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까지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이 진행 중이고, 최순실 등의 국정 농단에 대한 특검의 조사와 재판이 진행 중이다.
처음엔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던 촛불 집회의 열기가 뜨겁더니, 탄핵안이 통과하면서 촛불 집회는 서서히 열기가 가라앚은 반면,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태극기 집회가 다시 열기를 뿜어 내고 있는 듯 하다.
반대편은 일명 박사모라고 불리우는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들의 모임이 주축이 되어서 대통령 탄핵안 등에 반대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
아직까지 탄핵을 찬성하는 쪽이 더 우세하다 보이기도 하고, 언론에서의 보도도 다분히 대통령의 반대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에게 알려지는 사실들이라는 것이 주로 언론에 크게 의지하는 바, 지금까지 언론을 통해 알려진 사실들로만 판단해 보면 대통령의 잘못이 많아 보이며, 일반 정치인이라면 유죄 선고가 가능할 것이라 보이지만, 대통령이라는 지위의 특수성으로 이를 모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사실이 정말 사실이 아닐 수도 있으며, 자신이 믿는 것에 따라 받아 들이는 것과 버리는 것이 달라지니, 어진간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진실을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그 모든 가능성에 대해 인정을 하고 수용한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하는 원칙은 존재하지 않나 싶다.
바로 "인간"에 대한 존중이다.
그들의 의견이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들의 말이, 행동이, 생각이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런 불확실한 자신의 생각, 말, 행동에 대해 의심할 수도 있으며, 누군가는 틀림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우리 보통 인간들의 행태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다른 생각, 말, 행동을 한다고 해도, 그들의 존재를 증오하고 파괴하려 하면 안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종북좌파'니 '수구꼴통'이니 하는 인신공격성의 발언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말은 상대방의 의견에 대한 논리적 반박이 불가능하다고 느꼈을 때, 도저히 상대방이 제기한 나의 오류를 변론할 수 없을 때 내뱉게 되는 마지막 "발악"과도 같은 것이다.
이건 상대방의 생각이나 행동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너의 존재는 글러 먹었으니, 네가 하는 모든 말과 생각이 다 글러 먹었다"는 독선적인 선언인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논리적인 설명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찌된 일인지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생각의 회로는 작동을 중지해 버리고, <선과 악>이라는 경직된 이분법으로 나뉘게 되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의 모습이다.
이게 진짜 인간들인가 싶을 정도로, 파블로프의 개처럼, 단어 하나에 즉각적인 반응을 하고 있다.
참 많이 고민해 보았다.
왜 그런 것일까?
안그래야겠다고 다짐하고 냉정해지려고 하지만, 나와 반대되는 정치적인 의견을 듣고 있노라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스트레스가 상승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요즘은, 일부러라도 정치와 관련된 방송이나 인터넷 사이트는 조금씩 줄여가고 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것들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인간이 저지를 수 밖에 없는 모순된 것들에 대해서 나의 사고 회로는 작동을 멈춘다. 귀여운 강아지와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소와 돼지는 도살해서 먹어야 하는 모순에 대해서 눈을 가리고 침묵한다.
남자로 태어났기에 남자로써 누리는 권리는 당연하다 여기면서, 그 권리를 위해 여성이 희생해야 하는 것에는 외면한다.
동양인으로 태어났기에, 서구 문화 중심의 사회 문화적 현상에 대해 본능적인 반감 혹은 무비판적인 호감도 존재한다.
한국인으로 태어났기에, 일본은 미워해야 할 국가이고, 공산주의는 무조건 나쁜 것이다.
모씨(某氏) 집안에 태어났기에, 나의 조상님은 훌륭한 분이시고 조상님을 위해 제사를 지내야 하고, 명절마다 성묘와 차례를 지내야 한다.
누구의 아들 혹은 딸로 태어났기에, 누구에게 복종해야 하며, 효도해야 하며, 평생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야 한다.
나의 선택과는 무관한 것들,
태어나면서부터 내게 주어지는 것들,
그것이 부드럽고 따뜻한 담요인지 혹은 습하고 차가우며 거친 거적떼기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것에 의지해 살아났으며, 그것이 전부인 세상을 살았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확실한, 그리고 어쩌면 유일한 버팀목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들에서 벗어나야 내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판단을 멈추어버린 세계는, 우리를 보호해주는 단단한 껍질의 알이지만,
우리의 세계를 제한하는 장벽이기도 한 것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자신의 알을 깨뜨려야 한다.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사람들은 참 많은 알껍질 속에 살고 있는 듯 하다.
유교라는 관습의 알
반공이라는 이념의 알
적어도 이 두개의 알을 깨기 전에는 대한민국의 발전은 요원해 보인다.
2017년 1월 24일 화요일
2017년 1월 18일 수요일
야만과 문명의 사이 - 인간에 대한 이해의 기준
아직까지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은 진행 중이다.
그리고 최순실, 정유라, 세월호 사건과 관련한 특별검사의 수사도 진행 중이다.
특별검사 이전에 진행되었던 검찰의 수사 결과로 기소된 사건들은 현재 재판 중이다.
지난 두달여 시간 동안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많은 국민, 시민, 이웃들에게도 그렇지만 특히 나 개인에게 있어서도 그러했다.
나 자신의 내적인 변화는 어쩌면 다른 사람들의 변화와도 잇닿아 있을지 모르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개개인의 내적 변화들이 어떤 공통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졌을 때, 그 사회가 변화해가지 않나 싶다.
그러면 나의 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처음엔 많은 놀라움, 분노, 증오와 같은 것 들이었다.
새로이 알려진 것들에 대한 놀라움이고, 그들의 편향적이고 치졸하며 사리사욕에 눈 먼것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생겼다.
다음엔 자기 반성이었다.
결국은 우리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반성, 그것을 미리 알아채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었다는 반성.
그리고는 두려움.
이렇게까지 왔는데, 그 무거운 죄를 지었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이 이번에도 아무런 벌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가끔의 의심.
법정에선 피의자들, 헌번재판소에 출석한 증인들의 반박이 계속되고 있다고 하자, 어쩌면 저들은 정말 죄가 없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번에도 언론에 속아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들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
또 다시 허무함.
과연 나라는 하나의 개인이 알 수 있는 진실의 깊이는 얼마나 되는 것일까.
우리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며, 아는 만큼에 따라 진실과 거젓이 바뀌며, 선악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과연 우리가 진실을 논하는 것, 선악을 판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에 대한 허무함.
