핵으로 여기에 힘을 실어 주었고, 우리 국민들은 스스로의 판단을 유보하고 정부의 프라퍼갠다를 그냥 수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젠 누구도 섣불리 '종북좌파'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가 어려워졌다.
임기 내내 북한에 의한 위협을 앞세우고,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이라며 국민들 겁주기에 힘을 쓴 대통령과 그 정부의 패러다임과 궤를 같이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그동안 꾸준히 제기되어온 문제점과 의혹들은 모두 '정치공세'로 치부하거나 '팩트'만을 요구하고, '법과 원칙'만을 부르짖었기에, 완전히 드러나기 전에는 말도 꺼내선 안되는 것이었고, 법과 원칙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무법천지가 되고 말았다.
물론 이러한 잣대는 권력을 가진 자에 의해서 마음대로 적용되었기에 양지와 음지의 온도 차이는 극대화 되었으리라.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의 친이계 의원들은 호가호위하며 실세인 듯 행동했지만, 정권이 바뀌자마자 고행이 시작되었다.
지금의 친박계 의원들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과연 이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얼마나 알고 줄을 섰던 것인지, 잘 모르면서 줄을 섰다면 그 무책임함과 무능함으로 지탄을 받을 것이며, 알면서도 줄을 섣다면 그 비열함으로 지탄을 받을 처지다.


언론.
아마도 이번 사태에 대한 핵심 역할을 한 것이 언론이 아니었나 싶다.
전통적인 보수 언론과 진보 언론 - 대한민국 내에서의 상대적인 보수와 진보일 뿐이다 -은 이전까지 자신의 역할을 잘 지켜냈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주필을 청와대가 공격하면서 보수 언론들이 일제히 정부의 반대편에 서게 되면서 여론을 들끓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만약 보수 언론들이 정부를 호위하고, 의혹이 드러날 때마다 정부의 편에서 나팔수 역할을 했더라면 과연 이 사태가 어떻게 되었을까?
이번 정권 뿐 아니라 이전의 여러 정권들에서 제기되었던 의혹들처럼 단지 의혹으로만 끝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밝혀지지 않은 그 수많은 의혹 가운데 일부는 이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사건들이 없었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의혹을 밝힐 수 있는지의 여부가 언론에 달려 있다는 뜻이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누구보다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보수 논객들.
그들이야말로 악랄하게 종북좌파 낙인 찍기에 앞장 선 인물들이었고, 그 어느 때 보다 국민들을 갈라 놓는데 적극적이었던 인물들 이었다. 그랬던 인물들이 어떻게 변했는가? 이들이 아직도 대통령을 옹호한다면 그 명분이 없음으로 비난 받을 것이며, 대통령을 등진다면 그 가벼움으로 비난 받을 것이다.


나라가 어지럽다.
나라가 시끄럽다.
나라가 혼란스럽다.
마치 안개 속에 들어 앉은 듯, 모두가 지척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떠들어 대고 있는 양상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안개가 걷히고 난 후를 생각해야 한다. 아니 모두가 그래야 한다.
그리고 침착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안개가 걷히고 난 후에, 안개 속에서 떠들고 부르짖었던 것이 부끄럽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 국민들 모두가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의 정치가 바뀌고, 정치인이 바뀌고, 대한민국이 바뀐다.

더 나아가서, 종북좌파라는 낙인을 씌우고 수구꼴통이라는 비난을 일삼았던 것도 더 큰 시야에서 보면 부끄러운 일이다.
뜻을 같이한다고 모인 당파 내부에서 다시 세력을 나누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언론이 지켜야할 유일한 자존심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권세에 아부하는 것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무거운 가치를 무겁게 지켜나가는 이가 없는 이 세태가 참으로 무상할 뿐이다.

2016년 10월 28일 금요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이유

온 나라가 뜨겁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어떤 공식적인 책임도 없는 한낱 개인에게 비밀리에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 이유이다.

수 많은 청와대의 참모진과 비서관들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그 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적절한 위치에 공개적으로 임명을 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마도 그 사람이 대중에게 공개되기에는 흠결이 많았던 모양이다.

