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5일 화요일

선(善), 선행(善行), being a good boy(girl)

앞선 포스팅에서 행복과 선과의 관계(?)...라기보다는 행복과 선에 대한 개인적인 인식의 문제점에 대해 다루었다.

한편으로는 고민의 일부가 풀려서 시원하기도 했지만, 풀어야 할 고민이 더 많아졌다는 문제가 생겨버렸다.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 - 사실은 강박이라고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었지만 -이 아주 뿌리 깊게 내재되어 있었던 것 같고, '착하다, 선하다, 선행'의 의미에 타인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적어도 나에겐)

하지만, 이러한 내포적 의미의 착함, 선행은 그 단어 자체가 모순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선(善)의 가치 판단은 사람/시간/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 행위의 수혜자만이 그것이 선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善)의 행위자의 판단과 수혜자의 판단이 달라질 수 있기에, 행위의 의도와 결과가 달라지곤 한다.

칸트가 말한 대로,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선의지 뿐"인 셈이다.
(칸트의 선의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 칸트의 선의지는 지고 지순한 절대적인 가치임)


간혹 선행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봉사 활동을 하는 경우들도, 정작 봉사를 받는 사람들에겐 필요하지 않은 일들이어서, 봉사 활동을 한 이들의 자기 만족을 위한 게 아니었나 싶은 경우들도 허다해 보인다. (선거철 정치인들의 봉사활동 쇼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차라리, 처음부터 누군가에게 선행을 베푼다는 교만한 생각을 버리고,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솔직한 심정으로 행한다면, 차라리 낫지 않을까 싶다.


이럴진데, 타인에 대한 선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외면하기 보다는, 모두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이기적인 선"을 자신에게 베푸는 것이야 말로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방법이 아닌가 싶다.


* 물론 이기적인 선이 타인에게 끼칠 영향을 고려해야 겠지만, 적어도 스스로의 생각에 '내가 피해를 감수한다'가 아니라 '쌍방에게 공평하다'는 판단의 수준이라면 적당하지 않겠는가?

행복과 선(善)은 일치하는가?

선(善)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믿고 있었는데, 세상을 보면 행복해 보이는 악인이 너무도 많으며, 불행해 보이는 선인이 도 너무나 많다.

어째서 세상은 내 믿음과 이리도 다른 것일까?

과연 행복과 선은 관련이 있기나 한 것일까?



따지고 보면, 선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믿음은 어린 시절의 동화책이나 어른, 스승들의 은근한 가르침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동화책에 자주 등장하는 얘기들은, 좀 모자르고 어수룩해도 마음이 착해서 선행을 하는 사람은 결국에 복을 받게 된다는 식의 권선징악적인 얘기들이 많았다.
아마도 어른들과 스승들의 이야기도 딱히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어린 시절의 동화책과 어른들은 선과 행복을 함께 엮었을까?
그럴만한 타당한 근거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숨겨진 의도가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당시에도 세상에선 선한 것과 행복이 여간해서 함께 어울리지 못했기에 그걸 바라는 열망에서 그랬던 것일까?



얼마전, 아버지께선 내게 한편의 동영상을 권하셨다.

모대학 교수의 인문학 강의 일부분 이었는데, 그 일부의 소제목은 '행복한 사람을 곁에 두라'는 정도였던 것 같다.
동영상을 보면서 언젠가 회사 화장실에서 보았던 격언이 기억났다.
불행한 사람을 멀리하고, 행복한 사람을 가까이 하라. 불행은 전염병과 같아서 주위에 불행한 사람이 있으면 너마저 불행의 구덩이로 끌어들일 것이다.....라는 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행복한 사람 근처에 있으면 자신도 행복해진다는 것이나, 불행한 사람 근처에 있으면 자신도 불행해 진다는 것에 대한 근거는....어떤 학자가 조사했다는 통계였다.