그리고 다시 의문점들
어째서 자연계와는 대치되는 <정의> <평등>과 같은 가치를 인간이 추구하는 것인지, 그게 정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
그것이 자연계의 흐름이라면,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들이 애초에 "가치"로써 추구되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렇게 힘들여 추구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자연스럽지 못한 가치를 힘 들여가며 추구하는 인간.
하지만 자연스럽지 않기에 그 가치는 자꾸 스러져가고,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각성하고 힘쓰고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리라.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아주 원초적인 시원으로부터 출발하면 명확하게 보이는 듯 하다.
태초에 별 경쟁력이 없던 하나의 종족으로써의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 수를 늘려야 했던 것이고, 보다 많은 수의 개체들이 어울려서 살아나가며 그 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간의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규율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평등>과 <정의>는 매우 중요한 가치가 되었을 것임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생존에 필연적인 가치마저도, 자연스러운 본능적 욕구에 의해서 자꾸만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스스로를 가장 영리한 종족이라 칭하는 인간들이, 스스로를 지켜줄 가치를 허물어 버리는 우매한 짓을 반복하는 것이다.
과연 이게 가장 영리한 종족이 하는 짓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다양한 종교와 믿음을 통해서 존재하지도 않는 영혼, 자아를 얘기하고 윤회와 해탈을 말하며, 진화와 각성을 믿는다.
스스로가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소명을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자기 신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맞닥들인 이 사건을 통해서도 극명하게 드러난 바, 인간은 아직도 야만의 때를 벗어나지 못한 원숭이에 가까운 존재일 때름이다.
지금까지 이룬 문명의 업적을 증거로 내민다 한들, 딱 그만큼만 야만에서 벗어난 정도일 뿐이다.
인간이 과연 야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지만, 스스로에 대한 근거 없는 자존감은 자기 자신의 발판을 딛지 못함과 같기에, 자신에 대한 인식의 불가함과 발전의 불가함만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최순실, 정유라, 세월호 사건과 관련한 특별검사의 수사도 진행 중이다.
특별검사 이전에 진행되었던 검찰의 수사 결과로 기소된 사건들은 현재 재판 중이다.
지난 두달여 시간 동안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많은 국민, 시민, 이웃들에게도 그렇지만 특히 나 개인에게 있어서도 그러했다.
나 자신의 내적인 변화는 어쩌면 다른 사람들의 변화와도 잇닿아 있을지 모르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개개인의 내적 변화들이 어떤 공통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졌을 때, 그 사회가 변화해가지 않나 싶다.
그러면 나의 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처음엔 많은 놀라움, 분노, 증오와 같은 것 들이었다.
새로이 알려진 것들에 대한 놀라움이고, 그들의 편향적이고 치졸하며 사리사욕에 눈 먼것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생겼다.
다음엔 자기 반성이었다.
결국은 우리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반성, 그것을 미리 알아채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었다는 반성.
그리고는 두려움.
이렇게까지 왔는데, 그 무거운 죄를 지었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이 이번에도 아무런 벌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가끔의 의심.
법정에선 피의자들, 헌번재판소에 출석한 증인들의 반박이 계속되고 있다고 하자, 어쩌면 저들은 정말 죄가 없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번에도 언론에 속아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들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
또 다시 허무함.
과연 나라는 하나의 개인이 알 수 있는 진실의 깊이는 얼마나 되는 것일까.
우리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며, 아는 만큼에 따라 진실과 거젓이 바뀌며, 선악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과연 우리가 진실을 논하는 것, 선악을 판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에 대한 허무함.
그리고 다시 의문점들
어째서 자연계와는 대치되는 <정의> <평등>과 같은 가치를 인간이 추구하는 것인지, 그게 정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
그것이 자연계의 흐름이라면,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들이 애초에 "가치"로써 추구되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렇게 힘들여 추구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자연스럽지 못한 가치를 힘 들여가며 추구하는 인간.
하지만 자연스럽지 않기에 그 가치는 자꾸 스러져가고,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각성하고 힘쓰고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리라.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아주 원초적인 시원으로부터 출발하면 명확하게 보이는 듯 하다.
태초에 별 경쟁력이 없던 하나의 종족으로써의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 수를 늘려야 했던 것이고, 보다 많은 수의 개체들이 어울려서 살아나가며 그 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간의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규율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평등>과 <정의>는 매우 중요한 가치가 되었을 것임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생존에 필연적인 가치마저도, 자연스러운 본능적 욕구에 의해서 자꾸만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스스로를 가장 영리한 종족이라 칭하는 인간들이, 스스로를 지켜줄 가치를 허물어 버리는 우매한 짓을 반복하는 것이다.
과연 이게 가장 영리한 종족이 하는 짓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다양한 종교와 믿음을 통해서 존재하지도 않는 영혼, 자아를 얘기하고 윤회와 해탈을 말하며, 진화와 각성을 믿는다.
스스로가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소명을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자기 신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맞닥들인 이 사건을 통해서도 극명하게 드러난 바, 인간은 아직도 야만의 때를 벗어나지 못한 원숭이에 가까운 존재일 때름이다.
지금까지 이룬 문명의 업적을 증거로 내민다 한들, 딱 그만큼만 야만에서 벗어난 정도일 뿐이다.
인간이 과연 야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지만, 스스로에 대한 근거 없는 자존감은 자기 자신의 발판을 딛지 못함과 같기에, 자신에 대한 인식의 불가함과 발전의 불가함만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2016년 12월 21일 수요일
진보와 보수의 이념
좌우, 진보 보수는 단지 이념의 문제일까?
변화와 안정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쓸 수 있지만, 그게 그렇게 큰 차이일까?
각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도, 진보와 보수는 다른 입장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나름대로 양 진영의 논리는 그럴듯 해 보인다.
어쩌면 단지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가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선택된 진영의 예상과 반대 진영의 우려에 대해서도, 그 결과는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러기에 논의는 충분히 하되, 일단 결정이 되면 예상되는 결과를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우려되는 부작용을 막기위한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
여기까지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며, 나머지는 운명을 따라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의 논의 과정에서 가장 소모적인 것은, 이념 자체에 대한 논쟁이다.
개별 사안에 대한 선택을 두고, 그 사안에 대한 논의가 아닌, 그걸 추진하는 진영의 이념 혹은 반대하는 진영의 이념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는 것이야말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는 감정적 대립을 야기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주로 자신의 선택보다는 상대방의 선택이 보다 나을 수 있음을 인지한 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택을 관철시키려는 억지스러운 욕심에서 표출되곤 한다.
