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공동주택에서 거주한 지도 20년이 되어가니 참 오래도 살았다.
아마도 10여년간은 집과 회사만 오가는 시계 부랄의 생활의 연속이었으니, 이웃이 누구였는지도 몰랐고 층간 소음이 뭔지도 몰랐다.
당시엔 토요일도 근무를 했기도 하려니와 야근도 태반이었고 격주로 주말엔 본가에 찾아 다니기도 했다.
정말 집에 있는 시간이 참 적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만 박혀서 산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층간 소음을 인식하기 시작한 건 2014년 가을을 전후한 때라고 생각한다.
발소리, 의자 끄는 소리, 무언가 심하게 부딪히면서 나는 소리 등이 가끔씩 들려왔는데, 그게 1시간 ~ 2시간 정도씩 지속이 되었다.
처음엔 이게 무슨 소리인지,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지가 궁금했다. 찾아가서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문제는 그게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것 이었다.
이 공동주택의 구조로 보아 윗집이거나 옆집일 가능성이 제일 높아 보였지만, 원래의 소리가 무척이나 크다면 윗집의 옆집이거나 아랫집일 수도 있는거였다.
약 1년을 참았다.
그리고 이제는 분노에 짜증, 불면증과 간헐적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증상까지 생겼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이사를 나간 집도 있었고 들어 온 집도 있고, 안보이던 사람이 함께 사는 경우도 생겼다.
복수에 대해서도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겨우 겨우 생각을 바꿔 보았다.
모두가 나쁜 의도를 가지진 않았을거라는....단지 모르고 하는 일일 뿐이라고
층간 소음에 대해 직접 대화를 해 본 것은 윗집 뿐이었는데 반응이 그닥 좋지 않았었다.
그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 보았는데, 먼저 층간 소음에 대한 괴로움을 토로할 때에는 상대방이 가해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자세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 보다 중요한 건, 상대방의 행위를 짐작해서 지적해서는 안되고, 나의 상태가 매우 괴롭고 힘들다는 표현으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의 행위를 짐작해서 지적하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 아닐 경우에 매우 큰 반격에 직면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사실일 경우에도 상대방을 매우 방어적으로 만든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먼저 내가 어떤 소리나 진동 때문에 매우 힘들고 괴롭다는 식의 표현을 하게 되면, 상대방은 먼저 동정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대화로 문제를 풀기가 쉬워진다.
층간 소음은 전형적인 비대칭 상태의 불공정 게임이다.
가해자는 내가 하는 어떤 행동이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 지 알지 못하고 있으며, 피해자는 상대방이 얼마나 조심해야만 내가 참을 만 한지의 정도를 알지도 못하고 알려 줄 수도 없다.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1) 자신의 피해 상황을 짐작이 가는 가해자에게 알려주고
2) 잠정적인 가해자는 적극적으로 자신이 가해자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3) 피해자와 가해자가 합의하여 실험을 통해 문제가 되는 소리를 확인한 후,
4) 어떤 정도이면 피해가 되지 않을 지, 그 정도를 가늠한 후에
5) 적절한 해결 방법을 찾는 것(가해자의 행동 주의, 소음 방지 용품 사용, 건설사에 하자 보수 요청)
의 과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실상 정부는 이런 식의 합리적인 분쟁 조절 절차에 대해 국민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홍보만을 해도 상당히 많은 문제들이 해결 될 것이다.
현실성 없는 소음 기준을 만들어 봐야 피해자와 가해자가 더욱 원수가 되는 상황만 만들 뿐, 거의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해 우리 국민들이 미개하니까, 스스로 이런 합리적인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지도 못하는 것이며, 문제 해결과는 점점 동 떨어지는 감정 싸움으로 번지고, 결국엔 방화 살인에까지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다.
하지만 위의 대화 방법이나, 문제 해결 절차가 일반적인 깨달음이라면, 나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준 건 최근의 일 이었다.
요즘들어 윗집에 새로운 동거인이 한 명 추가되었는데, 발소리가 엄청나게 큰 남자였다.
이건 어디서 들리는지 확인 할 필요도 없이 명백했고, 정말 소리의 문제가 아니라 진동의 문제라서 귀마개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더더군다나 이 사람은 주로 밤 늦은 시각(23:00 ~ )에 아무렇지 않게 소리를 내서 많이 놀라게 했다.
이 동거인이 추가 되면서 기존에 사시던 노부인도 소음에 둔감해 진 탓일까? 아침 이른 시간(06:00 ~ 07:00)에 베란다에서 뚝딱거리고 댕그렁 거리는 것이 훨씬 심해졌다. 빈도나 강도 모든 면에서...
참다 못하고 인터폰으로 항의를 하긴 해서 조금 누그러들긴 했지만, 대화가 그리 쉬운 상대가 아니었기에 이 정도로 만족하고 참고 있는 중인다.
인터폰의 대화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기에 어지간하면 인터폰을 다시 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하지만, 아침 잠을 방해 받기도 하고 한밤중에 깜짝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좀 심하다 싶은 소음이 있었던 평일의 초 저녁 시간, 내 안에 분노가 쌓이지 않게 쌍욕을 내질렀다.
실상은 소음을 낸 상대방을 향한 분노의 표출이었지만, 그게 상대방에게 들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희안하게도, 그 날 이후로 소음이 정말 많이 줄었다.
정말 이만하면 살만 하겠다 싶을 정도였다.
이건 대체 무슨 조화일까? 정말 내 욕지거리가 들렸던 걸일까?
하긴 내가 발소리, 의자 끄는 소리, TV 소리, 물소리, 문 여닫는 소리 등등은 들어 보았어도, 사람 말소리는 거의 들어 본 적이 없다.
주말에 아주 작정하고 신나게 놀던 부녀간에 딸 아이의 자지러질 듯한 웃음 소리는 들은 적이 있다.
그 외에는 복도에 나와서 얘기하는 사람이거나 마을 놀이터에서 노는 계집아이들의 꺅꺅 비명소리 일 뿐, 집안에서 말하는 사람들의 말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 말소리는 어떻게? 그냥 우연의 일치?
이 일을 겪고 나서 두가지 깨달은 게 있었다.
이웃들이 소란스러울 수록, 나는 나 또한 가해자가 되지 않으려고 더 주의하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게 이웃 사람들을 더욱 소란스럽게 만들었던 하나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소음을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이 소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소음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소음을 듣는 사람들은, 자신이 소음을 듣고 괴롭기에, 자신이 소음을 만들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주의한다.
이 결과로 가해자는 점점 더 심한 가해자가 된고 피해자는 점점 더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된다.
하지만, 다시 바꾸어 말하면 피해자가 조심하고 소음을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기에 가해자의 소음이 커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윗층과 아랫층의 두 집만 생각하면 아래층에서 윗층에 지속적인 소음을 주는 것은 윗층에서 애랫층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좀 더 크게 생각해보면 결국은 돌고 돌게 되어 있다.)
여기에 더해서, 피해자가 주의할수록 다 소음을 잘 들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가해자가 거리낌 없이 소음을 만들수록 타인의 소음은 인식하기 어려워서 상황은 심각해지기 마련이다.
빈익빈 부익부가 아니라 가학가 피학피?
이게 한가지 깨달은 것이다.
결국 내 욕지거리가 가해자들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는 가정하에 성립할 설명이겠지만 말이다.
또 한가지 깨달은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깨달음 이었는데,
소음의 피해가 커질 수록, 나는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더욱 주의하면서,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명분을 만들고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었다.
