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not explain.
이게 무슨 뜻인지 처음에는 몰랐다.
설명하지 말라니...
타인에게 나 혼자 아는 척하며 설명해 주지 말라는 뜻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 자신에게 설명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대체 왜?
설명하지 말라는 이 말이, 말 조심해야 하는 4가지 금언(禁言) 중 하나였을까?
(나머지는, 불평하지 말아라. 남을 해하는 말을 하지 말아라. 받아들여지지 않는 충고 하지 말아라.)
사람들에겐 크고 작은 고난이 일어나곤 한다.
그게 자기 자신에게만 국한 된 일인 경우도 있고, 여러 사람과 함께 겪는 어려움인 경우도 있으며, 나에겐 고난이지만 상대방에게 행운인 경우도 있다.
그 고난이 스스로 해결이 가능하다면 별 문제가 될 것이 없겠지만,
해결하기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 한 경우에는, 고난 자체보다 더 큰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알면 쉬운데 모르면 어려운 문제들...)
이럴 경우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의 스트레스를 낮추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주로 그 고난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파악하려는 것인데,
원인을 알고 나면, 해결책을 알 수도 있고, 해결 방법은 없다 해도, 다음에 같은 어려움에 빠지지 않을 예방책을 세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러하듯...은 아니고, 인간의 지혜가 충분하지 못한 까닭에 제대로 된 원인을 알기란 매우 어렵기 마련이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낮추려는 마음의 움직임은 끊임없이 작동하고...
결국은 자기 자신만이 인정할 만한 원인을 내세우고는 그걸 자기 자신에게 설명한다.
이런 설명은, 자신의 스트레스를 낮추어서 긴장 상태를 완화하거나 종결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게 궁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왜? 원인이 틀렸기 때문에.
스스로 긴장의 끈을 풀러 놓았기에, 다시 원인을 찾을 동력은 절대적으로 감소.
그리고 이 고난을 끝난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하지만 우리는 제대로 된 원인도 찾지 못하며, 일어난 일의 현상을 똑바로 보지도 못한다.
스스로가 해결했다고는 생각하지만 사실은 문제를 회피한 셈이 되는 것이다.
2014년 4월 16일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세월호 사고는 온 국민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고, 유가족들에게는 평생의 한으로 남을 만한 사고였다.
그리고 정부는 어찌된 일인지 세월호 사고에 대한 조사를 꺼리는 듯한 행태를 넘어서, 조사를 방해했다는 정황의 증언들도 이어졌다.
어쩌면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사고에서 보여준 이해할 수 없는 대응 방식때문에 탄핵되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당시에 유가족은 물론이고 온 국민들이 동시에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를 낮추기 위해 설명이 필요했다.
왜 사고가 발생한 것인지, 왜 적극적으로 구조하지 않은 것인지, 왜 대통령은 재빨리 대응하지 못한 것인지, 왜 사고 조사를 방해한 것인지, 왜 유가족들은 시체팔이로 모함한 것인지...
하지만 대통령이 탄핵되고 여러 관료들이 구속 기소되었음에도 여전히 설명은 부족했다.
어쩌면 청와대 굿판, 밀회설, 마약 복용설, 미용 시술설 등등은 세월호 사고에 대한 대통령의 늑장 대응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되었던 각각의 예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와 따지고 보면 참 허무맹랑한 것일 수도 있으나, 청와대가 꽁꽁 숨기고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개 국민이 자신의 스트레스를 낮출 수 있는 방법은 이런 음모론을 제기하고 그것에 모든 것을 맞추어서 스스로 만족하는 것 뿐이었으리라.
만약 진실이라면 빈틈이 없이 완벽하게 모든 것이 설명될 것이다.
하지만 설명하기 위해 내 놓은 대국민 담화문은 거짓이었기에, 충분히 설명되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조각들과는 전혀 맞지 않는 모순을 낳았을 뿐이다.