최순실 게이트로 불리는 이번 사건은, 참으로 어이없고 끔찍한 일이며, 그 동안 설마설마 했던 일들이 실제였던 것으로 드러나 만인에게 충격을 준 검은 백조와 같은 사건이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황이며, 검찰의 조사가 진행 중이고, 특검이 도입될 예정이라 하니 참고 지켜봐야 할 일이다.


이 포스팅에서 다루려고 하는 주제는, 위의 사건을 통해 좀 더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 사건의 일부에 대해 시인하고 사과한 마당에도, 국민들의 반응이 하나가 되지는 않았다.

대다수가 대통령의 탄핵이나 하야를 주장하지만,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 또한 높다.

물론, 이번 사태에 대한 시각이 다를 수 있고, 대응 방안에 대해서는 더더욱 다른 입장들이 많을 것이나, 단순한 다음의 여론 조사 결과는 참 의아하다.

http://www.realmeter.net/2016/10/%EB%A6%AC%EC%96%BC%EB%AF%B8%ED%84%B0-10%EC%9B%94-4%EC%A3%BC%EC%B0%A8-%EC%A3%BC%EC%A4%91%EB%8F%99%ED%96%A5-%EC%B5%9C%EC%88%9C%EC%8B%A4-%EA%B5%AD%EC%A0%95%EB%86%8D%EB%8B%A8-%ED%8C%8C/
출처 : http://www.realmeter.net

그렇다.

천재지변에 버금가는 이런 재앙, 그리고 그것이 계속되 왔으며, 어디까지 이어질지도 모를 이 상황에서 21.2%의 국민들은 아직도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고 있다.

대체 왜 그럴까?
왜 대통령이 스스로 시인까지 한 마당에도 여전히 대통령을 지지하고 있는 걸까?
정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누군가가 황당한 경험이라며 인터넷에 올린 글에서는, 방송에서 최순실 사건에 대한 보도가가 나오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에 대한 글이 올라왔다.
지겹다는 반응에 심지어는 정부가 국민들을 너무 풀어 줬다는 어이없는 말까지 이어졌다고 황당해하던...

그리고, 언제나 보수를 지지하시는 나의 부모님 생각도 들었다.
그 분들은 광우병 사태로 나라가 시끄럽던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에는 MBC를 보지 않으시고 KBS만을 시청하셨다.
이어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을 한 후에, KBS가 정부 여당에 은근히 부정적인 보도를 내 보내자, TV조선과 채널A의 종편을 주로 보시기 시작했다.

문득, 이번 최순실 게이트에 대해 가장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TV조선이며 채널A 또한 거의 비슷한 입장이 되었음을 깨닫고는,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우리 부모님 이제는 어떤 채널을 보셔야 하나?'

그리고 나 또한 내 스스로의 모습을 되짚어 보니,
이명박 전 대통령의 광우병 사태 때에 부모님과 충돌했던 적이 있다.
당시에 보수 진영 언론에서 제기한 찌질한 의혹이, 저 시위대의 피켓과 촛불은 대체 누가 사준걸까하는 것이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TV를 시청하다가, 시위에 대한 보도가 나오고, 아버지 또한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말도 안하고 그냥 일어나서 부모님께 인사도 없이 본가를 떠나서 내 집으로 돌아왔던 적이 있다.


그러니까...나도, 부모님도, 그 신경질적인 누군가도, 그리고 아마도 꽤 많은 우리 나라의 국민들과, 전세계의 꽤 많은 사람들도 비슷한 면이 있어 보였다.

그 공통점은 바로, 제목에 있는 그대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보기 싫은 것이 자꾸 눈에 보이고 듣기 싫은 소리가 자꾸 들려온다.
보기도 전에, 듣기도 전에 선택할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기에...
그리고 보기 싫은 것, 듣기 싫은 것에 대한 반응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상당히 부정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기에, 진실로 드러나기 전까지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며, 심지어는 진실로 드러나도 인정하지 않거나 다른 핑계를 대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배경에는,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있고, 고통스럽거나 불편한 상황을 피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기왕에 발단이 되었던 사건이 정치적인 사건이니, 정치인에 대한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대통령 선거를 하게 되면 언제나 자신이 선호하는 후보를 하나 선택해야만 하곤 하는데, 일단 선택을 하고 나면 자신과 그 후보를 동일시하는 경향까지도 보인다.
그 후보의 장점이 드러나거나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지면 자신이 그렇게 된 듯이 의기양양하며, 반대로 후보의 단점이나 치부가 드러나면 한편으로는 자신이 나서서 변명을 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위축되기까지 한다.

