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개인 또는 민족, 나아가 인류가 발전을 위해 잘못된 것을 고쳐나갈 때에는
반드시 왜 그것이 잘못되었던 것인지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한다.
잘못된 옛것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며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잘못되었음에도 만들어지고 유지된 이유에 대해서 알아야만,
변증법의 무한 반복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2013년 9월 30일 월요일
2013년 9월 22일 일요일
현실과 꿈 속의 나
"나"라는 인식,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분별을 만들고 분별이 고통을 만든다....고 한다.
문득, 꿈에 대한 많은 이들의 인식, 혹은 어렴풋한 나 자신의 느낌으로 보건데,
현실과 꿈은 서로를 비추는 반영이기도 하면서 간혹 영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신비로운 현상이다.
계시적인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프로이트의 꿈에 대한 해석이 아직은 정설처럼 받아들여 지고 있다.
따라서 현실의 반영도 당연한 현상이며 현실과는 정 반대되는 꿈도 당연한 현상이 된다.
이런 결과는 종종 무의식의 반영으로 해석되기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한편으로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도 따져보면 모호하기 짝이 없지 아니한가?
무의식은 제쳐두고라도, 의식이라도 뚜렷하게 정의하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정신적인 활동 가운데 의식을 제외한 것이 무의식이요, 무의식을 제외한 것이 의식이라 설명하는 것이 부족하나마 정확한 설명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정신적 활동을, 그 범위를 정의할 수 없다면 이 또한 결국은 같은 모호함일 뿐이다.
이야기가 또 옆으로 새었으니 다시 본 주제로 돌아와보자.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고, 무의식 또한 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과연 무의식이 무엇인지, 무의식을 포함하고 있는 기저의 마음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방법으로, 꿈과 현실에서의 차이를 비교하면 되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나"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면,
꿈 속에서 "나"를 인식 하고 있는지, 꿈 속에서의 "나"는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그 인식을 감시하고 관찰하는 것은 "무엇"인지 쫓아가면 되지 않을까?
문득, 꿈에 대한 많은 이들의 인식, 혹은 어렴풋한 나 자신의 느낌으로 보건데,
현실과 꿈은 서로를 비추는 반영이기도 하면서 간혹 영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신비로운 현상이다.
계시적인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프로이트의 꿈에 대한 해석이 아직은 정설처럼 받아들여 지고 있다.
따라서 현실의 반영도 당연한 현상이며 현실과는 정 반대되는 꿈도 당연한 현상이 된다.
이런 결과는 종종 무의식의 반영으로 해석되기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한편으로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도 따져보면 모호하기 짝이 없지 아니한가?
무의식은 제쳐두고라도, 의식이라도 뚜렷하게 정의하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정신적인 활동 가운데 의식을 제외한 것이 무의식이요, 무의식을 제외한 것이 의식이라 설명하는 것이 부족하나마 정확한 설명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정신적 활동을, 그 범위를 정의할 수 없다면 이 또한 결국은 같은 모호함일 뿐이다.
이야기가 또 옆으로 새었으니 다시 본 주제로 돌아와보자.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고, 무의식 또한 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과연 무의식이 무엇인지, 무의식을 포함하고 있는 기저의 마음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방법으로, 꿈과 현실에서의 차이를 비교하면 되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나"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면,
꿈 속에서 "나"를 인식 하고 있는지, 꿈 속에서의 "나"는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그 인식을 감시하고 관찰하는 것은 "무엇"인지 쫓아가면 되지 않을까?
2013년 9월 20일 금요일
인간의 자기 인식
영화 [매트릭스]에서,
스미스 요원이 모피어스를 심문하는 중,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 자기 존재를 인식하는 것 같아."
[매트릭스2:리로디드]에서,
아키텍트가 네오에게 매트릭스에 관해 설명하던 중,
"인간은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선택할 권리가 주어지는 걸 선호하더군. 그게 무의식적인 선택이라도 말이야"
스미스 요원이 모피어스를 심문하는 중,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 자기 존재를 인식하는 것 같아."
[매트릭스2:리로디드]에서,
아키텍트가 네오에게 매트릭스에 관해 설명하던 중,
"인간은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선택할 권리가 주어지는 걸 선호하더군. 그게 무의식적인 선택이라도 말이야"
곰스크로 가는 기차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 대한 감상이,
문득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곰스크>는 꿈이고 이상이며 마음에 간직한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것이었다.
처음 이 작품을 접했을 당시엔 남성과 여성의 인생관에 대한 작품이라 생각했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는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선뜻 결정을 하지 못하는 인간의 딜레마에 대한 작품이라 생각을 했다.
