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죄를 저지를 사람은 애초에 정해져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은가?
혹은 환경으로 인해 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도록 강제되는 것인가?
환경적으로는 전혀 범죄를 저지를만한 동기가 없어 보이는 사람이 죄를 범하는 경우도 있으며,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 죄를 짖는 것이 불가피해 보이는 상황에도 한심하다 싶을 정도로 순박하거나 청렴함을 유지하는 사람도 있다.
전자의 경우로는, 고교생의 신분으로 <초x이의 모험>이라는 게임을 개발해 재능을 인정받아 국내 대기업 S전자에 입사했으나 자신의 꿈과 동떨어진 업무로 회사에 흥미를 잃고 위조지폐를 만드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있었다.
후자의 경우로는, 반지하 월세에 세들어 살던 세모녀가 수입이 없어 살길이 막막해지자 번개탄을 피워 자살을 한 사건이 었었다. 이들은 마지막으로 월세와 공과금을 유서와 함께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극과 극을 보여주는 경우이긴 하지만, 이들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범죄/사건/사고 등을 보면 죄를 저지르기 쉬운 유형의 사람이 있으며, 이들도 정도의 차이가 다양하여, 범죄를 유발하는 환경의 임계점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보는 것이 그나마 타당한 분석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 보다 타당한 설명을 가능하게 하려면,
사람마다 죄를 저지를 분야가 다른 것 같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돈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금전적인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높지만 권력이나 명예에는 관심이 없어 사람의 상해에 관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거의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설명한 "분야"는 앞선 <소인(素因)-환경> 가운데 <소인(素因)>과 같은 것이다.
종합하자면, 사람에 따라 죄를 저지르기 쉬운 정도의 차이가 있고, 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분야가 다르며, '정도'와 '분야'가 환경적 조건과 맞아 떨어지면 죄로 발현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해보면, 사람은 누구나 죄를 저지를 수 있는 분야가 있고, 죄를 저지를 가능성도 어느 정도는 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자신의 실체 가운데 일정 정도를 아는 방법이며,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피해야 할 환경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2014년 11월 25일 화요일
감정 노출증
가족들만 모여 있는 집안에서, 이웃들과 마주칠 수 있는 집 앞의 동네,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 큰 길거리와 공공 장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적절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야 한다.
적절하다는 모호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바꾸어 말하자면 최소한 가려서 남에게 보이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 사람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서 서로간에 노출이 가능한 정도가 묵시적으로 합의되어 있는 듯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친밀도에 의해 가능한 노출의 정도가 결정되곤 한다.
이와 비슷하게 사람이 드러낼 수 있는 감정의 노출 정도 또한 서로가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사실(?)이라 생각한다.
사실(?)에 물음표가 붙은 이유는, 누구도 명시적으로 그래야 한다고 가르쳐 주거나 선언하는 것을 듣거나 본 적이 없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겪어 본 바로는 그렇기 때문이다.
기쁨이나 즐거움은 비교적 넓게 노출이 허용되는 감정이긴 하지만, 이 역시 제한되는 관계가 있다.
슬픔과 분노는 훨씬 더 노출이 제한되는 감정임에 틀림없다.
서로간에 묵시적으로 합의된 감정의 노출제한이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의 당혹감은 마치...
꽤나 격식을 차리는 사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웃통을 벗어 제치고 바지를 내린다면?
아무리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중요하고 숨기고 싶어할만한 부분을 보여준다면?
마찬가지로 사무적인 관계, 공적인 관계의 사람이 지극히 내밀한 감정을 보여준다면?
최소한 표면상으로는 우호적이어야 하는 관계를 가져야 하는 관계에서 분노가 표출된다면?
허용된 노출은 쉽게 무마되고 복구된다.
하지만 제한을 넘긴 감정의 노출은 관계의 재설정을 요구한다.
상호간에 합의가 이루어지면 감정 노출의 범위가 넓어지는 효과를 가져오지만,
합의를 이루지 못한다면 아얘 관계의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다.
==============================================
감정 노출의 제한이 비대칭 적일 수 있다.
즉, 특정 쌍방이 맺고 있는 관계에서도 감정 표현의 제한이 방향에 따라 다르게 설정된다는 것.
