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일 목요일

남자에게 여자란

여성들이 들으면 분노하겠지만, 혹은 다르다고 부인하겠지만,

남성인 내가 보기엔,

남성에게 아름다운 여인은, 여성에게 새로 나온 명품 백이나 구두외 비슷한 듯 해.


여성들은 종종 자신의 배우자나 남자 친구가,

지나가는 여성들을 흘끔거린다고들 불만을 토로하지만,

그건 여성들이 백화점 쇼윈도우에 비치된,

새로 나온 명품 백과 구두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야.


어째서 남성에게 여성이란 존재는 백이나 구두 밖에 안되냐고 묻지는 말았으면 해.

그건 여성들 스스로 백이나 구두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거나,

그런 하찮은 것에 집착하는 자신들을 비하하는 것이거나,

왜 자신들은 그런 것에 집착하는지 모르면서 남성들 탓만 하는 것으로 보이니까.

남성들도 잘 모르겠어.




만약에 누군가가 미치도록 좋아진다면,

그 사랑이 오래가지는 못하리라는 건 예상해야 해.

마치 아주 잘 맞고, 잘 어울리고, 나를 한껏 빛나게 해 줄 날개와 같은 옷과 비슷하거든.

아주 좋아서 아끼고 아끼다가 몇 번 입지도 못한채로 입을 수 없는 시간이 오기도 하고,

너무 좋아서 자주 입다가 닳고 헤져서 못 입게 되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리고, 실제로 그런 옷들이 어울리는 장소는 제한적이고,

집에서 편하게 쉬거나 잠을 잘 때에 입을 수 없다는 것도 명심을 해 두어야 겠지.

2013년 12월 22일 일요일

아주 큰 것은 보이지 않는다.

곧잘 자신의 꿈과 희망을 늘어 놓던 젊은 날에는,

정작 큰 꿈은 보이지 않기 마련이다. 작은 꿈들만 보일 뿐...


시간이 한참 지나고,

작은 꿈들이 사라지고,

걸어온 길의 자취를 더듬어 보면,

그제서야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꿈이 무엇이었는지

보이게 된다.


그러고 나면 비로서

그 때, 왜 그런 선택을 했었는지,

왜 그것이 그리도 싫었는지,

어째서 무작정 그걸 좇았는지,

이해가 된다.


좀 더 빨리 큰 꿈을 보았더라면

후회가 들기도 하지만,

큰 꿈을 보기 위해선,

거기에서 멀리 떨어져 봐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지금 내가 알았다는

이것조차

더 큰 것의 일부 일 수 있다는 생각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본다.

2013년 9월 30일 월요일

바꾸기 전에 살펴보아야

한 개인 또는 민족, 나아가 인류가 발전을 위해 잘못된 것을 고쳐나갈 때에는
반드시 왜 그것이 잘못되었던 것인지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한다.

잘못된 옛것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며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잘못되었음에도 만들어지고 유지된 이유에 대해서 알아야만,
변증법의 무한 반복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2013년 9월 22일 일요일

현실과 꿈 속의 나

"나"라는 인식,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분별을 만들고 분별이 고통을 만든다....고 한다.


문득, 꿈에 대한 많은 이들의 인식, 혹은 어렴풋한 나 자신의 느낌으로 보건데,

현실과 꿈은 서로를 비추는 반영이기도 하면서 간혹 영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신비로운 현상이다.

계시적인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프로이트의 꿈에 대한 해석이 아직은 정설처럼 받아들여 지고 있다.

따라서 현실의 반영도 당연한 현상이며 현실과는 정 반대되는 꿈도 당연한 현상이 된다.

이런 결과는 종종 무의식의 반영으로 해석되기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한편으로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도 따져보면 모호하기 짝이 없지 아니한가?

무의식은 제쳐두고라도, 의식이라도 뚜렷하게 정의하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정신적인 활동 가운데 의식을 제외한 것이 무의식이요, 무의식을 제외한 것이 의식이라 설명하는 것이 부족하나마 정확한 설명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정신적 활동을, 그 범위를 정의할 수 없다면 이 또한 결국은 같은 모호함일 뿐이다.


이야기가 또 옆으로 새었으니 다시 본 주제로 돌아와보자.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고, 무의식 또한 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과연 무의식이 무엇인지, 무의식을 포함하고 있는 기저의 마음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방법으로, 꿈과 현실에서의 차이를 비교하면 되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나"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면,

꿈 속에서 "나"를 인식 하고 있는지, 꿈 속에서의 "나"는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그 인식을 감시하고 관찰하는 것은 "무엇"인지 쫓아가면 되지 않을까?

2013년 9월 20일 금요일

인간의 자기 인식

영화 [매트릭스]에서,
스미스 요원이 모피어스를 심문하는 중,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 자기 존재를 인식하는 것 같아."

[매트릭스2:리로디드]에서,
아키텍트가 네오에게 매트릭스에 관해 설명하던 중,
"인간은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선택할 권리가 주어지는 걸 선호하더군. 그게 무의식적인 선택이라도 말이야"

곰스크로 가는 기차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 대한 감상이,
문득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곰스크>는 꿈이고 이상이며 마음에 간직한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것이었다.

처음 이 작품을 접했을 당시엔 남성과 여성의 인생관에 대한 작품이라 생각했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는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선뜻 결정을 하지 못하는 인간의 딜레마에 대한 작품이라 생각을 했다.


혹자는 <곰스크>를 상징적인 대명사로 사용하며,
서로의 "곰스크"를 묻고, 점점 잊혀져가는 자신의 "곰스크"에 우울해하기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그가 <곰스크>에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해 보았다.
과연 곰스크는 그가 기대한 대로, 혹은 그 이상 이었을까? 아니면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까?
아니, 기대 이상이라 한들, 그는 곰스크에 만족하고 거기에 정착했을까?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곰스크>는 도달할 수 없는 [저기]에 존재하는 무엇이었다. [여기]가 아니란 말이다.
여자는 [여기]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곳이라고 남자를 설득하고 붙잡았지만,
남자는 [여기]는 불충분한 곳이며 [저기]만이 충분할거라 생각한다.

그 남자는 끊임없이 행복을 쫓지만 행복해 질 수 없는 불행한 존재였으며,
그 여자는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도 그 순간의 행복을 찾아 누리는 존재였던 것이다.

우리가 배운건 현실이 아니라 꿈 이었다.

내가 태어나고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많은 걸 가르쳐 주었지.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학교에 다니면서 선생님들에게서 많은 걸 배웠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 난 기쁨과 혼란을 함께 겪었어.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의 막연함과 답답함이 그 실체를 겪으면서 해소되었기에 기뻤고,
한편으로는 배움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로 인해 혼란스러웠지.

하지만 혼란스러움을 기쁨으로 메우기도 하고,
이 혼란스럼움 또한 배움이 커지면 다른 기쁨이 될 것으로 믿었지.


이젠, 더 이상 혼란스럽지도 않고 더 이상 기뻐하지도 않아.
그리고 사회에 발을 내디딘 그 초년생의 혼란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어.

우리가 자라면서 배운 많은 이론과 학문과 가름침들은,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가르쳐 준 게 아니라,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꿈을 가르쳐 준거였어.


모두가 꿈은 아니었지만,
꿈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에 있는 것들은 우리가 배운 것과 많이 흡사했고,
꿈과 다르게 되어 가는 것들은 우릴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거지.


그래서,
정의가 승리하는 게 아니라 승리한자가 정의가 되는 것이고,
착한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은 사람이 착한 사람이 되는 거고,
노력한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한 사람의 노력만이 인정받는 거고,
꿈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진 꿈만이 전해지는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