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6일 월요일

사랑 실연 아픔 그리고 이 감정들의 기억

많은 성인 남성들이 혼자 영화관에 가서 봤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확인된 바 없는) 영화인 <건축학개론>




영화라면 특수효과가 난무하는 SF나 큰 화면으로 어울리는 스케일이 큰 종류를 좋아하기에,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에 꽤 많은 입소문과 홍보로 호기심이 발동하기는 했지만, 어쩐지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장벽 같은게 있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명절의 연휴였을까, 그냥 주말이었을까, TV에서 방영해주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무리 남자가 나이가 들면 여성 호르몬의 분비로 많이 감성적이 된다고는 하지만, 보는 내내 왜 그리 많이 울었는지...
참 힘들게 봤다. 극장에 가서 보지 않은게 다행이었다 싶을 만큼 쿨쩍이면서....



아마도 사회 초년생이었던 즈음이었을 것이다.

TV 드라마는 지금도 거의 안보지만, 당시에 <남자대탐험>이라는 TV 드라마가 방영되었고, 이건 참 열심히 봤던 기억이 있다.



순수한 사랑, 현실의 장벽, 다른 선택, 헤어짐, 아픔...

어찌보면 흔할게 볼 수 있는 소재를 이용한 청춘물의 드라마였는데, 재미있게도 봤고, 인기도 많았던 기억이다.


어느날 오래된 차 안에서, 예전에 사 두었던 이 드라마의 OST 테잎을 발견해서 참 반가와했는데, 유튜브에도 이 음악이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 이 동영상에 달린 댓글 가운데, 이 드라마에 관해 요약해 놓은 것이 있었다.



참....이 댓글을 보고 있자니, 옛날 봤던 이 드라마의 줄거리들이 새록 새록 기억나고, 특히 영웅이가 여관방에서 직업 여성을 불러놓고 첫사랑의 이름을 부르는 대목에서는....아마도 대부분의 남자들이 공감할, 정말 쓰라린 기억이 아닐까 싶어 눈시울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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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주저리 주저리 장황하게 넋두리를 했지만, 위의 두 작품은 전형적인 성장 드라마이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을 볼 때, 격하게 공감이 되는 건 그 만큼 유사한 경험을 했다는 의미이고, 또한 이런 작품이 흥행에 성공한다는 건 꽤 많은 수가 유사한 경험을 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는 중년을 넘기는 나이가 되고 보니, 젊은 날과 같은 사랑의 감정이 생기기도 어렵겠지만, 저 시절과 같은 두근거림이 한때의 감정일 뿐, 영원할 수 없음도 알고 있게 되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 나이가 되고, 저 작품들을 보면, 사랑의 감정에 대해 공감은 해도, 순간의 감정이란걸 알고 있어서인지 미소를 지으며 넘길 수 있는데....
실연의 아픔, 상실의 아픔은 왜 저 때보다 지금이 더 심한 것인지 모르겠다.

내 일이 아님에도, 그 상처와 좌절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아프고 너무 힘들다.
왜일까?

사랑의 기억보다 슬픔의 기억이 더 오래 지속되고, 더 명확하게 각인이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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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연말에 건축학개론에 대한 글을, 비슷한 감정으로 포스팅했었다.
http://re-unify.blogspot.kr/2014/12/blog-post_29.html

2015년 11월 6일 금요일

부끄러움은 본능인가 학습인가

부끄러움 이라는 감정은 수치스러움과 수줍음으로 나뉠 수 있다고 한다.

수치스럼움과 수줍음이 같은 뿌리의 감정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얼핏 드는 생각에, 수줍음은 다분히 선천적인 개인 성향인 경우가 많지 않나 싶다.

내가 궁금히 여기는 부분은 수줍음이 아닌 수치스러움에 대한 것이니, 질문을 다시 바꾸어 보면,

수치스러움은 본능적인가 학습된 것인가?


현재의 나를 알기 위한 과거로의 여행에서 발견하게 된 모습에서, 유년 시절 나의 수치스러움이 두드려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가운데, 가난과 부유함에서 오는 수치스러움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아직까지도 빈부에 대한 인식이나 감정은 차분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다.

아마도 나의 가난함이 학교의 친구들에게 드러나게 되는 상황이 닥치면, 난 몹시 불안해하고 어떻게든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어떤 날은 도시락 반찬이 부끄러워서 점심을 굶은 적도 있었으며, 집에 놀러 오려는 친구를 떼어내려고 갖은 설득을 했던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리도 가난을 부끄럽게 여겼던 것일까?

