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말들이다. 아름다운 단어들이다.
생각만 해도 푹신하고 안락한 기분이 드는 단어들 아닌가?
그리고... 치명적인 독과 같은 단어들이기도 하다.
과연 저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을까?
아마도 어떤 말로도 완벽하게 기술할 수는 없을테고,
누군가 그것을 시도해서 표현하고 나면 즉각적으로 그 표현의 허술함과 부족함에 허탈할 것이다.
과연 우리는 저 단어들을 어떻게 배웠으며, 어떻게 익혔고,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어떤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에게 전해 들었고, 온갖 미사여구로 잔뜩 부풀려진 기대감이 가득하다 못해 터질지경이며, 어느새 인생의 목표가 되어 모든 것을 바칠 대상이 되며, 그것을 위해 현재의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은 다르지만 비슷하게 이것들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조금 오랜 시간을 그것을 위해 노력하다 보면, 한번쯤은 그걸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는 순간도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
그리고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 '가짜'였는 실망을 하고, 낙심하지만 또 다시 '진짜'를 찾아 떠나게 되곤 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몇번을 반복하다보면 우리는 곧 의심을 하게 된다.
'정말 존재하는 걸까?'
'행복이란, 사랑이란, 자유란 것이?'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
'만약 내가 어떤 상황을 맞았을 때, 그것이 행복인지, 사랑인지, 자유인지 판단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정확하게 행복이, 사랑이,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게 아닐까?
그리고 곰곰이 생각을 해 보면, 외부적인 조건이나 대상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사실 외부적인 대상, 즉 물질적인 것들은 대부분 소멸하거나 변하기 마련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닌 우리의 인식 자체가 변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사랑했던 사람이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은 것은, 그 대상의 변화보다는 나 자신의 인식의 변화에 기인하는 바가 더 지대하다.
행복이라 생각했던 상태가 유지될 수 없는 것 또한 상태나 조건의 변화보다는 자신의 인식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것들을 위해 우리가 바쳐야할 노력과 정열의 방향은 외부적인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인식을 바꾸는 것임은 명백하다.
결국 꿈속에서 파랑새를 찾아 떠났던 틸틸(치르치르)과 미틸(미치르)은 파랑새를 찾는 것에 실패하고 꿈에서 깨어서야, 항상 기르던 그 새가 파랑새였음을 깨닳았던 것과 같다.
그리고, 그 새가 파랑새였음을 깨닳아 안도하고 만족할 수도 있지만,
그동안 '파랑새'라는 것에 덧씌워져 있던 부풀리고 왜곡되어 있던 기대감의 상실을 슬퍼할 수도 있으며,
결국은 세상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허무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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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사실은 저 단어들이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비어있는, 공허함 그 자체라는 것에 있다.
이 단어들은 비어있기에 사람들마다 저마다의 정의로 그 공허함을 채워 놓고 그것이 행복이라고 믿고 사랑이라 믿으며 자유라 믿는다.
그런데 사실 사람들이 채워 놓은 그 정의들은 사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결핍과 욕망, 두려움에 대한 투영의 결과이다. 혹은 누구로부터 주입당한 타인의 정의인 경우도 있다.
아마도 스스로가 정의한 행복과 사랑과 자유를 이루었을 때, 잠시나마 만족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욕망이나 결핍을 채우고 두려움을 해소할 테니까.
하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그것이 '진짜'가 아닌 '가짜'임을 알게 될 것이다.
비어있는 것을 위한 헛된 노력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 단어들이 우리 인생에서 '독약'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독약'만 마시지 않았더라면....
2020년 5월 30일 토요일
2020년 5월 5일 화요일
꼰대와 문화
나도 오래된 사람이긴 하지만, 내가 어렸을 적, 중/고등 학생이었던 시절에는 "꼰대"라는 단어가 그리 흔하지는 않았다.
아니, 실제로 그걸 쓰는 부류가 있기는 했는데, 주로 동급생 가운데 양아치나 엽전(요즘의 일진을 당시엔 엽전이라고 흔히들 불렀다)쯤 되는, 소위 "불량 학생"들이 사용하는 그들만의 은어였다.
당시에 교실에서 그런 학생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간혹 이 단어를 듣곤 했는데, 당시에는 문맥으로 그 단어의 뜻이 "아버지"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네이버 국어 사전에는 늙은이 혹은 선생님을 이르는 은어라고 나와 있다.)
왜 아버지를 꼰대라고 부르는지는 지금도 알 지 못한다.
한참이 지나, 대학교를 가고 또래의 친구들이 군대를 다녀와서 군대 얘기를 하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는 군대에서 그들끼리 사용하는 새로운 용어들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 가운데 우연히 들었던 용어는 "꼬질대다"라는 용어였는데, 대략적인 의미는 "시시때때로 간섭하거나 딴지를 걸어 사람을 괴롭히다"는 뜻으로 기억을 하고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단어이다.)