혹자는 <곰스크>를 상징적인 대명사로 사용하며,
서로의 "곰스크"를 묻고, 점점 잊혀져가는 자신의 "곰스크"에 우울해하기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그가 <곰스크>에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해 보았다.
과연 곰스크는 그가 기대한 대로, 혹은 그 이상 이었을까? 아니면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까?
아니, 기대 이상이라 한들, 그는 곰스크에 만족하고 거기에 정착했을까?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곰스크>는 도달할 수 없는 [저기]에 존재하는 무엇이었다. [여기]가 아니란 말이다.
여자는 [여기]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곳이라고 남자를 설득하고 붙잡았지만,
남자는 [여기]는 불충분한 곳이며 [저기]만이 충분할거라 생각한다.
그 남자는 끊임없이 행복을 쫓지만 행복해 질 수 없는 불행한 존재였으며,
그 여자는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도 그 순간의 행복을 찾아 누리는 존재였던 것이다.
문득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곰스크>는 꿈이고 이상이며 마음에 간직한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것이었다.
처음 이 작품을 접했을 당시엔 남성과 여성의 인생관에 대한 작품이라 생각했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는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선뜻 결정을 하지 못하는 인간의 딜레마에 대한 작품이라 생각을 했다.
혹자는 <곰스크>를 상징적인 대명사로 사용하며,
서로의 "곰스크"를 묻고, 점점 잊혀져가는 자신의 "곰스크"에 우울해하기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그가 <곰스크>에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해 보았다.
과연 곰스크는 그가 기대한 대로, 혹은 그 이상 이었을까? 아니면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까?
아니, 기대 이상이라 한들, 그는 곰스크에 만족하고 거기에 정착했을까?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곰스크>는 도달할 수 없는 [저기]에 존재하는 무엇이었다. [여기]가 아니란 말이다.
여자는 [여기]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곳이라고 남자를 설득하고 붙잡았지만,
남자는 [여기]는 불충분한 곳이며 [저기]만이 충분할거라 생각한다.
그 남자는 끊임없이 행복을 쫓지만 행복해 질 수 없는 불행한 존재였으며,
그 여자는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도 그 순간의 행복을 찾아 누리는 존재였던 것이다.
우리가 배운건 현실이 아니라 꿈 이었다.
내가 태어나고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많은 걸 가르쳐 주었지.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학교에 다니면서 선생님들에게서 많은 걸 배웠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 난 기쁨과 혼란을 함께 겪었어.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의 막연함과 답답함이 그 실체를 겪으면서 해소되었기에 기뻤고,
한편으로는 배움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로 인해 혼란스러웠지.
하지만 혼란스러움을 기쁨으로 메우기도 하고,
이 혼란스럼움 또한 배움이 커지면 다른 기쁨이 될 것으로 믿었지.
이젠, 더 이상 혼란스럽지도 않고 더 이상 기뻐하지도 않아.
그리고 사회에 발을 내디딘 그 초년생의 혼란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어.
우리가 자라면서 배운 많은 이론과 학문과 가름침들은,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가르쳐 준 게 아니라,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꿈을 가르쳐 준거였어.
모두가 꿈은 아니었지만,
꿈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에 있는 것들은 우리가 배운 것과 많이 흡사했고,
꿈과 다르게 되어 가는 것들은 우릴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거지.
그래서,
정의가 승리하는 게 아니라 승리한자가 정의가 되는 것이고,
착한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은 사람이 착한 사람이 되는 거고,
노력한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한 사람의 노력만이 인정받는 거고,
꿈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진 꿈만이 전해지는 것이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학교에 다니면서 선생님들에게서 많은 걸 배웠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 난 기쁨과 혼란을 함께 겪었어.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의 막연함과 답답함이 그 실체를 겪으면서 해소되었기에 기뻤고,
한편으로는 배움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로 인해 혼란스러웠지.
하지만 혼란스러움을 기쁨으로 메우기도 하고,
이 혼란스럼움 또한 배움이 커지면 다른 기쁨이 될 것으로 믿었지.
이젠, 더 이상 혼란스럽지도 않고 더 이상 기뻐하지도 않아.
그리고 사회에 발을 내디딘 그 초년생의 혼란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어.
우리가 자라면서 배운 많은 이론과 학문과 가름침들은,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가르쳐 준 게 아니라,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꿈을 가르쳐 준거였어.
모두가 꿈은 아니었지만,
꿈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에 있는 것들은 우리가 배운 것과 많이 흡사했고,
꿈과 다르게 되어 가는 것들은 우릴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거지.
그래서,
정의가 승리하는 게 아니라 승리한자가 정의가 되는 것이고,
착한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은 사람이 착한 사람이 되는 거고,
노력한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한 사람의 노력만이 인정받는 거고,
꿈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진 꿈만이 전해지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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