과연 가난하다는 것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

가난하다는 것이 부끄럽다는 감정은 대체 어떻게 갖게 된 것일까?

친구들과 비교를 하면서 무언가 다르다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가난이라는 것을 어찌 알게 되었는지,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정말로 궁금하다.

2015년 9월 13일 일요일

선(善)과 악(惡)은 존재하는가

최근의 유럽은 시리아 난민들의 대거 유입으로 꽤 시끄러운 상황이다.

시리아 국내의 정치 불안과 새로운 이슬람 국가를 표방하는 테러집단인 IS의 활동으로 시리아 국민들이 살기 위해 고향을 버리고 유럽으로 무작정 이주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아 난민들을 모두 수용할 수는 없었고 일부 유럽 국가들은 반 이슬람 정서의 팽배로 난민 수용을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와중에 배가 침몰해 난민들이 물에 빠져 죽는 상황이 발생하고, 3살짜리 쿠르디라는 아주 어린 아이의 시체가 해변에 밀려온 사진이 사람들을 슬픔에 빠지게 했다.


참 어려운 문제다.
무조건 난민을 수용하는 것도 딱히 좋다고만 할 수도 없으며, 난민을 거부하는 국가나 국민들도 나름의 충분한 이유는 있으니 어느 한쪽을 비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다면, 난민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인 IS와 시리아에 대한 국제 사회의 적절한 대응은 불가능한 것인가?
IS는 이미 여러차례 국제 테러를 자행했으니 토벌을 위한 명분에는 문제가 없지만, 현실적인 방법의 문제나 전쟁의 득실에 관한 문제들이 장벽이 되는 듯 하다.

하지만, 시리아의 내전과 정치적인 불안 등이 더 풀기 어려운 문제로 보인다.

아마도 시리아의 국민들 스스로는 문제의 해결에 대한 방법들을 생각하고 있을테지만,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통합된 방법은 없지 않겠나 싶다.
총론에서는 찬성하지만 각론에 들어가면 다시 갈라지고 싸울 수 밖에 없는 그런...
(이건 전적으로 시리아 문외한이 상상해본 통상적인 예상일 뿐이다.)

그러니 제 3자일 수 밖에 없는 타국가에서 도움을 주려 해도, 어떻게 도움을 줘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아닐까?


이 사태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힘있는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등이 군사력 자랑만 하지 말고, IS도 몰아내고, 시리아의 내전도 종식시켜 주면 좋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과연 그게 시리아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라는 의문도 들었다.

결국 힘있는 강국이나 UN등이 함부로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이란 건, 선(善)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없음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객관적으로 기준이 되는 선이 존재한다면, 그래서 그게 보편 타당한 선이 된다면, 그건 절대 선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흔히들, 각 종교의 신은 선의 상징이며 선의 화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이 된다.
그래서 그 반대편에는 악마들이 대립하여 존재하곤 한다.

자연은 신의 피조물이며, 인간도 신의 피조물이다.
그러면 자연은 선해야 하고, 인간도 선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태양과 물이 모든 생명을 길러내지만, 죽음의 사막도 만들고, 홍수로 모든 것을 쓸어가기도 한다.
태풍과 지진, 화산과 혹한은 자연의 재해다.
자연의 현상은 선과 악이 없다.
단지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이로운 것은 선이요, 해로운 것은 악이다.
선한 것은 신의 축복이요, 악한 것은 악마의 장난이라 구분한 것은 오직 인간의 이해에 따른 것일 뿐이다.

인간이 없으면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없으며,
내가 없으면 모두가 자연스러운 것이다.

선과 악은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절대선과 절대악 또한 없다.
성선설과 성악설도 없는 것이다.
선과 악으로 구분된 신과 악마도 없는 것이다.