꼰대와 꼬질대다는 같은 어원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표준어도 아니고 하나는 은어이니 어원이 뭐가 중요하겠는가만, 어떤 계층에서 널리 쓰였다면 그 단어가 이리저리 변형되어 활용되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만약 같은 어원을 가졌다면 어느 정도는 이해도 될 만하지 않을까.
아버지나 선생님은 늘상 나에게 훈계하고 지적하고 고치려고 드니 말이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게 반복되면 괴롭기 짝이 없는 것이고,
급기야는 저 사람만 봐도 기분이 좋지 않아지고,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고,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지고.... 한마디로 가시방석과 같은 존재가 아니겠는가.
당시에는 그래도 이런 훈계를 마땅한 것으로 여겨 받아들이는 학생들이 많았나 보다.
유독 행실이 좋지 않은 학생들만, 자꾸만 반복되는 꾸짖음과 훈계에 지쳐,
꼰대라는 단어로 자신들의 스트레스를 승화시켰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던 것이 최근에는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꼰대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심지어는 선생님이나 아버지, 혹은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 뿐이 아니라, 나이가 비슷한 또래에게도 "젊은 꼰대 = 영꼰"이라 부르며 불만을 터트리고 있다.
단지 단어가 흔해진 것도 아니고, 꼰대라는 단어에 담긴 스트레스, 짜증의 정도가 약해진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현재에도 "꼰대"라는 단어는 많은 짜증을 내포하고 있고, 일정 부분의 증오심도 담고 있다.
이런 현상을, 주로 꼰대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젊은 층에서는, 사소한 일에도 이래라 저래라 참견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여러가지 생활 관습의 변화에서 기인한 것으로서, 타인에 대한 간섭을 무례한 것으로 생각하는 관습,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해야 한다는 관습 등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이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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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얘기가 길어졌다.
그래서 대체 "꼰대와 문화가 무슨 관련이 있는 건데?"
문화...넓게는 생활의 관습, 도덕, 예의, 생활 패턴... 이라는 것은 그 사회에서 무난하게 생활하기 위해서 지켜야할 것, 혹은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광범위한 규칙(혹은 약속)을 말한다.
이런 문화는 문헌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며, 대부분은 부모 가족 형제 친척 친구 이웃 선생님 등 자주 접하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가르치고 배우면서 전해진다.
그리고 그런 문화 중 강한 금기에 해당되는 것은, 그 만큼 강하게 전수가 되는데, 가장 흔한 방법은 "두려움"을 심어 주는 것이다.
흔한 예로, 금기가 되는 것을 모르고 범한 아동에게는 평생을 잊 못할 엄한 처벌이 내려지기도 하고, 그 모습을 다른 아동에게도 보여 줌으로써 강력한 경고로 삼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 그 처벌을 받은 아동 혹은 그런 처벌의 광경을 목격하거나 들었던 아동은, 후에 성인이 되어서도 두려움을 지울 수 없게 되고, 비슷한 금기를 다시 목격하게 되었을 때 즉각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금기를 어긴 사람에게는 강한 분노를 표하거나 비난을 하게 된다.
다시 이런 비난을 받은 사람은 강한 두려움을 가지고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게 된다.
모든 문화가 이런 식으로 전수되지는 않지만, 강력한 금기일 수록 비슷한 방식으로 전수가 된다.
어쩌면 외부에서 전혀 다른 문화 체계를 가진 사람이 보기에는, 얼핏 무엇에 세뇌된 집단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게 문화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결국 이런 넓은 의미의 문화의 전수 과정이, 이제는 꽤 폭넓게 "꼰대짓"으로 비난을 받고 있다.
한편으로는 시대에 걸맞지 않는 구태와 낡은 인습에 대한 자연스러운 거부 반응으로도 볼 수 있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전승받은 문화를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 예전만큼 쉽지 않고 용기를 내야만 하는 일이 되었다는 것, 그래서 그 폭은 줄어 들었으며, 줄어든 만큼 왜곡될 가능성은 높아지고 단절될 가능성도 높아진 것 만큼은 사실이다.
아니, 실제로 그걸 쓰는 부류가 있기는 했는데, 주로 동급생 가운데 양아치나 엽전(요즘의 일진을 당시엔 엽전이라고 흔히들 불렀다)쯤 되는, 소위 "불량 학생"들이 사용하는 그들만의 은어였다.