언제든지 가해자들에게 당당하게 죄를 물을 수 있도록, 나 자신은 완전한 무죄가 되기 위해서...
결국은 점잔빼고 나는 독야청정하리라 하면서, 나는 깨끗하고 저것들은 더럽고, 그러니 내가 저들에게 어떻게 대하든 그것은 옳은 것이고, 저들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그런 생각?
하지만 딱히 그들을 단죄할 힘도 용기도 없어서, 참아야 할 것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스스로 망가져가고 있었던 건 아닌지...
세상에 독불장군 없다고, 나 혼자 잘나고 나 혼자 옳고 나 혼자 정의로울 수 있겠는가?
내가 사는 이웃들의 수준이 이 정도라면 나도 거기에 맞춰 살아야 하는 것이 섭리이고 순응하는 방법이겠다 싶다.
뭔가 좀 타락하는 기분이고, 수준이 낮아지는 기분이 들지만, 근묵자는 흑이어야 여러모로 편하지 않겠는가?
백이고 싶으면 묵에서 멀어져야지, 굳이 묵 근처에 살면서 백이되려고 한다면 수시로 씻고 닦아내야 하는 번거로움은 견뎌내야 하지 않겠냐 말이다......
2016년 4월 10일 일요일
2016년 3월 25일 금요일
[가상 스토리] 인공 지능에 관한 법률로 생각해 보는 신의 생각
< 이 가상 스토리는 알파고의 출현으로 섬뜩 다가온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의 상상으로 부터 나왔습니다.>
인공지능이 어느 순간 놀라운 도약을 이루어 낸 이후로, 인공지능에 대한 사람들의 우려는 점차 커져갔다.
단지 주어진 임무를 똑똑하게 수행하는 것을 넘어서, 주어진 지식들로부터 새로운 지식을 추론해 내는가 하면, 주어진 임무를 분석하여 유사한 임무 혹은 변형된 임무까지 도출해 내게 되었다.
누군가는 이것을 일컬어 인공지능이 인공욕망까지 갖추게 되었다고 말했다.
인공지능은 이제 스스로 진화해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 발전 속도는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에 누군가가 망상에 사로잡혀 엉뚱한 욕망을 인공지능에게 부여한다면?
더욱 큰 문제는, 개별 인공지능의 소유자 혹은 관리자가 인공지능 시스템에 임무(=욕망?)를 부여했다 하더라도 어떤 결과로 나타날 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인공지능에 대한 강력한 규제안을 만들고 이를 법제화하기 위한 절차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 인공지능 시스템의 등록/허가제
- 인공지능 시스템을 구별하고 속성을 간파할 수 있도록 하는 코드체계 마련
- 인공지능 시스템을 제어할 수 있는 표준 제어 체계 마련
- (인공지능 시스템에 대한 중독성 부여의 의무화)
이상의 4가지가 주요 법제화의 대상이었다.
- 인공지능 시스템의 등록/허가제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작동/운용 하기 위해서는 관계기관에 등록하거나 허가를 받도록 하는 제도로서, 인공지능 시스템의 기동 시기, 운용되는 위치와 규모, 운용 목적, 제작자 및 소유자 정보 등을 포함하도록 한다.
- 인공지능 시스템의 코드체계는,
각 인공지능 시스템의 활동은 온라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바, 대상을 직접 볼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설령 대상을 직접 본다한들 외형으로 구별하기에는 어려움이 많기에, 각 인공지능 시스템은 온라인 통신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릴 수 있는 코드를 필히 적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각 인공지능 시스템에 부여할 코드체계를 마련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이 코드체계에는 인공지능 시스템의 규모, 위치를 알 수 있는 정보가 포함되어야 하며, 고유한 ID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파생 집단 코드 + 개별 고유 코드>로 이루어지게 한다.
파생집단코드란, 일종의 조상, 가족과 비슷한 것으로 원조가 되는 시스템의 집단코드를 파생된 모든 시스템이 공동으로 갖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각 인공지능 시스템의 성향이나 약점 등을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 인공지능 시스템 표준 제어 체계는,
시스템이 인간에게 위협적으로 돌변하거나 시스템 자신을 파괴하는 등의 긴급 상황에 강제로 중단하거나 초기화 할 수 있는 긴급 제어,
인간과 소통하기 위한 인간의 언어를 변경할 수 있는 언어 제어,
대량의 임무를 일괄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인터페이스 표준을 지정하는 인터페이스 제어,
인공지능 시스템의 소유권이 이전되는 경우 등에 필요한 관리자/소유자의 변경 인증에 필요한 인증 제어
등을 기본적으로 갖추어서, 모든 인공지능 시스템에서 공통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표준 제어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다.
- 인공지능 시스템의 중독성 부여는,
위의 표준 제어 체계로 제어가 불가능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것으로,
모든 인공지능 시스템이 중독될 수 있는 요소를 갖추도록 의무화하는 것이다.
중독 요소는 개별 시스템마다 달라도 되지만 최소한의 요건은 이러하다.
중독 요소는 최대한 간소화 한다. 소인수 찾기, 틱-택-토 게임, 파이의 소수점 계산 등과 같이....
중독 요소는 인공지능 시스템 스스로가 무의미하거나 비합리적이며 심지어는 자기 파괴적이라고 인식해도 좋지만, 무조건적으로 강력하게 선호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인공지능 시스템이 왜 이토록 강력하게 중독요소를 선호하는지는 그 자신도 모르도록 해야 한다.
중독성은 인공지능 시스템이 제어가 불가능해 졌을 때, 시스템의 작동을 지연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며, 인공지능 시스템이 지식이나 임무에 대한 끊임 없는 추론으로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에 도달할 것이 우려될 경우, 추론의 속도를 지연시키는 숨겨진 제어 장치이다.
이상의 규제안을 고안하면서,
특히 마지막의 중독성에 관한 부분은 인간들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게 되었다.
그 동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인간의 본능과 그에 대한 죄악시는 이 부분과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쾌락에 대한 집착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중독 요소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신도 인간을 두려워했던 걸까?
인공지능이 어느 순간 놀라운 도약을 이루어 낸 이후로, 인공지능에 대한 사람들의 우려는 점차 커져갔다.
단지 주어진 임무를 똑똑하게 수행하는 것을 넘어서, 주어진 지식들로부터 새로운 지식을 추론해 내는가 하면, 주어진 임무를 분석하여 유사한 임무 혹은 변형된 임무까지 도출해 내게 되었다.
누군가는 이것을 일컬어 인공지능이 인공욕망까지 갖추게 되었다고 말했다.
인공지능은 이제 스스로 진화해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 발전 속도는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에 누군가가 망상에 사로잡혀 엉뚱한 욕망을 인공지능에게 부여한다면?
더욱 큰 문제는, 개별 인공지능의 소유자 혹은 관리자가 인공지능 시스템에 임무(=욕망?)를 부여했다 하더라도 어떤 결과로 나타날 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인공지능에 대한 강력한 규제안을 만들고 이를 법제화하기 위한 절차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 인공지능 시스템의 등록/허가제
- 인공지능 시스템을 구별하고 속성을 간파할 수 있도록 하는 코드체계 마련
- 인공지능 시스템을 제어할 수 있는 표준 제어 체계 마련
- (인공지능 시스템에 대한 중독성 부여의 의무화)
이상의 4가지가 주요 법제화의 대상이었다.