인간들이 모여사는 사회에서는 사회의 존립을 위해 후대에게 가르치는 필수적인 덕목이 선(善)이었지만, 원래 존재하지도 않고, 모든 사람들의 기준이 다른 선을 가르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모순 덩어리인 셈이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에 대한 가치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일종의 준폭력 행위인 셈이다.
선을 행하는 것이 대단히 도덕적이고 양심적이고 올바른 인간이라는 생각, 덕을 쌓아 내세를 밝게 한다는 종교적인 믿음 등이 매우 잘못된 가르침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영원히 풀리지 않는 자기 모순속에서, 마치 체한 듯이 한쪽은 계속 답답한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사회의 존립을 위해 법, 도덕, 양심, 예(禮) 등을 가르치는데, 이 덕목들과 선(善)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니, 선과 관련은 있으되, 개개인의 선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며, 사람사이에 다른 기준의 선이 서로 충돌할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사람들은 모두가 다르다는 것,
그들이 가진 선악의 기준도 다른다는 것,
누군가 타인에게 선을 행하고 싶다면, 내 기준의 선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고,
타인의 선의 기준이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고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2015년 8월 16일 일요일

어리석은 지식의 챗바퀴

나는 엔지니어다.
아니 엔지니어였다.
아니 엔지니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엔지니어답지 못했던 점이 불쑥 불쑥 기억나서,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욕을 하고, 혼자서 얼굴을 붉히곤 한다.

엔지니어답다는 건 무엇일까?
아마도 여러가지 특성을 모아야 엔지니어답다는 묘사가 어울리겠지만, 당장의 생각으로 떠오르는 덕목은 완벽함에의 추구이고, 철저함에의 전력이다.

나는 완벽하지 못했고- 사실 누근들 완벽하겠는가만- 완벽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당당할 수 없었다.


그래 이젠 지난 일이다.
엔지니어가 대단한 사회적 지위나 명망이 아니니 스스로의 자부심만 뺀다면 있으나 마나 했던 신기루와 다름 없다.



하지만, 이런 습성이 남아서인지, 종종, 여러가지 문제를 대할 때마다 완벽한 해법을 찾아 보곤 한다.

그건 공학적인 문제가 아닌, 기계나 전기의 문제가 아닌, 인간 사회 정치 경제 등의 현실생활의 문제에까지도 그렇다.

특히 정치나 사회의 문제들을 보면, 비슷한 문제, 비슷한 사건, 비슷한 논란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게 되고, 언제나 같은 식으로 반복 (문제 발생/제기 - 해법의 출현 - 반론의 출현 - 해법과 반론에 대한 다양한 여론/언론의 찬성과 반대 - 해법/반론/첨언의 무한 반복 - 어물쩡 마무리)되는 것에 염증을 넘어 분노까지 느끼게 된다.

대체 왜 이런 어리석은 현상은 나아지지 않고 반복되는걸까?

소위 사회의 지도층이나 정치인 언론인들이라는, 오피니언 리더들, 사회적 영향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어찌 이다지도 어리석은걸까?


능력이 있는 정치권의 인사라고 해도, 그들이 제대로 해결하는 문제는 100중에 10이 안되는 것 같다.

역대 대통령들을 봐도 비슷해 보인다.

10%면 아주 우수해 보이고, 2~3%면 보통이라 할 것이며, 그 이하는 대부분 해결해 놓은 문제보다 저질러 놓은 문제들이 더 많아 보인다.

1년에 10%씩 나아진다면 정말 좋은 시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국민학교 시절엔 똑똑한 아이들이 어떤지 몰랐다. 크게 튀지도 않았으니까..

중학교 시절엔 아주 간혹 별나게 똑똑한 아이들이 있었던 거 같다.

고등학교 시절에 보니, 노력으로 쫓아갈 수 없는 차이라는게 존재한다는 걸 느꼈던 거 같다.

그만치 뛰어난 학생들이 최고의 대학에 가서, 또 그만큼의 뛰어난 능력으로 노력하고, 다시 사회에 나와서 저만치 보이지도 않게 앞서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뛰어난 능력과 뛰어난 열정으로 노력한 사람들과 마찬가지인 사람들이 지금 이 사회의 영향력을 쥐고 있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 뛰어난 인재들이, 내가 봐도 허탈할 정도의 어리석은 해법만 제시하는 것일까?

너무 뛰어나서 내가 그 뜻을 제대로 짐작하지도 못하는 것일까?

연작(燕雀)이 안지(安知) 홍곡지지재(鴻鵠之志哉)리요



언젠가 문득 떠 오른 뿌연 생각 하나,

매일 아침에 일나서 밥먹고 일하고 쉬고 밥먹고 싸고 놀고 자고....인 듯이 보이지만,

이런 일들도 순간 순간에 문제가 일어나고 있고, 곳곳에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 보면,

직장인 점심 시간만 되면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라는 문제로 고민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이게 일주일에 5번, 일년 365일 가운데 260일을 이 고민을 한다면?

