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31일 수요일

과학의 혁명

향후에-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과학계에 가장 큰 발견(?)으로 남을 업적은 정신(精神)과 에너지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발견이 위대한 이유는 물질과 에너지의 관계를 밝혔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러한 발견이 없었다면 물질과 에너지는 그저 별개의 것으로 여겨지고, 물질의 세계와 에너지의 세계가 공존은 하고 있지만 근본이 전혀 다른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일견, 아인슈타인의 발견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육체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밝힌 셈이기도 하다.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태어나기 이전에 에너지로 존재했으며, 육체를 벗어나면 모종의 에너지로 바뀐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물질 - 에너지> 만으로는 설명 되지 않는 것들이 아직도 많지 않은가?
인간을 예로 들어 보아도, 육화된 인간은 에너지가 물질화 된 것이라고 설명하기엔 부족한 것 들이 있다.

너무나도 다양하게 나타나는 인간들의 행동양식,
본능이라 생각되는 원초적인 행동에서도 이런 다양성은 너무나도 자주 목격되고 있다.
단순한 다양성 또한 하나의 생명 개체군(群)이 생존하기 위한 진화의 결과라고는 할 수도 있지만, 정작 이런 다양성의 개별 주체들은, 단지 다양성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이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보여준다.
이 개별 주체들은 나름의 확고한 의지나 신념을 가지고 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을 합리화 하기 위한 자기 최면 내지는 인식의 환상에 지나지 않을 지언정, 이러한 의지나 신념에 매우 강한 힘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종종 신념과 의지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본능에도 역행하는 힘든 과정을 겪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의지, 신념, 정신과 같은 것은 또 다른 에너지의 형태가 아닌가 싶다.

물론 아직까지는 이런 정신의 힘을 에너지와 구별하고 있다.
간혹 초능력이나 기적이라는 형태로 정신이 에너지화 되는 사례들이 보고되어 누적되고는 있지만 아직 정신의 에너지와 일반적인 에너지는 확연히 다른 것으로 구별되고 있다.

하지만 물질과 에너지가 별개의 것에서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 듯,
언젠가는 에너지와 정신 또한 일정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밝혀 질 것이다.

아마도 올바른 관계가 밝혀지고 나면,

             정신
           /      \
         물질 ― 에너지

와 같은 형태의 관계를 이룰 것이다.


이 관계를 잘 들여다 보면,
정신이 에너지로 바뀔 수 있으며, 정신이 물질로 바뀔 수도 있다.(초능력,마술과 같은...)
또한 에너지가 정신으로 바뀔 수 있고, 물질이 정신으로 바뀔 수도 있다.(???)

누군가 깊은 통찰력을 지닌 천재가 나타나
하루 빨리 이 관계를 밝혀 주길 기원한다.

2013년 7월 22일 월요일

우주는 마음이다

인간은 욕망이 모이고 모여서, 쌓이고 쌓여서 태어나게 된 욕망의 육화(肉化)이다.


빅뱅 이전에 모든 것이 하나인 순간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고 동요도 없고 치우침도 없었다.

마치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동심원을 그리며 물결이 퍼져 나가듯,

빅뱅과 함께 퍼져 나가기 시작한 우주는,

물결의 파고 처럼 치우침을 만들었고,

치우침의 정점은 에너지가 모이며 생명을 만들었다.

생명의 탄생은 에너지의 집중으로 만들어지며, 이 원초적 에너지의 근원은 치우침이며, 치우침은 욕망으로부터 만들어졌다.

인간 개개인은 각자 저마다의 욕망이 모여서 만들어낸 결집(結集)이다.


욕망의 소멸은 치우침의 소멸이며, 치우침의 소멸은 하나가 되는 과정이다.

대한민국은 어떤 업을 가지고 있는 걸까?

흔히들 깨달은 이들은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고 한다.
이러한 인과론(因果論)도 다분히 철학적 혹은 종교적 영역이니 당연시 할 수는 없지만,
이 포스팅에서는 인과론을 인정하고 시작해 보겠다.

학창시절의 역사 특히 국사(國史) 수업을 통해서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외세로부터 침략을 당하기만 하고 타 민족을 침략한 적은 거의 없다고 배워왔다.
이에 대해서는 민족성이 온순하기 때문이라는 자화자찬식의 이유도 있으며, 제대로 태평성세를 구가한 기간이 많지도 않으니 그럴 여유가 있었겠냐는 자조섞인 이유도 있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많은 이민족의 침략으로 희생을 당한 백성은 얼마나 많으며, 갖은 수탈과 치욕을 견뎌야 했던 것은 얼마이겠는가?


