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16일 일요일

어리석은 지식의 챗바퀴

나는 엔지니어다.
아니 엔지니어였다.
아니 엔지니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엔지니어답지 못했던 점이 불쑥 불쑥 기억나서,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욕을 하고, 혼자서 얼굴을 붉히곤 한다.

엔지니어답다는 건 무엇일까?
아마도 여러가지 특성을 모아야 엔지니어답다는 묘사가 어울리겠지만, 당장의 생각으로 떠오르는 덕목은 완벽함에의 추구이고, 철저함에의 전력이다.

나는 완벽하지 못했고- 사실 누근들 완벽하겠는가만- 완벽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당당할 수 없었다.


그래 이젠 지난 일이다.
엔지니어가 대단한 사회적 지위나 명망이 아니니 스스로의 자부심만 뺀다면 있으나 마나 했던 신기루와 다름 없다.



하지만, 이런 습성이 남아서인지, 종종, 여러가지 문제를 대할 때마다 완벽한 해법을 찾아 보곤 한다.

그건 공학적인 문제가 아닌, 기계나 전기의 문제가 아닌, 인간 사회 정치 경제 등의 현실생활의 문제에까지도 그렇다.

특히 정치나 사회의 문제들을 보면, 비슷한 문제, 비슷한 사건, 비슷한 논란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게 되고, 언제나 같은 식으로 반복 (문제 발생/제기 - 해법의 출현 - 반론의 출현 - 해법과 반론에 대한 다양한 여론/언론의 찬성과 반대 - 해법/반론/첨언의 무한 반복 - 어물쩡 마무리)되는 것에 염증을 넘어 분노까지 느끼게 된다.

대체 왜 이런 어리석은 현상은 나아지지 않고 반복되는걸까?

소위 사회의 지도층이나 정치인 언론인들이라는, 오피니언 리더들, 사회적 영향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어찌 이다지도 어리석은걸까?


능력이 있는 정치권의 인사라고 해도, 그들이 제대로 해결하는 문제는 100중에 10이 안되는 것 같다.

역대 대통령들을 봐도 비슷해 보인다.

10%면 아주 우수해 보이고, 2~3%면 보통이라 할 것이며, 그 이하는 대부분 해결해 놓은 문제보다 저질러 놓은 문제들이 더 많아 보인다.

1년에 10%씩 나아진다면 정말 좋은 시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국민학교 시절엔 똑똑한 아이들이 어떤지 몰랐다. 크게 튀지도 않았으니까..

중학교 시절엔 아주 간혹 별나게 똑똑한 아이들이 있었던 거 같다.

고등학교 시절에 보니, 노력으로 쫓아갈 수 없는 차이라는게 존재한다는 걸 느꼈던 거 같다.

그만치 뛰어난 학생들이 최고의 대학에 가서, 또 그만큼의 뛰어난 능력으로 노력하고, 다시 사회에 나와서 저만치 보이지도 않게 앞서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뛰어난 능력과 뛰어난 열정으로 노력한 사람들과 마찬가지인 사람들이 지금 이 사회의 영향력을 쥐고 있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 뛰어난 인재들이, 내가 봐도 허탈할 정도의 어리석은 해법만 제시하는 것일까?

너무 뛰어나서 내가 그 뜻을 제대로 짐작하지도 못하는 것일까?

연작(燕雀)이 안지(安知) 홍곡지지재(鴻鵠之志哉)리요



언젠가 문득 떠 오른 뿌연 생각 하나,

매일 아침에 일나서 밥먹고 일하고 쉬고 밥먹고 싸고 놀고 자고....인 듯이 보이지만,

이런 일들도 순간 순간에 문제가 일어나고 있고, 곳곳에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 보면,

직장인 점심 시간만 되면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라는 문제로 고민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이게 일주일에 5번, 일년 365일 가운데 260일을 이 고민을 한다면?

나라면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을 것이다.

이 문제 하나만이라도 나의 일생에서 완벽히 해결이 된다면 세상이 훨씬 살기에 편해질거 같으니까.....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이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는 순간 내 인생의 여백은 더 넓어질까?

그렇게 하나씩 문제들이 해결되고 나면.....

문제가 아닌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결국 모든 문제의 해결은 모든 것의 존재가 사라짐과 같은 건 아닐까?

어쩌면, 모든 것이 문제이고, 순간 순간이 문제인 것은, 내가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며, 내가 존재하기에 문제로 인식된 것이 아닐까?