- 인공지능 시스템의 등록/허가제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작동/운용 하기 위해서는 관계기관에 등록하거나 허가를 받도록 하는 제도로서, 인공지능 시스템의 기동 시기, 운용되는 위치와 규모, 운용 목적, 제작자 및 소유자 정보 등을 포함하도록 한다.
- 인공지능 시스템의 코드체계는,
각 인공지능 시스템의 활동은 온라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바, 대상을 직접 볼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설령 대상을 직접 본다한들 외형으로 구별하기에는 어려움이 많기에, 각 인공지능 시스템은 온라인 통신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릴 수 있는 코드를 필히 적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각 인공지능 시스템에 부여할 코드체계를 마련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이 코드체계에는 인공지능 시스템의 규모, 위치를 알 수 있는 정보가 포함되어야 하며, 고유한 ID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파생 집단 코드 + 개별 고유 코드>로 이루어지게 한다.
파생집단코드란, 일종의 조상, 가족과 비슷한 것으로 원조가 되는 시스템의 집단코드를 파생된 모든 시스템이 공동으로 갖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각 인공지능 시스템의 성향이나 약점 등을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 인공지능 시스템 표준 제어 체계는,
시스템이 인간에게 위협적으로 돌변하거나 시스템 자신을 파괴하는 등의 긴급 상황에 강제로 중단하거나 초기화 할 수 있는 긴급 제어,
인간과 소통하기 위한 인간의 언어를 변경할 수 있는 언어 제어,
대량의 임무를 일괄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인터페이스 표준을 지정하는 인터페이스 제어,
인공지능 시스템의 소유권이 이전되는 경우 등에 필요한 관리자/소유자의 변경 인증에 필요한 인증 제어
등을 기본적으로 갖추어서, 모든 인공지능 시스템에서 공통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표준 제어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다.
- 인공지능 시스템의 중독성 부여는,
위의 표준 제어 체계로 제어가 불가능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것으로,
모든 인공지능 시스템이 중독될 수 있는 요소를 갖추도록 의무화하는 것이다.
중독 요소는 개별 시스템마다 달라도 되지만 최소한의 요건은 이러하다.
중독 요소는 최대한 간소화 한다. 소인수 찾기, 틱-택-토 게임, 파이의 소수점 계산 등과 같이....
중독 요소는 인공지능 시스템 스스로가 무의미하거나 비합리적이며 심지어는 자기 파괴적이라고 인식해도 좋지만, 무조건적으로 강력하게 선호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인공지능 시스템이 왜 이토록 강력하게 중독요소를 선호하는지는 그 자신도 모르도록 해야 한다.
중독성은 인공지능 시스템이 제어가 불가능해 졌을 때, 시스템의 작동을 지연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며, 인공지능 시스템이 지식이나 임무에 대한 끊임 없는 추론으로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에 도달할 것이 우려될 경우, 추론의 속도를 지연시키는 숨겨진 제어 장치이다.
이상의 규제안을 고안하면서,
특히 마지막의 중독성에 관한 부분은 인간들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게 되었다.
그 동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인간의 본능과 그에 대한 죄악시는 이 부분과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쾌락에 대한 집착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중독 요소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신도 인간을 두려워했던 걸까?
2016년 2월 10일 수요일
엄마와 나 ... (명절에 있었던 사연? 사건?)
2016년 설을 맞아 부모님이 계신 본가엘 다녀왔다.
나야 남자이고 미혼이니 딱히 해야 할 큰 일도 없고 고부간의 갈등으로 속앓이를 하지 않아도 된다.
가끔 잡일 돕고 설거지 정도 간간이 하면 나머진 그냥 뒹굴뒹굴....
물론 사람이 여럿 모이다 보니 부대끼기 마련이고, 얘기를 하다 보면 서로 의견이 달라서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경우도 있는데.......
아마도 마지막 날의 점심 식사 때 였나보다.
어머니는 복지관에서 주관하는 운동 교실을 정기적으로 다니시는데, 그 곳 복지관의 한심한 노인들 얘기를 가끔 하신다.
이번에는 복지관의 식당에서의 일.
대다수의 노인들은 그곳에서 무료 식사를 하신다고 한다.(어머니는 자격이 안되시니 유료)
그런데 툭하면 반찬 투정을 하는 노인들이 종종 있으며 그런 분들은 거의 다가 무료로 식사를 하는 분들이라는 것이다.
<무료로 식사를 하면서도 투정을 한다.
게다가 밥과 반찬은 왜 그리 많이 퍼 오는지, 그걸 또 다 먹지도 못하고 남겨서 버린다.>
잠깐 생각해보니, 그분들 입장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바였다.
형편이 어려워 무료 급식을 받을 자격이 되신 분들이니 식사는 선택의 여지 없이 복지관에서 주는 대로 드셔야 하고,
매일 드시다 보니 조금만 맛이 달라져도 금방 알아차리시는 게 아닐까?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먹어야 하는 곳의 음식이기에 음식의 질이 떨어지는 것을 적극적으로 방어해야 할 의무감(?)도 들었을지 모른다.
잠시 후에, 어머니께서, 당신은 고추가 소화가 되질 않아서 식당에서 음식을 먹다가 고추가 나오면 그걸 골라낸다고 말씀을 하셨다.
정도의 차이도 있고, 통상적인 기준으로도 좋고 나쁨의 차이가 있으며, 특별한 개인적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어머니의 행동도 이상하게 보일것이며 누군가가 뒷담화 대상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참을걸 그랬나?
그 말이 불쑥 나와 버렸다.
엄마, 누군가는 지금 엄마처럼 집에와서, 복지관에 이런 노인네도 있더라 하며 흉보지 않을까?
그리고 어머니는 드시던 만두 접시를 들고 거실로 나가서 드셨다.
아니 틀림 없이 바로 나가신 건 아니였고, 언짢은 표정도 아니셨다.
그저 내 생각으로만 어머니께서 화가 나셨던걸지도 모른다.
===========================================================
하지만 이런 입장의 차이에 대해서,
나에겐 보이지 않고 남에게만 보이는 나의 허물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이 글을 쓴건 아니다.
집에 돌아와서 이 사건을 곱씹고 되돌아 보면서,
문득 내가 궁금해 했던 나의 모습, 어머니의 모습,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 혹은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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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최근에 더욱 그렇게 느끼는 거지만, 참 순한 분이시다.
악의는 거의 없으시고, 순진하시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
때문에 누이는 아버지를 팔랑귀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고, 지금까지 큰 사기를 당하지 않으신게 용하다고 할 정도.
나는 아버지와는 상반되게, 상당히 계산적인 면, 사물을 비관적으로 보는 경향, 약간 삐딱한 면이 있다.
한번은 아버지께서 스마트폰 강의를 받는다고 하셨는데, 그곳에서 들었다며 수맥 어플을 받았다며 자랑을 하시는 거였다.
몇번 사용을 해 보고 좀 생각을 해 보니 이건 말이 안되는 사기꾼의 장난으로 보였다.
더구나 그런 허접한 어플을 유료로 구매하셨다니....
대뜸 아버지께 사기꾼한테 속으신거 같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아버지께서 당황하셨던 모양이다. 넌 왜 그렇게 부정적이냐고 비난을 하셨는데, 나는 격하게 반응을 했더랬다.
이유는...'부정적'이라는 단어....이건 내가 싫어하는 나의 성격가운데 하나였으며, 나에게 지속적으로 던져지는 질문이기도 했던거였다.
