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기가 어렵다.
늘상은 아니더라도 가끔 넘어지고, 다치고, 까지고, 아프다.
그러면 슬프고 우울해지고 불행해진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누군가는 남들보다 더 나은 것을 행복으로, 누군가는 거침없는 자유를 행복으로 바랄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기본적인 행복의 시작은 불행의 제거가 아닐까 싶다.
실수하고, 그래서 미움받고 따돌림 당하고 위축되어 뒤쳐지고,
같은 일도 힘이 들어서 잘 하지 못하거나 하기를 주저하게 되어, 결국 실망하고 포기하고,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잘 하는게 뭔지 몰라서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만 하는 주변인이 되고,
이 모든 것들이 충분히 연습하고 반복해서 익숙해지면 극복이 되는 걸까.
그래서 이윽고 실수가 줄어들고 남들만큼 잘 하게되면 불행은 없어지는 걸까.
그럼 나는 두번의 삶을 살아야 하는걸까.
예습의 삶을 한번 살아야 행복해지는 걸까.
아니면,
실수하고, 그래서 미움받고 따돌림 당해도,
잘하지 못해서 실망스러워도,
인싸가 되지 못해도,
그래도 행복한 방법은 따로 있는 걸까.
2019년 4월 3일 수요일
2019년 3월 20일 수요일
용기와 뻔뻔함이 동의어?
참 뜬금 없게도 취업의 기회가 왔다.
과연 이게 무슨 경우일지 의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취업을 위한 인터뷰를 볼 의향이 있느냐는 식의 이메일을 받았다.
아마도 일반적인 경력직을 채용하는 절차로 보였고, 나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는 상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조만간 생계에 어려움이 예상되고 있어 초조하던 차에 정말 좋은 기회가 온 것이었다.
무조건 채용하는 것이 아니니 험난한 면접의 과정이 있겠지만...
그리고 사전 전화 통화 일정을 잡고, 이력서를 보내는 중에 많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제 아무리 글로벌 기업이라고 할지라도, 일하는 사람들은 다 우리나라 사람들.
그들 모두의 마인드마저 글로벌하리라 생각하는 건 무리였다.
글로벌 기업에서 일하면서 모든 사고방식이 글로벌해진다면, 그들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해서, 혹은 주말에 가족과 보내면서도 글로벌한 마인드로 생활하겠는가?
결국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한국인이다.
그런 한국인의 선입견, 관습, 사회적인 편견은 피하기 어렵다.
이제 중년의 나이로 입사를 해서, 한참 젊은 이들과 거리낌 없이 생활을 해야 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나의 편견은 나의 문제이고 내가 극복해야 하는 문제겠지만, 그들이 바라 볼 나의 모습에 대한 편견은 내가 어쩔 수 없는 문제다.
사실 그런 모든 편견만이 두려운건 아니다.
그게 편견의 문제를 넘어 실제로 현실적인 나의 문제가 되리라는 것이 더 두려웠다.
그래 그 편견들이 현실로 증명되는 것을...
어쩌면 굉장한 민폐가 아닐까 싶었다.
아직 취업이 결정된 것도 아니고, 인터뷰를 보지도 않았으니, 김치국부터 마시는게 아니겠냐고 하겠지만...
취업이 된 후도 걱정이지만, 취업의 과정에서 일일이 누군가의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아가며 인터뷰를 진행하게 하는 것이 큰 민폐가 아닐까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아니면 누군가 한명이 더 취업할 수 있으며, 누군가 한명이 더 인터뷰를 볼 여지가 있지 않겠는가.
사실 난 용기가 필요했다.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능력의 한계를 다 쓸 수 있는 용기,
지금과 같은 나태함이나 여유를 과감하게 버리고 스트레스를 버텨낼 용기,
내 자신의 편견과 세상의 편견에 의연해질 용기,
그리고 나 자신의 부족함을 마주 볼 용기.
