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 진보 보수는 단지 이념의 문제일까?
변화와 안정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쓸 수 있지만, 그게 그렇게 큰 차이일까?
각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도, 진보와 보수는 다른 입장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나름대로 양 진영의 논리는 그럴듯 해 보인다.
어쩌면 단지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가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선택된 진영의 예상과 반대 진영의 우려에 대해서도, 그 결과는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러기에 논의는 충분히 하되, 일단 결정이 되면 예상되는 결과를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우려되는 부작용을 막기위한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
여기까지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며, 나머지는 운명을 따라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의 논의 과정에서 가장 소모적인 것은, 이념 자체에 대한 논쟁이다.
개별 사안에 대한 선택을 두고, 그 사안에 대한 논의가 아닌, 그걸 추진하는 진영의 이념 혹은 반대하는 진영의 이념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는 것이야말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는 감정적 대립을 야기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주로 자신의 선택보다는 상대방의 선택이 보다 나을 수 있음을 인지한 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택을 관철시키려는 억지스러운 욕심에서 표출되곤 한다.
과연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으로 갈라놓으면, 모든 사안에 대한 선택은 미리 예측이 가능할까?
절대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미리 예측이 가능할 정도로 절대적인 보수와 절대적인 진보는 존재할 수도 없는 이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예측이 가능하다면, 정당을 이루는 국회의원들이 왜 필요하겠는가.
개별 사안에 대해 논의하고 표결하는 절차가 왜 필요하겠는가.
예측 가능한 진보의 의견과 예측 가능한 보수의 의견이 이미 나와 있는 셈이다.
의견의 당위성을 설명할 필요도 없다.
최종 결정만 남을 뿐이다.
진보적이지 않는 보수는 고여서 썩은 물이며, 보수적이지 않은 진보는 정처없이 떠도는 거렁뱅이에 지난지 않는다.
보수라도 잘못된 것은 고치고,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하는 것을 두려워 해서는 안되는 법이다. 보수가 경계해야 할 것은 보수 그 자체이다.
진보라 할지라도 내가 가진 것의 가치를 볼 줄 알고 지켜내는 강직함이 필요하다. 진보가 경계해야 할 것은 진보 그 자체이다.
진보도 변화해 왔으며, 보수도 변화해 왔다.
지금의 진보/보수도 과거의 진보/보수가 보면 사이비라고 비난할 것이며, 미래의 진보/보수가 보면 구태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것이 딱 우리의 현재 수준이다.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기와 동족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전쟁을 벌이는 아픔을 겪었다.
그리고 그 전쟁의 과정을 지켜본 많은 국민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깟 이념이 뭐라고..."
이념으로 다투어 서로의 목숨을 빼앗고 상처를 입히고 재산을 파괴했다.
그리고 이념이란 머리속에서 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무가치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아직도 이념으로 다투고 있다.
그깟 이념이 뭐라고...
역사를 통해 배웠어여 할 교훈은 어디로 갔을까.
P.S.
이념은 단지 명분이었을 뿐.
영토 전쟁의 명분이었고, 정치인들의 야망을 채우기 위한 명분이었을 뿐.
더 이상 이념의 희생양이 되지 말기를 갈망한다.
2016년 12월 21일 수요일
2016년 12월 17일 토요일
내부자의 증언이 어려운 이유
여전히 한참 진행 중인 대통령 탄핵정국에서 아주 흥미로운 볼거리는 국정조사 청문회이다.
이른바 최순실 국정조사(정식 명칭은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규명 국정조사")에서는 그 동안 '찌라시'라고 치부되거나, '~카더라'는 시중의 출처 없는 소문과 괴담들이 망라되어 있어서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국정조사의 법률적 한계로 인해, 증인의 출석을 강제할 수 없고, 강제적인 수사의 권한이 없어서 진실을 밝히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었다.