나는 왜 이리도 부정적인가?
그 원인이 무엇일까?
선천적인 것일까, 후천적인 것일까?
아버지는 만사에 긍정적이시기에 선천적으로 후천적으로 내게 '부정적' 성향의 영향을 끼쳤을리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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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아마도 국민학교 입학 즈음이 아닌가 싶은데, 난 어머니가 못생겼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어린 우리 남매들의 사진을 자주 찍으시곤 했는데, 나는 사진 속의 나도 못생겼다고 생각했다.
나는 턱이나 치아나 혀에 문제가 있는건지 모르겠지만 입을 헤 벌리곤 했다.
아버지는 그러다 넘어지면 혀를 깨물고 혀를 깨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입을 벌리고 있을 때마다, 얘야 이거 봐라 하시곤 내가 입벌린 모습을 흉내를 내시면서, 이게 얼마나 보기 싫으냐고 핀잔을 주셨다.
그 모습 때문에 어머니가 못생겼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흉내내는 모습은 다분히 과장 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 모습은 정말 끔찍하게도 싫었다.
사실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경각심을 가져서 입을 다무는 습관을 가졌다기 보다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싫어서, 그 흉내내는 모습이 더더욱 싫어서 입을 다물게 되었다.
=============================================================
설날의 그 식사 중에 어머니께서 복지관이 노인네 흉을 보는 모습은 흡사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흉내내며 잔소리하는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타인의 장점을 보고 그것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대개 타인의 단점을 보고 그것을 흉보거나 비판을 해 왔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어쩌면 나는 어머니의 그 싫은 모습을 그대로 유전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싫으면서도 배웠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 또한 어머니의 단점을 들춰내고 그걸 비난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내가 싫어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또한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이었으며,
내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들 - 타인의 시선에 대한, 비난에 대한, 실수에 대한 두려움들 -과 소심함의 원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의 단점을 찾아내려는 시선들을 피해야하고, 나를 비난하기 위해 내가 실수하기 만을 기다리는 시선들을 차단하려고 애썼나 보다.
하지만, 정작 타인의 단점을 찾아내기 위해 가장 애쓰는 사람은 나였고, 타인의 실수나 단점을 가장 먼저 보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
P.S. 부모라는 존재는,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존재이다.
나야 남자이고 미혼이니 딱히 해야 할 큰 일도 없고 고부간의 갈등으로 속앓이를 하지 않아도 된다.
가끔 잡일 돕고 설거지 정도 간간이 하면 나머진 그냥 뒹굴뒹굴....
물론 사람이 여럿 모이다 보니 부대끼기 마련이고, 얘기를 하다 보면 서로 의견이 달라서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경우도 있는데.......
아마도 마지막 날의 점심 식사 때 였나보다.
어머니는 복지관에서 주관하는 운동 교실을 정기적으로 다니시는데, 그 곳 복지관의 한심한 노인들 얘기를 가끔 하신다.
이번에는 복지관의 식당에서의 일.
대다수의 노인들은 그곳에서 무료 식사를 하신다고 한다.(어머니는 자격이 안되시니 유료)
그런데 툭하면 반찬 투정을 하는 노인들이 종종 있으며 그런 분들은 거의 다가 무료로 식사를 하는 분들이라는 것이다.
<무료로 식사를 하면서도 투정을 한다.
게다가 밥과 반찬은 왜 그리 많이 퍼 오는지, 그걸 또 다 먹지도 못하고 남겨서 버린다.>
잠깐 생각해보니, 그분들 입장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바였다.
형편이 어려워 무료 급식을 받을 자격이 되신 분들이니 식사는 선택의 여지 없이 복지관에서 주는 대로 드셔야 하고,
매일 드시다 보니 조금만 맛이 달라져도 금방 알아차리시는 게 아닐까?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먹어야 하는 곳의 음식이기에 음식의 질이 떨어지는 것을 적극적으로 방어해야 할 의무감(?)도 들었을지 모른다.
잠시 후에, 어머니께서, 당신은 고추가 소화가 되질 않아서 식당에서 음식을 먹다가 고추가 나오면 그걸 골라낸다고 말씀을 하셨다.
정도의 차이도 있고, 통상적인 기준으로도 좋고 나쁨의 차이가 있으며, 특별한 개인적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어머니의 행동도 이상하게 보일것이며 누군가가 뒷담화 대상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참을걸 그랬나?
그 말이 불쑥 나와 버렸다.
엄마, 누군가는 지금 엄마처럼 집에와서, 복지관에 이런 노인네도 있더라 하며 흉보지 않을까?
그리고 어머니는 드시던 만두 접시를 들고 거실로 나가서 드셨다.
아니 틀림 없이 바로 나가신 건 아니였고, 언짢은 표정도 아니셨다.
그저 내 생각으로만 어머니께서 화가 나셨던걸지도 모른다.
===========================================================
하지만 이런 입장의 차이에 대해서,
나에겐 보이지 않고 남에게만 보이는 나의 허물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이 글을 쓴건 아니다.
집에 돌아와서 이 사건을 곱씹고 되돌아 보면서,
문득 내가 궁금해 했던 나의 모습, 어머니의 모습,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 혹은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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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최근에 더욱 그렇게 느끼는 거지만, 참 순한 분이시다.
악의는 거의 없으시고, 순진하시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
때문에 누이는 아버지를 팔랑귀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고, 지금까지 큰 사기를 당하지 않으신게 용하다고 할 정도.
나는 아버지와는 상반되게, 상당히 계산적인 면, 사물을 비관적으로 보는 경향, 약간 삐딱한 면이 있다.
한번은 아버지께서 스마트폰 강의를 받는다고 하셨는데, 그곳에서 들었다며 수맥 어플을 받았다며 자랑을 하시는 거였다.
몇번 사용을 해 보고 좀 생각을 해 보니 이건 말이 안되는 사기꾼의 장난으로 보였다.
더구나 그런 허접한 어플을 유료로 구매하셨다니....
대뜸 아버지께 사기꾼한테 속으신거 같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아버지께서 당황하셨던 모양이다. 넌 왜 그렇게 부정적이냐고 비난을 하셨는데, 나는 격하게 반응을 했더랬다.
이유는...'부정적'이라는 단어....이건 내가 싫어하는 나의 성격가운데 하나였으며, 나에게 지속적으로 던져지는 질문이기도 했던거였다.
나는 왜 이리도 부정적인가?
그 원인이 무엇일까?
선천적인 것일까, 후천적인 것일까?
아버지는 만사에 긍정적이시기에 선천적으로 후천적으로 내게 '부정적' 성향의 영향을 끼쳤을리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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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아마도 국민학교 입학 즈음이 아닌가 싶은데, 난 어머니가 못생겼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어린 우리 남매들의 사진을 자주 찍으시곤 했는데, 나는 사진 속의 나도 못생겼다고 생각했다.
나는 턱이나 치아나 혀에 문제가 있는건지 모르겠지만 입을 헤 벌리곤 했다.
아버지는 그러다 넘어지면 혀를 깨물고 혀를 깨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입을 벌리고 있을 때마다, 얘야 이거 봐라 하시곤 내가 입벌린 모습을 흉내를 내시면서, 이게 얼마나 보기 싫으냐고 핀잔을 주셨다.
그 모습 때문에 어머니가 못생겼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흉내내는 모습은 다분히 과장 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 모습은 정말 끔찍하게도 싫었다.