일단 대통령이 당선된 후에는, 지지하던 사람은 여전히 지지하고, 반대하던 사람은 계속 불평한다.

그리고 대통령이 잘한 일에도, 못한 일에도 반응은 마찬가지다.
지지자는 잘한 일에 환호하고 못한 일에도 변명하고 스스로 위안한다.
반대자는 잘한 일에서도 결점을 찾아내려 하고, 못한 일에는 불꽃처럼 일어난다.

이 모든 행동의 배경에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있으며, 고통과 불편함을 피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는 것이다.

나의 모든 정치적 판단과 결정, 행동을 대신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몹시도 편리한 일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개별 사안에 대해 일일이 고민하고 옳고 그름, 유리와 불리를 따져보아야 하는 수고를 해야만 한다.
그 결정이 또 국정에 반영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의견과 맞으면 안도하고 맞지 않으면 불평해야 한다.
너무나도 피곤하고 효과도 없는 일인 셈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믿어 버리면, 그리고 그냥 지지하고 옹호하면 만사가 편하다.

그보다는 덜 편하지만, 그냥 믿지 않는 것도 다음으로 편하다.
그냥 넌 나쁜 사람이고 네가 하는 건 다 나쁘고, 넌 언제나 나쁜편 난 좋은 편.

자신의 입장이 완전히 반대로 돌아서기 전까지는 끝까지 믿는게 제일 편하다.
그리고 그렇게 믿기 위해서,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하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들으려 하는 것이다.


P.S.
하지만 대체 어떤 한 인간을 온전히 믿을 수 있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수십년을 함께 살았던 가족들도 믿을 수 없는 부분은 존재하기 마련인데, 단지 TV에서 많이 봐 왔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2016년 10월 21일 금요일

감정이 이성을 마비시키는 과정

거의 즉각적인 감정의 반응의 나타나는 경우들이 있다.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한데, 그 감정의 반응이 즉각적이고 강할수록 이성적인 판단은 거의 없는 듯이 마비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과연 왜 그런걸까?

법륜스님이 강연한 내용 중에 불교의 12연기와 관련된 강의가 유튜브에 올라와 았는 것으로 아는데, 스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이해가 되기는 한다.

물론 그것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직까지 개인적으로 이 보다 더 구체적인 설명을 접해 본 경험이 없다.


그것의 유래가 어떠하든간에 정말 의식이 관여할 틈이 없이 거의 즉각적으로 반응하게되는 감정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불같은 분노, 자지러들 듯한 웃음, 멈출 수 없는 눈물 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의식의 판단 이전에 감정이 먼저 솟구치고, 즉시 그에 수반되는 일련의 반응이 나타나게 되기에, 타인이 보기엔 정상이 아닌 듯 보이고,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하는 표현이 딱 들어 맞는 경우도 있게 되는 것이다.

매우 철저한 자기 반성과 끊임 없는 자기 성찰을 하지 않으면, 이런 감정에 대한 반응을 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제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며, 일반인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수준인 듯 하다.


그리고 일단 그 감정에 대한 연쇄 반응이 끝 나야만, 이성이 작동하게 되기에, 뒤늦게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후회를 하기는 할 지언정, 자신이 왜 그랬는지 파악하고 그것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에 대한 제대로된 방책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어린 아이가 무언가에 놀라서, 두려워서, 화나서, 슬퍼서 갑자기 크게 울거나 할 때, 옆에서 우는 아이에게 "너 대체 왜 우니?"라는 질문을 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질문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어린 아이 자신도 자신이 왜 우는지 판단할 이성이 작동하지 않고 있는데...

2016년 9월 30일 금요일

[잡념] 죽음 같은 잠을 자고 나면

간혹 아주 죽은 듯이 잠을 자는 경우가 있다.

아주 졸린 약 - 알러지 진정 약 -을 먹거나 고된 육체적 행위 뒤에 경험하게 되는데,

이런 잠을 자고 깨어나면 참 색다른 느낌이 든다.

과연 잠들기 전의 세상이 진짜였던 것인지 의문이 들곤 한다.