당시에 교실에서 그런 학생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간혹 이 단어를 듣곤 했는데, 당시에는 문맥으로 그 단어의 뜻이 "아버지"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네이버 국어 사전에는 늙은이 혹은 선생님을 이르는 은어라고 나와 있다.)
왜 아버지를 꼰대라고 부르는지는 지금도 알 지 못한다.
한참이 지나, 대학교를 가고 또래의 친구들이 군대를 다녀와서 군대 얘기를 하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는 군대에서 그들끼리 사용하는 새로운 용어들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 가운데 우연히 들었던 용어는 "꼬질대다"라는 용어였는데, 대략적인 의미는 "시시때때로 간섭하거나 딴지를 걸어 사람을 괴롭히다"는 뜻으로 기억을 하고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단어이다.)
꼰대와 꼬질대다는 같은 어원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표준어도 아니고 하나는 은어이니 어원이 뭐가 중요하겠는가만, 어떤 계층에서 널리 쓰였다면 그 단어가 이리저리 변형되어 활용되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만약 같은 어원을 가졌다면 어느 정도는 이해도 될 만하지 않을까.
아버지나 선생님은 늘상 나에게 훈계하고 지적하고 고치려고 드니 말이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게 반복되면 괴롭기 짝이 없는 것이고,
급기야는 저 사람만 봐도 기분이 좋지 않아지고,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고,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지고.... 한마디로 가시방석과 같은 존재가 아니겠는가.
당시에는 그래도 이런 훈계를 마땅한 것으로 여겨 받아들이는 학생들이 많았나 보다.
유독 행실이 좋지 않은 학생들만, 자꾸만 반복되는 꾸짖음과 훈계에 지쳐,
꼰대라는 단어로 자신들의 스트레스를 승화시켰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던 것이 최근에는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꼰대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심지어는 선생님이나 아버지, 혹은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 뿐이 아니라, 나이가 비슷한 또래에게도 "젊은 꼰대 = 영꼰"이라 부르며 불만을 터트리고 있다.
단지 단어가 흔해진 것도 아니고, 꼰대라는 단어에 담긴 스트레스, 짜증의 정도가 약해진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현재에도 "꼰대"라는 단어는 많은 짜증을 내포하고 있고, 일정 부분의 증오심도 담고 있다.
이런 현상을, 주로 꼰대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젊은 층에서는, 사소한 일에도 이래라 저래라 참견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여러가지 생활 관습의 변화에서 기인한 것으로서, 타인에 대한 간섭을 무례한 것으로 생각하는 관습,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해야 한다는 관습 등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이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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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얘기가 길어졌다.
그래서 대체 "꼰대와 문화가 무슨 관련이 있는 건데?"
문화...넓게는 생활의 관습, 도덕, 예의, 생활 패턴... 이라는 것은 그 사회에서 무난하게 생활하기 위해서 지켜야할 것, 혹은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광범위한 규칙(혹은 약속)을 말한다.
이런 문화는 문헌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며, 대부분은 부모 가족 형제 친척 친구 이웃 선생님 등 자주 접하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가르치고 배우면서 전해진다.
그리고 그런 문화 중 강한 금기에 해당되는 것은, 그 만큼 강하게 전수가 되는데, 가장 흔한 방법은 "두려움"을 심어 주는 것이다.
흔한 예로, 금기가 되는 것을 모르고 범한 아동에게는 평생을 잊 못할 엄한 처벌이 내려지기도 하고, 그 모습을 다른 아동에게도 보여 줌으로써 강력한 경고로 삼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 그 처벌을 받은 아동 혹은 그런 처벌의 광경을 목격하거나 들었던 아동은, 후에 성인이 되어서도 두려움을 지울 수 없게 되고, 비슷한 금기를 다시 목격하게 되었을 때 즉각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금기를 어긴 사람에게는 강한 분노를 표하거나 비난을 하게 된다.
다시 이런 비난을 받은 사람은 강한 두려움을 가지고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게 된다.
모든 문화가 이런 식으로 전수되지는 않지만, 강력한 금기일 수록 비슷한 방식으로 전수가 된다.
어쩌면 외부에서 전혀 다른 문화 체계를 가진 사람이 보기에는, 얼핏 무엇에 세뇌된 집단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게 문화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결국 이런 넓은 의미의 문화의 전수 과정이, 이제는 꽤 폭넓게 "꼰대짓"으로 비난을 받고 있다.
한편으로는 시대에 걸맞지 않는 구태와 낡은 인습에 대한 자연스러운 거부 반응으로도 볼 수 있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전승받은 문화를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 예전만큼 쉽지 않고 용기를 내야만 하는 일이 되었다는 것, 그래서 그 폭은 줄어 들었으며, 줄어든 만큼 왜곡될 가능성은 높아지고 단절될 가능성도 높아진 것 만큼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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