사실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경각심을 가져서 입을 다무는 습관을 가졌다기 보다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싫어서, 그 흉내내는 모습이 더더욱 싫어서 입을 다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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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의 그 식사 중에 어머니께서 복지관이 노인네 흉을 보는 모습은 흡사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흉내내며 잔소리하는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타인의 장점을 보고 그것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대개 타인의 단점을 보고 그것을 흉보거나 비판을 해 왔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어쩌면 나는 어머니의 그 싫은 모습을 그대로 유전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싫으면서도 배웠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 또한 어머니의 단점을 들춰내고 그걸 비난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내가 싫어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또한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이었으며,
내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들 - 타인의 시선에 대한, 비난에 대한, 실수에 대한 두려움들 -과 소심함의 원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의 단점을 찾아내려는 시선들을 피해야하고, 나를 비난하기 위해 내가 실수하기 만을 기다리는 시선들을 차단하려고 애썼나 보다.
하지만, 정작 타인의 단점을 찾아내기 위해 가장 애쓰는 사람은 나였고, 타인의 실수나 단점을 가장 먼저 보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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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부모라는 존재는,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존재이다.
2015년 11월 16일 월요일
사랑 실연 아픔 그리고 이 감정들의 기억
많은 성인 남성들이 혼자 영화관에 가서 봤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확인된 바 없는) 영화인 <건축학개론>
영화라면 특수효과가 난무하는 SF나 큰 화면으로 어울리는 스케일이 큰 종류를 좋아하기에,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에 꽤 많은 입소문과 홍보로 호기심이 발동하기는 했지만, 어쩐지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장벽 같은게 있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명절의 연휴였을까, 그냥 주말이었을까, TV에서 방영해주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무리 남자가 나이가 들면 여성 호르몬의 분비로 많이 감성적이 된다고는 하지만, 보는 내내 왜 그리 많이 울었는지...
참 힘들게 봤다. 극장에 가서 보지 않은게 다행이었다 싶을 만큼 쿨쩍이면서....
아마도 사회 초년생이었던 즈음이었을 것이다.
TV 드라마는 지금도 거의 안보지만, 당시에 <남자대탐험>이라는 TV 드라마가 방영되었고, 이건 참 열심히 봤던 기억이 있다.
순수한 사랑, 현실의 장벽, 다른 선택, 헤어짐, 아픔...
어찌보면 흔할게 볼 수 있는 소재를 이용한 청춘물의 드라마였는데, 재미있게도 봤고, 인기도 많았던 기억이다.
어느날 오래된 차 안에서, 예전에 사 두었던 이 드라마의 OST 테잎을 발견해서 참 반가와했는데, 유튜브에도 이 음악이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 이 동영상에 달린 댓글 가운데, 이 드라마에 관해 요약해 놓은 것이 있었다.
참....이 댓글을 보고 있자니, 옛날 봤던 이 드라마의 줄거리들이 새록 새록 기억나고, 특히 영웅이가 여관방에서 직업 여성을 불러놓고 첫사랑의 이름을 부르는 대목에서는....아마도 대부분의 남자들이 공감할, 정말 쓰라린 기억이 아닐까 싶어 눈시울이 붉어졌다.
========================================================
참 주저리 주저리 장황하게 넋두리를 했지만, 위의 두 작품은 전형적인 성장 드라마이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을 볼 때, 격하게 공감이 되는 건 그 만큼 유사한 경험을 했다는 의미이고, 또한 이런 작품이 흥행에 성공한다는 건 꽤 많은 수가 유사한 경험을 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는 중년을 넘기는 나이가 되고 보니, 젊은 날과 같은 사랑의 감정이 생기기도 어렵겠지만, 저 시절과 같은 두근거림이 한때의 감정일 뿐, 영원할 수 없음도 알고 있게 되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 나이가 되고, 저 작품들을 보면, 사랑의 감정에 대해 공감은 해도, 순간의 감정이란걸 알고 있어서인지 미소를 지으며 넘길 수 있는데....
실연의 아픔, 상실의 아픔은 왜 저 때보다 지금이 더 심한 것인지 모르겠다.
내 일이 아님에도, 그 상처와 좌절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아프고 너무 힘들다.
왜일까?
사랑의 기억보다 슬픔의 기억이 더 오래 지속되고, 더 명확하게 각인이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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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연말에 건축학개론에 대한 글을, 비슷한 감정으로 포스팅했었다.
http://re-unify.blogspot.kr/2014/12/blog-post_29.html
영화라면 특수효과가 난무하는 SF나 큰 화면으로 어울리는 스케일이 큰 종류를 좋아하기에,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에 꽤 많은 입소문과 홍보로 호기심이 발동하기는 했지만, 어쩐지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장벽 같은게 있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명절의 연휴였을까, 그냥 주말이었을까, TV에서 방영해주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무리 남자가 나이가 들면 여성 호르몬의 분비로 많이 감성적이 된다고는 하지만, 보는 내내 왜 그리 많이 울었는지...
참 힘들게 봤다. 극장에 가서 보지 않은게 다행이었다 싶을 만큼 쿨쩍이면서....
아마도 사회 초년생이었던 즈음이었을 것이다.
TV 드라마는 지금도 거의 안보지만, 당시에 <남자대탐험>이라는 TV 드라마가 방영되었고, 이건 참 열심히 봤던 기억이 있다.
순수한 사랑, 현실의 장벽, 다른 선택, 헤어짐, 아픔...
어찌보면 흔할게 볼 수 있는 소재를 이용한 청춘물의 드라마였는데, 재미있게도 봤고, 인기도 많았던 기억이다.
어느날 오래된 차 안에서, 예전에 사 두었던 이 드라마의 OST 테잎을 발견해서 참 반가와했는데, 유튜브에도 이 음악이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 이 동영상에 달린 댓글 가운데, 이 드라마에 관해 요약해 놓은 것이 있었다.
참....이 댓글을 보고 있자니, 옛날 봤던 이 드라마의 줄거리들이 새록 새록 기억나고, 특히 영웅이가 여관방에서 직업 여성을 불러놓고 첫사랑의 이름을 부르는 대목에서는....아마도 대부분의 남자들이 공감할, 정말 쓰라린 기억이 아닐까 싶어 눈시울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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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주저리 주저리 장황하게 넋두리를 했지만, 위의 두 작품은 전형적인 성장 드라마이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을 볼 때, 격하게 공감이 되는 건 그 만큼 유사한 경험을 했다는 의미이고, 또한 이런 작품이 흥행에 성공한다는 건 꽤 많은 수가 유사한 경험을 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는 중년을 넘기는 나이가 되고 보니, 젊은 날과 같은 사랑의 감정이 생기기도 어렵겠지만, 저 시절과 같은 두근거림이 한때의 감정일 뿐, 영원할 수 없음도 알고 있게 되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 나이가 되고, 저 작품들을 보면, 사랑의 감정에 대해 공감은 해도, 순간의 감정이란걸 알고 있어서인지 미소를 지으며 넘길 수 있는데....
실연의 아픔, 상실의 아픔은 왜 저 때보다 지금이 더 심한 것인지 모르겠다.
내 일이 아님에도, 그 상처와 좌절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아프고 너무 힘들다.
왜일까?
사랑의 기억보다 슬픔의 기억이 더 오래 지속되고, 더 명확하게 각인이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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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연말에 건축학개론에 대한 글을, 비슷한 감정으로 포스팅했었다.
http://re-unify.blogspot.kr/2014/12/blog-post_29.html
2015년 11월 6일 금요일
부끄러움은 본능인가 학습인가
부끄러움 이라는 감정은 수치스러움과 수줍음으로 나뉠 수 있다고 한다.