종종 사회 초년생이나 취준생들에게 이런 비슷한 식의 용기를 요구하거나 북돋우기도 하는데, 과연 이게 용기일까?
어쩌면 이건 용기가 아니라 뻔뻔함이 아닐까?
능력도 없으면서 열심히 하겠다고 말하는 뻔뻔함.
할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할 수 있다고 소리치는 뻔뻔함.
그리고 안좋은 결과에 대해서는 최선은 다했다고 말하는 뻔뻔함.
결국 뻔뻔해질 용기였던 걸까?
어쩌면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인간상은 너무나 완벽하고 무결이었던게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이 자랑하는 그들의 결과물을 속으로 비웃고 있었으며, 나 자신도 그럴 수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부끄러워했으며, 나 자신의 실수가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결국 잘못된 것은 나의 능력도 아니고, 사람들의 시선이나 편견도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잘못된 기준점(?)에서 비롯되었던 것이 아닐까?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야.
아주 잘났다고 하는 인간도 극히 일부의 분야에서, 아주 짧은 시간동안만 그 빛을 발할 뿐이고, 그 분야와 시간을 벗어나고나면 그저 다르게 생기고 다르게 생각하는 한명의 사람일 뿐.
과연 이게 무슨 경우일지 의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취업을 위한 인터뷰를 볼 의향이 있느냐는 식의 이메일을 받았다.
아마도 일반적인 경력직을 채용하는 절차로 보였고, 나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는 상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조만간 생계에 어려움이 예상되고 있어 초조하던 차에 정말 좋은 기회가 온 것이었다.
무조건 채용하는 것이 아니니 험난한 면접의 과정이 있겠지만...
그리고 사전 전화 통화 일정을 잡고, 이력서를 보내는 중에 많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제 아무리 글로벌 기업이라고 할지라도, 일하는 사람들은 다 우리나라 사람들.
그들 모두의 마인드마저 글로벌하리라 생각하는 건 무리였다.
글로벌 기업에서 일하면서 모든 사고방식이 글로벌해진다면, 그들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해서, 혹은 주말에 가족과 보내면서도 글로벌한 마인드로 생활하겠는가?
결국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한국인이다.
그런 한국인의 선입견, 관습, 사회적인 편견은 피하기 어렵다.
이제 중년의 나이로 입사를 해서, 한참 젊은 이들과 거리낌 없이 생활을 해야 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나의 편견은 나의 문제이고 내가 극복해야 하는 문제겠지만, 그들이 바라 볼 나의 모습에 대한 편견은 내가 어쩔 수 없는 문제다.
사실 그런 모든 편견만이 두려운건 아니다.
그게 편견의 문제를 넘어 실제로 현실적인 나의 문제가 되리라는 것이 더 두려웠다.
그래 그 편견들이 현실로 증명되는 것을...
어쩌면 굉장한 민폐가 아닐까 싶었다.
아직 취업이 결정된 것도 아니고, 인터뷰를 보지도 않았으니, 김치국부터 마시는게 아니겠냐고 하겠지만...
취업이 된 후도 걱정이지만, 취업의 과정에서 일일이 누군가의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아가며 인터뷰를 진행하게 하는 것이 큰 민폐가 아닐까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아니면 누군가 한명이 더 취업할 수 있으며, 누군가 한명이 더 인터뷰를 볼 여지가 있지 않겠는가.
사실 난 용기가 필요했다.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능력의 한계를 다 쓸 수 있는 용기,
지금과 같은 나태함이나 여유를 과감하게 버리고 스트레스를 버텨낼 용기,
내 자신의 편견과 세상의 편견에 의연해질 용기,
그리고 나 자신의 부족함을 마주 볼 용기.
종종 사회 초년생이나 취준생들에게 이런 비슷한 식의 용기를 요구하거나 북돋우기도 하는데, 과연 이게 용기일까?