종종 부모와 자식간에 이런 경우가 많으며, 상하 종속적인 관계에서도 흔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선생님과 학생간에 이루어지는 감정의 노출 제한은 다른 경우가 많다.
매우 엄한 선생님과 순종적인 학생과 같은 전통적인 스승-제자의 관계에서,
스승은 제자에게 애착과 분노를 보일 수 있지만 슬픔과 기쁨을 보여주는 것은 제한될 수 있고, 제자는 스승에게 기쁨과 슬픔은 허용되지만 분노는 제한될 수 있는 것과 같다.
감정의 노출 제한이 비대칭적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를 두고 상하관계, 지배-종속의 관계라고 일괄적으로 말하기는 곤란한 것 같다.
하지만 지배-종속관계에서는 감정의 노출 제한이 비대칭적이 된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듯 하다.
적절하다는 모호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바꾸어 말하자면 최소한 가려서 남에게 보이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 사람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서 서로간에 노출이 가능한 정도가 묵시적으로 합의되어 있는 듯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친밀도에 의해 가능한 노출의 정도가 결정되곤 한다.
이와 비슷하게 사람이 드러낼 수 있는 감정의 노출 정도 또한 서로가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사실(?)이라 생각한다.
사실(?)에 물음표가 붙은 이유는, 누구도 명시적으로 그래야 한다고 가르쳐 주거나 선언하는 것을 듣거나 본 적이 없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겪어 본 바로는 그렇기 때문이다.
기쁨이나 즐거움은 비교적 넓게 노출이 허용되는 감정이긴 하지만, 이 역시 제한되는 관계가 있다.
슬픔과 분노는 훨씬 더 노출이 제한되는 감정임에 틀림없다.
서로간에 묵시적으로 합의된 감정의 노출제한이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의 당혹감은 마치...
꽤나 격식을 차리는 사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웃통을 벗어 제치고 바지를 내린다면?
아무리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중요하고 숨기고 싶어할만한 부분을 보여준다면?
마찬가지로 사무적인 관계, 공적인 관계의 사람이 지극히 내밀한 감정을 보여준다면?
최소한 표면상으로는 우호적이어야 하는 관계를 가져야 하는 관계에서 분노가 표출된다면?
허용된 노출은 쉽게 무마되고 복구된다.
하지만 제한을 넘긴 감정의 노출은 관계의 재설정을 요구한다.
상호간에 합의가 이루어지면 감정 노출의 범위가 넓어지는 효과를 가져오지만,
합의를 이루지 못한다면 아얘 관계의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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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노출의 제한이 비대칭 적일 수 있다.
즉, 특정 쌍방이 맺고 있는 관계에서도 감정 표현의 제한이 방향에 따라 다르게 설정된다는 것.
종종 부모와 자식간에 이런 경우가 많으며, 상하 종속적인 관계에서도 흔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선생님과 학생간에 이루어지는 감정의 노출 제한은 다른 경우가 많다.
매우 엄한 선생님과 순종적인 학생과 같은 전통적인 스승-제자의 관계에서,
스승은 제자에게 애착과 분노를 보일 수 있지만 슬픔과 기쁨을 보여주는 것은 제한될 수 있고, 제자는 스승에게 기쁨과 슬픔은 허용되지만 분노는 제한될 수 있는 것과 같다.
감정의 노출 제한이 비대칭적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를 두고 상하관계, 지배-종속의 관계라고 일괄적으로 말하기는 곤란한 것 같다.
하지만 지배-종속관계에서는 감정의 노출 제한이 비대칭적이 된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듯 하다.
2014년 11월 3일 월요일
금언(禁言)
R. F. Scott
1. 남을 해롭게 하는 말을 하지 말라.
2. 불평하지 말라.
3. 설명하지 말라.
4. 받아 들여지지 않는 충고를 하지 말라.
이 금언(禁言)은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었던 글인데,
기억을 되짚어 보고, 인터넷에서 다시 검색을 해 보니 정말 여러 사람들에 의해 퍼져 있었다.
영국의 탐험가인 Robert Falcon Scott이라는 분이 한 말이라고 들 하는 것도 다 똑같다.