수치스럼움과 수줍음이 같은 뿌리의 감정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얼핏 드는 생각에, 수줍음은 다분히 선천적인 개인 성향인 경우가 많지 않나 싶다.
내가 궁금히 여기는 부분은 수줍음이 아닌 수치스러움에 대한 것이니, 질문을 다시 바꾸어 보면,
수치스러움은 본능적인가 학습된 것인가?
현재의 나를 알기 위한 과거로의 여행에서 발견하게 된 모습에서, 유년 시절 나의 수치스러움이 두드려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가운데, 가난과 부유함에서 오는 수치스러움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아직까지도 빈부에 대한 인식이나 감정은 차분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다.
아마도 나의 가난함이 학교의 친구들에게 드러나게 되는 상황이 닥치면, 난 몹시 불안해하고 어떻게든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어떤 날은 도시락 반찬이 부끄러워서 점심을 굶은 적도 있었으며, 집에 놀러 오려는 친구를 떼어내려고 갖은 설득을 했던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리도 가난을 부끄럽게 여겼던 것일까?
과연 가난하다는 것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
가난하다는 것이 부끄럽다는 감정은 대체 어떻게 갖게 된 것일까?
친구들과 비교를 하면서 무언가 다르다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가난이라는 것을 어찌 알게 되었는지,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정말로 궁금하다.
수치스럼움과 수줍음이 같은 뿌리의 감정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얼핏 드는 생각에, 수줍음은 다분히 선천적인 개인 성향인 경우가 많지 않나 싶다.
내가 궁금히 여기는 부분은 수줍음이 아닌 수치스러움에 대한 것이니, 질문을 다시 바꾸어 보면,
수치스러움은 본능적인가 학습된 것인가?
현재의 나를 알기 위한 과거로의 여행에서 발견하게 된 모습에서, 유년 시절 나의 수치스러움이 두드려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가운데, 가난과 부유함에서 오는 수치스러움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아직까지도 빈부에 대한 인식이나 감정은 차분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다.
아마도 나의 가난함이 학교의 친구들에게 드러나게 되는 상황이 닥치면, 난 몹시 불안해하고 어떻게든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어떤 날은 도시락 반찬이 부끄러워서 점심을 굶은 적도 있었으며, 집에 놀러 오려는 친구를 떼어내려고 갖은 설득을 했던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리도 가난을 부끄럽게 여겼던 것일까?
과연 가난하다는 것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
가난하다는 것이 부끄럽다는 감정은 대체 어떻게 갖게 된 것일까?
친구들과 비교를 하면서 무언가 다르다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가난이라는 것을 어찌 알게 되었는지,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정말로 궁금하다.
2015년 9월 13일 일요일
선(善)과 악(惡)은 존재하는가
최근의 유럽은 시리아 난민들의 대거 유입으로 꽤 시끄러운 상황이다.
시리아 국내의 정치 불안과 새로운 이슬람 국가를 표방하는 테러집단인 IS의 활동으로 시리아 국민들이 살기 위해 고향을 버리고 유럽으로 무작정 이주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아 난민들을 모두 수용할 수는 없었고 일부 유럽 국가들은 반 이슬람 정서의 팽배로 난민 수용을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와중에 배가 침몰해 난민들이 물에 빠져 죽는 상황이 발생하고, 3살짜리 쿠르디라는 아주 어린 아이의 시체가 해변에 밀려온 사진이 사람들을 슬픔에 빠지게 했다.
참 어려운 문제다.
무조건 난민을 수용하는 것도 딱히 좋다고만 할 수도 없으며, 난민을 거부하는 국가나 국민들도 나름의 충분한 이유는 있으니 어느 한쪽을 비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다면, 난민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인 IS와 시리아에 대한 국제 사회의 적절한 대응은 불가능한 것인가?
IS는 이미 여러차례 국제 테러를 자행했으니 토벌을 위한 명분에는 문제가 없지만, 현실적인 방법의 문제나 전쟁의 득실에 관한 문제들이 장벽이 되는 듯 하다.
하지만, 시리아의 내전과 정치적인 불안 등이 더 풀기 어려운 문제로 보인다.
아마도 시리아의 국민들 스스로는 문제의 해결에 대한 방법들을 생각하고 있을테지만,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통합된 방법은 없지 않겠나 싶다.
총론에서는 찬성하지만 각론에 들어가면 다시 갈라지고 싸울 수 밖에 없는 그런...
(이건 전적으로 시리아 문외한이 상상해본 통상적인 예상일 뿐이다.)
그러니 제 3자일 수 밖에 없는 타국가에서 도움을 주려 해도, 어떻게 도움을 줘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아닐까?
이 사태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힘있는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등이 군사력 자랑만 하지 말고, IS도 몰아내고, 시리아의 내전도 종식시켜 주면 좋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과연 그게 시리아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라는 의문도 들었다.
결국 힘있는 강국이나 UN등이 함부로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이란 건, 선(善)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없음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객관적으로 기준이 되는 선이 존재한다면, 그래서 그게 보편 타당한 선이 된다면, 그건 절대 선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흔히들, 각 종교의 신은 선의 상징이며 선의 화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이 된다.
그래서 그 반대편에는 악마들이 대립하여 존재하곤 한다.
자연은 신의 피조물이며, 인간도 신의 피조물이다.
그러면 자연은 선해야 하고, 인간도 선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태양과 물이 모든 생명을 길러내지만, 죽음의 사막도 만들고, 홍수로 모든 것을 쓸어가기도 한다.
태풍과 지진, 화산과 혹한은 자연의 재해다.
자연의 현상은 선과 악이 없다.
단지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이로운 것은 선이요, 해로운 것은 악이다.
선한 것은 신의 축복이요, 악한 것은 악마의 장난이라 구분한 것은 오직 인간의 이해에 따른 것일 뿐이다.
인간이 없으면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없으며,
내가 없으면 모두가 자연스러운 것이다.
선과 악은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절대선과 절대악 또한 없다.
성선설과 성악설도 없는 것이다.
선과 악으로 구분된 신과 악마도 없는 것이다.
인간들이 모여사는 사회에서는 사회의 존립을 위해 후대에게 가르치는 필수적인 덕목이 선(善)이었지만, 원래 존재하지도 않고, 모든 사람들의 기준이 다른 선을 가르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모순 덩어리인 셈이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에 대한 가치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일종의 준폭력 행위인 셈이다.
선을 행하는 것이 대단히 도덕적이고 양심적이고 올바른 인간이라는 생각, 덕을 쌓아 내세를 밝게 한다는 종교적인 믿음 등이 매우 잘못된 가르침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영원히 풀리지 않는 자기 모순속에서, 마치 체한 듯이 한쪽은 계속 답답한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사회의 존립을 위해 법, 도덕, 양심, 예(禮) 등을 가르치는데, 이 덕목들과 선(善)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니, 선과 관련은 있으되, 개개인의 선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며, 사람사이에 다른 기준의 선이 서로 충돌할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사람들은 모두가 다르다는 것,
그들이 가진 선악의 기준도 다른다는 것,
누군가 타인에게 선을 행하고 싶다면, 내 기준의 선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고,
타인의 선의 기준이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고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시리아 국내의 정치 불안과 새로운 이슬람 국가를 표방하는 테러집단인 IS의 활동으로 시리아 국민들이 살기 위해 고향을 버리고 유럽으로 무작정 이주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아 난민들을 모두 수용할 수는 없었고 일부 유럽 국가들은 반 이슬람 정서의 팽배로 난민 수용을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와중에 배가 침몰해 난민들이 물에 빠져 죽는 상황이 발생하고, 3살짜리 쿠르디라는 아주 어린 아이의 시체가 해변에 밀려온 사진이 사람들을 슬픔에 빠지게 했다.