어쩌면 이건 용기가 아니라 뻔뻔함이 아닐까?
능력도 없으면서 열심히 하겠다고 말하는 뻔뻔함.
할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할 수 있다고 소리치는 뻔뻔함.
그리고 안좋은 결과에 대해서는 최선은 다했다고 말하는 뻔뻔함.
결국 뻔뻔해질 용기였던 걸까?
어쩌면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인간상은 너무나 완벽하고 무결이었던게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이 자랑하는 그들의 결과물을 속으로 비웃고 있었으며, 나 자신도 그럴 수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부끄러워했으며, 나 자신의 실수가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결국 잘못된 것은 나의 능력도 아니고, 사람들의 시선이나 편견도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잘못된 기준점(?)에서 비롯되었던 것이 아닐까?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야.
아주 잘났다고 하는 인간도 극히 일부의 분야에서, 아주 짧은 시간동안만 그 빛을 발할 뿐이고, 그 분야와 시간을 벗어나고나면 그저 다르게 생기고 다르게 생각하는 한명의 사람일 뿐.
2019년 3월 6일 수요일
나에게서 벗어나면 조금 더 행복해질까
유튜브에서 음악을 한 곡 들었다.
그리고 그 음악을 듣고 사람들이 쓴 댓글을 보았다.
누군가의 댓글.
'A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나의 ??때가 생각난다. 그때의 나는 어쩌구 저쩌구....'
그 댓글을 보면서 나랑 비슷하구나, 혹은 나는 이랬었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참으로 많이, 자주, 모든 타인들의 사건, 사고, 행위, 말, 생각, 느낌을 듣거나 보면서, 거기에 나를 대입시켜 보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지독하게 나에 대해 집착하고 있는건 아닐까 싶다.
그런 대입으로 나는 종종 나 자신을 연민하고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고 싶어지기도 하며 긍지를 얻고 자신감을 가지며 뽐내고 싶어지기도 한다.
정작 나 자신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나 자신이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이 말이다.
결국 나는 현실의 내가 싫어서, 나를 증오하는 대신 현실을 증오하고, 타인의 이야기나 매스미디어의 꾸며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위로하기만 한다.
하지만 한발만 밖으로 내디뎌도 현실은 심비오트처럼 내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나는 이내 절규하면서 나만의 공간으로 숨어버린다.
현실과 정신의 분리된 상황은, 정신의 위로만으로 안도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끈질긴 현실에 의해 언제나 침범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공존하는 불안정한 상태이다.
이젠 정신승리만으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처절하게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궁극적으로 현실과 완전히 합체하여 끊임없이 받는 상처를 치료하고 아물기를 반복하며 살아가거나, 얄팍한 자기 위로를 넘어서는 깊은 각성이 필요하다.
흔히들 명상하고 수행하고 각성하고 깨달음을 얻기를 원하지만, 구체적으로 그게 무엇인지 실체는 모르고 있는 듯 하다.
나라고 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인간들의 왜 그것을 원하는지는 어렴풋이 알겠다.
아니, 내가 왜 오랜 세월동안 그것을 원했는지 이제는 조금 알겠다.
난 어리석으며, 사람들과 어울려 삶으로써 발생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몰랐고, 내 마음의 두려움과 슬픔과 괴로움 외로움이 싫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의 두려움과 슬픔 괴로움과 외로움을 조금은 덜어낼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건, 나에게서 나를 조금 덜어내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음악을 듣고 사람들이 쓴 댓글을 보았다.
누군가의 댓글.
'A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나의 ??때가 생각난다. 그때의 나는 어쩌구 저쩌구....'
그 댓글을 보면서 나랑 비슷하구나, 혹은 나는 이랬었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참으로 많이, 자주, 모든 타인들의 사건, 사고, 행위, 말, 생각, 느낌을 듣거나 보면서, 거기에 나를 대입시켜 보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지독하게 나에 대해 집착하고 있는건 아닐까 싶다.