나라면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을 것이다.

이 문제 하나만이라도 나의 일생에서 완벽히 해결이 된다면 세상이 훨씬 살기에 편해질거 같으니까.....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이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는 순간 내 인생의 여백은 더 넓어질까?

그렇게 하나씩 문제들이 해결되고 나면.....

문제가 아닌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결국 모든 문제의 해결은 모든 것의 존재가 사라짐과 같은 건 아닐까?

어쩌면, 모든 것이 문제이고, 순간 순간이 문제인 것은, 내가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며, 내가 존재하기에 문제로 인식된 것이 아닐까?



문제라는 건 대상이 원인인 듯 보이지만, 실은 문제 인식의 주체가 원인이다.

따라서 문제의 완벽한 해결은 인식의 주체를 제거해야 한다.

인간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문제를 인식한다는 것, 문제와 함께 어우러진다는 것이며,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스스로 문제라고 인식했던 생각(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문제를 해결한 인간은 죽음에 이른 인간 뿐이다.



나는 지식이 우리를 '꽤' 자유롭게 해 줄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문제에 대한 옳은 해법을 찾는 것은 바로 지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해결되는 문제보다 더 많은 문제들이 끊임없이 발생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식은 단지 챗바퀴에 불과했는지 모르겠다.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제자리였던 챗바퀴,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고 속도를 높일수록 다시 그만큼의 속도로 내게 쏟아지는 문제들의 챗바퀴.

결국에 문제의 원인이 나 자신이었음을 알아내야만 비로소 내려올 수 있는 챗바퀴...

2015년 8월 13일 목요일

요지경인 마음의 흔들림

모처럼만에 남매간의 식사 모임을 인사동에서 가졌다.

점심식사를 하면서 만남을 가진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직은 퇴근 시간이 되기 전, 서둘러 을지로에서 버스를 탔다.

버스엔 자리가 많았는데, 군데 군데 보이는 승객 가운데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백발인 머리에 크지 않은 눈의, 대략 6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버스의 뒷쪽에 앉아있는 그 사람은 내가 알던 사람과 매우 흡사해 보여서 잠시나마 그를 쳐다보았고, 그 사람도 나를 쳐다보았고, 눈을 돌리지 않았다.

나는 짧은 시간 고민하다가 앞쪽 좌석에 앉았다.


예전 직장에서, 나의 직속 상관은 아니지만, 직책으로는 나보다 위였던 손모씨와 매우 닮았던 그 사람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정말 그 손모씨인걸까? 그냥 닮은 사람인걸까?

가서 아는체를 해야하는 걸까? 그냥 모른체 할까?

그 손모씨가 맞다면, 그 사람의 성격으로는 모른체 지나갈리가 없지만, 예전과 달리 염색도 하지 않은 듯이 백발인 점, 평일 업무시간에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점을 미루어 보면, 나처럼 쇠락하여 많이 위축되어 그럴지도 모른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버스의 행선지는 내가 알던 그의 집과는 다른 방향이다.
역시 그냥 닮은 사람일까?
아니라면, 혹시 최근에 벤쳐 타운으로 조성된 곳에 새로운 직장을 가지고 있으며, 그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 이 손모씨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결코 좋은 기억을 떠 올리기 함든 사이였다.
아마도 전 직장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테지만,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회사의 발전에 기여한 점이 거의 없었으며, 겉보기엔 사람들 만나며 웃고 즐기는 게 주된 일인 것으로 보였으니, 한마디로 거머리와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새로운 직장을 가지고 있다면, 나에게도 좋은 자리를 제공해 줄지 모른다는 희망이 스멀스멀 생기고 있었다.
치욕적이지만, 지금의 내 신세가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도 아니거니와, 사실 손모씨도 자신이 우리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는 것을 은근히 인정한 적이 있었기에 나름의 명문은 있다고까지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정말 그 손모씨라면,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
자신이 일하는 직장에 정말 내가 필요하다면 그가 먼저 적극적으로 내게 다가올테지만, 지금 그러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이며, 그렇다면 나는 공연히 아쉬운 얘기만 하는 꼴이 될것이었다.


수많은 생각이 머리속에 들고 왼쪽과 오른쪽으로, 위와 아래로 요동을 치며 기대와 좌절 희망과 절망이 교차되었다.


