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2일 금요일

노력과 성과에 관해서

과연 우리가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얼마나 되는 걸까?

집에서 커피를 직접 볶아서 마시곤 하는데,
처음엔 도통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방법이야 인터넷에 널리고 널렸으니 적절한 시간과 성의을 가진다면 "문장으로 이루어진 방법"은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커피라는 건, 결국은 맛과 향으로 결정되는 것인데
아직까지 인터넷이 맛과 향을 그대로 전달해 줄 수는 없기에, 이 부분들이 매우 모호할 수 밖에 없다.

사실 여러가지 조리방법 중에, 색의 변화, 향기의 변화, 질감의 변화, 맛의 변화에 따라 판단이 필요한 것들은 말이나 문자로 전달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그래서 실습이 필요한 것이고, 스승이 필요한 것이고, 도제가 필요한 것이고, 무형문화재가 필요한 것이다.

이젠 2년 정도 커피를 볶아보니 대략적인 감은 생겼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커피는 내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 볶아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는 맛과 향기의 특성이 존재하더란 것이다.
물론 로스팅을 망쳐버리면 좋은 맛과 향기를 모두 잃을 수도 있기에 나쁘게 바꾸는 것에는 한계가 없는 셈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한계가 나름 명확하다.
그 커피가 원래 가지고 있지 않은 맛과 향기를 나게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더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자 한다면, 더 좋은 커피 생두를 찾아야지, 똑같은 커피 생두에 노력을 더한다고 갑자기 맛이 좋아지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또, 그 커피 생두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 경우에도, 그 노력이 허사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마련이다.
그게 그 커피 생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일 수도 있고, 외부적인 요인이 될 수도 있는데, 노력으로 개선된 장점을 우습게 잡아먹어 버리는 월등한 단점이 부각되는 경우이다.
커피의 경우에는 진한 커피를 위해서 많이 볶으면 향미를 잃고, 향미를 살리기 위해 살짝 볶으면 커피가 가벼워지거나 덜 익은 떫은 맛이 나기 쉽기고 하다.

이처럼 어떤 일의 성과를 내기에는 많은 어려움들이 도사리고 있다.


어쩌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노력이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꾸준히 노력하는 것과, 노력해도 성과가 나오지 않는 이유를 모르니 그냥 포기해버리는 차이를 만드는 정도일 지도 모르겠다.

2019년 11월 21일 목요일

공수처(고위 공직자 범죄 수사처)를 두고 벌이는 싸움 (feat. 어벤저스 시빌워)

어제인가, 자유한국당의 황교안 대표가 단식투쟁을 선언했다.
단식 투쟁을 벌이며 정부에 요구하는 사항은 3가지라고 한다.
1. 지소미아 종료시한 전에 연장 요구
2. 공수처법 추진 철폐
3. 선거법 패스트 트랙 상정 철회
https://news.joins.com/article/23637605

1번의 지소미아 연장에 관한 문제는 한미일의 3국간의 외교적인 협상 카드로서 활용하는 것이기에, 그 문제 하나만을 떼어놓고 옳다 그르다 하기엔 어려운 문제다.
당장에 한미 양국의 방위비 협상 문제가 이슈로 떠오르는 상황이고, 여기에 어떤 식으로든 지소미아 관련 문제도 함께 논의 될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나머지 2번과 3번의 경우에는 국민들과는 하등 관련이 없다.
선거법은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관련되어 있고, 공수처법은 고위 공직자들에 국한된 부분이니 국민들과는 더더욱 관련이 없는 사안이 아닌가.

아무튼, 저 단식투쟁에 관해 얘기하려는게 아니고, 공수처법이라는 것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한다.

아직은 공수처법에 대해 별 관심도 없어서 이리 되건 저리 되건 내 알바 아니라 생각했는데, 대체 뭐길래 단식까지 하면서 저걸 막고 있는지 참 알쏭달쏭하다.
뭔가 내막이 있는걸까?

마블의 영화들 중, 시빌워라는 작품이 있었다.
이게 캡틴 아메리카 시빌워인지, 어벤저스 시빌워인지 모르겠다.
사실 난 마블 만화에 별 관심이 없으니까.
하지만, 이 시빌워의 영화는 안 봤어도 만화는 봤더랬다.
어벤저스의 히어로들이 양편으로 갈라지는 과정, 그 분열과 팽팽한 정당성 시비, 과연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비슷한 영화, 아니 만화로 왓치맨이 있다.
앨런 무어의 왓치맨.
자경단원들의 고뇌와 딜레마들.
왓치맨은 누가 감시하는가? 라는 조롱의 낙서는 또 다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오지맨디아스와 닥터 맨해튼 중 누가 옳은가, 닥터 맨해튼과 로르샤흐(로어세크) 중 누가 옳은가는 끝나지 않을 논쟁거리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왓치맨의 딜레마를 마블에서 가져다 쓴 것이 시빌워가 아닐까 싶다.)

아직 잘은 모르지만, 이 공수처법이라는 걸 두고 싸우는 여야, 혹은 국회와 정부, 검찰과 국회의 대립이 어딘지 모르게 왓치맨과 시빌워의 대립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내가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일수 도 있다.
만약 대의적 명분에서 공수처법이 압도적인 우의를 점하고 있다면 말이다.

그러면 이 문제는 영국의 경제학자인 하이에크과 케인즈의 대립과 비슷해 진다.
거시적인 관점과 원칙적인 관점에서는 하이에크가, 실용적인 측면과 현실적인 대안에서는 케인즈가 우월했다는 식의 대립 말이다.


어떤 식의 대립인지는 좀 더 살펴봐야 할테지만, 양쪽 모두 여론의 힘을 얻어서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기는 어려우므로, 명분으로 정당성을 얻거나, 실제 현실에서의 적용에 대한 효용성 혹은 부작용으로 이해득실을 따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