그런 대입으로 나는 종종 나 자신을 연민하고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고 싶어지기도 하며 긍지를 얻고 자신감을 가지며 뽐내고 싶어지기도 한다.
정작 나 자신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나 자신이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이 말이다.
결국 나는 현실의 내가 싫어서, 나를 증오하는 대신 현실을 증오하고, 타인의 이야기나 매스미디어의 꾸며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위로하기만 한다.
하지만 한발만 밖으로 내디뎌도 현실은 심비오트처럼 내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나는 이내 절규하면서 나만의 공간으로 숨어버린다.
현실과 정신의 분리된 상황은, 정신의 위로만으로 안도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끈질긴 현실에 의해 언제나 침범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공존하는 불안정한 상태이다.
이젠 정신승리만으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처절하게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궁극적으로 현실과 완전히 합체하여 끊임없이 받는 상처를 치료하고 아물기를 반복하며 살아가거나, 얄팍한 자기 위로를 넘어서는 깊은 각성이 필요하다.
흔히들 명상하고 수행하고 각성하고 깨달음을 얻기를 원하지만, 구체적으로 그게 무엇인지 실체는 모르고 있는 듯 하다.
나라고 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인간들의 왜 그것을 원하는지는 어렴풋이 알겠다.
아니, 내가 왜 오랜 세월동안 그것을 원했는지 이제는 조금 알겠다.
난 어리석으며, 사람들과 어울려 삶으로써 발생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몰랐고, 내 마음의 두려움과 슬픔과 괴로움 외로움이 싫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의 두려움과 슬픔 괴로움과 외로움을 조금은 덜어낼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건, 나에게서 나를 조금 덜어내는 것이 아닐까.
2019년 3월 1일 금요일
[상상] 인간의 본질
우연히 유튜브에서 게임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았는데, 제목은 SOMA.
지구가 소행성과의 충돌로 인간들이 모두 전멸한 가운데, 인간의 의식을 디지털로 보관하던 연구의 성과로 지구에 남은 건, 일부 인간들의 의식과 이를 행동에 옮길 수 있게 만들어진 로봇. 마지막에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기 위한 지구 엑소더스...
이 영상을 보면서, 예전에 이현세님의 만화 아마겟돈이 떠 올랐다.
그 만화의 줄거리는 생각나지 않는데(ㅠ.ㅠ), 흥미로운 가설을 전제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던 기억은 난다.
지적 존재가 우주의 여러 행성에 실험적으로 생명을 배양하고 그 생명체들이 행성에서 어떻게 생존해 나가는지 관찰하고 있는데, 지구에서는 공룡과 인간이 그 실험적인 생명체의 대표적인 예라고...
개인적으로는, 일부의 인간들이 강력하게 믿는 "영혼"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입장인데, 한편으로는 영혼이 존재한다는 증거들이 있어서 참 곤란해하곤 한다.
물론 "영혼"이 있다는 것을 반박할만한 증거는 더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건 마치 빛이 파동이냐 입자냐의 논쟁과도 유사해 보인다.)
만약 위에서 소개한 SOMA와 비슷한 예를 들어서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 설명하면 어떨까?
가령 진보한 지적 존재가 자신들의 의식을 우주에 퍼뜨려 나가던 중에, 지구에서는 인간이라는 종에게 심어진 것이 현재의 인간들을 만들어 냈다고.
인간이 본래 타고난 본성과 신체적인 제약의 문제로 인해서, 심어진 의식들은 꽤 많이 방해를 받거나 100% 발현할 수 없는데, 간혹 돌연변이처럼 인체의 제약을 풀어낸 인간들이 나타나면서 과학 기술들이 급격한 발전을 하게 되었다고.
일부의 인간들은 이 의식들의 힘에 이끌려 자신을 각성시키는 수행법을 찾기 위해 고된 수행을 하지만, 이를 해낸 인간은 극소수이며, 오히려 실패하여 비참한 결과를 맞는 경우가 많아 대대적인 의식의 각성은 억제되고 있다.