문제라는 건 대상이 원인인 듯 보이지만, 실은 문제 인식의 주체가 원인이다.

따라서 문제의 완벽한 해결은 인식의 주체를 제거해야 한다.

인간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문제를 인식한다는 것, 문제와 함께 어우러진다는 것이며,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스스로 문제라고 인식했던 생각(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문제를 해결한 인간은 죽음에 이른 인간 뿐이다.



나는 지식이 우리를 '꽤' 자유롭게 해 줄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문제에 대한 옳은 해법을 찾는 것은 바로 지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해결되는 문제보다 더 많은 문제들이 끊임없이 발생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식은 단지 챗바퀴에 불과했는지 모르겠다.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제자리였던 챗바퀴,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고 속도를 높일수록 다시 그만큼의 속도로 내게 쏟아지는 문제들의 챗바퀴.

결국에 문제의 원인이 나 자신이었음을 알아내야만 비로소 내려올 수 있는 챗바퀴...

2015년 8월 13일 목요일

요지경인 마음의 흔들림

모처럼만에 남매간의 식사 모임을 인사동에서 가졌다.

점심식사를 하면서 만남을 가진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직은 퇴근 시간이 되기 전, 서둘러 을지로에서 버스를 탔다.

버스엔 자리가 많았는데, 군데 군데 보이는 승객 가운데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백발인 머리에 크지 않은 눈의, 대략 6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버스의 뒷쪽에 앉아있는 그 사람은 내가 알던 사람과 매우 흡사해 보여서 잠시나마 그를 쳐다보았고, 그 사람도 나를 쳐다보았고, 눈을 돌리지 않았다.

나는 짧은 시간 고민하다가 앞쪽 좌석에 앉았다.


예전 직장에서, 나의 직속 상관은 아니지만, 직책으로는 나보다 위였던 손모씨와 매우 닮았던 그 사람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정말 그 손모씨인걸까? 그냥 닮은 사람인걸까?

가서 아는체를 해야하는 걸까? 그냥 모른체 할까?

그 손모씨가 맞다면, 그 사람의 성격으로는 모른체 지나갈리가 없지만, 예전과 달리 염색도 하지 않은 듯이 백발인 점, 평일 업무시간에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점을 미루어 보면, 나처럼 쇠락하여 많이 위축되어 그럴지도 모른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버스의 행선지는 내가 알던 그의 집과는 다른 방향이다.
역시 그냥 닮은 사람일까?
아니라면, 혹시 최근에 벤쳐 타운으로 조성된 곳에 새로운 직장을 가지고 있으며, 그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 이 손모씨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결코 좋은 기억을 떠 올리기 함든 사이였다.
아마도 전 직장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테지만,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회사의 발전에 기여한 점이 거의 없었으며, 겉보기엔 사람들 만나며 웃고 즐기는 게 주된 일인 것으로 보였으니, 한마디로 거머리와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새로운 직장을 가지고 있다면, 나에게도 좋은 자리를 제공해 줄지 모른다는 희망이 스멀스멀 생기고 있었다.
치욕적이지만, 지금의 내 신세가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도 아니거니와, 사실 손모씨도 자신이 우리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는 것을 은근히 인정한 적이 있었기에 나름의 명문은 있다고까지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정말 그 손모씨라면,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
자신이 일하는 직장에 정말 내가 필요하다면 그가 먼저 적극적으로 내게 다가올테지만, 지금 그러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이며, 그렇다면 나는 공연히 아쉬운 얘기만 하는 꼴이 될것이었다.


수많은 생각이 머리속에 들고 왼쪽과 오른쪽으로, 위와 아래로 요동을 치며 기대와 좌절 희망과 절망이 교차되었다.


드디어, 벤처타운에 진입한 버스가 몇개의 정류소에 정차했지만, 그는 하차하지 않았다.

왜? 어째서? 혹시 그 사이에 이사라도 한 것일까?

버스는 벤처타운을 벗어나 아파트 촌을 돌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는 내리지 않았다.

아니....어쩌면 그가 나를 따라 내리려고 작정한 것이 아닐까?
오히려 그가 나에게 무언가 곤란한 부탁을 하려는 것은 아닐까?
집으로 가자고 하면 어쩌지?
근처에 얘기할만한 장소가 어디 있을까?


내가 하차할 정류소가 3개 정도 남았을 즈음에 그는 내렸다.