국정조사 위원들과 언론들이 한목소리로 "내부자의 양심적인 증언"을 호소하는 것은 바로 이런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고, 결정적인 진실의 봉인을 푸는 실마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첫번째,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의 행적을 밝히는 것은 아마도 내부자의 용기와 결단이 없다면 불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두번째, 김영재 성형외과의원 원장의 세월호 당일 행적 또한 내부자의 자발적 증언이 없다면 밝혀내기가 쉽지 않으리라 본다.
청와대의 경우에는 청와대 직원들, 김영재 원장의 경우엔 알리바이로 내세운 장모, 골프 상대, 병원 간호사 정도가 내부자가 될 것이다.
자, 만약에 김영재 원장의 병원 간호사가 원장의 증언 내용이 사실과 다름을 알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간호사가 알고 있는 원장의 의심스러운 언행은, 단지 원장이 밝힌 행선지이거나 원장이 병원을 비운 시간이거나 한, 극히 일부라고 말이다.
이 사실을 국정조사위원에게 폭로하거나 언론에 공대한다면?
간호사는 병원에서 근무할 수 없게 될 것은 명백하다. 원장으로부터 파면 당하거나, 병원이 문을 닫거나.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소한 사실로 인해서 진실이 드러날 확률이 매우 미미하다고 생각된다면 굳이 이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양심의 문제?
내가 아는 것보다, 아마 장모나 골프 상대가 알고 있는 사실이 진실을 밝힐 더 확실한 증거이고, 양심의 가책이라면 자신보다 그 사람들이 더 커야 한다고 위안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비밀을 가지고 있는 한, 원장은 자신을 해고할 수 없다는 보장까지 확보한다.
청와대의 의무실에 근무했다는 의무장교들 또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들이 비밀을 폭로해서 얻을 수 있는 잇점은, 비밀을 유지해서 얻을 수 있는 잇점에 비해 터무니 없이 보잘 것 없다.
결국은 '좋은 경찰 나쁜 경찰'과 같은 방법만이 남는다.
비밀을 폭로하지 않았을 경우에 처해질 공포를 극대화 해서 공포스럽게 만듦으로써, 비밀을 폭로했을 경우에 공포에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하는 방법.
이른바 최순실 국정조사(정식 명칭은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규명 국정조사")에서는 그 동안 '찌라시'라고 치부되거나, '~카더라'는 시중의 출처 없는 소문과 괴담들이 망라되어 있어서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국정조사의 법률적 한계로 인해, 증인의 출석을 강제할 수 없고, 강제적인 수사의 권한이 없어서 진실을 밝히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었다.
국정조사 위원들과 언론들이 한목소리로 "내부자의 양심적인 증언"을 호소하는 것은 바로 이런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고, 결정적인 진실의 봉인을 푸는 실마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첫번째,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의 행적을 밝히는 것은 아마도 내부자의 용기와 결단이 없다면 불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두번째, 김영재 성형외과의원 원장의 세월호 당일 행적 또한 내부자의 자발적 증언이 없다면 밝혀내기가 쉽지 않으리라 본다.
청와대의 경우에는 청와대 직원들, 김영재 원장의 경우엔 알리바이로 내세운 장모, 골프 상대, 병원 간호사 정도가 내부자가 될 것이다.
자, 만약에 김영재 원장의 병원 간호사가 원장의 증언 내용이 사실과 다름을 알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간호사가 알고 있는 원장의 의심스러운 언행은, 단지 원장이 밝힌 행선지이거나 원장이 병원을 비운 시간이거나 한, 극히 일부라고 말이다.
이 사실을 국정조사위원에게 폭로하거나 언론에 공대한다면?
간호사는 병원에서 근무할 수 없게 될 것은 명백하다. 원장으로부터 파면 당하거나, 병원이 문을 닫거나.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소한 사실로 인해서 진실이 드러날 확률이 매우 미미하다고 생각된다면 굳이 이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양심의 문제?
내가 아는 것보다, 아마 장모나 골프 상대가 알고 있는 사실이 진실을 밝힐 더 확실한 증거이고, 양심의 가책이라면 자신보다 그 사람들이 더 커야 한다고 위안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비밀을 가지고 있는 한, 원장은 자신을 해고할 수 없다는 보장까지 확보한다.