드디어, 벤처타운에 진입한 버스가 몇개의 정류소에 정차했지만, 그는 하차하지 않았다.

왜? 어째서? 혹시 그 사이에 이사라도 한 것일까?

버스는 벤처타운을 벗어나 아파트 촌을 돌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는 내리지 않았다.

아니....어쩌면 그가 나를 따라 내리려고 작정한 것이 아닐까?
오히려 그가 나에게 무언가 곤란한 부탁을 하려는 것은 아닐까?
집으로 가자고 하면 어쩌지?
근처에 얘기할만한 장소가 어디 있을까?


내가 하차할 정류소가 3개 정도 남았을 즈음에 그는 내렸다.

하차하면서 나에게 뭐라고 한마디 하는 것은 아닐까 했던 우려와 달리 그냥 내렸다.

그리고, 출발하는 버스의 창문을 통해서 얼핏 그의 모습을 보았다.

좀 많이 달랐다. 그냥 얼핏 보기에 손모씨는 닮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1시간 가량의 주행시간동안 내 머리속에서 요동쳤던 갖가지 생각들은 대체 뭐였던 것인지 허탈하기 그지 없었다.

아니, 혼자서 온갖 상상을 하며 단독 쇼를 펼쳤던 내 자신이 한심했다.

이게 내 인생이었다.

용감하게, 순수하게, 담백하게, 그냥 행동했다면 나의 1시간은 쾌적한 여행일 수 있었겠지만, 마음의 흔들림이 나를 그냥 두지 않았고, 나는 거기에 놀아났던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며 제자가 스승님에게 물었다.
스승님, 지금 흔들리는 것은 나뭇가지입니까, 바람입니까?
스승님이 답하길, 흔들리는 것은 나뭇가지도 바람도 아니며, 오직 너의 마음뿐이다.
(달콤한 인생, Dialogue #3)


마음은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은 원래 흔들리는 것이라는 걸 인정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차분히 관조하며, 고요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법륜스님, 즉문즉설)


마음을 고요히 해야 하는 이유

잡히지 않을 듯 아주 미약한 마음의 움직임이 있다.

너무 미약해서 곧잘 무시된곤 하고, 너무 미약해서 기억되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엔, 다른 것들로 인하여 마음이 시끄럽고 혼잡하여 이 움직임을 알아채지도 못한다.

하지만 틀림없이 존재하는 움직임이다.

이 미약한 움직임은 곧 무성하게 자라날 큰 나무의 씨앗일런지도 모른다.

아직은 작고 약하기에 소중하게 보살펴야만 자라날 것이요, 마음속에 몰아치는 폭풍우에 그대로 방치하면 그대로 사라져버릴 그런 씨앗.


초발심이라는 말이 있다.

불교라는 제한을 두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겠다고, 혹은 무엇을 하고 싶다는 최초의 마음을 말한다.

이런 마음이 대체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 방법은 없으나, 초발심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첫발걸음이며, 필수조건이다.

초발심 없이 무언가 이루어진다면, 그건 이루어짐을 인식할수도 없으며, 내것도 아니다.

초발심 없이 이룰 수 있는 내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초발심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 우리는 종종 마음을 고요히 하고, 마음속의 작은 움직임을 돌보아야하는 것이다.

2015년 7월 6일 월요일

뻔뻔함에 분노한 날, 이 분노의 원인은 무엇일까?

어젯밤에 작은 누이와 통화 내용...

큰 누이와 둘째 누이가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일본 여행을 다녀 오기로 했다고 한다.
문제는 큰 누이의 집에서 기르는 슈나우저가 혼자 있게되어 작은 누이에게 좀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
매형이 있으니 매형이 돌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매형이 개똥을 못치운다고 돌보지 못하겠다고 했단다.
그렇다고 개 호텔에 맡기자니 비용도 비용이지만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고...

전화 통화를 마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 말도 안되고 염치고 없고 뻔뻔스럽다는 생각에 화가 난다.
1년에 2번은 명절에 시골 간다고 개를 본가에 맡기는 바람에, 본가에 있는 부모님과 나, 누이와 원래 기르던 강아지들까지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한다.
장거리에 막히는 귀향 귀성길 생각하면 개를 맡겨 두는게 이해가 가지만, 참 매년 명절이 깝깝하다.