과연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으로 갈라놓으면, 모든 사안에 대한 선택은 미리 예측이 가능할까?
절대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미리 예측이 가능할 정도로 절대적인 보수와 절대적인 진보는 존재할 수도 없는 이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예측이 가능하다면, 정당을 이루는 국회의원들이 왜 필요하겠는가.
개별 사안에 대해 논의하고 표결하는 절차가 왜 필요하겠는가.
예측 가능한 진보의 의견과 예측 가능한 보수의 의견이 이미 나와 있는 셈이다.
의견의 당위성을 설명할 필요도 없다.
최종 결정만 남을 뿐이다.
진보적이지 않는 보수는 고여서 썩은 물이며, 보수적이지 않은 진보는 정처없이 떠도는 거렁뱅이에 지난지 않는다.
보수라도 잘못된 것은 고치고,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하는 것을 두려워 해서는 안되는 법이다. 보수가 경계해야 할 것은 보수 그 자체이다.
진보라 할지라도 내가 가진 것의 가치를 볼 줄 알고 지켜내는 강직함이 필요하다. 진보가 경계해야 할 것은 진보 그 자체이다.
진보도 변화해 왔으며, 보수도 변화해 왔다.
지금의 진보/보수도 과거의 진보/보수가 보면 사이비라고 비난할 것이며, 미래의 진보/보수가 보면 구태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것이 딱 우리의 현재 수준이다.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기와 동족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전쟁을 벌이는 아픔을 겪었다.
그리고 그 전쟁의 과정을 지켜본 많은 국민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깟 이념이 뭐라고..."
이념으로 다투어 서로의 목숨을 빼앗고 상처를 입히고 재산을 파괴했다.
그리고 이념이란 머리속에서 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무가치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아직도 이념으로 다투고 있다.
그깟 이념이 뭐라고...
역사를 통해 배웠어여 할 교훈은 어디로 갔을까.
P.S.
이념은 단지 명분이었을 뿐.
영토 전쟁의 명분이었고, 정치인들의 야망을 채우기 위한 명분이었을 뿐.
더 이상 이념의 희생양이 되지 말기를 갈망한다.
변화와 안정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쓸 수 있지만, 그게 그렇게 큰 차이일까?
각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도, 진보와 보수는 다른 입장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나름대로 양 진영의 논리는 그럴듯 해 보인다.
어쩌면 단지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가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선택된 진영의 예상과 반대 진영의 우려에 대해서도, 그 결과는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러기에 논의는 충분히 하되, 일단 결정이 되면 예상되는 결과를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우려되는 부작용을 막기위한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
여기까지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며, 나머지는 운명을 따라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의 논의 과정에서 가장 소모적인 것은, 이념 자체에 대한 논쟁이다.
개별 사안에 대한 선택을 두고, 그 사안에 대한 논의가 아닌, 그걸 추진하는 진영의 이념 혹은 반대하는 진영의 이념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는 것이야말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는 감정적 대립을 야기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주로 자신의 선택보다는 상대방의 선택이 보다 나을 수 있음을 인지한 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택을 관철시키려는 억지스러운 욕심에서 표출되곤 한다.
과연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으로 갈라놓으면, 모든 사안에 대한 선택은 미리 예측이 가능할까?
절대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미리 예측이 가능할 정도로 절대적인 보수와 절대적인 진보는 존재할 수도 없는 이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예측이 가능하다면, 정당을 이루는 국회의원들이 왜 필요하겠는가.
개별 사안에 대해 논의하고 표결하는 절차가 왜 필요하겠는가.
예측 가능한 진보의 의견과 예측 가능한 보수의 의견이 이미 나와 있는 셈이다.
의견의 당위성을 설명할 필요도 없다.
최종 결정만 남을 뿐이다.
진보적이지 않는 보수는 고여서 썩은 물이며, 보수적이지 않은 진보는 정처없이 떠도는 거렁뱅이에 지난지 않는다.
보수라도 잘못된 것은 고치고,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하는 것을 두려워 해서는 안되는 법이다. 보수가 경계해야 할 것은 보수 그 자체이다.
진보라 할지라도 내가 가진 것의 가치를 볼 줄 알고 지켜내는 강직함이 필요하다. 진보가 경계해야 할 것은 진보 그 자체이다.
진보도 변화해 왔으며, 보수도 변화해 왔다.
지금의 진보/보수도 과거의 진보/보수가 보면 사이비라고 비난할 것이며, 미래의 진보/보수가 보면 구태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것이 딱 우리의 현재 수준이다.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기와 동족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전쟁을 벌이는 아픔을 겪었다.
그리고 그 전쟁의 과정을 지켜본 많은 국민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깟 이념이 뭐라고..."
이념으로 다투어 서로의 목숨을 빼앗고 상처를 입히고 재산을 파괴했다.
그리고 이념이란 머리속에서 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무가치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아직도 이념으로 다투고 있다.
그깟 이념이 뭐라고...
역사를 통해 배웠어여 할 교훈은 어디로 갔을까.
P.S.
이념은 단지 명분이었을 뿐.
영토 전쟁의 명분이었고, 정치인들의 야망을 채우기 위한 명분이었을 뿐.
더 이상 이념의 희생양이 되지 말기를 갈망한다.
2016년 12월 17일 토요일
내부자의 증언이 어려운 이유
여전히 한참 진행 중인 대통령 탄핵정국에서 아주 흥미로운 볼거리는 국정조사 청문회이다.
이른바 최순실 국정조사(정식 명칭은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규명 국정조사")에서는 그 동안 '찌라시'라고 치부되거나, '~카더라'는 시중의 출처 없는 소문과 괴담들이 망라되어 있어서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국정조사의 법률적 한계로 인해, 증인의 출석을 강제할 수 없고, 강제적인 수사의 권한이 없어서 진실을 밝히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었다.
국정조사 위원들과 언론들이 한목소리로 "내부자의 양심적인 증언"을 호소하는 것은 바로 이런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고, 결정적인 진실의 봉인을 푸는 실마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첫번째,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의 행적을 밝히는 것은 아마도 내부자의 용기와 결단이 없다면 불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두번째, 김영재 성형외과의원 원장의 세월호 당일 행적 또한 내부자의 자발적 증언이 없다면 밝혀내기가 쉽지 않으리라 본다.
