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9일 목요일

보편성에서 특수성으로, 전체성에서 개별성으로

과거에는 커다란 하나의 이념으로 사회 전체의 기준을 삼을 수 있었지만, 최근에 이르러서는개개인의 다양성과 사회의 다양성이 증가하면서 사회 전체를 대변할 수 있는 이념을 세우기가 매우 곤란해졌다.

따라서 현재의 사회를 이해하는 방식은 보편성을 고집하지 말고 특수성의 눈으로 봐야하며, 전체성이 아닌 개별성의 눈으로 봐야만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보편성이 사라진 것이라고, 전체성이 없어진 것이라고 봐야 하는가?
이렇게 손바닥을 뒤집듯이 하나로 뭉쳐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단 말인가?

아니다.
예전의 사회라 할지라도 보편성과 특수성은 공존하고 있었으며
단지 예전에 비해 보편성은 줄어들었고 특수성은 늘어났다고 봐야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아프리카의 어떤 초원에 살고 있는 동물이 거의 포유류였다고 가정하자.
우리는 이 초원을 포유류 초원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 조류와 파충류로까지 늘어났다고 하면, 과거에 부르던 포유류의 초원은 적절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동물의 초원이라고 묶어서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의 다양성은 늘었으며, 우리 사회를 묶을 수 있는 보편적인 이념은 과거보다 한차원 더 높아야만 가능해졌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2014년 7월 10일 목요일

증오와 괴로움

아파트 단지 중앙에 몇개의 상가가 있다.

썩 활발하진 않지만 산책로를 이용하는 주민들의 왕래는 꾸준한 그런 곳 이었다.

여기에 작은 동네 슈퍼마켓이 있었고 나도 몇번 이용을 했던 터라 주인 아저씨와 안면도 있었다.

한동안 이용이 뜸했다가 한참만에 가보니 대각선으로 마주보는 곳에 또 하나의 슈퍼마켓이 이었다.

그런데 새로 개점을 한 슈퍼에 예전의 주인 아저씨가 있는 것이 아닌가?

혹시 장사가 잘되서 슈퍼를 두 개 모두 운영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보았다.

안면이 있는 주인 아저씨를 보고 새로 개점한 슈퍼에 들어가서 몇가지 물건을 사면서,

'저 쪽에 있는 예전의 슈퍼는...' 슬쩍 물어보니,

주인 아저씨의 표정이 급속히 어두워지시며 '쳇, 나도 몰라요'라는 분노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자세한 내막이야 모르겠지만 좋은 일이 아님은 분명했다.



다시 한참만에야 늦은 시각에 그 곳을 지나게 되었다.

슈퍼에 볼 일은 없었지만 지나치며 보니 그 주인 아저씨가 혼자서 슈퍼에 서 계신 모습이 보였다.

어두워져 인적이 뜸해진 거리, 손님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무엇인가를 지키고 있는 문지기처럼, 다소 경직되어 보이던 그 아저씨를 보고 있자니 한편으로는 측은하게까지 보였다.


최근의 내 상황과 묘하게 교차되기도 했기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위층의 시도 때도 없는 쿵쿵거리는 발소리, 의자 끄는 소리, 깜짝 놀랄 정도의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 등이 순간순간마다 증오를 불러오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소리 자체가 나의 귀를 괴롭히는 것 보다, 그로인해 생겨난 증오가 나를 더 괴롭히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모쪼록 그 주인 아저씨가 경쟁 상대로 생각하는 슈퍼에 대한 증오만 없애도 훨씬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지나친 절약의 문제

가계의 소득이 물가상승률을 미치지 못할 때,

그리고 가계 소비의 주체가 그것을 체감하게 되면

당연한 수순으로 소비를 줄이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불요불급한 소비를 하지않으려 하고, 반드시 필요한 소비에 대해서도 보다 저렴한 소비방법을 찾게된다.

너무도 당연하며, 어찌보면 거의 기계적인 반응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다.