그러면 과연 무슨 원인을 지었기에 한민족은 이리도 많은 침략과 핍박을 받았던 것이며,
그 많은 침략과 핍박을 받은 결과는 무엇이란 말인가?

임진왜란 병자호란 구한말의 일제침략으로 우리 민족을 끊임 없이 갈구던 일본은,
한민족을 침략하고 짓밟은 원인으로 세계적인 경제대국이 되어 동아시아, 아니 아시아에서 최고의 국가가 되었다.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받아 가혹한 세월을 보낸 한민족은,
결국은 열강에 의해 남북으로 찢어지고 이간질로 서로를 적대시하며,
비록 경제규모가 세계 10위에 근접하는 국가가 되었음에도 열강의 눈치를 봐야 하는 반꼭두각시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마치 우스갯소리처럼,
한여름 노래부르며 놀던 베짱이는 가수로 발탁되어 호의호식하며, 등골빠지게 일한 개미는 관절염으로 고생고생했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고 깨달은 이들은 말한다.
그럼에도 정작 그들은 빈번히 침략 당하는 결과가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모르며,
침략 받고 고통 받은 것의 결과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면서 좋은 원인을 지으라 한다.
좋은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를 뿐 아니라, 설령 아는 척 해도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
좋은 원인을 짓기 위해 선행을 하고 남을 돕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도, 어떤 결과가 올지 모르며 또한 언제 올지 모른다.
아마도 100번쯤 다시 태어났을 때에야, 그저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게 되면, 그것 보아라 그때의 원인이 이런 결과로 나타났다고 공치사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인과론을 부르짖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태도는 매우 부정적이다.

하지만 한번 쯤, 우리 한민족은 왜 이리 고달픈 역사를 타고 난 것인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물어보고 싶다.

옳고 그름은 없는가?

신과 나눈 이야기를 읽다 보면 많은 충격을 받게 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옳은 것과 그른 것이라는 가치판단에 대한 것이다.

흔하게 어떤 사건이나 상황을 보고 사람들은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판단하려고 한다.
하지만 신과 나눈 이야기에서는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주관적인 가치 판단일 뿐이며 사건이나 상황은 그저 일어난 것, 혹은 유지되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한다.

자동차 사고가 일어나고, 건물이 붕괴되고, 지진이 일어나고, 태풍이 몰아치고, 홍수가 나도 그저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유/불리에 처하게 되기도 하고, 그에 따라 옳으냐 그르냐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가급적이면 내가 접하게 되는 모든 사건과 상황을 이처럼 치우침 없이 바라 보고자 노력은 하지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난 이상, 나와 남을 분리시키는 것은 본능과도 같으니, 치우침이 없다함은 다시 나와 남의 구분을 없애고 모두가 하나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결국은 궁극적인 치우침의 소멸은, 인간이라는 존재와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각설하고,
과연 모든 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까?
가령 두개의 서로 다른 단음(單音)을 듣고 어느쪽이 높고 어느 쪽이 낮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가 그른가?
높이가 다른 두개의 나무를 두고 어느 쪽이 크고 어느 쪽이 작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가 그른가?
두개의 색깔을 보고 어느 쪽이 밝고 어느 쪽이 어둡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가 그른가?

위의 사례만 보아도, 두개를 비교하여 상대적인 고저/대소/명암을 가리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상대적인 비교는 옳고 그름을 논할 필요가 없다.
단지 비교 대상 없이 하나만을 두고 절대적인 고저/대소/명암을 가리는 것은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는 일일 것이다.


간혹, 치우침 없이 본질을 보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옳고 그름이 분명한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치우침이 없는 가치판단도 가능할까 라는 의심이 들고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앞으로 만나게 될 사건과 상황들에서 이런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면 다시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2013년 6월 23일 일요일

진화의 끝

저는 불과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물론 진화론에 대한 지식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것과 그 밖에 TV 다큐멘터리를 통해 배우거나 본 것이 전부였고, 찰스 다윈의 저서라는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을 읽어 본 적도 없습니다.

아마 특별한 계기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죽을 때 까지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최근 5년 사이에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던 두 분의 대중 과학자는 잠시나마 진화론에 대해 고민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한 분은 리처드 도킨스 박사, 또 한 분은 최재천 교수님입니다.
두 분 모두 찰스 다윈의 열렬한 추종자 입니다.