참 어려운 문제다.
무조건 난민을 수용하는 것도 딱히 좋다고만 할 수도 없으며, 난민을 거부하는 국가나 국민들도 나름의 충분한 이유는 있으니 어느 한쪽을 비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다면, 난민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인 IS와 시리아에 대한 국제 사회의 적절한 대응은 불가능한 것인가?
IS는 이미 여러차례 국제 테러를 자행했으니 토벌을 위한 명분에는 문제가 없지만, 현실적인 방법의 문제나 전쟁의 득실에 관한 문제들이 장벽이 되는 듯 하다.
하지만, 시리아의 내전과 정치적인 불안 등이 더 풀기 어려운 문제로 보인다.
아마도 시리아의 국민들 스스로는 문제의 해결에 대한 방법들을 생각하고 있을테지만,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통합된 방법은 없지 않겠나 싶다.
총론에서는 찬성하지만 각론에 들어가면 다시 갈라지고 싸울 수 밖에 없는 그런...
(이건 전적으로 시리아 문외한이 상상해본 통상적인 예상일 뿐이다.)
그러니 제 3자일 수 밖에 없는 타국가에서 도움을 주려 해도, 어떻게 도움을 줘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아닐까?
이 사태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힘있는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등이 군사력 자랑만 하지 말고, IS도 몰아내고, 시리아의 내전도 종식시켜 주면 좋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과연 그게 시리아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라는 의문도 들었다.
결국 힘있는 강국이나 UN등이 함부로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이란 건, 선(善)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없음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객관적으로 기준이 되는 선이 존재한다면, 그래서 그게 보편 타당한 선이 된다면, 그건 절대 선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흔히들, 각 종교의 신은 선의 상징이며 선의 화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이 된다.
그래서 그 반대편에는 악마들이 대립하여 존재하곤 한다.
자연은 신의 피조물이며, 인간도 신의 피조물이다.
그러면 자연은 선해야 하고, 인간도 선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태양과 물이 모든 생명을 길러내지만, 죽음의 사막도 만들고, 홍수로 모든 것을 쓸어가기도 한다.
태풍과 지진, 화산과 혹한은 자연의 재해다.
자연의 현상은 선과 악이 없다.
단지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이로운 것은 선이요, 해로운 것은 악이다.
선한 것은 신의 축복이요, 악한 것은 악마의 장난이라 구분한 것은 오직 인간의 이해에 따른 것일 뿐이다.
인간이 없으면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없으며,
내가 없으면 모두가 자연스러운 것이다.
선과 악은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절대선과 절대악 또한 없다.
성선설과 성악설도 없는 것이다.
선과 악으로 구분된 신과 악마도 없는 것이다.
인간들이 모여사는 사회에서는 사회의 존립을 위해 후대에게 가르치는 필수적인 덕목이 선(善)이었지만, 원래 존재하지도 않고, 모든 사람들의 기준이 다른 선을 가르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모순 덩어리인 셈이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에 대한 가치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일종의 준폭력 행위인 셈이다.
선을 행하는 것이 대단히 도덕적이고 양심적이고 올바른 인간이라는 생각, 덕을 쌓아 내세를 밝게 한다는 종교적인 믿음 등이 매우 잘못된 가르침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영원히 풀리지 않는 자기 모순속에서, 마치 체한 듯이 한쪽은 계속 답답한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사회의 존립을 위해 법, 도덕, 양심, 예(禮) 등을 가르치는데, 이 덕목들과 선(善)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니, 선과 관련은 있으되, 개개인의 선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며, 사람사이에 다른 기준의 선이 서로 충돌할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사람들은 모두가 다르다는 것,
그들이 가진 선악의 기준도 다른다는 것,
누군가 타인에게 선을 행하고 싶다면, 내 기준의 선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고,
타인의 선의 기준이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고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2015년 8월 16일 일요일
어리석은 지식의 챗바퀴
나는 엔지니어다.
아니 엔지니어였다.
아니 엔지니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엔지니어답지 못했던 점이 불쑥 불쑥 기억나서,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욕을 하고, 혼자서 얼굴을 붉히곤 한다.
엔지니어답다는 건 무엇일까?
아마도 여러가지 특성을 모아야 엔지니어답다는 묘사가 어울리겠지만, 당장의 생각으로 떠오르는 덕목은 완벽함에의 추구이고, 철저함에의 전력이다.
나는 완벽하지 못했고- 사실 누근들 완벽하겠는가만- 완벽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당당할 수 없었다.
그래 이젠 지난 일이다.
엔지니어가 대단한 사회적 지위나 명망이 아니니 스스로의 자부심만 뺀다면 있으나 마나 했던 신기루와 다름 없다.
하지만, 이런 습성이 남아서인지, 종종, 여러가지 문제를 대할 때마다 완벽한 해법을 찾아 보곤 한다.
그건 공학적인 문제가 아닌, 기계나 전기의 문제가 아닌, 인간 사회 정치 경제 등의 현실생활의 문제에까지도 그렇다.
특히 정치나 사회의 문제들을 보면, 비슷한 문제, 비슷한 사건, 비슷한 논란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게 되고, 언제나 같은 식으로 반복 (문제 발생/제기 - 해법의 출현 - 반론의 출현 - 해법과 반론에 대한 다양한 여론/언론의 찬성과 반대 - 해법/반론/첨언의 무한 반복 - 어물쩡 마무리)되는 것에 염증을 넘어 분노까지 느끼게 된다.
대체 왜 이런 어리석은 현상은 나아지지 않고 반복되는걸까?
소위 사회의 지도층이나 정치인 언론인들이라는, 오피니언 리더들, 사회적 영향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어찌 이다지도 어리석은걸까?
능력이 있는 정치권의 인사라고 해도, 그들이 제대로 해결하는 문제는 100중에 10이 안되는 것 같다.
역대 대통령들을 봐도 비슷해 보인다.
10%면 아주 우수해 보이고, 2~3%면 보통이라 할 것이며, 그 이하는 대부분 해결해 놓은 문제보다 저질러 놓은 문제들이 더 많아 보인다.
1년에 10%씩 나아진다면 정말 좋은 시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국민학교 시절엔 똑똑한 아이들이 어떤지 몰랐다. 크게 튀지도 않았으니까..
중학교 시절엔 아주 간혹 별나게 똑똑한 아이들이 있었던 거 같다.
고등학교 시절에 보니, 노력으로 쫓아갈 수 없는 차이라는게 존재한다는 걸 느꼈던 거 같다.
그만치 뛰어난 학생들이 최고의 대학에 가서, 또 그만큼의 뛰어난 능력으로 노력하고, 다시 사회에 나와서 저만치 보이지도 않게 앞서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뛰어난 능력과 뛰어난 열정으로 노력한 사람들과 마찬가지인 사람들이 지금 이 사회의 영향력을 쥐고 있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 뛰어난 인재들이, 내가 봐도 허탈할 정도의 어리석은 해법만 제시하는 것일까?