처음에 들었을 때엔 4번의 "받아 들여지지 않는 충고"의 쓸모 없음에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고, 다시 생각을 해 보니 3번의 "설명하지 말라"는 말의 의미가 사뭇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것을 혼자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는 아는 척 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실생활에서는 '이미 일어난 일을 직시하고 받아들여야지 공연히 부연 설명을 해서 회피하지 말라.'는 것이 더 교훈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이 말을 한 Scott 선생의 의도는 뭐였을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검색을 해 보았다.
한글로 된 검색 결과에서는 모두가 달랑 4가지 말만 써 놓았을 뿐이었다.(내가 못 찾았는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영어로 검색을 해 보았다.
R. F. Scott's sayings
R. F. Scott's Quotes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Scott 선생께서 이런 말을 했다는 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
명언들만 모아 놓은 사이트도 있는데, 거기서 R. F. Scott의 말들을 찾아봐도 이런 금언은 없었다.
http://www.brainyquote.com/quotes/authors/r/robert_falcon_scott.html
이번에는 저 금언을 대략 영역을 해서 검색해 보았다.
1. Do not speak ill of others
2. Do not complain
3. Do not explain
4. Do not advise ...
영역이 맞는지도 모르겠고 1번과 4번은 문장이 좀 길어져서 2번과 3번을 먼저 타이핑 하자 검색창에서 바로 자동 완성이 되는 게 아닌가?
실제 검색한 단어는 "do not complain do not explain"이었는데, 참 많은 결과들이 나왔다.
대부분은 누가 한 말인지 언급도 없이 인용해서 사용하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작가가 한 말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디에서는 헨리 포드가 한 말이라고도 했다.
참....실제로 누가 한 말인지는 아무도 모르는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2번과 3번의 금언에 대한 설명은 대략 일치하는 듯 하다.
"불평을 하거나 장황하게 설명을 하는 것은 벌어진 일에 당당히 맞서지 않고 회피하기 위함이거나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함이니 그런 비겁한 짓 하지 말고 당당하게 인정할 것은 인정하라."는 뜻이라는 것.
인간이라면 자기 보호 본능이 있기에, 자신이 상처받을 상황이 되면 거짓말도 하고 핑계도 대고 이유도 갖다 붙이곤 한다. 이건 유치원정도 다니는 어린 아이들도 그러는 것이니 어쩌면 당연하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거짓말을 인식하지 못하고 반복하는 사이에 나는 현실과 괴리되어 나만의 울타리에 갇혀버린 것은 아닐까? 그리고 자꾸 더 많은 현실의 상황을 회피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누가 한 말인지 모르지만 이 4개의 금언은 인간의 본성을 인식하고, 다시 이것을 극복하라고 다그치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 4개의 금언(禁言)은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명령하는 언명(言命)은 아니었을까?
1. 남을 해롭게 하는 말을 하지 말라.
2. 불평하지 말라.
3. 설명하지 말라.
4. 받아 들여지지 않는 충고를 하지 말라.
이 금언(禁言)은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었던 글인데,
기억을 되짚어 보고, 인터넷에서 다시 검색을 해 보니 정말 여러 사람들에 의해 퍼져 있었다.
영국의 탐험가인 Robert Falcon Scott이라는 분이 한 말이라고 들 하는 것도 다 똑같다.
처음에 들었을 때엔 4번의 "받아 들여지지 않는 충고"의 쓸모 없음에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고, 다시 생각을 해 보니 3번의 "설명하지 말라"는 말의 의미가 사뭇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것을 혼자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는 아는 척 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실생활에서는 '이미 일어난 일을 직시하고 받아들여야지 공연히 부연 설명을 해서 회피하지 말라.'는 것이 더 교훈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이 말을 한 Scott 선생의 의도는 뭐였을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검색을 해 보았다.
한글로 된 검색 결과에서는 모두가 달랑 4가지 말만 써 놓았을 뿐이었다.(내가 못 찾았는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영어로 검색을 해 보았다.
