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23일 토요일

다양과 획일, 공감과 차이, 생각의 모순들

인간이 진화하면서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폭이 확대되어,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든가, 동물에 대한 학대가 줄어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 반대되는 현상으로, 유럽으로 유입되는 대규모의 난민에 저항하는 자국민들의 태도이다. 어찌보면 이기주의이며,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처사로 보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것에 대한 반발일 뿐, 큰 흐름은 타인과의 공감이라고 보는게 맞을 수 있겠다.

오히려 여기에 대한 더 큰 모순은, 낙태에 대한 반대 의견이다.
낙태를 찬성하는 쪽의 의견을 들어보면, 낙태를 고려한다는 것은 아이를 제대로 키울 여력이나 형편이 되지 않음을 의미하고, 이는 부모의 경제적 사회적 기반의 부족 혹은 태아의 선천적 장애가 확실시 되는 경우에 태아나 부모 모두의 행복을 위해 최선의 선택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낙태를 반대하는 의견을 들어보면, 인간이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본능적이며, 정상인들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장애인들은 불행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인간의 진화가 타인에 대한, 타 생명에 대한 공감으로 나타났다면, 그것은 타인도 어느 정도 나와 유사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가능하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자신이 장애를 가지게 된다면 그것이 얼마나 불행해 질 지를 상상하고 낙태를 찬성하자는 쪽으로 기울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닐까? 선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 났어도 아마 그들에겐 그들이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이 있을 테니까 그걸 함부로 뺏을 권리는 없다는 생각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생각은 모든 타인에 대한, 타 생명에체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나 나름의 행동양식을 모두 이해해 줘야 하는 것이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그 다양한 생각과 행동들을 가진 타자들과의 공감은 일정 부분 버려야 함을 뜻하지 않을까?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확일화에서 벗어나 다양화로 가고 있으며, 집단에서 개인으로 가고 있으며, 규칙과 제어에서 벗어나 자유로 가고 있음이 뚜렷해 보인다.

하지만 소위 인류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나'라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이기주의를 벗어나 '우리'라는 생각의 이타주의로 가야 하며, 다름이 중시되는 차별성에서 벗어나 모두가 하나라는 단일성으로 가야만 할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것은 아서 클라크의 소설 <유년기의 끝>에서 보여준 모습으로의 진화가 될런지도 모르겠다.


원래 하나였던 우주는 빅뱅이후 엄청난 속도로 공간의 팽창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런 우주 팽창의 모습은 인간 개개인들이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분화되어 가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그리고 한편으로 인간들의 이러한 다양한 분화가, 국가와 사회라는 집단의 필요성을 파과하기에 이르고 있어 보인다.
이에 반발하여 인간들 서로가 타인의 이해의 폭을 넓혀 가자는 움직임도 있는 것이며, 서로 교감하고 이해하고 뱌려하는 것이 인간의 발전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우주의 팽창처럼 다양하게 분화될 것이며, 인간들이 교감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일시적인 반발에 그치고 말 것이다.

어쩌면 빅뱅으로 인한 우주의 팽창이 멈추고 다시 하나의 점으로 수축이 진행된다면, 인간도 점점 하나의 모습으로 동일화가 진행될 것이다. 변이는 줄어들고, 사람들은 점점 비슷해져 가고, 인구는 줄어들고, 생태계의 생물 다양성도 줄어들며, 아무런 규칙이나 법률이 없어도 될 것이며, 그리고 이기주의는 물론 이타주의도 없고, 너와 나라는 구분이 모호해지고, 결국 우리는 하나의 점으로 돌아가게 되지 않겠는가.


인간이 대단한 존재인양 떠들고 있지만, 결국은 이런 우주적인 움직임에 따라 함께 변해가는 것이 뿐이며, 그걸 진화라고 부르던, 퇴보라고 부르던, 그 마저도 단지 인간끼리의 말에 불과한, 아무 의미 없는 자뻑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2016년 7월 17일 일요일

[도서] 데미안의 서문

서명 : 데미안 (Demian - Die Geschichte von Emil Sinclairs Jugend)
저자 :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
출판사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역자 : 전영애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내 이야기를 하자면, 훨씬 앞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훨씬 더 이전으로 내 유년의 맨 처음까지, 또 아득한 나의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리라.