청와대의 경우에는 청와대 직원들, 김영재 원장의 경우엔 알리바이로 내세운 장모, 골프 상대, 병원 간호사 정도가 내부자가 될 것이다.
자, 만약에 김영재 원장의 병원 간호사가 원장의 증언 내용이 사실과 다름을 알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간호사가 알고 있는 원장의 의심스러운 언행은, 단지 원장이 밝힌 행선지이거나 원장이 병원을 비운 시간이거나 한, 극히 일부라고 말이다.
이 사실을 국정조사위원에게 폭로하거나 언론에 공대한다면?
간호사는 병원에서 근무할 수 없게 될 것은 명백하다. 원장으로부터 파면 당하거나, 병원이 문을 닫거나.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소한 사실로 인해서 진실이 드러날 확률이 매우 미미하다고 생각된다면 굳이 이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양심의 문제?
내가 아는 것보다, 아마 장모나 골프 상대가 알고 있는 사실이 진실을 밝힐 더 확실한 증거이고, 양심의 가책이라면 자신보다 그 사람들이 더 커야 한다고 위안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비밀을 가지고 있는 한, 원장은 자신을 해고할 수 없다는 보장까지 확보한다.
청와대의 의무실에 근무했다는 의무장교들 또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들이 비밀을 폭로해서 얻을 수 있는 잇점은, 비밀을 유지해서 얻을 수 있는 잇점에 비해 터무니 없이 보잘 것 없다.
결국은 '좋은 경찰 나쁜 경찰'과 같은 방법만이 남는다.
비밀을 폭로하지 않았을 경우에 처해질 공포를 극대화 해서 공포스럽게 만듦으로써, 비밀을 폭로했을 경우에 공포에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하는 방법.
이른바 최순실 국정조사(정식 명칭은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규명 국정조사")에서는 그 동안 '찌라시'라고 치부되거나, '~카더라'는 시중의 출처 없는 소문과 괴담들이 망라되어 있어서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국정조사의 법률적 한계로 인해, 증인의 출석을 강제할 수 없고, 강제적인 수사의 권한이 없어서 진실을 밝히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었다.
국정조사 위원들과 언론들이 한목소리로 "내부자의 양심적인 증언"을 호소하는 것은 바로 이런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고, 결정적인 진실의 봉인을 푸는 실마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첫번째,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의 행적을 밝히는 것은 아마도 내부자의 용기와 결단이 없다면 불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두번째, 김영재 성형외과의원 원장의 세월호 당일 행적 또한 내부자의 자발적 증언이 없다면 밝혀내기가 쉽지 않으리라 본다.
청와대의 경우에는 청와대 직원들, 김영재 원장의 경우엔 알리바이로 내세운 장모, 골프 상대, 병원 간호사 정도가 내부자가 될 것이다.
자, 만약에 김영재 원장의 병원 간호사가 원장의 증언 내용이 사실과 다름을 알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간호사가 알고 있는 원장의 의심스러운 언행은, 단지 원장이 밝힌 행선지이거나 원장이 병원을 비운 시간이거나 한, 극히 일부라고 말이다.
이 사실을 국정조사위원에게 폭로하거나 언론에 공대한다면?
간호사는 병원에서 근무할 수 없게 될 것은 명백하다. 원장으로부터 파면 당하거나, 병원이 문을 닫거나.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소한 사실로 인해서 진실이 드러날 확률이 매우 미미하다고 생각된다면 굳이 이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양심의 문제?
내가 아는 것보다, 아마 장모나 골프 상대가 알고 있는 사실이 진실을 밝힐 더 확실한 증거이고, 양심의 가책이라면 자신보다 그 사람들이 더 커야 한다고 위안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비밀을 가지고 있는 한, 원장은 자신을 해고할 수 없다는 보장까지 확보한다.
청와대의 의무실에 근무했다는 의무장교들 또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들이 비밀을 폭로해서 얻을 수 있는 잇점은, 비밀을 유지해서 얻을 수 있는 잇점에 비해 터무니 없이 보잘 것 없다.
결국은 '좋은 경찰 나쁜 경찰'과 같은 방법만이 남는다.
비밀을 폭로하지 않았을 경우에 처해질 공포를 극대화 해서 공포스럽게 만듦으로써, 비밀을 폭로했을 경우에 공포에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하는 방법.
2016년 12월 1일 목요일
우리는 합리적인가? 이성적인가? 논리적인가?
나를 비롯해 내 친구와 가족들, 친치들, 직장 동료와 선후배들, 동네 이웃들 등등
그리고 그 사람들을 통해 (들어서)알게된 더 많은 사람들.
과연 나 혹은 내 주변 혹은 주변의 지인들 가운데 충분히 합리적/이성적/논리적인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몇% 정도의 사람들이 그런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까?
*----------------------------------------------------------
근원적으로 따지자면 인간으로서 그 누군들 합리적/이성적/논리적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아는 것이 너무 얕아서 그런 판단을 한다는 자체가 우스운 일일 것이다.
단지, 우리 현 시대의 평균적인 성인들이 아는 것을 기준으로 삼자.
여기서 제기하는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기반으로 하는 합리적/이성적/논리적 수준임을 가정한다.
-----------------------------------------------------------*
최근의 정치적인 혼란 상황에서, 제반 문제점들에 대해서 근본에서의 재고찰이 필요해 보이며, 몇가지를 생각하다 보니 우리들이 너무 직관적/감정적이지 않았던가 하는 반성을 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몇가지 예를 들어 보일 것인데, 각 사례에 대해 우리들이 어떤식으로 판단을 했던 것인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 정치적인 입장(진보/보수 가 아니라 각 정책 사안에 따른 개별적인 판단이 필요)
2. 선거에 나선 후보에 대한 판단(여당/야당이 아니라 후보의 공약 자질에 대한 판단)
3. 뉴스의 사건 보도(선입견을 배제하고 보도한 내용을 기반으로 진실이 무엇인지 판단)
4. 자동차의 선택(브랜드/광고에 현혹되기 보다는 용도에 따른 기능,성능,가격으로 판단)
5. 스마트폰의 선택(상동)
6. 아날로그-디지털의 논쟁(디지털의 대중화에 대한 반발로 아날로그에 대한 장점이 부각되기도 하지만 그게 정말 꼭 필요한 것인지)
7. 좌-우 이념에 대한 가치의 혼동 (좌우익은 진보와 보수로 대변되는 것인데 언제부턴지 대한민국에서는 좌익=종북이라는 프레임이 당연시. 북한 내부에도 좌-우익이 있을거 같지 않은지?)