청와대의 의무실에 근무했다는 의무장교들 또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들이 비밀을 폭로해서 얻을 수 있는 잇점은, 비밀을 유지해서 얻을 수 있는 잇점에 비해 터무니 없이 보잘 것 없다.
결국은 '좋은 경찰 나쁜 경찰'과 같은 방법만이 남는다.
비밀을 폭로하지 않았을 경우에 처해질 공포를 극대화 해서 공포스럽게 만듦으로써, 비밀을 폭로했을 경우에 공포에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하는 방법.
2016년 12월 1일 목요일
우리는 합리적인가? 이성적인가? 논리적인가?
나를 비롯해 내 친구와 가족들, 친치들, 직장 동료와 선후배들, 동네 이웃들 등등
그리고 그 사람들을 통해 (들어서)알게된 더 많은 사람들.
과연 나 혹은 내 주변 혹은 주변의 지인들 가운데 충분히 합리적/이성적/논리적인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몇% 정도의 사람들이 그런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까?
*----------------------------------------------------------
근원적으로 따지자면 인간으로서 그 누군들 합리적/이성적/논리적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아는 것이 너무 얕아서 그런 판단을 한다는 자체가 우스운 일일 것이다.
단지, 우리 현 시대의 평균적인 성인들이 아는 것을 기준으로 삼자.
여기서 제기하는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기반으로 하는 합리적/이성적/논리적 수준임을 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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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정치적인 혼란 상황에서, 제반 문제점들에 대해서 근본에서의 재고찰이 필요해 보이며, 몇가지를 생각하다 보니 우리들이 너무 직관적/감정적이지 않았던가 하는 반성을 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몇가지 예를 들어 보일 것인데, 각 사례에 대해 우리들이 어떤식으로 판단을 했던 것인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 정치적인 입장(진보/보수 가 아니라 각 정책 사안에 따른 개별적인 판단이 필요)
2. 선거에 나선 후보에 대한 판단(여당/야당이 아니라 후보의 공약 자질에 대한 판단)
3. 뉴스의 사건 보도(선입견을 배제하고 보도한 내용을 기반으로 진실이 무엇인지 판단)
4. 자동차의 선택(브랜드/광고에 현혹되기 보다는 용도에 따른 기능,성능,가격으로 판단)
5. 스마트폰의 선택(상동)
6. 아날로그-디지털의 논쟁(디지털의 대중화에 대한 반발로 아날로그에 대한 장점이 부각되기도 하지만 그게 정말 꼭 필요한 것인지)
7. 좌-우 이념에 대한 가치의 혼동 (좌우익은 진보와 보수로 대변되는 것인데 언제부턴지 대한민국에서는 좌익=종북이라는 프레임이 당연시. 북한 내부에도 좌-우익이 있을거 같지 않은지?)
8. 마찬가지로 좌우익 = 자본주의&공산주의 등식 고착화.(이게 과연 맞을지. 자본주의 자체가 계속 변하고 있는 마당에...)
최근의 상황은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에 민심의 무게가 실리는 상황이다.
아마도 역대 최다 국민이 참가한 시위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 와중에 정 반대의 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있다.
대통령의 탄핵이나 하야에 반대한다는 시위도 있는데, 그 수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고 대부분은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이다.
또한, 국회 내에서도 대규모의 국민들이 집회를 하는 것에 대해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거나, '촛불 집회에 종북 좌파 세력이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식으로 폄하하거나 음모론을 제기하는 국회의원도 있었다.
대다수 국민들과는 반대의 의견을 가진 이들은 꽤 뿌리 깊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공산주의, 빨갱이, 인민, 좌파, 좌익, 종북, 친북이라는 단어에 대한 발작에 가까운 두려움을 말이다.