기본 소비 단위인 하나의 가계만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바람직한 행동양식이겠지만, 모든 소비 주체를 엮어 생각하고, 생산자와의 연관 관계까지 함께 고려한다면, 이 순환 시스템에서 자신의 소비 감소는 결국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개인들의 소비에 의존하는 생산자들을 생각해 보자.

생상자들은 소비자들의 이러한 소비 절감 행위에 맞추어 반응할 것이다.

생산자들이 소비자에게 저렴한 가격에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익을 줄일거라 생각하는가?

생산자가 자신의 이익을 줄이는 행위는 자멸을 향해 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최후에, 다른 방법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생산자들은 먼저 자신들의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줄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면 저렴한 원료/부품을 사용하거나 인건비를 줄일 수 밖에 없다.

이는 재화나 서비스의 질 하락을 가져오며, 동시에 근로자의 소득 하락을 가져온다.

재화나 서비스의 질 하락은 결국은 비용의 증가를 가져오고, 근로자의 소득하락은 다시 가계 소득의 하락으로 이어져서,

생산과 소비의 순환 시스템이 더욱 빠르게 악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상의 악순환에서 개인/가계의 소비자는 피해자이며 착취당하는 노동자로 보일 수 있다.
반면에 생산자는 가해자이며 착취하는 자본가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생산자 또한 피해자가 된다.

결국의 소비자의 소비 여력이 줄어들게 되면 생산자의 이익은 줄어들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산자의 입장에서 이익률이 중요할까 절대 이익의 양(금액)이 중요할까?

이익의 양(금액)이다.

규모가 100일 때의 이익률이 20%라서 20의 이익을 올렸던 생산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100을 추가로 투자해서 규모를 200으로 늘렸을 때 이익률이 15%로 줄어든다면 이 생산자는 투자를 할까 말까?

10중 8,9는 투자를 할 것이다.

생산자의 입장에서 이익률이 높으면 좋겠지만 이익률이 첫번째는 아닌 이유이다.

기업의 재무제표에서 매출액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전체적인 소비의 감소는 매출의 규모 감소로 이어지고,

이익률은 올라갈지 몰라도 이익의 양(금액)은 줄어들어서 결국은 쇠퇴하는 양상을 보이게 될 것이다.


1997년 IMF에서 구제금융을 받았던 시기,

한국의 원화 가치는 폭락하고 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은 급락하면서,

기업들은 아주 당연한 행동양식을 보였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의 도입이 그것이었다.


조기에 IMF 구제금융에서 벗어나게 되었음을 외부로부터, 그리고 스스로 칭찬해 마지 않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살아남은 기업들은 자유로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으로 비용을 줄여서 얻은 경쟁력을 해외로 까지 널혀가면서 자신에게 돌아올 부메랑의 회전반경을 넓혔던 것이다.

이젠 돌아올 부메랑을 받아야 할 시기가 점점 가까와지고 있다.


기업들도 이걸 알고 있으며, 정부와 국민들도 느끼고 있는 듯 하다.

지나친 절약의 부메랑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이제 분명해 보인다.

다만 그 달콤했던 이익의 감소를 포기할 용기가 있을지가 문제일 따름이다.

2014년 6월 30일 월요일

산을 오르면 내려와야 한다

인생은 등산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높이 오를 수록 성취감은 커지겠지만 결국 우리의 등산은 하산해야 비로소 끝이 나는거지

높이 오를 수록 하산해야 할 여정도 길어지기 마련이고

등산보다는 하산이 안전사고의 위험이 큰 만큼,

더 많은 배려가 필요하고 충분한 시간도 필요하다.


만약 너무 늦게 하산을 시작한다면

구르거나 뛰어내려야 하산할 수 있을테고 그러면 만신창이가 될 것은 자명한 법


간혹 애초의 목표가 등산이 아닌데도 산을 오르는 경우도 있겠지

행글라딩이나 낙하산 활강을 하기 위한 경우라면

온전히 산을 오르는 과정은 인내의 연속일 테이지만

매우 짧은 활강의 순간은 짜릿한 환희일 것이고

인생의 마무리가 행복감으로 채워질 것이다.