R. F. Scott's sayings
R. F. Scott's Quotes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Scott 선생께서 이런 말을 했다는 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
명언들만 모아 놓은 사이트도 있는데, 거기서 R. F. Scott의 말들을 찾아봐도 이런 금언은 없었다.
http://www.brainyquote.com/quotes/authors/r/robert_falcon_scott.html
이번에는 저 금언을 대략 영역을 해서 검색해 보았다.
1. Do not speak ill of others
2. Do not complain
3. Do not explain
4. Do not advise ...
영역이 맞는지도 모르겠고 1번과 4번은 문장이 좀 길어져서 2번과 3번을 먼저 타이핑 하자 검색창에서 바로 자동 완성이 되는 게 아닌가?
실제 검색한 단어는 "do not complain do not explain"이었는데, 참 많은 결과들이 나왔다.
대부분은 누가 한 말인지 언급도 없이 인용해서 사용하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작가가 한 말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디에서는 헨리 포드가 한 말이라고도 했다.
참....실제로 누가 한 말인지는 아무도 모르는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2번과 3번의 금언에 대한 설명은 대략 일치하는 듯 하다.
"불평을 하거나 장황하게 설명을 하는 것은 벌어진 일에 당당히 맞서지 않고 회피하기 위함이거나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함이니 그런 비겁한 짓 하지 말고 당당하게 인정할 것은 인정하라."는 뜻이라는 것.
인간이라면 자기 보호 본능이 있기에, 자신이 상처받을 상황이 되면 거짓말도 하고 핑계도 대고 이유도 갖다 붙이곤 한다. 이건 유치원정도 다니는 어린 아이들도 그러는 것이니 어쩌면 당연하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거짓말을 인식하지 못하고 반복하는 사이에 나는 현실과 괴리되어 나만의 울타리에 갇혀버린 것은 아닐까? 그리고 자꾸 더 많은 현실의 상황을 회피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누가 한 말인지 모르지만 이 4개의 금언은 인간의 본성을 인식하고, 다시 이것을 극복하라고 다그치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 4개의 금언(禁言)은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명령하는 언명(言命)은 아니었을까?
2014년 10월 9일 목요일
보편성에서 특수성으로, 전체성에서 개별성으로
과거에는 커다란 하나의 이념으로 사회 전체의 기준을 삼을 수 있었지만, 최근에 이르러서는개개인의 다양성과 사회의 다양성이 증가하면서 사회 전체를 대변할 수 있는 이념을 세우기가 매우 곤란해졌다.
따라서 현재의 사회를 이해하는 방식은 보편성을 고집하지 말고 특수성의 눈으로 봐야하며, 전체성이 아닌 개별성의 눈으로 봐야만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보편성이 사라진 것이라고, 전체성이 없어진 것이라고 봐야 하는가?
이렇게 손바닥을 뒤집듯이 하나로 뭉쳐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단 말인가?
아니다.
예전의 사회라 할지라도 보편성과 특수성은 공존하고 있었으며
단지 예전에 비해 보편성은 줄어들었고 특수성은 늘어났다고 봐야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아프리카의 어떤 초원에 살고 있는 동물이 거의 포유류였다고 가정하자.
우리는 이 초원을 포유류 초원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 조류와 파충류로까지 늘어났다고 하면, 과거에 부르던 포유류의 초원은 적절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동물의 초원이라고 묶어서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의 다양성은 늘었으며, 우리 사회를 묶을 수 있는 보편적인 이념은 과거보다 한차원 더 높아야만 가능해졌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사회를 이해하는 방식은 보편성을 고집하지 말고 특수성의 눈으로 봐야하며, 전체성이 아닌 개별성의 눈으로 봐야만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보편성이 사라진 것이라고, 전체성이 없어진 것이라고 봐야 하는가?
이렇게 손바닥을 뒤집듯이 하나로 뭉쳐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단 말인가?
아니다.
예전의 사회라 할지라도 보편성과 특수성은 공존하고 있었으며
단지 예전에 비해 보편성은 줄어들었고 특수성은 늘어났다고 봐야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아프리카의 어떤 초원에 살고 있는 동물이 거의 포유류였다고 가정하자.