일정한 수 이상의 집단을 조사하고, 그 구성원의 행복 여부와 그들이 맺고 있는 인간 관계를 그려보니, 행복한 사람간의 관계와 불행한 사람간의 관계가 두드러지게 구별된다는 것이었다.

이쯤 듣고 보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과연 행복은 무엇이길래 설문조사 한 문항으로 행복/불행을 단정할 만큼 명백하게 나뉠 수 있었을까?
과연 그들이 답한 행복/불행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생각하는 행복/불행의 기준은 무엇이며, 그들과 과연 일치할 것인가?


너무도 추상적인 혹은 자의적이며 주관적인 "행복"을 수량화된 통계로 이끌어냈다는 것에 대해, 그 동영상에 대한 신뢰도는 한낱 장터의 약장수소리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추락해버렸다.



이 포스팅의 제목이었던, "행복은 선과 일치하는가?"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행복'이 과연 무엇이길래, 또한 '선'이 무엇이길래 그것의 연관성을 찾고있었던 걸까?

'행복'이 물질적인 풍요를 의미한다고 정의한다면,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행복'해지는 방법이 될 것이다.

'행복'이 마음의 평화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욕심을 버리고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행복'이 주위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라면, 주위 사람들에게 베풀고, 자주 왕래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행복'의 의미는 언제나 달라질 수 있으며, 그 부여된 의미에 따라 '행복'해 지는 방법도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찌 보면, '행복'해 지기 위한 모든 방법들이 바로 '선(善)'한 행동이 아닐까?

즉,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이라면 그건 언제나 (나에게는) '선'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단지, 내게 '선'한 행위가 타인에게 '악'한 행위인 경우가 있을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조절만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애초에 이 의문을 가지고 있던 내 머리속에는 모순이 존재했음을 알게 되었다.

'행복'은 주관적인 것이며 자의적인 것이다.
따라서 타인의 기준이 어떤지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나만 만족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기저에 나를 배제하고 타인을 위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선'한 행위라고 생각하고 행했던 행위들에 대해서는 최종적으로 타인의 승인을 얻어야만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이고, 결국 '선'의 기준은 주관적일 수 없는 한계를 지녔던 것이다.

'행복'의 기준은 내가 정하지만, '선'의 기준은 타인이 정하는데, 어떻게 행복과 선이 일치할 수 있겠는가?

이 모순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선'에 대한 의미를 바꾸어서 <나를 배제하고 타인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나를 먼저 위하는 것>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언제나 행복과 선은 당연히 일치하게 된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하는 모든 행위는 그것이 바로 선한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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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찾아보니 비슷한 주제로 고민한 사람들이 있던데, 시간이 날 때 제대로 읽어 봐야겠다.
http://peterlevine.ws/?p=9815
참고로 검색한 키워드는 happiness and goodness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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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4일 월요일

인간은 모순의 존재?

가까이 지내는 친구 C와 L이 만난 자리에서의 이야기다.

특히 C와는 서로 통하는 바가 많아서인지 많은 주제로 대화를 나누곤 한다.
종교나 철학적인 주제에 대해 관심이 일치하는 바도 그렇고 방향이 비슷하기도 해서 자연스레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살짝 취기가 올라서, C가 약간 수다스러워지며 꺼낸 주제가, 40대 중반을 지나며 맛있는 음식에 대한 탐닉이 우려스럽다는 것이었다.

이제 중고등학생인 자녀들은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는 것에 반해서 자신이 너무 말초적인 감각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었나 하고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주제로 대화가 오간 뒤에 C가 다시 꺼내든 주제는, 자신에게 미적인 감각이 부족하여 자신의 스타일을 가꾸는 것에 참 어색하고 서투르다는 것이었다.
단적으로, 자신이 입는 옷들은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지금은 와이프가 골라주는 것을 그대로 입는다는 것이었으며, 유심히 살펴보면 멋을 부리지 않은 듯 하지만, 참 자신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가만히 듣던 나는, C에게 질문을 했다.
앞서 음식에 대한 탐닉의 절제를 얘기했던 것과, 이제 외모에 대한 추구를 얘기하는 것이 서로 양립하는 것 아니냐고.