8. 마찬가지로 좌우익 = 자본주의&공산주의 등식 고착화.(이게 과연 맞을지. 자본주의 자체가 계속 변하고 있는 마당에...)
최근의 상황은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에 민심의 무게가 실리는 상황이다.
아마도 역대 최다 국민이 참가한 시위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 와중에 정 반대의 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있다.
대통령의 탄핵이나 하야에 반대한다는 시위도 있는데, 그 수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고 대부분은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이다.
또한, 국회 내에서도 대규모의 국민들이 집회를 하는 것에 대해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거나, '촛불 집회에 종북 좌파 세력이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식으로 폄하하거나 음모론을 제기하는 국회의원도 있었다.
대다수 국민들과는 반대의 의견을 가진 이들은 꽤 뿌리 깊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공산주의, 빨갱이, 인민, 좌파, 좌익, 종북, 친북이라는 단어에 대한 발작에 가까운 두려움을 말이다.
그리고 이 분들 대다수가 60대 이상의 노년층이기에 적어도 직접적으로 6.25를 겪으며 트라우마를 갖게 되셨거나 혹은 군사 독재 정권이 장기 집권을 위해 세뇌에 가까울 정도로 반복해서 심어준 후천적인 두려움에 온전히 세뇌된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노년층의 이러한 무조건적인 반공 사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후 세대를 다시 무조건적인 반-반공 사상에 빠지게 만들었다.
즉, 반공이라는 단어 자체를 매우 혐오스럽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젊은 세대로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약 30년 정도만 지나면 대한민국은 극좌파적인 사회가 되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다.
매우 불행한 현상인데, 이러한 극과 극으로의 전이 현상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과정이 이성적/합리적/논리적으로 추구되지 않았다는 점이 그러하다.
공포-두려움에 의한 무조건적인 반발과 회피 본능이 발현되었고, 두려움을 강요당한 세대들은 다시 그 강요를 두려워하게 되어 반발하고 회피하는...
그런데, 이런 현상이 비단 정치적인 분야에서만 일어나난 것이 아니란 점.
국내에서 굳건한 입지를 다지고 있는 현대자동차는 그 동안 매우 많은 비난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해외와 국내의 차별적인 품질/가격//서비스와 소비자를 대하는 마인드가 매우 고압적이라는 점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동안 밝혀진 자동차 자체의 문제점들, 소극적인 리콜, 품질이나 가격의 역차별 등등이 사실임이 밝혀진 후에도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의 점유율은 상대적으로 낙폭이 적었다.(떨어지긴 했으나 밝혀진 사실들에 비하면 적다는...다분히 주관적인 의견)
왜일까?
물론 드러난 단점들이 감점 요인이긴 하지만, 그 동안 현대차가 쌓아온 신뢰가 있었던 건 아닐까?
몇가지 단점들 때문에 타사의 차를 구매했더니, 현대차에서는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단점이 등장할 가능성도 있고...
일부 반-현대차 주의자들은 여전히 현대차를 구매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는다. 잘못된 걸 뻔히 알면서도 구매해 주니까 현대차가 시정을 하지 않는 거라고. 사실로 밝혀진 것들조차 믿지 않거나 모르는 척 외면한다고.
과연 어느 쪽의 주장이 맞을까?
삼성의 갤럭시 스마트폰과 애플의 아이폰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서로가 상대방을 비방하고 자신의 장점을 자랑하면서 언쟁하기 일쑤다.
과연 맞는 주장이 있기는 한걸까?
이런 일련의 갈등에서 현명한 판단이 많이 아쉽기도 하지만,
과연 우리는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사람들을 통해 (들어서)알게된 더 많은 사람들.
과연 나 혹은 내 주변 혹은 주변의 지인들 가운데 충분히 합리적/이성적/논리적인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몇% 정도의 사람들이 그런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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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적으로 따지자면 인간으로서 그 누군들 합리적/이성적/논리적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아는 것이 너무 얕아서 그런 판단을 한다는 자체가 우스운 일일 것이다.
단지, 우리 현 시대의 평균적인 성인들이 아는 것을 기준으로 삼자.
여기서 제기하는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기반으로 하는 합리적/이성적/논리적 수준임을 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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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정치적인 혼란 상황에서, 제반 문제점들에 대해서 근본에서의 재고찰이 필요해 보이며, 몇가지를 생각하다 보니 우리들이 너무 직관적/감정적이지 않았던가 하는 반성을 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몇가지 예를 들어 보일 것인데, 각 사례에 대해 우리들이 어떤식으로 판단을 했던 것인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 정치적인 입장(진보/보수 가 아니라 각 정책 사안에 따른 개별적인 판단이 필요)
2. 선거에 나선 후보에 대한 판단(여당/야당이 아니라 후보의 공약 자질에 대한 판단)
3. 뉴스의 사건 보도(선입견을 배제하고 보도한 내용을 기반으로 진실이 무엇인지 판단)
4. 자동차의 선택(브랜드/광고에 현혹되기 보다는 용도에 따른 기능,성능,가격으로 판단)
5. 스마트폰의 선택(상동)
6. 아날로그-디지털의 논쟁(디지털의 대중화에 대한 반발로 아날로그에 대한 장점이 부각되기도 하지만 그게 정말 꼭 필요한 것인지)
7. 좌-우 이념에 대한 가치의 혼동 (좌우익은 진보와 보수로 대변되는 것인데 언제부턴지 대한민국에서는 좌익=종북이라는 프레임이 당연시. 북한 내부에도 좌-우익이 있을거 같지 않은지?)
8. 마찬가지로 좌우익 = 자본주의&공산주의 등식 고착화.(이게 과연 맞을지. 자본주의 자체가 계속 변하고 있는 마당에...)
최근의 상황은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에 민심의 무게가 실리는 상황이다.
아마도 역대 최다 국민이 참가한 시위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 와중에 정 반대의 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있다.
대통령의 탄핵이나 하야에 반대한다는 시위도 있는데, 그 수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고 대부분은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이다.
또한, 국회 내에서도 대규모의 국민들이 집회를 하는 것에 대해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거나, '촛불 집회에 종북 좌파 세력이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식으로 폄하하거나 음모론을 제기하는 국회의원도 있었다.
대다수 국민들과는 반대의 의견을 가진 이들은 꽤 뿌리 깊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공산주의, 빨갱이, 인민, 좌파, 좌익, 종북, 친북이라는 단어에 대한 발작에 가까운 두려움을 말이다.
