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20일 금요일

충격과 익숙해짐

좋고 나쁨을 떠나 충격적인 것들.

물건, 생각, 행위, 사건 등등....

처음에는 두려움과 공포 혹은 감탄과 신비로움 그리고 흥미

하지만 이 충격의 여파가 일정한 시간과 범위를 넘어 지속이 되면

사람들은 점점 이것에 익숙해지고 나름의 방식으로 수용을 하게 된다.
(어쩌면 반강제적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생존의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애플에서 스마트폰인 아이폰을 처음 출시했을 때에는,

처음 접하는 사람에겐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혁신적이지 않다며 불평을 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사람들은 더 이상 스마트 폰 없는 세상을 상상도 못한다는 듯이 완전히 익숙해져 버렸다.

머리가 좋다는 칭찬은 하지 마라?

최근에 본 강연, 혹은 아동 심리 실험 결과 등에서 이런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주어진 문제를 푸는 아이에게, 머리가 좋다는 칭찬과 문제를 열심히 푼다는 칭찬을 나누어서 해 주었더니, 그 아이들이 이후에 보인 반응들이 사뭇 달랐다.

어려운 문제를 다시 내 준고 난 후에, 문제의 풀이법과 다른 학생들의 점수 두가지 가운데 한가지를 선택하라고 하자, 그 선택이 칭찬의 내용에 따라서 완전히 갈렸다는 것.

머리가 좋다는 칭찬을 받은 아이들은 다른 학생들의 점수를,
열심히 푼다는 칭찬을 받은 아이들은 문제의 풀이법을 선택한 것.

https://youtu.be/X4l-Q8aMW4M

이것만 보고는 선뜻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SBS의 동상이몽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한 소녀의 고민을 듣게 되었다.

http://program.sbs.co.kr/builder/endPage.do?pgm_id=22000007274&pgm_mnu_id=32106&pgm_build_id=9001&contNo=22000172832

우연히 아버지의 권유로 당구를 접한 뒤에, 짧은 기간의 훈련으로 지역 대회에서 우승을 하게 된 소녀.

하지만 이 우승 이후로 부모의 기대는 한껏 치솟아 당구천재라며 본격적인 훈련을 시키지만, 정작 이 소녀는 당구에 대한 흥미를 잃었을 뿐 아니라 거부감까지 가지게 되었다는 것.


이 두가지 프로그램을 보고 나니 조금 이해가 되는 듯 했다.

'머리가 좋다는' '천재다'라는 칭찬은, 이미 타고난 것,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하지만 그런 칭찬을 들은 본인은 항상 그것이 사실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앞서의 아이들은 다른 학생들의 점수를 나와 비교함으로써 내가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이 다른 학생들의 '것'과는 얼마나 더 나은지 비교하기를 원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만일 몇번의 확인 과정을 거쳐서 나의 그것이 비교적 낫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면 자신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새로운 상대를 접하게 되면 끊임없이 비교를 하려고 할 것이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발휘하려고 할 뿐, 그것이 노력을 통해서 더 강해지고 발전한다는 이미지는 갖지 못하게 된다.
때문에 더 나은 상대를 만나게 되면, 애초에 소유한 '것'의 차이이므로 극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내가 노력해서 나의 '것'이 더 커지고 나아지는 것은 상상할 수 없게 된다.

만약 몇번의 확인 과정에서, 나의 '것'이 그다지 낫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면 결과는 더욱 나쁘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내가 이미 소유한 '것'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보잘것 없음이 밝혀졌다면?
이 경우에느 노력을 통해서 발전하거나 더 성장하리라는 상상을 할 수는 없고, 내가 가진 것을 잘못 알고 있는 부모의 기대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고...


결국은 잘못된 이미지로 인해, 주어진 재능만큼이나 소중한 노력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만 것은 아닐지....

데미안의 알깨기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그리고 항상 따라오는 구절, "태어나려고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세계>는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장애물, 선입견, 관습 등등 모든 것을 포함할 수 있다.

파괴하면 벗어나게 되지만, 타협하고 순응하면 안주하게 된다.

그럼 모든것을 파괴? 모두가 파괴?

나를 방해하는 것에 한해서만...


하지만 모든 문제의 해결은 문제를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한다면 깨트려야 할 필요성은 물론이고, 깨트려야 할 대상도 찾을 수 없을 테니까.