인간들이 어렴풋이 느끼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고민은, 이처럼 인간의 신체와 의식이 서로 다른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잘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상태와 비슷한 것.
한편, 신체의 주인인 인간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의식들은 오히려 연가시와 같은 기생충이며, 인간들의 일평생을 지배하고 노예처럼 부리는 악질적인 존재이다.
이 의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유일하게 인간 자신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며,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방법이다.
지구가 소행성과의 충돌로 인간들이 모두 전멸한 가운데, 인간의 의식을 디지털로 보관하던 연구의 성과로 지구에 남은 건, 일부 인간들의 의식과 이를 행동에 옮길 수 있게 만들어진 로봇. 마지막에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기 위한 지구 엑소더스...
이 영상을 보면서, 예전에 이현세님의 만화 아마겟돈이 떠 올랐다.
그 만화의 줄거리는 생각나지 않는데(ㅠ.ㅠ), 흥미로운 가설을 전제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던 기억은 난다.
지적 존재가 우주의 여러 행성에 실험적으로 생명을 배양하고 그 생명체들이 행성에서 어떻게 생존해 나가는지 관찰하고 있는데, 지구에서는 공룡과 인간이 그 실험적인 생명체의 대표적인 예라고...
개인적으로는, 일부의 인간들이 강력하게 믿는 "영혼"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입장인데, 한편으로는 영혼이 존재한다는 증거들이 있어서 참 곤란해하곤 한다.
물론 "영혼"이 있다는 것을 반박할만한 증거는 더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건 마치 빛이 파동이냐 입자냐의 논쟁과도 유사해 보인다.)
만약 위에서 소개한 SOMA와 비슷한 예를 들어서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 설명하면 어떨까?
가령 진보한 지적 존재가 자신들의 의식을 우주에 퍼뜨려 나가던 중에, 지구에서는 인간이라는 종에게 심어진 것이 현재의 인간들을 만들어 냈다고.
인간이 본래 타고난 본성과 신체적인 제약의 문제로 인해서, 심어진 의식들은 꽤 많이 방해를 받거나 100% 발현할 수 없는데, 간혹 돌연변이처럼 인체의 제약을 풀어낸 인간들이 나타나면서 과학 기술들이 급격한 발전을 하게 되었다고.
일부의 인간들은 이 의식들의 힘에 이끌려 자신을 각성시키는 수행법을 찾기 위해 고된 수행을 하지만, 이를 해낸 인간은 극소수이며, 오히려 실패하여 비참한 결과를 맞는 경우가 많아 대대적인 의식의 각성은 억제되고 있다.
인간들이 어렴풋이 느끼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고민은, 이처럼 인간의 신체와 의식이 서로 다른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잘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상태와 비슷한 것.
한편, 신체의 주인인 인간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의식들은 오히려 연가시와 같은 기생충이며, 인간들의 일평생을 지배하고 노예처럼 부리는 악질적인 존재이다.
이 의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유일하게 인간 자신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며,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방법이다.
2019년 2월 23일 토요일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Clouds of Sils Maria)
친구들과 모임. 수많은 얘기들. 음식과 술, 산책...
겨울답지 않은 따뜻한 날씨와 깨끗한 공기, 온화하다.
가장 친한 친구가 선을 넘었다는 생각을 했다.
다분히 공격적이라 느꼈다. 아니, 당시에는 그도 나도 공격하거나 공격받지 않았을지도...
지나고 보니, 내 기준에서는 공격이었다.
난 수비적이었고, 막아내기 바빴으며, 완전히 막아내지도 못했다.
아마도 변명 투성이었을 것이며, 그건 간단히 해결할 수도 있었다.