언젠가부터, 고급 시계가 남성의 부와 지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부각하게 되었고, 명품 백이 여성의 가치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런 것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런 걸 차고 들고 있는 사람들은, 저 시계와 저 백이 자기 자신인 것처럼 생각하나 보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 그 심리는 모르겠으나 참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로 나 자신의 가치를 보이려고 하는 사람들.
아마도 저들 중 대대수는 명품 시계나 명품 백이 없으면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리라, 저들은 자기 자신이 너무 보잘 것 없음을 잘 알기에 물질적인 것들로 자기를 채우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내 자신에게 물었다.
그래서 너는 네가 가지고 있는 볼품 없는 옷차림이 아무렇지도 않냐.
여기 저기 긁히고 낡아서 오래된 저 차가 당당하냐.
...사실 그렇지 않았다.
부끄럽다. 너무 오래되어서 여기 저기 녹이 슬고, 찌그러져도 고칠 수 없는 내 차가 부끄럽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어둡고 답답한 옷이 부끄럽고, 아직도 목까지 올라오는 신발이 부끄럽다.
그럼 네가 명품 시계와 명품 백을 가진 이들을 흠잡았던 건, 그들의 공허함을 알았던 것이 아니라, 네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것에 대한 부러움의 다른 표현이 아니었던거냐.
어쩌면... 그래 어쩌면 나는 나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설명하고 있었던건지도 모르겠다.
아주 어릴 적, 우리 집은 가난했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매우 우울하고, 어쩌면 매우 찌질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살림이 좀 펴게 되었고, 난 예전보다는 많은 걸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난 내가 가진 것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표현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난 그 때의 내 행동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때의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바라보는 허영심의 그들, 사치의 그녀들은 어쩌면 내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었을지 모르겠다.
내가 증오하는 나의 모습이 떠오르는 게 싫어서, 내 자신에게 그럴듯한 설명으로 위안을 했을지도...
2017년 4월 18일 화요일
2017년 4월 15일 토요일
성(性) 소수자들에 대한 인식에 대해
최근에는 우리 사회에서도 성소수자들에 대한 논의가 조금씩이지만 널리 퍼지고 있다.
나 또한 기존의 고지식함을 버리지도 못했고,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만큼 내 생활에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대다수의 의견을 따라가고 있었다.
언젠가 친구들과 동성애에 관한 의견을 나눈 적이 있는데, 친구들의 의견은 "치료할 수 없는" 것이니 인정해야 하지 않겠냐 정도였다.
친구들에 비해 더 고지식했던 나는, 그들의 자녀가 동성애자라면 어찌 하겠느냐는, 짖궂은 질문을 했지만, "치료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답을 들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치료"한다는 의미 자체가 당사자들에게는 매우 결례이고 부적절한 단어임을 알게 되었다. 이는 마치 "엑스맨"이라는 영화에서 돌연변이 치료에 관한 논쟁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이런 토론(?) 후에, 집중적이지는 않지만 간간이 접하게 되는 관련된 뉴스나 이슈들에 대해 조금은 더 관심을 가져 보았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본 자료에 따르면, 실제로 정확한 성(性)의 구별이 어려운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건 정신적,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의학적인 기준으로도 그렇다는 것인데, 성염색체의 이상, 성기의 존재나 발달 상태, 성호르몬의 이상 등으로 남녀의 구분이 모호한 경우들이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사람들은 매우 드문 경우라는 생각, 성(性)에 대한 사회적 금기 때문에 적극적인 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기에(치료가 가능은 한 것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하는지 알기도 어렵다고 한다.
더불어 각 사회는 성(性)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들이 있는데, 이들은 남자 혹은 여자의 둘 중 하나가 되어야만 하기에 반강제로 자신의 성향과는 다른 성역할을 맡아야만 하기도 한다.
일단, 이런 현실에 대해 인식을 하고 받아들이게 되니, 앞서의 동성애에 대한 문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해결이 된다.