그리고 이 분들 대다수가 60대 이상의 노년층이기에 적어도 직접적으로 6.25를 겪으며 트라우마를 갖게 되셨거나 혹은 군사 독재 정권이 장기 집권을 위해 세뇌에 가까울 정도로 반복해서 심어준 후천적인 두려움에 온전히 세뇌된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노년층의 이러한 무조건적인 반공 사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후 세대를 다시 무조건적인 반-반공 사상에 빠지게 만들었다.
즉, 반공이라는 단어 자체를 매우 혐오스럽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젊은 세대로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약 30년 정도만 지나면 대한민국은 극좌파적인 사회가 되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다.
매우 불행한 현상인데, 이러한 극과 극으로의 전이 현상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과정이 이성적/합리적/논리적으로 추구되지 않았다는 점이 그러하다.
공포-두려움에 의한 무조건적인 반발과 회피 본능이 발현되었고, 두려움을 강요당한 세대들은 다시 그 강요를 두려워하게 되어 반발하고 회피하는...
그런데, 이런 현상이 비단 정치적인 분야에서만 일어나난 것이 아니란 점.
국내에서 굳건한 입지를 다지고 있는 현대자동차는 그 동안 매우 많은 비난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해외와 국내의 차별적인 품질/가격//서비스와 소비자를 대하는 마인드가 매우 고압적이라는 점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동안 밝혀진 자동차 자체의 문제점들, 소극적인 리콜, 품질이나 가격의 역차별 등등이 사실임이 밝혀진 후에도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의 점유율은 상대적으로 낙폭이 적었다.(떨어지긴 했으나 밝혀진 사실들에 비하면 적다는...다분히 주관적인 의견)
왜일까?
물론 드러난 단점들이 감점 요인이긴 하지만, 그 동안 현대차가 쌓아온 신뢰가 있었던 건 아닐까?
몇가지 단점들 때문에 타사의 차를 구매했더니, 현대차에서는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단점이 등장할 가능성도 있고...
일부 반-현대차 주의자들은 여전히 현대차를 구매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는다. 잘못된 걸 뻔히 알면서도 구매해 주니까 현대차가 시정을 하지 않는 거라고. 사실로 밝혀진 것들조차 믿지 않거나 모르는 척 외면한다고.
과연 어느 쪽의 주장이 맞을까?
삼성의 갤럭시 스마트폰과 애플의 아이폰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서로가 상대방을 비방하고 자신의 장점을 자랑하면서 언쟁하기 일쑤다.
과연 맞는 주장이 있기는 한걸까?
이런 일련의 갈등에서 현명한 판단이 많이 아쉽기도 하지만,
과연 우리는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사람들을 통해 (들어서)알게된 더 많은 사람들.
과연 나 혹은 내 주변 혹은 주변의 지인들 가운데 충분히 합리적/이성적/논리적인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몇% 정도의 사람들이 그런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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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적으로 따지자면 인간으로서 그 누군들 합리적/이성적/논리적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아는 것이 너무 얕아서 그런 판단을 한다는 자체가 우스운 일일 것이다.
단지, 우리 현 시대의 평균적인 성인들이 아는 것을 기준으로 삼자.
여기서 제기하는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기반으로 하는 합리적/이성적/논리적 수준임을 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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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정치적인 혼란 상황에서, 제반 문제점들에 대해서 근본에서의 재고찰이 필요해 보이며, 몇가지를 생각하다 보니 우리들이 너무 직관적/감정적이지 않았던가 하는 반성을 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몇가지 예를 들어 보일 것인데, 각 사례에 대해 우리들이 어떤식으로 판단을 했던 것인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 정치적인 입장(진보/보수 가 아니라 각 정책 사안에 따른 개별적인 판단이 필요)
2. 선거에 나선 후보에 대한 판단(여당/야당이 아니라 후보의 공약 자질에 대한 판단)
3. 뉴스의 사건 보도(선입견을 배제하고 보도한 내용을 기반으로 진실이 무엇인지 판단)
4. 자동차의 선택(브랜드/광고에 현혹되기 보다는 용도에 따른 기능,성능,가격으로 판단)
5. 스마트폰의 선택(상동)
6. 아날로그-디지털의 논쟁(디지털의 대중화에 대한 반발로 아날로그에 대한 장점이 부각되기도 하지만 그게 정말 꼭 필요한 것인지)
7. 좌-우 이념에 대한 가치의 혼동 (좌우익은 진보와 보수로 대변되는 것인데 언제부턴지 대한민국에서는 좌익=종북이라는 프레임이 당연시. 북한 내부에도 좌-우익이 있을거 같지 않은지?)