우리는 이 초원을 포유류 초원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 조류와 파충류로까지 늘어났다고 하면, 과거에 부르던 포유류의 초원은 적절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동물의 초원이라고 묶어서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의 다양성은 늘었으며, 우리 사회를 묶을 수 있는 보편적인 이념은 과거보다 한차원 더 높아야만 가능해졌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2014년 7월 10일 목요일
증오와 괴로움
아파트 단지 중앙에 몇개의 상가가 있다.
썩 활발하진 않지만 산책로를 이용하는 주민들의 왕래는 꾸준한 그런 곳 이었다.
여기에 작은 동네 슈퍼마켓이 있었고 나도 몇번 이용을 했던 터라 주인 아저씨와 안면도 있었다.
한동안 이용이 뜸했다가 한참만에 가보니 대각선으로 마주보는 곳에 또 하나의 슈퍼마켓이 이었다.
그런데 새로 개점을 한 슈퍼에 예전의 주인 아저씨가 있는 것이 아닌가?
혹시 장사가 잘되서 슈퍼를 두 개 모두 운영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보았다.
안면이 있는 주인 아저씨를 보고 새로 개점한 슈퍼에 들어가서 몇가지 물건을 사면서,
'저 쪽에 있는 예전의 슈퍼는...' 슬쩍 물어보니,
주인 아저씨의 표정이 급속히 어두워지시며 '쳇, 나도 몰라요'라는 분노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자세한 내막이야 모르겠지만 좋은 일이 아님은 분명했다.
다시 한참만에야 늦은 시각에 그 곳을 지나게 되었다.
슈퍼에 볼 일은 없었지만 지나치며 보니 그 주인 아저씨가 혼자서 슈퍼에 서 계신 모습이 보였다.
어두워져 인적이 뜸해진 거리, 손님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무엇인가를 지키고 있는 문지기처럼, 다소 경직되어 보이던 그 아저씨를 보고 있자니 한편으로는 측은하게까지 보였다.
최근의 내 상황과 묘하게 교차되기도 했기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위층의 시도 때도 없는 쿵쿵거리는 발소리, 의자 끄는 소리, 깜짝 놀랄 정도의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 등이 순간순간마다 증오를 불러오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소리 자체가 나의 귀를 괴롭히는 것 보다, 그로인해 생겨난 증오가 나를 더 괴롭히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모쪼록 그 주인 아저씨가 경쟁 상대로 생각하는 슈퍼에 대한 증오만 없애도 훨씬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썩 활발하진 않지만 산책로를 이용하는 주민들의 왕래는 꾸준한 그런 곳 이었다.
여기에 작은 동네 슈퍼마켓이 있었고 나도 몇번 이용을 했던 터라 주인 아저씨와 안면도 있었다.
한동안 이용이 뜸했다가 한참만에 가보니 대각선으로 마주보는 곳에 또 하나의 슈퍼마켓이 이었다.
그런데 새로 개점을 한 슈퍼에 예전의 주인 아저씨가 있는 것이 아닌가?
혹시 장사가 잘되서 슈퍼를 두 개 모두 운영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보았다.
안면이 있는 주인 아저씨를 보고 새로 개점한 슈퍼에 들어가서 몇가지 물건을 사면서,
'저 쪽에 있는 예전의 슈퍼는...' 슬쩍 물어보니,
주인 아저씨의 표정이 급속히 어두워지시며 '쳇, 나도 몰라요'라는 분노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자세한 내막이야 모르겠지만 좋은 일이 아님은 분명했다.
다시 한참만에야 늦은 시각에 그 곳을 지나게 되었다.
슈퍼에 볼 일은 없었지만 지나치며 보니 그 주인 아저씨가 혼자서 슈퍼에 서 계신 모습이 보였다.
어두워져 인적이 뜸해진 거리, 손님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무엇인가를 지키고 있는 문지기처럼, 다소 경직되어 보이던 그 아저씨를 보고 있자니 한편으로는 측은하게까지 보였다.