그 무엇보다 인간을 남자와 여자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더 유연하게 성적인 구분도 연속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남성적인, 중석적인, 여성적인 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미래에는 누군가에게 "성(性)적 편향성"을 묻는 것 자체가 "정치적 편향성"을 묻는 것보다 더 결례가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의 상태에서는 많은 장벽들이 존재하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서양에서는 엄격한 종교의 잣대들이 이중적이거나 모호한 성에 대해 인정하기를 꺼리게 만드는 요소이며, 동양에서는 전통적인 유교적 남녀의 구별이 이를 가로 막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남성"이 지게되는 "국방의 의무"로 인해서, 이와 같은 까다로운 문제의 논의가 더욱 어려워진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고, 조금 더 용기있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하고, 조금 더 많은 사건들을 겪고 나면,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겠는가.
P.S.
어째서 조물주는 이런 조화를 부렸을까?
자연의 모든 생명을 암과 수로 나누었으면서, 어째서 인간도 모두 암과 수로 나누지 않았던 것일까?
나 또한 기존의 고지식함을 버리지도 못했고,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만큼 내 생활에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대다수의 의견을 따라가고 있었다.
언젠가 친구들과 동성애에 관한 의견을 나눈 적이 있는데, 친구들의 의견은 "치료할 수 없는" 것이니 인정해야 하지 않겠냐 정도였다.
친구들에 비해 더 고지식했던 나는, 그들의 자녀가 동성애자라면 어찌 하겠느냐는, 짖궂은 질문을 했지만, "치료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답을 들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치료"한다는 의미 자체가 당사자들에게는 매우 결례이고 부적절한 단어임을 알게 되었다. 이는 마치 "엑스맨"이라는 영화에서 돌연변이 치료에 관한 논쟁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이런 토론(?) 후에, 집중적이지는 않지만 간간이 접하게 되는 관련된 뉴스나 이슈들에 대해 조금은 더 관심을 가져 보았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본 자료에 따르면, 실제로 정확한 성(性)의 구별이 어려운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건 정신적,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의학적인 기준으로도 그렇다는 것인데, 성염색체의 이상, 성기의 존재나 발달 상태, 성호르몬의 이상 등으로 남녀의 구분이 모호한 경우들이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사람들은 매우 드문 경우라는 생각, 성(性)에 대한 사회적 금기 때문에 적극적인 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기에(치료가 가능은 한 것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하는지 알기도 어렵다고 한다.
더불어 각 사회는 성(性)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들이 있는데, 이들은 남자 혹은 여자의 둘 중 하나가 되어야만 하기에 반강제로 자신의 성향과는 다른 성역할을 맡아야만 하기도 한다.
일단, 이런 현실에 대해 인식을 하고 받아들이게 되니, 앞서의 동성애에 대한 문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해결이 된다.
그 무엇보다 인간을 남자와 여자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더 유연하게 성적인 구분도 연속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남성적인, 중석적인, 여성적인 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미래에는 누군가에게 "성(性)적 편향성"을 묻는 것 자체가 "정치적 편향성"을 묻는 것보다 더 결례가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의 상태에서는 많은 장벽들이 존재하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서양에서는 엄격한 종교의 잣대들이 이중적이거나 모호한 성에 대해 인정하기를 꺼리게 만드는 요소이며, 동양에서는 전통적인 유교적 남녀의 구별이 이를 가로 막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남성"이 지게되는 "국방의 의무"로 인해서, 이와 같은 까다로운 문제의 논의가 더욱 어려워진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고, 조금 더 용기있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하고, 조금 더 많은 사건들을 겪고 나면,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겠는가.
P.S.
어째서 조물주는 이런 조화를 부렸을까?
자연의 모든 생명을 암과 수로 나누었으면서, 어째서 인간도 모두 암과 수로 나누지 않았던 것일까?
피드 구독하기:
글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