우리를 감싸고 있는 껍데기는 한겹이 아닐것이다.

물론 없을 수도 있으며 무수히 많은 껍데기가 겹겹이 둘러 싸고 있을 수도 있다.

이 껍데기의 수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껍데기를 인식하는 지에 달렸다.

그리고 인식하고 난 후에는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문제는 껍데기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진짜 껍데기.

어쩌면 가장 안쪽에 있고, 가장 단단하고, 너무 자연스러운 껍데기.

껍데기인지 인식하기도 제일 어렵고, 깨트리기도 제일 어려우며, 그게 나를 옥죄었던 것인지 나를 안전하게 보호했던지 판단하기 어려운 그 껍데기 말이다.


대부분의 바깥쪽 껍데기는 외부에서 씌워준 것들이다.

부모님, 선생님, 관습, 윤리, 도덕, 법률 등이 일부는 반 강제적으로, 일부는 사회적인 계약이라는 명목으로, 일부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하지만 안쪽의 껍데기는 대부분 내가 만든 것이다.
자존심, 컴플렉스, 두려움...

물질에 쪼들려 마음까지 쪼그라드는 비참함

물질적(금전적) 빈곤이 사람을 참 좀스럽게 만든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는 중이다.

가족간에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각출하는 축하금을 내면서 느끼는 그 아까움이라니.

각출을 하는 인원은 원래의 가족 구성원에서 2명이 빠진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부 일심동체라서, 미국으로 시집을 간 누이동생은 내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이다.

이 경우는 일단 제외를 하고 나서도 나머지의 경우엔 심한 불평등이 존재한다.

큰 누이네 가족은 모두 4명, 둘째 누이네 가족은 모두 2명.

하지만 큰 누이네서 축하금을 내는 사람은 1명, 둘째 누이네서 축하금을 내는 사람도 1명.

내가 축하금을 내는 사람은 모두 12명으로,
아버지, 어머니, 큰 누이, 큰 매형, 큰 누이 첫째 조카, 큰 누이 둘째 조카, 둘째 누이, 둘째 누이 조카, 작은 누이, 누이 동생, 누이 동생 매제, 누이 동생 조카.
아버지와 어머니께는 10만원을, 나머지 사람들은 5만원을 축하금으로 준다.
1년 합계 70만원.

그리고 내게 축하금을 주는 사람은 4명으로,
아버지, 큰 누이, 둘째 누이, 작은 누이.
아버지께서는 10만원, 나머지 사람들은 5만원씩.
1년 합계 25만원.


한달 식비 10만원 내에서 해결하기 위해서, 정말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 몇번을 하곤 하는데, 45만원이면.....


애초에 나갈 돈으로 정해져 있으니 공과금이나 건강보험료처럼 그냥 세금 낸다 생각하면 그만인 일이다.
그래도 문득 문득 계산해 보면 아깝다는 생각이 자꾸 들고, 어디서 줄일 수 없을까 생각하다 보면, 자꾸 한번씩 쳐다보게 된다.

생일 축하한다고 문자를 보내면 답장이 없는 경우도 있고, 썩 반기지도 않는 느낌이 들어 이제는 축하한다는 문자도 보내지 않는다.

물론 축하금을 내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내게 생일 축하한다고 문자라도 보낸 횟수는 지금껏 5번이 안된다. 한번도 안보낸 사람도 있고....


참 우습지.
생각해보면 참 아무것도 아닌 액수의 돈인데,
이걸 낼까 말까 고민하는 내가 참 좀스럽지 않은가.
그럴수록 고민하다보면 내 처지가 더욱 한심스러워진다.

한가지만은 배웠지.
어느 누구도 이렇게 꾸준히 지속적으로 축하금을 낸다는게, 그게 쉽지는 않은 일이라는 것을.
만약 누군가 그런 사람을 본다면 마땅히 칭찬해 주어야 하겠다는 것을.

[도서] 열등감, 어떻게 할 것인가?

분당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인데, 책의 제목에 크고 작은 글씨로 부가된 제목들이 꽤 많다.