'오케이, 그럴께' 혹은 '그렇게 해보지'라는 말로...하지만 거짓말을 하긴 싫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러모로 생각해봐도 어처구니 없는 황당한 요구였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의 대사처럼 '인간에게 인간 이상의 것을 바라지 말아라'고 말해 줬어야 하는걸까?
과연 어찌해야 할까?
결국은 이렇게 멀어지고 다시 각자의 삶을 보면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들으며 살것인가?
아니면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그냥 다시 만나면 미소짓고 예전처럼...하지만 속마음은 예전같을 수 없는...?
그의 지적처럼 나는 결국 그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 센 늙은이가 되어가는 것이며, 결코 달라지지도 발전하지도 않을 것인가?
어쩌면 그는 아무렇지도 않을 상황이지만, 내 마음 속에선 어지러이 회오리 돌풍이 풀고 있는 느낌이다.
얼핏...만 2번 본 영화가 생각이 났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그 두번 모두 후반부부터 보게되었던 것 같다.
비노쉬와 스튜어트가 어느 한가로운 시골 주택에서 함께 생활하며 대본 연습을 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논쟁하고...
지금 이 글을 쓰기 전에 이 영황에 대해 잠시 살펴보니 과거와 현재에 맡은 역할의 변화와 그에 따라 운명처럼 맞이하게 되는 미묘한 상황들이,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부분에 있었나보다. 그리고 제목의 실스마리아는 지명으로, 그것이 상징하는 것 또한 영황의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영황에 있어서는 중요하다 해도, 나에게 있어서 중요한 건 다른 부분이었다.
비노쉬 크리스틴 모레츠간의 미묘한 심리적 갈등상황들, 그리고 그것들이 뿜어내는 힘이 사람들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언제 드러날지 지켜보는 초조함. 그리고 비열해 보이지만, 상대방은 모르게 자신만의 복수를 하는 듯한 모습들...
(비노쉬는 모레츠에 대해 굴욕감 같은 걸 가지고 있어 보였고, 그런 상황을 만든 연출가에게도 일정 정도의 반감이 있었던 듯 하다. 후에 연출가가 검토를 부탁한 원고는 일부러 보지도 않으며, 자신의 손상된 자존심을 세워줄지도 모를 무명의 감독이 제안하는 배역에는 대단한 호의를 보인다.)
왜 이 영화가 생각이 났을까?
내 마음속에 움직이고 있는 혼란스러움들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데, 이 영화가 그걸 보여 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걸까?
아니면 그 영화에서도 지금 내가 느낀 것같은 그런 혼란스러움이 느껴졌던 걸까?
겨울답지 않은 따뜻한 날씨와 깨끗한 공기, 온화하다.
가장 친한 친구가 선을 넘었다는 생각을 했다.
다분히 공격적이라 느꼈다. 아니, 당시에는 그도 나도 공격하거나 공격받지 않았을지도...
지나고 보니, 내 기준에서는 공격이었다.
난 수비적이었고, 막아내기 바빴으며, 완전히 막아내지도 못했다.
아마도 변명 투성이었을 것이며, 그건 간단히 해결할 수도 있었다.
'오케이, 그럴께' 혹은 '그렇게 해보지'라는 말로...하지만 거짓말을 하긴 싫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러모로 생각해봐도 어처구니 없는 황당한 요구였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의 대사처럼 '인간에게 인간 이상의 것을 바라지 말아라'고 말해 줬어야 하는걸까?
과연 어찌해야 할까?
결국은 이렇게 멀어지고 다시 각자의 삶을 보면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들으며 살것인가?
아니면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그냥 다시 만나면 미소짓고 예전처럼...하지만 속마음은 예전같을 수 없는...?
그의 지적처럼 나는 결국 그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 센 늙은이가 되어가는 것이며, 결코 달라지지도 발전하지도 않을 것인가?
어쩌면 그는 아무렇지도 않을 상황이지만, 내 마음 속에선 어지러이 회오리 돌풍이 풀고 있는 느낌이다.