그런데 이번엔 더더욱 화가 나는게, 매형이 개똥을 못 치워서 맡긴다니....
매형이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누군 똥을 치울 줄 알아서 치운단 말인가?
적어도 가족간에 합의로 개를 키운다면, 가족 모두가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란 말인가?
.............


바로 그날 오후에 있었던 일이다.
사촌 누이 한분이 근방에 살고 계시는데, 몇년 전에 내가 살고 있는 집에 전입 신고를 해 두셨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부동산을 매각하면서 양도세를 좀 줄이시려 한 거 같았다.
누이가 처음 주민등록 전입 신고를 부탁했을 때, 사촌 지간이고, 일년에 제사로 2번 이상은 꼬박 꼬박 뵙게 되는 사이이고, 근방에 사시기 때문에 거절하기가 곤란했다.
암튼 그렇게 주민등록만 전입 신고를 한 채로 몇년이 지나면서, 가끔 우편물이 오면 문자로 알려 드리고, 누이도 가끔 고맙다며 커피나 견과류 따위를 선물로 주시곤 했다.
그리고 며칠 전, 국민연금 공단에서 우편물이 왔는데, 기초연금 수령 안내문인 듯 했다.
누이에게 알려 드리고 나서, 다음 날인가 누이가 전화를 하셨다.
기초연금 수령을 위해서는 내가 집을 무상으로 임대하고 있다는 확인서에 서명을 해야 하니 좀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나기로 한 것인데.....일단 전화로는 그러겠다고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 몰염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떳떳하지 못한 일에 조카더러 동조하라고 부탁을 한다는 것이,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부터 의문스러웠다.
내가 누이에게 그 만큼 도덕적이지 못한 이미지로 비춰진 것인지, 아니면 누이에게는 그런 정도의 위반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인지...

얻게 될 이익과 잃게 될 손실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찜찜한 일에 내가 적극적으로 확인서에 서명까지 하면서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거절했을 경우에 누이와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도 걱정이 되었지만, 용기를 내서 누이에게 거절을 했다.

다행히 누이는 선뜻 나의 제안을 받아들여 주었다.
공짜로 얻어먹은 도넛과 커피, 마카다미아 한통을 받은게 머쓱하긴 했지만 끝내고 돌아오면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날 어머님께 전화로 자초지종을 설명드렸고, 어머니는 잘 했다 하셨고, 작은 누이와 통화때에는 누이도 분개한 듯 했다.
그리고 이어진 통화의 내용이 큰누이네 개에 관한 얘기였다.

어딘지 비슷한 면을 가진 두개의 사건,
그리고 그것에 분개하는 작은 누이와 나....

큰누이가 본가에 개를 맡겨서 작은 누이와 강아지들이 스트레스를 받을 것에 대해서 분개하는 나,
나에게 정당하지 못한 일을 부탁해서 곤란하게 만든 사촌 누이에 대해 분개하는 작은 누이.

직접적인 피해의 당사자가 아니면서 왜 우리는 분개했던 것일까?


나는 심지어 이러면 어떨까 저러면 어떨까를 막 고민해 보기도 했었다.
큰누이나 매형에게 전화를 걸어서 따지려고까지 생각할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가해보니, 큰누이가 할 말이 상상되었다...."네가 왜 그러니?"

그래....난 당사자가 아니었다.
그저 작은 누이와 강아지들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생각했지만, 작은 누이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면 내가 정의의 사도인가?
그래서 모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분개하는가?
아니다....최소한 나 자신에 대해서는 아니다. 내가 저지르는 불의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합리화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내가 화가 난 상황이, TV에서 정치인들의 뻔뻠스러움이나 어처구니 없는 언행을 보았을 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분노의 원인이나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들은 비슷한 분노였던 것 같다.

그리고 부끄러워졌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왜 이 정도밖에 안되는걸까, 정치인들을 비난하고, 우매한 국민들을 한심하게 생각했었지만, 그건 내가 그 정도밖에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타인의 눈 속에 티는 귀신처럼 찾아내면서 내 눈속에 있는 댓돌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내가 바뀌지 않는데, 과연 누가 바뀌기를 바란단 말인가?
서로 비난하고 욕하고 헐 뜯는 속에선 아무 것도 나아질 수가 없었다.
그저 서로의 탓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바뀌면 주변의 몇몇은 바뀔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비로소 세상이 나아지는 시작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