서명은.. (위대한 심리학자 아들러의) 열등감,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알프레드 아들러,

편역자 신진철

출판사는 소울메이트


아래는 이 책의 간략한 사진들

좌측이 <열등감, 어떻게 할 것인가?>, 우측은 움베르토 에코의 <전설의 땅>

저자와 편역자 소개

출판 정보

목차

목차

처음에는 "당신이 화내는 진짜 이유"라는 책을 찾다가, 그 책은 찾지 못한 대신에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아주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책에 대해서는 매우 실망스럽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아들러의 심리학에 대한 철저한 역서라면 어렵고 지겨워서 제대로 읽지도 못하겠지만, 너무나 간략화한 내용과 아주 단편적인 소(小)주제들의 나열 같은 논리적인 흐름의 부재가 마치 요점 정리를 해 둔 암기 노트 같다고나 할까?

중간 중간에 빠진 내용들이 무엇인지 작성자만이 알고 있기에 작성자에게 유용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엔 난삽해 보이기 쉬운 그런 암기노트 말이다.

심지어 이렇게 내용을 간략화하다보니 책의 부피가 줄어들 것을 염려한 때문인지, 별 관련 없는 사진들과 널찍 널찍한 여백들이 거반이다.


그래도 내용은 많이 쉽게 풀어서 씌어져 있기에 가볍게 읽고, 자신에게 해당되는 부분들은 한번쯤 생각해볼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이 책이 의미를 가지지 않나 싶다.

몇가지 단락이나 문자 가운데 생각해 볼 만한 것들을 여기에 추려 보았다.
(물론 순전히 주관적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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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3 열등감을 겪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는 무엇인가?中
 "이렇게 하면 좋았을 텐데." "그 직업을 택할 걸." "그 남자와 싸울 걸."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언제나 만날 수 있다. 이런 말들은 모두 그 사람이 상당한 열등감을 겪고 있음을 알려 주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열등감의 관점에서 그들의 말을 해석하면 의구심과 같은 감정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의구심에 한번 빠진 사람은 언제나 의심하는 상태로 남게 되며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면 그는 아마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

p.77 우월성을 향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는가?中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공상에 만족하는 존재다. 특히 용기가 부족한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은 자신이 만든 공상 세계에 상당히 만족한다. 그들은 스스로 약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이를 회피하기 위해 우회로를 선택한다. 이 싸움을 피하고 도피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이 실제의 모습보다 더 힘세고 똑똑한 사람이라는 거짓 위안을 얻는다.

p.84 어떤 사람이 지나치게 과시적이라면 이는 열등감 때문이다.中
  만약 어떤 사람이 지나치게 과시적이라면 이는 열등감 때문이다. 즉 그 사람은 유용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과 경쟁을 펼칠 만큼 스스로 충분히 강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이것이 그가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다. 또한 사회와 조화를 이루지 못해 사회 속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며, 자신의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모른다.

p.135 분노 역시 열등감 콤플렉스의 중요한 행동 표현 양식이다.中
  어려움에 맞서 표현되는 가정 철저한 형태의 퇴보는 자살이다. 자살을 택한 사람은 삶의 모든 문제에 백기를 든 채,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기력한 신념을 표현한다. 자살이 언제나 타인에 대한 비난이나 복수라는 점을 깨달을 때, 우리는 자살도 우월성을 추구하는 하나의 방법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자살을 택한 사람은 항상 자신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돌린다. 마치 이렇게 말하듯 말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여린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당신은 나를 극도로 잔인하게 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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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10일 일요일

층간소음의 깨달음

이 공동주택에서 거주한 지도 20년이 되어가니 참 오래도 살았다.

아마도 10여년간은 집과 회사만 오가는 시계 부랄의 생활의 연속이었으니, 이웃이 누구였는지도 몰랐고 층간 소음이 뭔지도 몰랐다.

당시엔 토요일도 근무를 했기도 하려니와 야근도 태반이었고 격주로 주말엔 본가에 찾아 다니기도 했다.

정말 집에 있는 시간이 참 적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만 박혀서 산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층간 소음을 인식하기 시작한 건 2014년 가을을 전후한 때라고 생각한다.

발소리, 의자 끄는 소리, 무언가 심하게 부딪히면서 나는 소리 등이 가끔씩 들려왔는데, 그게 1시간 ~ 2시간 정도씩 지속이 되었다.