잠들기 이전의 기억이 정말로 "겪었던" 것인지, 아니면 단지 기억이 "주입된" 것인지 모르겠다는 의문 말이다.

아는 사람들과의 잦은 교류를 통해서, 잠들기 이전의 기억에 대한 '공통성'을 확보하는 일상의 사람들은 이 의문이 쓸데없다고 할 지 모르지만, 단지 나 혼자만의 생활이 이어지다보면 이런 기억의 '공통성'은 확보가 불가능하고, 심지어는 이전의 기억이 정말인지, 착각인지, 또 다른 꿈이었던건지 온통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아직까지는 그저 재미있는 상상이겠지만, 어느 순간 나 자신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면, 어제의 기억이 의심스러워지고, 나의 과거가 의심스러워지고, 나라는 존재마저도 의심스러워질지 모르는 일이다.

---------------
알러지 진정 약을 2~3일에 한번씩 복용하는데, 복용한 이후의 첫 잠에는 이런 경험을 하곤 한다.

그리고 만약에 외부의 소음 등으로 잠이 방해를 받아 충분히 자지 못하게 되면, 그 날은 비몽사몽 계속 졸린 상태가 이어지고, 가끔은 심한 두통을 겪게 된다.

약 하나의 효과 - 혹은 부작용이 이렇게 심하다는 것을 경험하고 나면, 인간의 나약함을 절감할 수 밖에 없다.

2016년 8월 1일 월요일

[단상] 사람들이 하는 일의 종류

사람들이 하는 일의 종류야 무궁하고 다양하겠지만, 크게는 3가지로 나눌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하나는 한계를 넒혀 가는 일.
인간이 가진 여러 제약들. 이로 인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되고 혹은 규모가, 혹은 영향력의 범위가 제한되는데, 누군가 하는 일은 이 제약의 일부를 허물어서 한계를 넒혀 가는 일을 하고 있다.
대단히 어렵고 의미 있는 일이며, 미래에 대한 비전이 확고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꽤 많은 일들이 여기에 속할 수도 있다.
임계선 부근에서 일하는 사람들, 끊임 없는 노력으로 한계에 근접하는 사람들은 종종 우연인듯 필연인듯 이 한계를 넘게되고, 이것이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세밀함을 추구하는 일.
정밀함 또는 세심함의 한계라는 측면에서는 위의 한계를 넓히는 일과 하나로 볼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분류하기엔 곤란한 많은 일들이 여기에 속한다.
한계를 넓히고 영역을 확장하기에 몰두하다 보면, 자칫 스스로 확장시킨 부분에 대해 충분한 관심을 두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이렇게 성글어진 영역에서의 세세한 부분에 대해 다듬고 채우는 일을 해야만 한다.
어쩌면 현재의 대한민국도 수출의 한계에 막혀 내수를 살리자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 이와 유사한 상황이 아닌가 싶다.
영역을 확장하기 곤란한 경우에 관심을 내부로 돌려서, 구성원들의 성향을 좀 더 세분하여 구분하고, 그에 따른 맞춤 서비스로 만족도를 높이는 일 따위가 여기에 해당한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진정한 차이는 이러한 세세함에서 뚜렷이 드러나며, 이러한 차이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이기에, 소위 졸부가 전통의 부자를 따라가기 어려운 것과도 유사한 차이점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 하나는 순환-반복적인 일.
아마도 대부분의 일들이 여기에 속한다 생각한다.
인간이면 누구나 먹어야 살 수 있으며, 자야만 하고, 입어야 하고, 씻고 이동하는 등의 일을 반복한다. 여기에 필요한 식품, 제품,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큰 틀에서는 순환-반복적인 일들이다.
물론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는 위의 한계를 넓히는 일이나 세밀함을 추구하는 일의 속성도 지니게 된다.


이렇게 구분한 일들은 그 순서대로, 리스크가 큰 일에서 작은 일의 순서이며, 따라서 성공에 대한 보상이 큰 일에서 보상이 작은 일의 순서이며, 일의 난이도가 높은 일에서 난이도가 낮은 일의 순서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의 구분은 현재의 기업들에서 적용이 된다.
물론 대기업들은 3가지 속성의 일을 모두 영위하는 것이 보통이나, 작은 기업들은 한가지에 집중하는 비율이 높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