하차하면서 나에게 뭐라고 한마디 하는 것은 아닐까 했던 우려와 달리 그냥 내렸다.

그리고, 출발하는 버스의 창문을 통해서 얼핏 그의 모습을 보았다.

좀 많이 달랐다. 그냥 얼핏 보기에 손모씨는 닮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1시간 가량의 주행시간동안 내 머리속에서 요동쳤던 갖가지 생각들은 대체 뭐였던 것인지 허탈하기 그지 없었다.

아니, 혼자서 온갖 상상을 하며 단독 쇼를 펼쳤던 내 자신이 한심했다.

이게 내 인생이었다.

용감하게, 순수하게, 담백하게, 그냥 행동했다면 나의 1시간은 쾌적한 여행일 수 있었겠지만, 마음의 흔들림이 나를 그냥 두지 않았고, 나는 거기에 놀아났던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며 제자가 스승님에게 물었다.
스승님, 지금 흔들리는 것은 나뭇가지입니까, 바람입니까?
스승님이 답하길, 흔들리는 것은 나뭇가지도 바람도 아니며, 오직 너의 마음뿐이다.
(달콤한 인생, Dialogue #3)


마음은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은 원래 흔들리는 것이라는 걸 인정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차분히 관조하며, 고요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법륜스님, 즉문즉설)


마음을 고요히 해야 하는 이유

잡히지 않을 듯 아주 미약한 마음의 움직임이 있다.

너무 미약해서 곧잘 무시된곤 하고, 너무 미약해서 기억되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엔, 다른 것들로 인하여 마음이 시끄럽고 혼잡하여 이 움직임을 알아채지도 못한다.

하지만 틀림없이 존재하는 움직임이다.

이 미약한 움직임은 곧 무성하게 자라날 큰 나무의 씨앗일런지도 모른다.

아직은 작고 약하기에 소중하게 보살펴야만 자라날 것이요, 마음속에 몰아치는 폭풍우에 그대로 방치하면 그대로 사라져버릴 그런 씨앗.


초발심이라는 말이 있다.

불교라는 제한을 두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겠다고, 혹은 무엇을 하고 싶다는 최초의 마음을 말한다.

이런 마음이 대체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 방법은 없으나, 초발심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첫발걸음이며, 필수조건이다.

초발심 없이 무언가 이루어진다면, 그건 이루어짐을 인식할수도 없으며, 내것도 아니다.

초발심 없이 이룰 수 있는 내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초발심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 우리는 종종 마음을 고요히 하고, 마음속의 작은 움직임을 돌보아야하는 것이다.

2015년 7월 6일 월요일

뻔뻔함에 분노한 날, 이 분노의 원인은 무엇일까?

어젯밤에 작은 누이와 통화 내용...

큰 누이와 둘째 누이가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일본 여행을 다녀 오기로 했다고 한다.
문제는 큰 누이의 집에서 기르는 슈나우저가 혼자 있게되어 작은 누이에게 좀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
매형이 있으니 매형이 돌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매형이 개똥을 못치운다고 돌보지 못하겠다고 했단다.
그렇다고 개 호텔에 맡기자니 비용도 비용이지만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고...

전화 통화를 마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 말도 안되고 염치고 없고 뻔뻔스럽다는 생각에 화가 난다.
1년에 2번은 명절에 시골 간다고 개를 본가에 맡기는 바람에, 본가에 있는 부모님과 나, 누이와 원래 기르던 강아지들까지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한다.
장거리에 막히는 귀향 귀성길 생각하면 개를 맡겨 두는게 이해가 가지만, 참 매년 명절이 깝깝하다.

그런데 이번엔 더더욱 화가 나는게, 매형이 개똥을 못 치워서 맡긴다니....
매형이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누군 똥을 치울 줄 알아서 치운단 말인가?
적어도 가족간에 합의로 개를 키운다면, 가족 모두가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란 말인가?
.............