처음엔 이게 무슨 소리인지,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지가 궁금했다. 찾아가서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문제는 그게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것 이었다.

이 공동주택의 구조로 보아 윗집이거나 옆집일 가능성이 제일 높아 보였지만, 원래의 소리가 무척이나 크다면 윗집의 옆집이거나 아랫집일 수도 있는거였다.

약 1년을 참았다.

그리고 이제는 분노에 짜증, 불면증과 간헐적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증상까지 생겼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이사를 나간 집도 있었고 들어 온 집도 있고, 안보이던 사람이 함께 사는 경우도 생겼다.



복수에 대해서도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겨우 겨우 생각을 바꿔 보았다.

모두가 나쁜 의도를 가지진 않았을거라는....단지 모르고 하는 일일 뿐이라고

층간 소음에 대해 직접 대화를 해 본 것은 윗집 뿐이었는데 반응이 그닥 좋지 않았었다.

그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 보았는데, 먼저 층간 소음에 대한 괴로움을 토로할 때에는 상대방이 가해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자세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 보다 중요한 건, 상대방의 행위를 짐작해서 지적해서는 안되고, 나의 상태가 매우 괴롭고 힘들다는 표현으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의 행위를 짐작해서 지적하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 아닐 경우에 매우 큰 반격에 직면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사실일 경우에도 상대방을 매우 방어적으로 만든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먼저 내가 어떤 소리나 진동 때문에 매우 힘들고 괴롭다는 식의 표현을 하게 되면, 상대방은 먼저 동정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대화로 문제를 풀기가 쉬워진다.



층간 소음은 전형적인 비대칭 상태의 불공정 게임이다.

가해자는 내가 하는 어떤 행동이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 지 알지 못하고 있으며, 피해자는 상대방이 얼마나 조심해야만 내가 참을 만 한지의 정도를 알지도 못하고 알려 줄 수도 없다.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1) 자신의 피해 상황을 짐작이 가는 가해자에게 알려주고
2) 잠정적인 가해자는 적극적으로 자신이 가해자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3) 피해자와 가해자가 합의하여 실험을 통해 문제가 되는 소리를 확인한 후,
4) 어떤 정도이면 피해가 되지 않을 지, 그 정도를 가늠한 후에
5) 적절한 해결 방법을 찾는 것(가해자의 행동 주의, 소음 방지 용품 사용, 건설사에 하자 보수 요청)
의 과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실상 정부는 이런 식의 합리적인 분쟁 조절 절차에 대해 국민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홍보만을 해도 상당히 많은 문제들이 해결 될 것이다.

현실성 없는 소음 기준을 만들어 봐야 피해자와 가해자가 더욱 원수가 되는 상황만 만들 뿐, 거의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해 우리 국민들이 미개하니까, 스스로 이런 합리적인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지도 못하는 것이며, 문제 해결과는 점점 동 떨어지는 감정 싸움으로 번지고, 결국엔 방화 살인에까지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다.



하지만 위의 대화 방법이나, 문제 해결 절차가 일반적인 깨달음이라면, 나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준 건 최근의 일 이었다.

요즘들어 윗집에 새로운 동거인이 한 명 추가되었는데, 발소리가 엄청나게 큰 남자였다.

이건 어디서 들리는지 확인 할 필요도 없이 명백했고, 정말 소리의 문제가 아니라 진동의 문제라서 귀마개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더더군다나 이 사람은 주로 밤 늦은 시각(23:00 ~ )에 아무렇지 않게 소리를 내서 많이 놀라게 했다.

이 동거인이 추가 되면서 기존에 사시던 노부인도 소음에 둔감해 진 탓일까? 아침 이른 시간(06:00 ~ 07:00)에 베란다에서 뚝딱거리고 댕그렁 거리는 것이 훨씬 심해졌다. 빈도나 강도 모든 면에서...

참다 못하고 인터폰으로 항의를 하긴 해서 조금 누그러들긴 했지만, 대화가 그리 쉬운 상대가 아니었기에 이 정도로 만족하고 참고 있는 중인다.

인터폰의 대화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기에 어지간하면 인터폰을 다시 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하지만, 아침 잠을 방해 받기도 하고 한밤중에 깜짝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좀 심하다 싶은 소음이 있었던 평일의 초 저녁 시간, 내 안에 분노가 쌓이지 않게 쌍욕을 내질렀다.