최근의 내 상황과 묘하게 교차되기도 했기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위층의 시도 때도 없는 쿵쿵거리는 발소리, 의자 끄는 소리, 깜짝 놀랄 정도의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 등이 순간순간마다 증오를 불러오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소리 자체가 나의 귀를 괴롭히는 것 보다, 그로인해 생겨난 증오가 나를 더 괴롭히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모쪼록 그 주인 아저씨가 경쟁 상대로 생각하는 슈퍼에 대한 증오만 없애도 훨씬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지나친 절약의 문제
가계의 소득이 물가상승률을 미치지 못할 때,
그리고 가계 소비의 주체가 그것을 체감하게 되면
당연한 수순으로 소비를 줄이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불요불급한 소비를 하지않으려 하고, 반드시 필요한 소비에 대해서도 보다 저렴한 소비방법을 찾게된다.
너무도 당연하며, 어찌보면 거의 기계적인 반응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다.
기본 소비 단위인 하나의 가계만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바람직한 행동양식이겠지만, 모든 소비 주체를 엮어 생각하고, 생산자와의 연관 관계까지 함께 고려한다면, 이 순환 시스템에서 자신의 소비 감소는 결국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개인들의 소비에 의존하는 생산자들을 생각해 보자.
생상자들은 소비자들의 이러한 소비 절감 행위에 맞추어 반응할 것이다.
생산자들이 소비자에게 저렴한 가격에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익을 줄일거라 생각하는가?
생산자가 자신의 이익을 줄이는 행위는 자멸을 향해 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최후에, 다른 방법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생산자들은 먼저 자신들의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줄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면 저렴한 원료/부품을 사용하거나 인건비를 줄일 수 밖에 없다.
이는 재화나 서비스의 질 하락을 가져오며, 동시에 근로자의 소득 하락을 가져온다.
재화나 서비스의 질 하락은 결국은 비용의 증가를 가져오고, 근로자의 소득하락은 다시 가계 소득의 하락으로 이어져서,
생산과 소비의 순환 시스템이 더욱 빠르게 악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상의 악순환에서 개인/가계의 소비자는 피해자이며 착취당하는 노동자로 보일 수 있다.
반면에 생산자는 가해자이며 착취하는 자본가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생산자 또한 피해자가 된다.
결국의 소비자의 소비 여력이 줄어들게 되면 생산자의 이익은 줄어들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산자의 입장에서 이익률이 중요할까 절대 이익의 양(금액)이 중요할까?
이익의 양(금액)이다.
규모가 100일 때의 이익률이 20%라서 20의 이익을 올렸던 생산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100을 추가로 투자해서 규모를 200으로 늘렸을 때 이익률이 15%로 줄어든다면 이 생산자는 투자를 할까 말까?
10중 8,9는 투자를 할 것이다.
생산자의 입장에서 이익률이 높으면 좋겠지만 이익률이 첫번째는 아닌 이유이다.
기업의 재무제표에서 매출액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전체적인 소비의 감소는 매출의 규모 감소로 이어지고,
이익률은 올라갈지 몰라도 이익의 양(금액)은 줄어들어서 결국은 쇠퇴하는 양상을 보이게 될 것이다.
1997년 IMF에서 구제금융을 받았던 시기,
한국의 원화 가치는 폭락하고 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은 급락하면서,
기업들은 아주 당연한 행동양식을 보였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의 도입이 그것이었다.
조기에 IMF 구제금융에서 벗어나게 되었음을 외부로부터, 그리고 스스로 칭찬해 마지 않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살아남은 기업들은 자유로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으로 비용을 줄여서 얻은 경쟁력을 해외로 까지 널혀가면서 자신에게 돌아올 부메랑의 회전반경을 넓혔던 것이다.
이젠 돌아올 부메랑을 받아야 할 시기가 점점 가까와지고 있다.
기업들도 이걸 알고 있으며, 정부와 국민들도 느끼고 있는 듯 하다.
지나친 절약의 부메랑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이제 분명해 보인다.
다만 그 달콤했던 이익의 감소를 포기할 용기가 있을지가 문제일 따름이다.
그리고 가계 소비의 주체가 그것을 체감하게 되면
당연한 수순으로 소비를 줄이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불요불급한 소비를 하지않으려 하고, 반드시 필요한 소비에 대해서도 보다 저렴한 소비방법을 찾게된다.
너무도 당연하며, 어찌보면 거의 기계적인 반응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다.