바로 그날 오후에 있었던 일이다.
사촌 누이 한분이 근방에 살고 계시는데, 몇년 전에 내가 살고 있는 집에 전입 신고를 해 두셨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부동산을 매각하면서 양도세를 좀 줄이시려 한 거 같았다.
누이가 처음 주민등록 전입 신고를 부탁했을 때, 사촌 지간이고, 일년에 제사로 2번 이상은 꼬박 꼬박 뵙게 되는 사이이고, 근방에 사시기 때문에 거절하기가 곤란했다.
암튼 그렇게 주민등록만 전입 신고를 한 채로 몇년이 지나면서, 가끔 우편물이 오면 문자로 알려 드리고, 누이도 가끔 고맙다며 커피나 견과류 따위를 선물로 주시곤 했다.
그리고 며칠 전, 국민연금 공단에서 우편물이 왔는데, 기초연금 수령 안내문인 듯 했다.
누이에게 알려 드리고 나서, 다음 날인가 누이가 전화를 하셨다.
기초연금 수령을 위해서는 내가 집을 무상으로 임대하고 있다는 확인서에 서명을 해야 하니 좀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나기로 한 것인데.....일단 전화로는 그러겠다고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 몰염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떳떳하지 못한 일에 조카더러 동조하라고 부탁을 한다는 것이,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부터 의문스러웠다.
내가 누이에게 그 만큼 도덕적이지 못한 이미지로 비춰진 것인지, 아니면 누이에게는 그런 정도의 위반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인지...

얻게 될 이익과 잃게 될 손실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찜찜한 일에 내가 적극적으로 확인서에 서명까지 하면서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거절했을 경우에 누이와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도 걱정이 되었지만, 용기를 내서 누이에게 거절을 했다.

다행히 누이는 선뜻 나의 제안을 받아들여 주었다.
공짜로 얻어먹은 도넛과 커피, 마카다미아 한통을 받은게 머쓱하긴 했지만 끝내고 돌아오면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날 어머님께 전화로 자초지종을 설명드렸고, 어머니는 잘 했다 하셨고, 작은 누이와 통화때에는 누이도 분개한 듯 했다.
그리고 이어진 통화의 내용이 큰누이네 개에 관한 얘기였다.

어딘지 비슷한 면을 가진 두개의 사건,
그리고 그것에 분개하는 작은 누이와 나....

큰누이가 본가에 개를 맡겨서 작은 누이와 강아지들이 스트레스를 받을 것에 대해서 분개하는 나,
나에게 정당하지 못한 일을 부탁해서 곤란하게 만든 사촌 누이에 대해 분개하는 작은 누이.

직접적인 피해의 당사자가 아니면서 왜 우리는 분개했던 것일까?


나는 심지어 이러면 어떨까 저러면 어떨까를 막 고민해 보기도 했었다.
큰누이나 매형에게 전화를 걸어서 따지려고까지 생각할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가해보니, 큰누이가 할 말이 상상되었다...."네가 왜 그러니?"

그래....난 당사자가 아니었다.
그저 작은 누이와 강아지들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생각했지만, 작은 누이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면 내가 정의의 사도인가?
그래서 모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분개하는가?
아니다....최소한 나 자신에 대해서는 아니다. 내가 저지르는 불의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합리화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내가 화가 난 상황이, TV에서 정치인들의 뻔뻠스러움이나 어처구니 없는 언행을 보았을 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분노의 원인이나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들은 비슷한 분노였던 것 같다.

그리고 부끄러워졌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왜 이 정도밖에 안되는걸까, 정치인들을 비난하고, 우매한 국민들을 한심하게 생각했었지만, 그건 내가 그 정도밖에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타인의 눈 속에 티는 귀신처럼 찾아내면서 내 눈속에 있는 댓돌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내가 바뀌지 않는데, 과연 누가 바뀌기를 바란단 말인가?
서로 비난하고 욕하고 헐 뜯는 속에선 아무 것도 나아질 수가 없었다.
그저 서로의 탓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바뀌면 주변의 몇몇은 바뀔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비로소 세상이 나아지는 시작이 될 것이다.

2015년 6월 21일 일요일

교통 체증으로 본 주식의 속성

앞선 포스팅과 마찬가지로 교통 체증에 걸려서 차안에서 여러 생각을 하던 중에, 주식과 운전의 유사한 점을 발견했다.

생각나는 대로 적어두고, 나중에 다시 정리를 해 봐야하겠다.