얼핏...만 2번 본 영화가 생각이 났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그 두번 모두 후반부부터 보게되었던 것 같다.
비노쉬와 스튜어트가 어느 한가로운 시골 주택에서 함께 생활하며 대본 연습을 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논쟁하고...
지금 이 글을 쓰기 전에 이 영황에 대해 잠시 살펴보니 과거와 현재에 맡은 역할의 변화와 그에 따라 운명처럼 맞이하게 되는 미묘한 상황들이,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부분에 있었나보다. 그리고 제목의 실스마리아는 지명으로, 그것이 상징하는 것 또한 영황의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영황에 있어서는 중요하다 해도, 나에게 있어서 중요한 건 다른 부분이었다.
비노쉬 크리스틴 모레츠간의 미묘한 심리적 갈등상황들, 그리고 그것들이 뿜어내는 힘이 사람들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언제 드러날지 지켜보는 초조함. 그리고 비열해 보이지만, 상대방은 모르게 자신만의 복수를 하는 듯한 모습들...
(비노쉬는 모레츠에 대해 굴욕감 같은 걸 가지고 있어 보였고, 그런 상황을 만든 연출가에게도 일정 정도의 반감이 있었던 듯 하다. 후에 연출가가 검토를 부탁한 원고는 일부러 보지도 않으며, 자신의 손상된 자존심을 세워줄지도 모를 무명의 감독이 제안하는 배역에는 대단한 호의를 보인다.)
왜 이 영화가 생각이 났을까?
내 마음속에 움직이고 있는 혼란스러움들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데, 이 영화가 그걸 보여 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걸까?
아니면 그 영화에서도 지금 내가 느낀 것같은 그런 혼란스러움이 느껴졌던 걸까?
2019년 2월 19일 화요일
아는 것에 대한 두려움 vs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
어른의 두려움 vs 아이의 두려움
전자는 대상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대상 혹은 사건에서 파생될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건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기도 한다.
뜨겁게 팔팔 끓고 있는 주전자를 보면서 두려움을 가질 수도 있다.
그건 주전자나 물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뜨겁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다.
만약 뜨거운 물이나 주전자에 데었을 때의 사태, 쉽게 가시지 않을 고통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크게 데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일 수록, 화상으로 인한 통증에 유난히 민감한 사람일 수록 더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니, 내재화된 혹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신의 약점인 셈이다.
누군가는 추운것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하니 말이다.
자기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이런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이 있을까?
두려움을 이겨낸다는 것은,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만 한다.
'설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거야'라는 생각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하나 극복해 내는 힘든 과정일 것이며, 불을 이겨내고 담금질과 연마를 견뎌내어 강철이 되어가는 그런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
각오와 다짐을 하고, 용기를 내어 나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바뀌는 힘든 여정을 견뎌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후자의 경우는 두려움의 한계가 없다.
무한대의 두려움이 가능하다.
이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을 "용기"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 용기는 그저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을 먹는 순간의 일이며, 그것으로 완성된다. 그 후의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제 슬쩍 들춰 본 그 대상의 실체를 접했을 때 겪게되는 인상과 느낌, 경험은 그 자신에게 내재화 될 것이다.
시간차이가 있겠지만, 어쩌면 순간적으로 그 두려움은 바로 아는 것에 대한 두려움 = 어른의 두려움으로 치환되어 가는지도 모르겠다.
전자는 대상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대상 혹은 사건에서 파생될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건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기도 한다.
뜨겁게 팔팔 끓고 있는 주전자를 보면서 두려움을 가질 수도 있다.
그건 주전자나 물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뜨겁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다.
만약 뜨거운 물이나 주전자에 데었을 때의 사태, 쉽게 가시지 않을 고통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크게 데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일 수록, 화상으로 인한 통증에 유난히 민감한 사람일 수록 더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니, 내재화된 혹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신의 약점인 셈이다.