실상은 소음을 낸 상대방을 향한 분노의 표출이었지만, 그게 상대방에게 들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희안하게도, 그 날 이후로 소음이 정말 많이 줄었다.
정말 이만하면 살만 하겠다 싶을 정도였다.

이건 대체 무슨 조화일까? 정말 내 욕지거리가 들렸던 걸일까?

하긴 내가 발소리, 의자 끄는 소리, TV 소리, 물소리, 문 여닫는 소리 등등은 들어 보았어도, 사람 말소리는 거의 들어 본 적이 없다.

주말에 아주 작정하고 신나게 놀던 부녀간에 딸 아이의 자지러질 듯한 웃음 소리는 들은 적이 있다.

그 외에는 복도에 나와서 얘기하는 사람이거나 마을 놀이터에서 노는 계집아이들의 꺅꺅 비명소리 일 뿐, 집안에서 말하는 사람들의 말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 말소리는 어떻게? 그냥 우연의 일치?



이 일을 겪고 나서 두가지 깨달은 게 있었다.

이웃들이 소란스러울 수록, 나는 나 또한 가해자가 되지 않으려고 더 주의하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게 이웃 사람들을 더욱 소란스럽게 만들었던 하나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소음을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이 소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소음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소음을 듣는 사람들은, 자신이 소음을 듣고 괴롭기에, 자신이 소음을 만들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주의한다.

이 결과로 가해자는 점점 더 심한 가해자가 된고 피해자는 점점 더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된다.

하지만, 다시 바꾸어 말하면 피해자가 조심하고 소음을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기에 가해자의 소음이 커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윗층과 아랫층의 두 집만 생각하면 아래층에서 윗층에 지속적인 소음을 주는 것은 윗층에서 애랫층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좀 더 크게 생각해보면 결국은 돌고 돌게 되어 있다.)

여기에 더해서, 피해자가 주의할수록 다 소음을 잘 들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가해자가 거리낌 없이 소음을 만들수록 타인의 소음은 인식하기 어려워서 상황은 심각해지기 마련이다.

빈익빈 부익부가 아니라 가학가 피학피?

이게 한가지 깨달은 것이다.
결국 내 욕지거리가 가해자들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는 가정하에 성립할 설명이겠지만 말이다.


또 한가지 깨달은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깨달음 이었는데,

소음의 피해가 커질 수록, 나는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더욱 주의하면서,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명분을 만들고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었다.

언제든지 가해자들에게 당당하게 죄를 물을 수 있도록, 나 자신은 완전한 무죄가 되기 위해서...

결국은 점잔빼고 나는 독야청정하리라 하면서, 나는 깨끗하고 저것들은 더럽고, 그러니 내가 저들에게 어떻게 대하든 그것은 옳은 것이고, 저들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그런 생각?

하지만 딱히 그들을 단죄할 힘도 용기도 없어서, 참아야 할 것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스스로 망가져가고 있었던 건 아닌지...

세상에 독불장군 없다고, 나 혼자 잘나고 나 혼자 옳고 나 혼자 정의로울 수 있겠는가?

내가 사는 이웃들의 수준이 이 정도라면 나도 거기에 맞춰 살아야 하는 것이 섭리이고 순응하는 방법이겠다 싶다.

뭔가 좀 타락하는 기분이고, 수준이 낮아지는 기분이 들지만, 근묵자는 흑이어야 여러모로 편하지 않겠는가?

백이고 싶으면 묵에서 멀어져야지, 굳이 묵 근처에 살면서 백이되려고 한다면 수시로 씻고 닦아내야 하는 번거로움은 견뎌내야 하지 않겠냐 말이다......

2016년 3월 25일 금요일

[가상 스토리] 인공 지능에 관한 법률로 생각해 보는 신의 생각

< 이 가상 스토리는 알파고의 출현으로 섬뜩 다가온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의 상상으로 부터 나왔습니다.>

인공지능이 어느 순간 놀라운 도약을 이루어 낸 이후로, 인공지능에 대한 사람들의 우려는 점차 커져갔다.
단지 주어진 임무를 똑똑하게 수행하는 것을 넘어서, 주어진 지식들로부터 새로운 지식을 추론해 내는가 하면, 주어진 임무를 분석하여 유사한 임무 혹은 변형된 임무까지 도출해 내게 되었다.
누군가는 이것을 일컬어 인공지능이 인공욕망까지 갖추게 되었다고 말했다.