너무 뛰어나서 내가 그 뜻을 제대로 짐작하지도 못하는 것일까?
연작(燕雀)이 안지(安知) 홍곡지지재(鴻鵠之志哉)리요
언젠가 문득 떠 오른 뿌연 생각 하나,
매일 아침에 일나서 밥먹고 일하고 쉬고 밥먹고 싸고 놀고 자고....인 듯이 보이지만,
이런 일들도 순간 순간에 문제가 일어나고 있고, 곳곳에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 보면,
직장인 점심 시간만 되면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라는 문제로 고민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이게 일주일에 5번, 일년 365일 가운데 260일을 이 고민을 한다면?
나라면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을 것이다.
이 문제 하나만이라도 나의 일생에서 완벽히 해결이 된다면 세상이 훨씬 살기에 편해질거 같으니까.....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이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는 순간 내 인생의 여백은 더 넓어질까?
그렇게 하나씩 문제들이 해결되고 나면.....
문제가 아닌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결국 모든 문제의 해결은 모든 것의 존재가 사라짐과 같은 건 아닐까?
어쩌면, 모든 것이 문제이고, 순간 순간이 문제인 것은, 내가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며, 내가 존재하기에 문제로 인식된 것이 아닐까?
문제라는 건 대상이 원인인 듯 보이지만, 실은 문제 인식의 주체가 원인이다.
따라서 문제의 완벽한 해결은 인식의 주체를 제거해야 한다.
인간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문제를 인식한다는 것, 문제와 함께 어우러진다는 것이며,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스스로 문제라고 인식했던 생각(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문제를 해결한 인간은 죽음에 이른 인간 뿐이다.
나는 지식이 우리를 '꽤' 자유롭게 해 줄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문제에 대한 옳은 해법을 찾는 것은 바로 지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해결되는 문제보다 더 많은 문제들이 끊임없이 발생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식은 단지 챗바퀴에 불과했는지 모르겠다.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제자리였던 챗바퀴,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고 속도를 높일수록 다시 그만큼의 속도로 내게 쏟아지는 문제들의 챗바퀴.
결국에 문제의 원인이 나 자신이었음을 알아내야만 비로소 내려올 수 있는 챗바퀴...
아니 엔지니어였다.
아니 엔지니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엔지니어답지 못했던 점이 불쑥 불쑥 기억나서,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욕을 하고, 혼자서 얼굴을 붉히곤 한다.
엔지니어답다는 건 무엇일까?
아마도 여러가지 특성을 모아야 엔지니어답다는 묘사가 어울리겠지만, 당장의 생각으로 떠오르는 덕목은 완벽함에의 추구이고, 철저함에의 전력이다.
나는 완벽하지 못했고- 사실 누근들 완벽하겠는가만- 완벽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당당할 수 없었다.
그래 이젠 지난 일이다.
엔지니어가 대단한 사회적 지위나 명망이 아니니 스스로의 자부심만 뺀다면 있으나 마나 했던 신기루와 다름 없다.
하지만, 이런 습성이 남아서인지, 종종, 여러가지 문제를 대할 때마다 완벽한 해법을 찾아 보곤 한다.
그건 공학적인 문제가 아닌, 기계나 전기의 문제가 아닌, 인간 사회 정치 경제 등의 현실생활의 문제에까지도 그렇다.
특히 정치나 사회의 문제들을 보면, 비슷한 문제, 비슷한 사건, 비슷한 논란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게 되고, 언제나 같은 식으로 반복 (문제 발생/제기 - 해법의 출현 - 반론의 출현 - 해법과 반론에 대한 다양한 여론/언론의 찬성과 반대 - 해법/반론/첨언의 무한 반복 - 어물쩡 마무리)되는 것에 염증을 넘어 분노까지 느끼게 된다.
대체 왜 이런 어리석은 현상은 나아지지 않고 반복되는걸까?
소위 사회의 지도층이나 정치인 언론인들이라는, 오피니언 리더들, 사회적 영향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어찌 이다지도 어리석은걸까?
능력이 있는 정치권의 인사라고 해도, 그들이 제대로 해결하는 문제는 100중에 10이 안되는 것 같다.
역대 대통령들을 봐도 비슷해 보인다.
10%면 아주 우수해 보이고, 2~3%면 보통이라 할 것이며, 그 이하는 대부분 해결해 놓은 문제보다 저질러 놓은 문제들이 더 많아 보인다.
1년에 10%씩 나아진다면 정말 좋은 시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국민학교 시절엔 똑똑한 아이들이 어떤지 몰랐다. 크게 튀지도 않았으니까..
중학교 시절엔 아주 간혹 별나게 똑똑한 아이들이 있었던 거 같다.
고등학교 시절에 보니, 노력으로 쫓아갈 수 없는 차이라는게 존재한다는 걸 느꼈던 거 같다.
그만치 뛰어난 학생들이 최고의 대학에 가서, 또 그만큼의 뛰어난 능력으로 노력하고, 다시 사회에 나와서 저만치 보이지도 않게 앞서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뛰어난 능력과 뛰어난 열정으로 노력한 사람들과 마찬가지인 사람들이 지금 이 사회의 영향력을 쥐고 있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 뛰어난 인재들이, 내가 봐도 허탈할 정도의 어리석은 해법만 제시하는 것일까?
너무 뛰어나서 내가 그 뜻을 제대로 짐작하지도 못하는 것일까?
연작(燕雀)이 안지(安知) 홍곡지지재(鴻鵠之志哉)리요
언젠가 문득 떠 오른 뿌연 생각 하나,
매일 아침에 일나서 밥먹고 일하고 쉬고 밥먹고 싸고 놀고 자고....인 듯이 보이지만,
이런 일들도 순간 순간에 문제가 일어나고 있고, 곳곳에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 보면,
직장인 점심 시간만 되면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라는 문제로 고민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이게 일주일에 5번, 일년 365일 가운데 260일을 이 고민을 한다면?
나라면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을 것이다.
이 문제 하나만이라도 나의 일생에서 완벽히 해결이 된다면 세상이 훨씬 살기에 편해질거 같으니까.....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이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는 순간 내 인생의 여백은 더 넓어질까?
그렇게 하나씩 문제들이 해결되고 나면.....
문제가 아닌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결국 모든 문제의 해결은 모든 것의 존재가 사라짐과 같은 건 아닐까?
어쩌면, 모든 것이 문제이고, 순간 순간이 문제인 것은, 내가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며, 내가 존재하기에 문제로 인식된 것이 아닐까?
문제라는 건 대상이 원인인 듯 보이지만, 실은 문제 인식의 주체가 원인이다.
따라서 문제의 완벽한 해결은 인식의 주체를 제거해야 한다.
인간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문제를 인식한다는 것, 문제와 함께 어우러진다는 것이며,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스스로 문제라고 인식했던 생각(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문제를 해결한 인간은 죽음에 이른 인간 뿐이다.
나는 지식이 우리를 '꽤' 자유롭게 해 줄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문제에 대한 옳은 해법을 찾는 것은 바로 지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해결되는 문제보다 더 많은 문제들이 끊임없이 발생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식은 단지 챗바퀴에 불과했는지 모르겠다.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제자리였던 챗바퀴,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고 속도를 높일수록 다시 그만큼의 속도로 내게 쏟아지는 문제들의 챗바퀴.
결국에 문제의 원인이 나 자신이었음을 알아내야만 비로소 내려올 수 있는 챗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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