인생의 장점을 지나면서 쇠락해가는 자신을 비참하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저 지금 산을 내려오고 있다고....

그리고 그것은 누구나가 거쳐야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자

2014년 5월 13일 화요일

논리-철학논고 by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by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목차

  1.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1.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2. 세계는 사실들로 이루어진다.
  2. 일어나는 것, 즉 사실은 사태들의 존립이다.
      1. 사태는 대상들(실물들, 사물들)의 결합이다.
      2. 대상은 단순하다.
      3. 사태 속에서 대상들은 사슬의 고리들처럼 서로 걸려 있다.
      4. 존립하는 사태들의 총체가 세계이다.
      5. 존립하는 사태들의 총체는 어떤 사태들이 존립하지 않는가를 또한 확정한다.
      6. 사태들의 존립과 비존립이 현실이다. (우리는 사태들의 존립을 긍정적 사실, 비존립을 부정적 사실이라 부르기도 한다.)
    1. 우리는 사실들의 그림을 그린다.
    2. 그림은 모사된 것과 모사의 논리적 형식을 공유한다.
  3.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사고이다.
        1. "어떤 한 사태가 생각될 수 있다"가 뜻하는 것은, 우리가 그 사태에 관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1. 참된 사고들의 총체는 세계의 그림이다.
      2. 사고는 그것이 생각하는 상황의 가능성을 포함한다. 생각될 수 있는 것은 또한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3. 우리는 비논리적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비논리적으로 생각해야 할 터이기 때문이다.
      4. 선천적으로 올바른 사고는 그것의 가능성이 그것의 참을 조건부로 하는 사고일 것이다.
      5. 하나의 사고가 참이라는 것을 우리가 선천적으로 알 수 있을 경우는 그 사고 자체로부터 (비교 대상 없이) 그 사고의 참됨이 인식될 수 있을 때 뿐이다.
    1. 명제에서 사고는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게 표현된다.
    2. 명제 속에서 사고는 명제 기호의 요소들이 사고의 대상들과 대응하도록 표현될 수 있다.
    3. 오직 명제만이 뜻을 가진다; 오직 명제 연관 속에서만 이름은 의미를 가진다.
    4. 명제는 논리적 공간 속의 어떤 한 장소를 확정한다. 이 논리적 장소의 존재는 구성 요소들만의 존재에 의해서, 즉 뜻이 있는 명제의 존재에 의해서 보증된다.
    5. 적용된, 생각된 명제 기호가 사고이다.
  4. 사고는 뜻이 있는 명제이다.
        1. 명제들의 총체가 언어이다.
        2. 인간은 각의 낱말이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이 각각의 뜻이 모두 표현될 수 있게 하는 언어들을 구성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우리들이 개별적인 소리들이 어떻게 산출되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말을 하듯이 말이다.
          일상 언어는 인간 유기체의 일부이며, 그에 못지 않게 복잡하다. 일상 언어로부터 그 언어의 논리를 직접 끄집어 낸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
          언어는 사고를 위장한다. 더욱이 그 복장의 외부적 형태로부터 그 옷 입혀진 사고의 형태를 추론할 수 없도록 그렇게 위장한다; 왜냐하면 복장의 외부적 형태는 신체의 형태를 인식시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목적에 따라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3. 철학적인 것들에 관해 씌어진 대부분의 명제들과 물음들은 거짓이 아니라 무의미하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런 종류의 물음들에 대해 결코 대답할 수 없고, 다만 그것들의 무의미성을 확립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자들의 물음들이나 명제들은 대부분 우리가 우리의 언어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그것들은 선(善)이 미(美)보다 다소 동일한가 하는 물과 같은 종류이다.)
          그리고 가장 깊은 문제들이 실제로는 아무 문제도 아니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 명제는 현실의 그림이다.
      2. 이것을 우리는 명제 기호의 뜻이 우리에게 설명되지 않아도 우리는 그 뜻을 이해한다는 점으로부터 안다.
      3. 명제는 낡은 표현들을 가지고 새로운 뜻을 전달해야 한다.
        명제는 우리에게 상황을 전달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본질적으로 상황과 연관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 연관은 바로, 명제가 상황의 논리적 그림이라는 것이다.
        명제는 그림인 한에서만 무엇인가를 진술한다.