1) 차선 바꾸기 = 종목 교체

운전을 하다 보면, 내가 주행 중인 차선과 옆의 차선을 비교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막힘이 없는 도로라면 내 차의 성능이나 기분에 따라 속도를 조절해가며 운전을 하니 비교할 일이 별로 없지만, 주행 속도가 일정 정도 이하로 느려지게 되면 다른 차선의 주행 속도와 비교를 하고, 차선을 바꾸는 경우가 있다.
주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수익률이 일정 정도 이하로 만족스럽지 못하면 다른 종목을 살펴보다가 교체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단, 차선을 바꾸고 보니 원래 차선이 빨라지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종목을 바꾸고 나니 원래 종목이 더 잘 오르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2) 차량이 많아지면 느려지게 마련 = 경제 성장이 둔화되면 주식 수익률도 떨어지기 마련

1)의 경우처럼 교통이 정체되면 차선을 이리 저리 바꿔보지만, 차량이 많아져서 발생하는 정체의 경우에는 별 뽀족한 방법이 없다.
열심히 차선을 바꿔바야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간은 별반 차이가 없으며, 공연히 신경만 많이 써서 피곤해지고, 사고 낼 가능성 높아지고, 기름 많이 소비하고...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애초에 마음만이라도 느긋하게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주식도 이와 마찬가지로, 경제가 불황이면 기대 수익률을 낮게 잡고 리스크 관리에 주력하는게 더 좋은 투자 방법이다. 공연히 테마주 소형주 따라다니면 변동성이 커져서 리스크에 노출되고, 섣부른 종목 교체로 수수료만 날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3) 큰 차를 따라가면 조금은 낫더라 = 외국인이나 기관의 투자를 따라하면 낫더라

버스나 트럭 등 차고가 높은 차량은 작은 승용차보다 더 먼곳을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사고가 난 차선이나, 진출입로 등의 상황을 봐 가며 조금은 더 유리한 운전을 할 수 있다.
이건 실제로도 경험한 바인데, 정체 중인 상황에서 내 옆에 있던 버스가 나중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앞서가는 것을 봤던 경험이 있다.
주식 시장에서도 개인들의 정보력은 떨어지기 때문에 외국인이나 개인들이 투자하는 종목을 따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단, 목적지가 다른 경우도 있으니 이건 주의해야 할 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에서 언급한 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교통이 정체가 되면 그나마 빨리 가는 방법은 있지만, 평상시보다는 느릴 것이며, 경제 성장이 둔화되면 남들보다 조금 더 수익을 얻을 수는 있을 지언정 기대 수익률은 낮춰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통 체증에 걸린 날

분당에서 강북의 본가를 갈 때엔 항상 분당-수서간 고속화 도로를 이용한다.

신호등 없이 시원하게 이어진 길은,
분당 - 수서 - 청담 대교 - 강북 강변로 - 동부 간선로 - 내부 순환로까지 이어지기에
분당 시내의 구간과 내부 순환로 이후의 구간을 제외하고는 기분 좋은 운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운전자들이 이런 생각을 하기에 차량이 많이 몰리는 시간 대라면 교통 체증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되고 만다.

우회 도로를 이용해 보지만, 우회 도로들 또한 차량의 증가로 인해 늦어지긴 마찬가지고, 거기에 신호등 대기의 짜증스러움까지 참아내야 하기 때문에,
언제나 이용하는 루트가 되었다.


최근에 토요일 오후에 이 구간을 이용하면서 겪은 몇가지 의문점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사실은 예전부터 궁금하게 생각한 것인데 항상 그 때뿐이라 의문은 계속 반복만 될 뿐이었다.)


첫번째 의문은 교통 체증의 원인에 대한 것이다.

분당-수서간 고속화도로는 복정역 즈음에서 합류하는 구간이 있고, 수서 부근에서 합류하는 구간이 있다.
통상 정체시에는 복정역 합류 구간 이전부터 정체가 시작되고, 복정역 합류구간 후에도 정체가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수서 합류 구간을 통과하면 놀랄만큼 차량의 주행 속도가 빨라진다.

이렇게 갑자기 차량들의 주행 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보면, 이전의 정체가 더욱 더 의문스럽다.
대체 정체되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이 정도까지는 정체되지 않아도 될 상황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대한 해답은 모른다.
이 모든 구간에 CCTV를 설치하고 정체 시간대의 차량 흐름을 종합적으로 관찰 해 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단지, 하나 유추해 볼 수 있는 가설은, 차량의 증가에 못지 않게, 차선을 변경하는 시도가 교통 체증의 중요한 원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수서 구간에서 합류한 차량들은 곧 이어 올림픽 대로 공항방면, 올림픽 대로 강서 방면, 청담대교 방면에 따른 분기점이 나타나기에 여기에 맞춰 차선을 바꾸려는 시도 또한 많아지기 때문이다.