작가들은 소설을 쓸 때 자기들이 하느님이라도 되듯 그 누군가의 인생사를 훤히 내려다보고 파악하여, 하느님이 몸소 이야기하듯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이 어디서나 핵심을 집어내어 써낼 수 있는 양 굴곤 한다. 나는 그럴 수 없다, 작가들이 그래서는 안 되듯이. 그리고 내게는 내 이야기가, 어떤 작가에게든 그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내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한 인간의 이야기, 즉 그 어떤 가공의 인물, 있을 수 있는 인물, 이상적인 인물, 어떻든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일화적인, 살아 있는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현실적으로 살아 있는 인간이란 것이 무엇인지,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혼미해져 버렸다. 그 하나하나가 자연의 단 한번의 소중한 시도인 사람을 무더기로 쏘아 죽이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이제 더 이상 단 한번뿐인 소중한 목숨이 아니라면, 우리들 하나하나를 총알 하나로 정말로 완전히 세상에서 없애버릴 수도 있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쓴다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리라.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일회적이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세계의 여러 현상이 그곳에서 오직 한번 서로 교차되며, 다시 반복되는 일은 없는 하나의 점(點)인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한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든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로우며 충분히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누구 속에서든 정신은 형상이 되고, 누구 속에서든 피조물이 괴로워하고 있으며, 누구 속에서든 한 구세주가 십자가에 매달리고 있다.

사람이란 존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느끼기는 한다. 그리고 느끼는 만큼 쉽게 죽어간다. 나도 이 이야기를 다 쓰고 나면 좀더 수월하게 죽게 될 것이다.

내 자신을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라고는 감히 부를 수 없다.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는 찾는 구도자였으며, 아직도 그렇다. 그러나 이제 별을 쳐다보거나 책을 들여다보며 찾지는 않는다. 내 피가 몸 속에서 소리내고 있는 그 가르침을 듣기 시작하고 있다. 내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 꾸며낸 이야기처럼 달콤하거나 조화롭지 않다. 무의미와 혼란, 착란과 꿈의 맛이 난다. 이제 더는 자신을 기만하지 않겠다는 모든 사람들의 삶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始原)의 점액과 알 껍질을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인간이 되라고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우리 모두는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2016년 7월 14일 목요일

[도서] 채식주의자에 대한 단상

직전에 포스팅한 <채식주의자>는 무언가 자꾸 씹히는 느낌이다.
제대로 소화되지 않고 입안에 남아서 씹히는...


나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작품들을 좋아한다.
그게 나의 모순을 건드려서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곱씹어서 그 모순을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채식주의자>는 그렇게 불편한게 아니었다.

<채식주의자>의 불편함은, 어째서 유력한 상의 수상작품이 내게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을 주는가 하는 불편함이었다.
과연 내가 느끼는 불편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문득 떠 오른 하나의 가정은, 보편성의 부족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대부분의 소설은 구체적인 주인공과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 또는 일상을 다루고 있다.
이런 구체적이고 나와는 별개로 인식되는 주인공은, 그래서 독자의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게 만들수 있으며, 충분히 독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주인공이 독자와 일체시되는 상황에서는 독자 스스로가 매우 방어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이 주인공은 개별적인 인물에서 보편적인 인물로의 투사가 되어야 한다.
이 과정이 소설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독자 스스로 투사시키게 되며, 작가는 보편적으로 투사될 수 있는 상징이나 개연성을 제공해 주곤 한다.


이러한 보편적 인물로의 투사가 중요한 이유는,
작품에서 다룬 사건이나 교훈 또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작품에서 다룬 이야기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의 이야기, 내 주변과도 전혀 관련이 없는 이야기, 우연히라도 맞닥뜨리게 될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라면?
그건 그냥 신기한 이야기로 끝날 뿐이다.


육식이 필연적으로 폭력을 수반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지만, 거식증으로까지 이어진 영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육식과 폭력에 저항하여 스스로 나무가 되어 흙과 물로만 살 수 있을거라 믿는 영혜의 생각에 어떤 보편성이 있는 것일까?
인혜 또한 영혜와 같이 사회 관습적인 폭력을 인식했다고 해도, 영혜의 극단적인 생각이 과연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겠는가?

어째서 생각이 달리고 달려서 너무 지나치게 달려가버린 그 생각을 내가 따라 잡으려 해야 한단 말인가?


아마도 이렇게 말하겠지.
가기 싫으면 안가도 된다고.
왜 싫은데 궂이 따라가려 하는냐고.