      4. 명제는 그것이 묘사하는 상황에서 구별될 수 있는 바로 그 만큼 구별될 수 있어야 한다.
        그 양자(兩者)는 동일한 논리적(수학적) 다수성을 소유해야 한다.(동력학적 모형들에 관한 헤르츠의 역학 이론을 참조하라.)
      5. 현실은 명제와 비교된다.
      6. 명제는 오직 현실의 그림임으로 인해 참 또는 거짓일 수 있다.
    1. 명제는 사태의 존립과 비존립을 묘사한다.
    2. 명제의 뜻은 사태들의 존립 및 비존립 가능성들과 명제와의 일치와 불일치이다.
    3. 요소 명제들의 진리 가능성들은 사태들의 존립과 비존립의 가능성들을 의미한다.
    4. 명제는 요소 명제들의 진리 가능성과의 일치 및 불일치의 표현이다.
    5. 이제는 가장 일반적인 명제 형식을 제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인다. 다시 말해서 그 어떠한 기호 언어의 명제들에 대해서건 하나의 기술(記述)을 주어서, 모든 가능한 뜻이 그 기술에 걸맞은 상징에 의해 표현될 수 있고, 또 이름들의 의미들이 알맞게 선정된다면, 그 기술에 걸맞은 모든 상징이 각각 뜻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인다.
      가장 일반적인 명제 형식을 기술할 적에는 오직 그 본질적인 것만이 기술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가장 일반적인 형식이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일반적 명제 형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형식이 예견(즉 구성)될 수 없었을 명제는 있을 수 없다는 점에 의해서 증명된다. 명제의 일반적 형식은 다음과 같다: 사정이 이러이러하다.
  5. 명제는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이다. (요소 명제는 자기 자신의 진리 함수이다.)
      1. 요소 명제들은 명제의 진리 독리 변수들이다.
      2. 함수의 독립 변수들은 이름의 지표들과 혼동되기 쉽다. 왜냐하면 지표에서와 마찬가지로 독립변수에서도 그것을 포함하는 기호의 의미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러셀의 "+c"에서 "c"는 그 기호 전체가 기수(基數)에 대한 더하기 기호임을 지시하는 지표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칭은 단순히 자의적인 약정에 의거하고 있고, 우리들은 "+c" 대신에 하나의 단순한 기호를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p"에서 "p"는 지표가 아니라 독립변수이다: "~p"의 뜻은 "p"의 뜻이 미리 이해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에서 "율리우스"는 하나의 지표이다. 우리가 대상의 이름에 붙이는 지표는 언제나 그 대상 기술의 일부이다. 예컨대, 율리우스 가(家)의 그 카이사르.)
        내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명제와 함수의 의미에 관한 프레게의 이론 밑바닥에는 독립 변수와 지표에 대한 혼동이 놓여 있다.프레게에게는 논리학의 명제들은 이름들이었고, 그것들의 독립변수들은 이러한 이름들의 지표들이었다.
    1. 진리 함수들은 계열을 이루도록 배열 될 수 있다.
      그것이 확률론의 기초이다.
    2. 명제들의 구조는 서로 내적인 관계가 있다.
    3. 모든 명제들은 요소 명제들에 대한 진리 연산의 결과들이다.
      진리 연산은 요소 명제들로부터 진리 함수가 생겨나는 방식이다.
      진리 연산의 본질에 따르면, 요소 명제들로부터 그 진리 함수가 생겨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진리 함수들로부터는 새로운 진리 함수가 생겨난다. 모든 진리 연산은 각각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들로부터 다시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를, 즉 명제를, 산출한다. 요소 명제들에 대한 진리 연산의 결과들을 가지고 행한 모든 진리 연산의 결과는 또 다시, 요소 명제들에 대한 하나의 진리 연산의 결과이다.
      모든 명제는 요소 명제들에 대한 진리 연산들의 결과이다.
    4. 여기서 (프레게와 러셀의 뜻에서의)"논리적 대상들"이나 "논리적 상항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난다.
    5. 모든 진리 함수는 (-----T)(ξ,....)라는 연산을 요소 명제들에다 계속적으로 적용한 결과이다.
      이 연산은 오른편 괄호 속에 있는 명제들 전체를 부정하며, 나는 이 연산을 이 명제들의 부정이라고 부른다.
    6. 나의 언어의 한계들은 나의 세계의 한계들을 의미한다.
  6. 진리 함수의 일반적 형식은 [ρ, ξ, Ν(ξ)]이다.
    1. 논리학의 명제들은 동어 반복들이다.
    2. 수학은 하나의 논리적 방법이다.
      수학의 명제들은 등식들이며, 따라서 사이비 명제들이다.
    3. 논리의 탐구는 모든 법칙성의 탐구이다. 그리고 논리 밖에서는 모든 것이 우연이다.
    4. 모든 명제들은 가치가 같다.
    5. 언표될 수 없는 대답에 대해서는 물음표도 언표될 수 없다.
      수수께씨는 존재하지 않는다.
      도대체 어떤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면, 그 물음은 또한 대답될 수도 있다.
  7.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2014년 1월 9일 목요일