도킨스 박사는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이라는 책을 통해서 국내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중요시하며 무신론자 이기에 종교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도킨스 박사의 무신론이 진화론을 추종하면서 내리게 된 판단인지, 진화론과는 별개의 어떤 이유에서 기인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기독교 진영에서는 진화론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도킨스 박사는 이래 저래 기독교 진영과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최재천 교수님은 최근에 EBS에서 진화론에 대한 특강을 꽤 오랫동안 하셨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더 오래 전에도 방송에서 곤충에 대한 강의를 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때나 최근에나 강의를 참 재미있게 하셔서 재미있게 봤습니다.

아마도 이 두 분이 제게 잠시나마 진화론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들어 주신 것으로 생각하는데, 오히려 저의 고민은 '정말 진화론은 진리인가?' 였습니다.
기독교의 비중이 높은 서양에서는 아직도 진화론이 일반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얘기도 들어 본 기억이 있고, 반대론자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다룬 방송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이 찬성론자들의 이야기만 들어 봤기에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은 과연 진화론에 적합한 생명체인가?"
"과연 진화의 끝은 있는 것일까? 끝이 있다면 그건 어떤 모습일까?"

제가 알고 있는 일반 상식 순준의 진화론에 의하면,
현재의 인간도 진화의 한 형태이겠지요. 그리고 지금도 진화를 하고 있을 겁니다.
수 많은 인간들이 서로 다른 수 많은 변이를 겪고, 다시 이것이 세대로 유전이 되고, 자연에 의해 선택이 되거나 버려지고 하면서....

하지만 인간은 찰스 다윈이 관찰했던 작은 생물들과는 큰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과학이라는 막강한 힘을 이용해서, 자연의 선택을 받지 않고, 자연이 인간을 선택하도록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종과의 비교할 수 없는 우위를 이용해서, 다른 종들이 자연의 선택을 받는 것이 아닌 인간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환경을 만들었다는 것 입니다.

인간의 생존에 해가 되는 생물은 도태가 되어야 하고, 인간의 생존에 득이 되는 생물은 자연의 선택과 상관없이 길러지고 사육됩니다.

즉, 자연 선택설이 인간 선택설로 서서히 전이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또한 진화의 한 모습으로 보아야 한다면,
진화의 끝이란 결국 강력한 하나의 종(種)의 나타나 다른 종(種) 위에 군림하고, 그 종(種)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겠지만, 결국은 현재의 인간들 처럼 자연이 교란상태 빠져 그 스스로도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려스러울 따름입니다.

어쩌면 이는 필연적인 진화의 마지막 모습일 것이며,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매우 강력한 종(種)이 나타났을 때, 이를 제어하거나 억누를 수 있는 반대의 힘이 나타나는 새로운 메커니즘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2013년 5월 25일 토요일

마음과 현실, 천국과 지옥

죄를 지으면 벌을 받으리라는 계율은 단지 특정 종교에 국한된 것은 아닌듯 합니다.
게다가 종교를 떠나서도 이러한 규율은 이미 법으로 제정되어 있으며,
성문법 이전의 시대에도,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면 죄를 규정하고 그에 합당한 벌을 만들어  자치적으로도 행하곤 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일 겁니다.

하지만, 인간이 규정하고 인간이 벌하는 이러한 제도가 강력하게 정착될 수록, 진정한 속죄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가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워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도화된 처벌 시스템은 한 개인의 속죄를 도와주는 방향이 아니라,
공공대중에게 범죄와 비범죄의 경계를 학습시키고 처벌에 의한 공포심을 학습시켜 잠재적인 범죄를 예방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학습이 필요한 이유는 다양한 환경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의 규칙으로 묶어야 하기에 발생한 것이며, 여기에서 자연적인 범죄(sin)와 사회적인 범죄(crime)가 일치되지 못하고 괴리되는 문제점을 여기하기도 합니다.


원래 글을 쓰려던 목적과 다른 방향으로 빠져 버렸군요.
애니웨이,

종종 전지적인 신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죄를 저질렀을 때,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은 그에 합당한 벌을 받을 것이라고 믿곤 합니다.
제도화된 기성 종교뿐 아니라 그저 신적인 존재를 믿는 사람들의 경우엔 대부분 이러한 믿음을 갖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합당한 벌은 사후에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받는다고 믿기도 하며, 내세(來世)에 죄값을 치를 운명을 지고 다시 태어난다고 믿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제도화된 종교에 반기를 드는 뉴에이지 부류들 가운데에서는 색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닐 도널드 월시(Neale Donald Walsch)의 신과 나눈 이야기를 읽어 보면 기성종교의 왜곡된 해석을 새롭게 재해석 하기도 하는데, 그는 천국과 지옥이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현재의 상태를 천국으로 만들기도 하고 지옥으로 만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불교의 일체유심조와도 같은 이야기이겠습니다만...