그건.....상을 줬기 때문이야.
유력한 상을 줬다는 건, 그게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거니까.
그리고 그게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고 인정하는 거니까.
그래서 본 거라고....

어쩌면 내가 오해했는지도 모르겠다.

위대한 작품은 보편성을 갖추지 않아도 되는가 보다.


가끔은 오만한 작가와 작품을 만나게 된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주 긴 설명이 필요한 그런 작품을
하지만 친절하게 설명하지도 않는다.
이해한 사람만이 느끼고 누리라는 듯이...

그럴거라면 왜 남들에게 보여주고 읽히려고 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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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생각해 보니,

작가는 인간의 본질적인 모순에 대해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끔찍한 폭력을 수반하는 육식과 육식을 하지 않고는 살아나가기 곤란한 본질적인 모순 말이다.
물론 채식만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게 인간의 본성에 적합한지는 논란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채식만으로도 충분하기에 채식주의자인 사람은 거의 보질 못했기에...

어찌할 수 없는 이 딜레마는 어쩌면 본성과 이성의 충돌이 아닐까?
결국 이성을 따르는 영혜는 인간이라는 생명의 본성을 포기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인간이 폭력적일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닐런지...

영혜의 이런 절망적인 몸부림을 보는 인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들을 나열하면서 생명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지만, 인혜야말로 본성과 이성이 충돌하는 모순을 가장 치열하게 온몸으로 부딪히는 보통 인간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여기에도 몇가지 문제는 남게 된다.
육식으로 대변되는 폭력을 사회 전반적인 구조와 관습으로까지 확대시킨 것은, 그 폭력이 본성적이라는 사실을 희미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혹은, 이 문제는 단지 인간이 만들어낸 스스로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 미화되었을 뿐이라는 간단한 결론으로 해결되지 않겠나 하는 점이다.
우리 쿨하게 인정하자. 인간도 동물의 하나다. 무언가 먹어야 하고 번식하고 생존해야 하는 거다. 스스로가 진화된 존재라는 착각에 빠져서 다른 생물과의 거리를 두려고 하지만, 단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뿐이지, 인간은 여전히 동물이다 라고...


덧붙여 마지막에 언급했던 오만한 작품에 대해서도 조금은 반성해 본다.

누군가는 치열하게 고민하고 내적 투쟁을 거쳐서 어렵게 내린 결론을, 단지 책 한권 읽는 노력으로, 혹은 전시회장을 찾는 것으로, 그렇게 쉽게 얻으려 하는 것 또한 날강도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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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분석적이긴 하지만,
이 소설이 주었던 몇가지 의문점을 마저 해소한 듯 하다.

첫번째 의문은, <채식주의자>의 마지막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

영혜가 병원 앞 정원 벤치에 가슴을 드러내고 새를 손에 쥔 채 입에 피를 뭍히고 앉아 있다.
새나 가슴은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이미 앞서 언급했지만, 과연 치열하게 육식을 거부하던 영혜가 왜 새를 날로 뜯어 먹었을까 하는 궁금증은 풀지 못했다.

나름대로 분석해 보건데, 이 부분은 영혜의 상태가 매우 불안함을 보여주어 <몽고반점>과 <나무 불꽃>에서 보여주는 영혜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함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영혜가 육식의 본능과 채식의 이성 사에에서 마지막 갈등을 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성으로써의 채식에 실패하고 본능의 육식으로 돌아간 듯이 보이는 이 장면은 <본능>과 <이성>의 갈등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인데, 앞으로 이어질 <몽고반점>은 지나칠 정도로 감각정인 상황과 행동들로 <본능>에만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며, <나무 불꽃>은 모든 본능을 철저히 거부하고 자신의 의지로 생명마저 극복하려는 <이성>의 극한을 보여준다.

작가는 인간이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과연 그 둘이 충돌했을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과연 정답은 있을 것인가? 단지 선택의 문제일 뿐이지 않겠는가?
이런 딜레마를 다룸으로써 인간의 모순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두번째 의문은, 2번째 중편인 <몽고반점>의 생뚱맞음이었다.
채식주의자가 다루고 있는 인간의 모순과는 동떨어진 지극히 감각적이고 탐미적인 이야기가 왜 여기에 들어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의문점은 첫번째 의문에 대한 답변으로 해소된다.
가장 본능적인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본능적인 모습 또한 충분히 타당하며 의미있을 보여주는 것.
양팔 저울의 한쪽을 채우기 위함이었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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