만약 이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 이루어진다면, 이어서 좋은 대책도 이어지지 않을까 싶은데, 아무런 시도도 없는 듯 해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두번째 의문은 도로 교통법과 관련된 끼어들기 위반의 범위에 관한 것이다.

분당에서 청담대교까지 오게된면, 청담대교의 북단은 3갈래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강변북로 한남/마포방면, 건대방면, 강변북로 잠실방면이 그것이다.
통상적으로 강변북로 마포방면이 통행 차량이 제일 많고 다음이 건대방면, 강변북로 잠실방면이 차량이 제일 적다.

3차선의 청담대교는 북단 즈음에 오면 각 차선별로 진행방향이 정해지는데, 이들의 통과 차량수가 차이가 크다보니, 정체시간대에는 얌체 운전자가 늘어나기 마련이다.
결국은 차선변경 금지 구간선인 실선을 길게 그어서 얌체짓의 정도를 줄이기는 했지만 정체가 심해서 청담대교 이전부터 정체가 시작된 경우에는 있으나 마나한 경우가 많다.

더 심한 곳은 내부 순환로의 월곡동 진출로다.
이 역시 진출로 이전 500m가 넘는 지점까지 차선변경 금지구간으로 설정했으나, 심한 경우에는 2km가 넘게 정체되기 일쑤고, 2km되는 지점에는 합류구간이 있어서, 양심을 지키고 싶어도 못지키는 경우가 발생할 지경이다.

설명이 길었지만, 요지는 이거다.
끼어들기 위반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실선으로 그어진 곳에서 차선을 변경하지 못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끼어드는 것이 과연 도로교통법상의 위반 사항인가 말이다.
얌체짓이고 괘씸할 수는 있지만 법적인 처벌이 불가능하지는 않을까 싶었다.

예전에 많이 검색을 해 본 결과로는 끼어들기 위반은 도로교통법상의 추월 위반의 한가지로 본 것으로 기억을 하고 있다.
속도가 얼마 이하로 주행중인 차량의 앞으로는 끼어들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이 속도가 교통 체증이 심한 시내에서는 언제나 적용할 수 있는 속도이다보니 실제로 적용하기엔 무리가 많지 않나 싶었다.

다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대대적으로 끼어들기 위반을 단속한다고 하는데, 구체적인 법률 조항이 명시된 경우는 찾질 못했다.

경찰청에서 홍보까지 하고 있으니 직접 문의라도 해 봐야 하겠다.

2015년 5월 5일 화요일

선(善), 선행(善行), being a good boy(girl)

앞선 포스팅에서 행복과 선과의 관계(?)...라기보다는 행복과 선에 대한 개인적인 인식의 문제점에 대해 다루었다.

한편으로는 고민의 일부가 풀려서 시원하기도 했지만, 풀어야 할 고민이 더 많아졌다는 문제가 생겨버렸다.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 - 사실은 강박이라고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었지만 -이 아주 뿌리 깊게 내재되어 있었던 것 같고, '착하다, 선하다, 선행'의 의미에 타인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적어도 나에겐)

하지만, 이러한 내포적 의미의 착함, 선행은 그 단어 자체가 모순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선(善)의 가치 판단은 사람/시간/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 행위의 수혜자만이 그것이 선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善)의 행위자의 판단과 수혜자의 판단이 달라질 수 있기에, 행위의 의도와 결과가 달라지곤 한다.

칸트가 말한 대로,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선의지 뿐"인 셈이다.
(칸트의 선의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 칸트의 선의지는 지고 지순한 절대적인 가치임)


간혹 선행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봉사 활동을 하는 경우들도, 정작 봉사를 받는 사람들에겐 필요하지 않은 일들이어서, 봉사 활동을 한 이들의 자기 만족을 위한 게 아니었나 싶은 경우들도 허다해 보인다. (선거철 정치인들의 봉사활동 쇼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차라리, 처음부터 누군가에게 선행을 베푼다는 교만한 생각을 버리고,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솔직한 심정으로 행한다면, 차라리 낫지 않을까 싶다.


이럴진데, 타인에 대한 선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외면하기 보다는, 모두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이기적인 선"을 자신에게 베푸는 것이야 말로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방법이 아닌가 싶다.


* 물론 이기적인 선이 타인에게 끼칠 영향을 고려해야 겠지만, 적어도 스스로의 생각에 '내가 피해를 감수한다'가 아니라 '쌍방에게 공평하다'는 판단의 수준이라면 적당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