이것이 죄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제도화된 법률로는 처벌하기가 매우 어렵고, 양심에는 꺼려지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적인 제도와 규율이 강력해질수록, 양심에 꺼려지는지 여부를 행동의 기준으로 삼기보다는, 제도적인 법률에 위배되는지를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강해지는 듯 합니다.

그리고 한참을, 아주 한참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제는 본말이 전도되어 법률에 위배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을 받지도 않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피해자 입장에서 보면 화가 날 노릇이고, 가해자가 법의 취약점을 악용했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합니다. 점차 법률을 강화하자는 소리들이 들려오게 되고, 법이 양심까지 판단하려 들겠지만, 그럴수록 양심은 점점 쪼그라들어서 아얘 없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한참을 살다보니, 어느 날 문득, 내가 아주 몹쓸 인간으로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흔한 경우로는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제 3자에게 그 사람의 험담을 하는 경우였습니다.
이건 아주 흔한 경우인데, 그래서 아주 쉽게 자신을 객관화 시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누군가의 뒷담화를 늘어 놓는 것으로 보고, 누군가는 나를 저런 대화의 소재로 삼을 수 있으리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한두번 들고, 그런 후에는 당사자가 없는 상황에선 험담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깜빡하고 누군가의 험담을 하고, 그런 험담을 한 나를 스스로 경멸하고 부끄러워하고...

몇번을 반복해서 알게 되니, 이제는 남의 뒷담화를 하는 순간에 내 마음속이 어떤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엔 내가 아프거나 괴롭진 않았으나 조금만 지나고 보면 거기엔 어둠만이 있고 악마들이 있습니다. 그 순간의 내 마음은 지옥이었습니다.

지금은 조금만 보이고, 그 순간에는 기분이 불쾌한 정도입니다만,
조금 더 지나고, 더 잘 보게된다면 아마 매우 고통스럽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그 때에는, 내 마음이 천국과 지옥을 만든다는 것을,
그것도 마음을 먹는 바로 그 즉시 만든다는 것을 알게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3년 5월 18일 토요일

말의 의도와 내용, 그리고 실체

오래간만에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비교적 격이 없는 친구들이기에 편하게 얘기하고 신세한탄이나 치부가 될 만한 것도 가끔씩은 꺼내놓기도 하곤 합니다.

이번에도 만나서여러가지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최근에 내가 고민하고 있는 가족사와 관계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누이동생과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아, 어릴 때에는 자주 싸웠고, 커서도 다투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며, 시집가서 아이를 낳은 후에도 편하지만은 않은 사이가 되었습니다.

어찌어찌하다 이야기가 그리로 흐르게 되고, 누이동생에 대한 비난을 털어놓게 되었습니다.그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나의 편을 들어주면서 동조를 해 주었는데....

집에 돌아와 한숨 자고 다음날 일어나 생각해보니 기분이 영 찜찜하기가 이를데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하지만, 누이동생이 없는 자리에서 그녀의 험담을 한 것(뒤담화)도 그렇지만, 내가 한 얘기의 편파성을 나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에 더 그랬었나 봅니다.

과연 그 얘기를 들은 친구들은, 내 누이동생을 어떤 모습의 인격체로 상상했을까요?
그리고 그런 상상이 과연 누이동생의 실체와 얼마나 가까울까요?


어떤 관계든, 나쁜 관계의 쌍방은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책임은 양쪽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겁니다.
하지만 상대방을 비난하는 한쪽은 자신의 책임이 있는 부분은 쏙 빼고 상대방의 책임이 있는 부분만을 부각시켜 이야기를 함으로써, 제 3자가 듣고 판단하기에는 일방적으로 한쪽은 선하고 한쪽은 악하기만 한 것으로 생각될 겁니다.
그리고 이건 그 실체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이 될겁니다.

결국 누군가의 의견을 들을 때, 그 사람의 의도가 어떠한가가 실체와의 상관 정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지해야만 할 것입니다.
좌편향 의도를 가진 사람이 말하는 의견들은 실체의 왼쪽 부분에 해당하는 것들이므로, 왼쪽의 부분 모습을 상상하는 부분 자료로만 이용해야 할 것이며, 실체의 오른쪽도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나 의도를 일부러 숨기는 사람은 지탄받아 마땅한 사람이며, 이를 제외한 경우에는 상대방의 의도와 의견을 모두 존종하되 그 의견의 부분성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들 개인의 인격과, 그리고 그들이 구성원이 된 사회가 더 성숙하다면,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청자의 오해를 막기 위해 균형 있게 사실을 전할 수 있게 되리라 기대하지만, 거기에 이르기 전까지는 청자의 입장에서 부분을 전체로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