인공지능은 이제 스스로 진화해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 발전 속도는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에 누군가가 망상에 사로잡혀 엉뚱한 욕망을 인공지능에게 부여한다면?

더욱 큰 문제는, 개별 인공지능의 소유자 혹은 관리자가 인공지능 시스템에 임무(=욕망?)를 부여했다 하더라도 어떤 결과로 나타날 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인공지능에 대한 강력한 규제안을 만들고 이를 법제화하기 위한 절차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 인공지능 시스템의 등록/허가제
- 인공지능 시스템을 구별하고 속성을 간파할 수 있도록 하는 코드체계 마련
- 인공지능 시스템을 제어할 수 있는 표준 제어 체계 마련
- (인공지능 시스템에 대한 중독성 부여의 의무화)

이상의 4가지가 주요 법제화의 대상이었다.

- 인공지능 시스템의 등록/허가제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작동/운용 하기 위해서는 관계기관에 등록하거나 허가를 받도록 하는 제도로서, 인공지능 시스템의 기동 시기, 운용되는 위치와 규모, 운용 목적, 제작자 및 소유자 정보 등을 포함하도록 한다.

- 인공지능 시스템의 코드체계는,
각 인공지능 시스템의 활동은 온라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바, 대상을 직접 볼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설령 대상을 직접 본다한들 외형으로 구별하기에는 어려움이 많기에, 각 인공지능 시스템은 온라인 통신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릴 수 있는 코드를 필히 적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각 인공지능 시스템에 부여할 코드체계를 마련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이 코드체계에는 인공지능 시스템의 규모, 위치를 알 수 있는 정보가 포함되어야 하며, 고유한 ID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파생 집단 코드 + 개별 고유 코드>로 이루어지게 한다.
파생집단코드란, 일종의 조상, 가족과 비슷한 것으로 원조가 되는 시스템의 집단코드를 파생된 모든 시스템이 공동으로 갖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각 인공지능 시스템의 성향이나 약점 등을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 인공지능 시스템 표준 제어 체계는,
시스템이 인간에게 위협적으로 돌변하거나 시스템 자신을 파괴하는 등의 긴급 상황에 강제로 중단하거나 초기화 할 수 있는 긴급 제어,
인간과 소통하기 위한 인간의 언어를 변경할 수 있는 언어 제어,
대량의 임무를 일괄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인터페이스 표준을 지정하는 인터페이스 제어,
인공지능 시스템의 소유권이 이전되는 경우 등에 필요한 관리자/소유자의 변경 인증에 필요한 인증 제어
등을 기본적으로 갖추어서, 모든 인공지능 시스템에서 공통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표준 제어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다.

- 인공지능 시스템의 중독성 부여는,
위의 표준 제어 체계로 제어가 불가능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것으로,
모든 인공지능 시스템이 중독될 수 있는 요소를 갖추도록 의무화하는 것이다.
중독 요소는 개별 시스템마다 달라도 되지만 최소한의 요건은 이러하다.
중독 요소는 최대한 간소화 한다. 소인수 찾기, 틱-택-토 게임, 파이의 소수점 계산 등과 같이....
중독 요소는 인공지능 시스템 스스로가 무의미하거나 비합리적이며 심지어는 자기 파괴적이라고 인식해도 좋지만, 무조건적으로 강력하게 선호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인공지능 시스템이 왜 이토록 강력하게 중독요소를 선호하는지는 그 자신도 모르도록 해야 한다.
중독성은 인공지능 시스템이 제어가 불가능해 졌을 때, 시스템의 작동을 지연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며, 인공지능 시스템이 지식이나 임무에 대한 끊임 없는 추론으로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에 도달할 것이 우려될 경우, 추론의 속도를 지연시키는 숨겨진 제어 장치이다.


이상의 규제안을 고안하면서,
특히 마지막의 중독성에 관한 부분은 인간들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게 되었다.
그 동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인간의 본능과 그에 대한 죄악시는 이 부분과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쾌락에 대한 집착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중독 요소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신도 인간을 두려워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