그리고 이 분들 대다수가 60대 이상의 노년층이기에 적어도 직접적으로 6.25를 겪으며 트라우마를 갖게 되셨거나 혹은 군사 독재 정권이 장기 집권을 위해 세뇌에 가까울 정도로 반복해서 심어준 후천적인 두려움에 온전히 세뇌된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노년층의 이러한 무조건적인 반공 사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후 세대를 다시 무조건적인 반-반공 사상에 빠지게 만들었다.
즉, 반공이라는 단어 자체를 매우 혐오스럽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젊은 세대로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약 30년 정도만 지나면 대한민국은 극좌파적인 사회가 되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다.
매우 불행한 현상인데, 이러한 극과 극으로의 전이 현상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과정이 이성적/합리적/논리적으로 추구되지 않았다는 점이 그러하다.
공포-두려움에 의한 무조건적인 반발과 회피 본능이 발현되었고, 두려움을 강요당한 세대들은 다시 그 강요를 두려워하게 되어 반발하고 회피하는...
그런데, 이런 현상이 비단 정치적인 분야에서만 일어나난 것이 아니란 점.
국내에서 굳건한 입지를 다지고 있는 현대자동차는 그 동안 매우 많은 비난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해외와 국내의 차별적인 품질/가격//서비스와 소비자를 대하는 마인드가 매우 고압적이라는 점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동안 밝혀진 자동차 자체의 문제점들, 소극적인 리콜, 품질이나 가격의 역차별 등등이 사실임이 밝혀진 후에도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의 점유율은 상대적으로 낙폭이 적었다.(떨어지긴 했으나 밝혀진 사실들에 비하면 적다는...다분히 주관적인 의견)
왜일까?
물론 드러난 단점들이 감점 요인이긴 하지만, 그 동안 현대차가 쌓아온 신뢰가 있었던 건 아닐까?
몇가지 단점들 때문에 타사의 차를 구매했더니, 현대차에서는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단점이 등장할 가능성도 있고...
일부 반-현대차 주의자들은 여전히 현대차를 구매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는다. 잘못된 걸 뻔히 알면서도 구매해 주니까 현대차가 시정을 하지 않는 거라고. 사실로 밝혀진 것들조차 믿지 않거나 모르는 척 외면한다고.
과연 어느 쪽의 주장이 맞을까?
삼성의 갤럭시 스마트폰과 애플의 아이폰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서로가 상대방을 비방하고 자신의 장점을 자랑하면서 언쟁하기 일쑤다.
과연 맞는 주장이 있기는 한걸까?
이런 일련의 갈등에서 현명한 판단이 많이 아쉽기도 하지만,
과연 우리는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까?
2016년 11월 19일 토요일
[도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제목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
저자 : 코맥 매카시 (Cormac McCarthy)
역자 : 임재서
출판사 : 사피엔스21
국내에서는 영화로 더 잘 알려진 원작의 소설.
나도 영화를 먼저 본 후, 한참이 지나서 원작이 있음을 알았고, 또 한참이 지나서 책으로 읽게 되었다.
원작은 2005년 발표, 영화는 2008년 개봉.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영화 개봉 당시에는 매우 잘 만든 영화라는 호평이 자자했는데, 생각보다 그닥 재미있지는 않았다.
이 또한 수입 배급사의 과장 홍보 때문이었을까?
하비에르 바르뎀, 토미 리 존스 등 주연급 배우들의 연기는 매우 좋았다.
감독은 코엔 형제.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간의 긴장감, 그리고 이들의 뒤를 한 발 늦게 따라가며 수사하는 보안관의 절망감.
안톤 쉬거의 냉혈함이 주는 섬뜩함.
모스의 능숙함과 영리함, 그러나 쪽기는 자로서의 긴장감.
벨 보안관의 절망감.
소설을 읽어 보면, 코엔 형제가 왜 뛰어난 감독인지를 알 수 있다.
소설을 영화화 한 것인지, 영화를 소설로 펴 낸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
작품의 재미가 떨어지는 것은, 작품의 배경과 소재가 우리에겐 그다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의 가치는 세밀한 묘사에 있다.
하지만 나로써는 글자만으로 상상해내기 어려운 장면의 묘사들이 많았기에, 코엔 형제의 재현에 감탄을 했으며, 원작만을 보았다면 많은 부분이 어렵게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벨 보안관의 독백과 같은 생각들은, 이 책이 단순한 액션 스릴러가 아님을 보여준다.
책의 일부를 스캔해서 올려 두는 것이 저작권법에 위배 될 수도 있지만, 이 책의 느낌을 활자화된 상태로 보여주는 것이 제일 적절하다 생각했다.
매우 제한된 양이기에 양해를 구하는 바이며, 문제가 될 시에는 바로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노쇠한 보안관 벨은 점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을 버거워하며 한탄을 한다.
그리고 전쟁 영웅으로 훈장을 받았던 일의 뒤에 숨겨진 진실로 자책을 한다.
책의 말미는 조금 의아한데, 영화화 되지 않은 부분들이 벨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책에서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인물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와서 당혹하게 만들며, 구체적 설명이 없었던 모 사건의 증인으로 출석을 하는 부분 등이 나온다.
연작 소설의 한 부분만을 떼어낸 듯이 참으로 이해가 쉽지 않은 부분이며, 역자의 주석이 없었다면 내내 궁금했을 것이어서 아쉬움도 있다.
흔히들 노인들이 젊은 세대를 보며 한탄하는 일은 로마시대부터 줄곧 이어진 일이라고 치부한다.
한편으로는 세상은 결국 돌고 도는 것이라며, 지금 일어난 일이 과거에도 있었던 일이라며 위안으로 삼는다.
과연 노인들의 경고는 그저 꼰대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벨 보안관의 한탄처럼 세상은 점점 나락으로 치닫고 있는 것일까.
저자 : 코맥 매카시 (Cormac McCarthy)
역자 : 임재서
출판사 : 사피엔스21
국내에서는 영화로 더 잘 알려진 원작의 소설.
나도 영화를 먼저 본 후, 한참이 지나서 원작이 있음을 알았고, 또 한참이 지나서 책으로 읽게 되었다.
원작은 2005년 발표, 영화는 2008년 개봉.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영화 개봉 당시에는 매우 잘 만든 영화라는 호평이 자자했는데, 생각보다 그닥 재미있지는 않았다.