8. 마찬가지로 좌우익 = 자본주의&공산주의 등식 고착화.(이게 과연 맞을지. 자본주의 자체가 계속 변하고 있는 마당에...)
최근의 상황은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에 민심의 무게가 실리는 상황이다.
아마도 역대 최다 국민이 참가한 시위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 와중에 정 반대의 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있다.
대통령의 탄핵이나 하야에 반대한다는 시위도 있는데, 그 수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고 대부분은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이다.
또한, 국회 내에서도 대규모의 국민들이 집회를 하는 것에 대해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거나, '촛불 집회에 종북 좌파 세력이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식으로 폄하하거나 음모론을 제기하는 국회의원도 있었다.
대다수 국민들과는 반대의 의견을 가진 이들은 꽤 뿌리 깊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공산주의, 빨갱이, 인민, 좌파, 좌익, 종북, 친북이라는 단어에 대한 발작에 가까운 두려움을 말이다.
그리고 이 분들 대다수가 60대 이상의 노년층이기에 적어도 직접적으로 6.25를 겪으며 트라우마를 갖게 되셨거나 혹은 군사 독재 정권이 장기 집권을 위해 세뇌에 가까울 정도로 반복해서 심어준 후천적인 두려움에 온전히 세뇌된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노년층의 이러한 무조건적인 반공 사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후 세대를 다시 무조건적인 반-반공 사상에 빠지게 만들었다.
즉, 반공이라는 단어 자체를 매우 혐오스럽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젊은 세대로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약 30년 정도만 지나면 대한민국은 극좌파적인 사회가 되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다.
매우 불행한 현상인데, 이러한 극과 극으로의 전이 현상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과정이 이성적/합리적/논리적으로 추구되지 않았다는 점이 그러하다.
공포-두려움에 의한 무조건적인 반발과 회피 본능이 발현되었고, 두려움을 강요당한 세대들은 다시 그 강요를 두려워하게 되어 반발하고 회피하는...
그런데, 이런 현상이 비단 정치적인 분야에서만 일어나난 것이 아니란 점.
국내에서 굳건한 입지를 다지고 있는 현대자동차는 그 동안 매우 많은 비난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해외와 국내의 차별적인 품질/가격//서비스와 소비자를 대하는 마인드가 매우 고압적이라는 점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동안 밝혀진 자동차 자체의 문제점들, 소극적인 리콜, 품질이나 가격의 역차별 등등이 사실임이 밝혀진 후에도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의 점유율은 상대적으로 낙폭이 적었다.(떨어지긴 했으나 밝혀진 사실들에 비하면 적다는...다분히 주관적인 의견)
왜일까?
물론 드러난 단점들이 감점 요인이긴 하지만, 그 동안 현대차가 쌓아온 신뢰가 있었던 건 아닐까?
몇가지 단점들 때문에 타사의 차를 구매했더니, 현대차에서는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단점이 등장할 가능성도 있고...
일부 반-현대차 주의자들은 여전히 현대차를 구매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는다. 잘못된 걸 뻔히 알면서도 구매해 주니까 현대차가 시정을 하지 않는 거라고. 사실로 밝혀진 것들조차 믿지 않거나 모르는 척 외면한다고.
과연 어느 쪽의 주장이 맞을까?
삼성의 갤럭시 스마트폰과 애플의 아이폰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서로가 상대방을 비방하고 자신의 장점을 자랑하면서 언쟁하기 일쑤다.
과연 맞는 주장이 있기는 한걸까?
이런 일련의 갈등에서 현명한 판단이 많이 아쉽기도 하지만,
과연 우리는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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