기본 소비 단위인 하나의 가계만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바람직한 행동양식이겠지만, 모든 소비 주체를 엮어 생각하고, 생산자와의 연관 관계까지 함께 고려한다면, 이 순환 시스템에서 자신의 소비 감소는 결국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개인들의 소비에 의존하는 생산자들을 생각해 보자.
생상자들은 소비자들의 이러한 소비 절감 행위에 맞추어 반응할 것이다.
생산자들이 소비자에게 저렴한 가격에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익을 줄일거라 생각하는가?
생산자가 자신의 이익을 줄이는 행위는 자멸을 향해 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최후에, 다른 방법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생산자들은 먼저 자신들의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줄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면 저렴한 원료/부품을 사용하거나 인건비를 줄일 수 밖에 없다.
이는 재화나 서비스의 질 하락을 가져오며, 동시에 근로자의 소득 하락을 가져온다.
재화나 서비스의 질 하락은 결국은 비용의 증가를 가져오고, 근로자의 소득하락은 다시 가계 소득의 하락으로 이어져서,
생산과 소비의 순환 시스템이 더욱 빠르게 악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상의 악순환에서 개인/가계의 소비자는 피해자이며 착취당하는 노동자로 보일 수 있다.
반면에 생산자는 가해자이며 착취하는 자본가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생산자 또한 피해자가 된다.
결국의 소비자의 소비 여력이 줄어들게 되면 생산자의 이익은 줄어들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산자의 입장에서 이익률이 중요할까 절대 이익의 양(금액)이 중요할까?
이익의 양(금액)이다.
규모가 100일 때의 이익률이 20%라서 20의 이익을 올렸던 생산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100을 추가로 투자해서 규모를 200으로 늘렸을 때 이익률이 15%로 줄어든다면 이 생산자는 투자를 할까 말까?
10중 8,9는 투자를 할 것이다.
생산자의 입장에서 이익률이 높으면 좋겠지만 이익률이 첫번째는 아닌 이유이다.
기업의 재무제표에서 매출액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전체적인 소비의 감소는 매출의 규모 감소로 이어지고,
이익률은 올라갈지 몰라도 이익의 양(금액)은 줄어들어서 결국은 쇠퇴하는 양상을 보이게 될 것이다.
1997년 IMF에서 구제금융을 받았던 시기,
한국의 원화 가치는 폭락하고 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은 급락하면서,
기업들은 아주 당연한 행동양식을 보였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의 도입이 그것이었다.
조기에 IMF 구제금융에서 벗어나게 되었음을 외부로부터, 그리고 스스로 칭찬해 마지 않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살아남은 기업들은 자유로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으로 비용을 줄여서 얻은 경쟁력을 해외로 까지 널혀가면서 자신에게 돌아올 부메랑의 회전반경을 넓혔던 것이다.
이젠 돌아올 부메랑을 받아야 할 시기가 점점 가까와지고 있다.
기업들도 이걸 알고 있으며, 정부와 국민들도 느끼고 있는 듯 하다.
지나친 절약의 부메랑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이제 분명해 보인다.
다만 그 달콤했던 이익의 감소를 포기할 용기가 있을지가 문제일 따름이다.
2014년 6월 30일 월요일
산을 오르면 내려와야 한다
인생은 등산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높이 오를 수록 성취감은 커지겠지만 결국 우리의 등산은 하산해야 비로소 끝이 나는거지
높이 오를 수록 하산해야 할 여정도 길어지기 마련이고
등산보다는 하산이 안전사고의 위험이 큰 만큼,
더 많은 배려가 필요하고 충분한 시간도 필요하다.
만약 너무 늦게 하산을 시작한다면
구르거나 뛰어내려야 하산할 수 있을테고 그러면 만신창이가 될 것은 자명한 법
간혹 애초의 목표가 등산이 아닌데도 산을 오르는 경우도 있겠지
행글라딩이나 낙하산 활강을 하기 위한 경우라면
온전히 산을 오르는 과정은 인내의 연속일 테이지만
매우 짧은 활강의 순간은 짜릿한 환희일 것이고
인생의 마무리가 행복감으로 채워질 것이다.
인생의 장점을 지나면서 쇠락해가는 자신을 비참하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저 지금 산을 내려오고 있다고....
그리고 그것은 누구나가 거쳐야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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