이 또한 수입 배급사의 과장 홍보 때문이었을까?
하비에르 바르뎀, 토미 리 존스 등 주연급 배우들의 연기는 매우 좋았다.
감독은 코엔 형제.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간의 긴장감, 그리고 이들의 뒤를 한 발 늦게 따라가며 수사하는 보안관의 절망감.
안톤 쉬거의 냉혈함이 주는 섬뜩함.
모스의 능숙함과 영리함, 그러나 쪽기는 자로서의 긴장감.
벨 보안관의 절망감.
소설을 읽어 보면, 코엔 형제가 왜 뛰어난 감독인지를 알 수 있다.
소설을 영화화 한 것인지, 영화를 소설로 펴 낸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
작품의 재미가 떨어지는 것은, 작품의 배경과 소재가 우리에겐 그다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의 가치는 세밀한 묘사에 있다.
하지만 나로써는 글자만으로 상상해내기 어려운 장면의 묘사들이 많았기에, 코엔 형제의 재현에 감탄을 했으며, 원작만을 보았다면 많은 부분이 어렵게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벨 보안관의 독백과 같은 생각들은, 이 책이 단순한 액션 스릴러가 아님을 보여준다.
책의 일부를 스캔해서 올려 두는 것이 저작권법에 위배 될 수도 있지만, 이 책의 느낌을 활자화된 상태로 보여주는 것이 제일 적절하다 생각했다.
매우 제한된 양이기에 양해를 구하는 바이며, 문제가 될 시에는 바로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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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틀, 공공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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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의 유래가 된 싯구의 소개. 예이츠의 비잔티움으로의 항해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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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페이지. 이 부분은 벨 보안관의 얘기이며 이 책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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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반부, 이 책의 재미있는 주석. 핏자국 주석. |
노쇠한 보안관 벨은 점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을 버거워하며 한탄을 한다.
그리고 전쟁 영웅으로 훈장을 받았던 일의 뒤에 숨겨진 진실로 자책을 한다.
책의 말미는 조금 의아한데, 영화화 되지 않은 부분들이 벨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책에서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인물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와서 당혹하게 만들며, 구체적 설명이 없었던 모 사건의 증인으로 출석을 하는 부분 등이 나온다.
연작 소설의 한 부분만을 떼어낸 듯이 참으로 이해가 쉽지 않은 부분이며, 역자의 주석이 없었다면 내내 궁금했을 것이어서 아쉬움도 있다.
흔히들 노인들이 젊은 세대를 보며 한탄하는 일은 로마시대부터 줄곧 이어진 일이라고 치부한다.
한편으로는 세상은 결국 돌고 도는 것이라며, 지금 일어난 일이 과거에도 있었던 일이라며 위안으로 삼는다.
과연 노인들의 경고는 그저 꼰대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벨 보안관의 한탄처럼 세상은 점점 나락으로 치닫고 있는 것일까.
2016년 11월 4일 금요일
세태무상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은 연일 급락하고 있으며, 지리멸렬해 보이던 야당과 야당의 대선주자들은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상태이다.
드러난 것만으로도 불법적인 것이 명확해 보이고, 드러나지 않았으나 대통령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정황은 명약관화하다.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가 2차례 있었지만 모두 미흡했던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때마다 검찰에게 수사 가이드를 지시한 듯이 보이는 대통령의 언급으로 미루어, 두번째 대국민 사과에서 '검찰의 수사와 특검까지도 수용하겠다'는 말은 특검까지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로까지 의심될 지경이다.
한마디로, 대통령의 말이라면 이제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 3년의 모든 것마저 의심스러우며, 대통령이 배신자였다는 분노도 숨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나 자신의 이러한 감정적인 격정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감정적으로 큰 변화가 있는 경우에, 이성적인 판단은 그만큼 약해지기 마련이고, 또 그래서 쉬이 잊혀지기도 하는 법이다.
약해지는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서 몇가지 기억나는 것들을 적어 보려 한다.
불과 1,2개월 전만 해도 '종북좌파'라는 단어는 낙인처럼 사용되었다.
주로 보수 여당의 진영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에게 달아주던 꼬리표 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이런 짓들이 어떻게 힘을 가질 수 있었을까? 정부가 꾸준히 북한의 위험함을 강조했고, 북한은 미사일과 핵으로 여기에 힘을 실어 주었고, 우리 국민들은 스스로의 판단을 유보하고 정부의 프라퍼갠다를 그냥 수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젠 누구도 섣불리 '종북좌파'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가 어려워졌다.
임기 내내 북한에 의한 위협을 앞세우고,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이라며 국민들 겁주기에 힘을 쓴 대통령과 그 정부의 패러다임과 궤를 같이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그동안 꾸준히 제기되어온 문제점과 의혹들은 모두 '정치공세'로 치부하거나 '팩트'만을 요구하고, '법과 원칙'만을 부르짖었기에, 완전히 드러나기 전에는 말도 꺼내선 안되는 것이었고, 법과 원칙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무법천지가 되고 말았다.
물론 이러한 잣대는 권력을 가진 자에 의해서 마음대로 적용되었기에 양지와 음지의 온도 차이는 극대화 되었으리라.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의 친이계 의원들은 호가호위하며 실세인 듯 행동했지만, 정권이 바뀌자마자 고행이 시작되었다.
지금의 친박계 의원들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과연 이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얼마나 알고 줄을 섰던 것인지, 잘 모르면서 줄을 섰다면 그 무책임함과 무능함으로 지탄을 받을 것이며, 알면서도 줄을 섣다면 그 비열함으로 지탄을 받을 처지다.
언론.
아마도 이번 사태에 대한 핵심 역할을 한 것이 언론이 아니었나 싶다.
전통적인 보수 언론과 진보 언론 - 대한민국 내에서의 상대적인 보수와 진보일 뿐이다 -은 이전까지 자신의 역할을 잘 지켜냈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주필을 청와대가 공격하면서 보수 언론들이 일제히 정부의 반대편에 서게 되면서 여론을 들끓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만약 보수 언론들이 정부를 호위하고, 의혹이 드러날 때마다 정부의 편에서 나팔수 역할을 했더라면 과연 이 사태가 어떻게 되었을까?
이번 정권 뿐 아니라 이전의 여러 정권들에서 제기되었던 의혹들처럼 단지 의혹으로만 끝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밝혀지지 않은 그 수많은 의혹 가운데 일부는 이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사건들이 없었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의혹을 밝힐 수 있는지의 여부가 언론에 달려 있다는 뜻이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누구보다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보수 논객들.