사실은 그 두개의 주제를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C의 의견이 일견 모순된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달리보면 전혀 다른 주제가 될 수도 있으므로 양립 여부를 따질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쉽게는 음식에 대한 얘기와 의복에 대한 얘기로 전혀 다를 수 있다.
혹은 음식에 탐닉하는 것은 기본적인 욕구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외모에 대한 것은 타인에게 비춰지는 것을 의식한, 좀 더 고차원적인(?) 욕구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전혀 다른 주제에 대한 얘기로 받아 들일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넓게 보면, 의.식.주라는 기본적인 생존과 관련된 주제로도 묶을 수 있으며, 물질과 정신으로 나눌 때 물질에 속하는 영역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기도 한다.
(내가 C와 나누던 관심의 분야가 주로 세속적인 것을 가벼이 보고, 탈속을 추구했기에 그러했다.)

사실 C가 음식에 대한 탐닉을 경계해야 겠다고 할 때에만 해도, 그가 감각적인 것을 경계하고 영적인 것을 추구해야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뒤이어 외모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날개를 달고 인간계를 떠나서 올라가던 그가, 바로 추락해서 저잣거리를 배회하는 듯한 모습에 실망감을 느꼈던 것 같다.

결국은 그가 영적인 것, 성(聖)적인 것을 추구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식욕, 성욕, 수면욕이라는 기본적인 욕구가 만족되자 명예욕, 권력욕과 같은 사회적 욕구를 추구했던 것인가 하는 생각에 씁쓸해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보다 더 우울해 진 건, 나의 질문에 대한 C의 반응이었다.
그는 나의 질문이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관념적인 것이라는 진단을 했던 것이다.
이전에도 몇번 이런 답을 들은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한번은 대체 그 관념적이란 게 무엇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는데, 그의 대답도 명확하진 않았다. 모호하게도 그는 직접 겪어보면 알게 될 것이라고 얘기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는 "음식의 탐닉에 대한 경계"에 대해 내 생각을 말한 것이 아니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의 추구"에 대해 내 생각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 두가지 주제가 가지고 있는 상반된 면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두가지 주제는 모두 그의 경험과 생각에서 나온 것이리라.


이번에도 나는 그에게 대체 생각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더불어 옆에서 함께 듣고 있던 L을 객관적인 관찰자이며 증인으로 삼아서...

잠시 고민하던 C는 영화 <밀양>에서 주제로 다루고 있는 "용서"를 예로 들어 설명하려고 했다. 용서라는 단어를 아는 것과 그것을 행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

하지만, 이 영화의 예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은 그도 나도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가 나의 질문에 대한 관념적인 것이라는 진단을 내리기 보다는, 자신의 주장들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한다.



인간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인 욕구라는 식욕, 성욕, 수면욕 조차도, 그 욕구를 해소하는 방법은 사회적으로 용인된 방법을 통해서 채워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또한 사회적인 욕망은 타인에 의해서 심어진 경우가 많다고 본다.
부모나 친척, 이웃과 또래의 친구들로부터....

인간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높은 곳과 큰 소리는 동물이 가지는 기본적인 두려움이라고 한다.

그 외에 사회적인 규범이라는 명목하에, 개개인을 사회의 틀에 맞추기 위해 가해지는 두려움도 있다.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은 온전히 자신의 경험에만 의존하여 차곡 차곡 쌓인게 아니다.

주위의 관계로부터 주입된 것들이 아무런 체계나 근거도 없이 무작위로 혼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욕망과 욕망 사이에 모순이 존재할 수 있음은 당연하다.

두려움과 두려움 사이의 모순도 그러하다.

욕망과 두려움 또한 마찬가지로 모순이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의 모순을 발견하기란 너무나 어렵다.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겨우 볼 수 있으며, 그나마도 대부분의 경우는 자신의 모순이 비춰지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바로 외면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