누군가는 추운것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하니 말이다.
자기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이런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이 있을까?
두려움을 이겨낸다는 것은,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만 한다.
'설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거야'라는 생각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하나 극복해 내는 힘든 과정일 것이며, 불을 이겨내고 담금질과 연마를 견뎌내어 강철이 되어가는 그런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
각오와 다짐을 하고, 용기를 내어 나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바뀌는 힘든 여정을 견뎌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후자의 경우는 두려움의 한계가 없다.
무한대의 두려움이 가능하다.
이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을 "용기"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 용기는 그저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을 먹는 순간의 일이며, 그것으로 완성된다. 그 후의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제 슬쩍 들춰 본 그 대상의 실체를 접했을 때 겪게되는 인상과 느낌, 경험은 그 자신에게 내재화 될 것이다.
시간차이가 있겠지만, 어쩌면 순간적으로 그 두려움은 바로 아는 것에 대한 두려움 = 어른의 두려움으로 치환되어 가는지도 모르겠다.
2019년 2월 17일 일요일
생각하지 못했던 것, 의도하지 않았던 것, 궁금하지 않았던 것... 그리고 창조와 진화
앞선 포스팅에선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에 대한 생각을 찌끄려 봤다.
그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면서 의문들이 따라 올라왔다.
과연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는가?
만약 누군가, 혹은 인류가, 아니 어떤 존재가 이런 방법을 고안해 낸다면, 그 존재는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이나 연극 영화와 같은 가공의 스토리를 만드는 작가가, 자신이 의도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
자신이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론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떠면 작가의 의도는 그 자신의 정체성임과 동시에 그 자신의 한계일 수 있는데, 자신의 의도를 벗어나게 된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것과 같은 일일지 모른다.
데미안의 아프락사스에게 날아가는 새와 같이...
우리는 궁금해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을까?
사실 인간은 많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며 발전해 왔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답은 언젠가는 나오는 것이다. 시간의 문제일 뿐.
문제는 질문이었다.
어떤 사람의 미래는, 그가 던지는 질문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니, 과연 인간이 지금껏 가지지 않았던 질문을 할 수 있느냐가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지 않을까?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은 "창조"라는 단어로 묶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주로 예술의 방면에서 종종 이런 창조성의 천재들을 접하게 되지만, 과연 "완벽한 창조"라는 것을 했던 예술가가 있는지,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 "창조의 방법" 혹은 "창조의 과정"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인식하고 전수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그리고 결국은 이 "창조"가 "진화"의 열쇠가 아닐까 싶다.
그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면서 의문들이 따라 올라왔다.
과연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는가?
만약 누군가, 혹은 인류가, 아니 어떤 존재가 이런 방법을 고안해 낸다면, 그 존재는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이나 연극 영화와 같은 가공의 스토리를 만드는 작가가, 자신이 의도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
자신이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론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떠면 작가의 의도는 그 자신의 정체성임과 동시에 그 자신의 한계일 수 있는데, 자신의 의도를 벗어나게 된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것과 같은 일일지 모른다.
데미안의 아프락사스에게 날아가는 새와 같이...
우리는 궁금해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을까?
사실 인간은 많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며 발전해 왔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답은 언젠가는 나오는 것이다. 시간의 문제일 뿐.
문제는 질문이었다.
어떤 사람의 미래는, 그가 던지는 질문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니, 과연 인간이 지금껏 가지지 않았던 질문을 할 수 있느냐가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지 않을까?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은 "창조"라는 단어로 묶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주로 예술의 방면에서 종종 이런 창조성의 천재들을 접하게 되지만, 과연 "완벽한 창조"라는 것을 했던 예술가가 있는지,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 "창조의 방법" 혹은 "창조의 과정"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인식하고 전수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그리고 결국은 이 "창조"가 "진화"의 열쇠가 아닐까 싶다.
피드 구독하기:
글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