그들이야말로 악랄하게 종북좌파 낙인 찍기에 앞장 선 인물들이었고, 그 어느 때 보다 국민들을 갈라 놓는데 적극적이었던 인물들 이었다. 그랬던 인물들이 어떻게 변했는가? 이들이 아직도 대통령을 옹호한다면 그 명분이 없음으로 비난 받을 것이며, 대통령을 등진다면 그 가벼움으로 비난 받을 것이다.
나라가 어지럽다.
나라가 시끄럽다.
나라가 혼란스럽다.
마치 안개 속에 들어 앉은 듯, 모두가 지척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떠들어 대고 있는 양상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안개가 걷히고 난 후를 생각해야 한다. 아니 모두가 그래야 한다.
그리고 침착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안개가 걷히고 난 후에, 안개 속에서 떠들고 부르짖었던 것이 부끄럽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 국민들 모두가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의 정치가 바뀌고, 정치인이 바뀌고, 대한민국이 바뀐다.
더 나아가서, 종북좌파라는 낙인을 씌우고 수구꼴통이라는 비난을 일삼았던 것도 더 큰 시야에서 보면 부끄러운 일이다.
뜻을 같이한다고 모인 당파 내부에서 다시 세력을 나누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언론이 지켜야할 유일한 자존심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권세에 아부하는 것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무거운 가치를 무겁게 지켜나가는 이가 없는 이 세태가 참으로 무상할 뿐이다.
드러난 것만으로도 불법적인 것이 명확해 보이고, 드러나지 않았으나 대통령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정황은 명약관화하다.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가 2차례 있었지만 모두 미흡했던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때마다 검찰에게 수사 가이드를 지시한 듯이 보이는 대통령의 언급으로 미루어, 두번째 대국민 사과에서 '검찰의 수사와 특검까지도 수용하겠다'는 말은 특검까지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로까지 의심될 지경이다.
한마디로, 대통령의 말이라면 이제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 3년의 모든 것마저 의심스러우며, 대통령이 배신자였다는 분노도 숨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나 자신의 이러한 감정적인 격정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감정적으로 큰 변화가 있는 경우에, 이성적인 판단은 그만큼 약해지기 마련이고, 또 그래서 쉬이 잊혀지기도 하는 법이다.
약해지는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서 몇가지 기억나는 것들을 적어 보려 한다.
불과 1,2개월 전만 해도 '종북좌파'라는 단어는 낙인처럼 사용되었다.
주로 보수 여당의 진영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에게 달아주던 꼬리표 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이런 짓들이 어떻게 힘을 가질 수 있었을까? 정부가 꾸준히 북한의 위험함을 강조했고, 북한은 미사일과 핵으로 여기에 힘을 실어 주었고, 우리 국민들은 스스로의 판단을 유보하고 정부의 프라퍼갠다를 그냥 수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젠 누구도 섣불리 '종북좌파'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가 어려워졌다.
임기 내내 북한에 의한 위협을 앞세우고,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이라며 국민들 겁주기에 힘을 쓴 대통령과 그 정부의 패러다임과 궤를 같이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그동안 꾸준히 제기되어온 문제점과 의혹들은 모두 '정치공세'로 치부하거나 '팩트'만을 요구하고, '법과 원칙'만을 부르짖었기에, 완전히 드러나기 전에는 말도 꺼내선 안되는 것이었고, 법과 원칙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무법천지가 되고 말았다.
물론 이러한 잣대는 권력을 가진 자에 의해서 마음대로 적용되었기에 양지와 음지의 온도 차이는 극대화 되었으리라.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의 친이계 의원들은 호가호위하며 실세인 듯 행동했지만, 정권이 바뀌자마자 고행이 시작되었다.
지금의 친박계 의원들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과연 이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얼마나 알고 줄을 섰던 것인지, 잘 모르면서 줄을 섰다면 그 무책임함과 무능함으로 지탄을 받을 것이며, 알면서도 줄을 섣다면 그 비열함으로 지탄을 받을 처지다.
언론.
아마도 이번 사태에 대한 핵심 역할을 한 것이 언론이 아니었나 싶다.
전통적인 보수 언론과 진보 언론 - 대한민국 내에서의 상대적인 보수와 진보일 뿐이다 -은 이전까지 자신의 역할을 잘 지켜냈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주필을 청와대가 공격하면서 보수 언론들이 일제히 정부의 반대편에 서게 되면서 여론을 들끓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만약 보수 언론들이 정부를 호위하고, 의혹이 드러날 때마다 정부의 편에서 나팔수 역할을 했더라면 과연 이 사태가 어떻게 되었을까?
이번 정권 뿐 아니라 이전의 여러 정권들에서 제기되었던 의혹들처럼 단지 의혹으로만 끝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밝혀지지 않은 그 수많은 의혹 가운데 일부는 이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사건들이 없었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의혹을 밝힐 수 있는지의 여부가 언론에 달려 있다는 뜻이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누구보다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보수 논객들.
그들이야말로 악랄하게 종북좌파 낙인 찍기에 앞장 선 인물들이었고, 그 어느 때 보다 국민들을 갈라 놓는데 적극적이었던 인물들 이었다. 그랬던 인물들이 어떻게 변했는가? 이들이 아직도 대통령을 옹호한다면 그 명분이 없음으로 비난 받을 것이며, 대통령을 등진다면 그 가벼움으로 비난 받을 것이다.
나라가 어지럽다.
나라가 시끄럽다.
나라가 혼란스럽다.
마치 안개 속에 들어 앉은 듯, 모두가 지척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떠들어 대고 있는 양상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안개가 걷히고 난 후를 생각해야 한다. 아니 모두가 그래야 한다.
그리고 침착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안개가 걷히고 난 후에, 안개 속에서 떠들고 부르짖었던 것이 부끄럽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 국민들 모두가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의 정치가 바뀌고, 정치인이 바뀌고, 대한민국이 바뀐다.
더 나아가서, 종북좌파라는 낙인을 씌우고 수구꼴통이라는 비난을 일삼았던 것도 더 큰 시야에서 보면 부끄러운 일이다.
뜻을 같이한다고 모인 당파 내부에서 다시 세력을 나누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언론이 지켜야할 유일한 자존심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권세에 아부하는 것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무거운 가치를 무겁게 지켜나가는 이가 없는 이 세태가 참으로 무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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