직업과 돈벌이에 대한 모순된 고정 관념

근자에 스포츠 스타들에 대한 뉴스가 유난히 많았다.

메이저 리그 야구 선수인 류현진과 추신수는 지난 성적과 트레이드로, 여기에 이대호와 오승환도 가세하고,
다가온 월드컵에 대한 관심으로 축구 대표팀과 대표 선수, 감독에 대한 소식들,
또한 동계 올림픽의 유망주인 김연아와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들, 소외 종목 선수들...

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둔 스타들에 대한 얘기이긴 하지만,
그들의 사회적인 명성과 위상, 그리고 수입은 가히 어떤 부류의 직업에도 뒤지지 않는다.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 아닐까 싶다.
공을 잘 던지고 잘 쳐내는 것이, 공을 잘 차는 것이, 얼음 위에서 빨리 달리는 것이 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냐고 반문했어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었다.
때문에 모두가 공부가 성공의 가장 확실한 투자였다고 생각했으며,
당시에는 정말 맞는 얘기었다.

하긴 지금도, 그들이 야구를 잘하고 축구를 잘해서 쌀을 만들지는 못하고 고기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단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프츠에서 뛰어난 실력을 가졌기에, 그 많은 관중들이 투자한 금전과 시간에 비례해서, 그리고 그 종목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례해서 보상을 받고 있을 다름이다.


지금은 그 성장세가 주춤하지만, 십여년 전 부터 프로 게이머라는 직업이 생겨났다.
그 당시엔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 보였다.
누구나 다 즐겨하는 게임을, 그걸 조금 더 잘한다고, 직업을 삼는다는 건 쉽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관연 그게 돈벌이가 될까하는 의심도 들었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순수한 놀이의 결정체인 게임을 하는데, 그게 어떻게 직업이 되겠는가?
저들이 게임하면서 즐기는데 왜 관중들이 돈을 지불하겠는가 하는 생각...

이제는 프로 게이머가 다분히 적업적인 면모도 많이 갖추고 있는 듯 하다.
꾸준한 훈련, 이기기 위한 끊임없는 연구와 실험, 갖가지 전략과 기술의 습득 및 연마...

물론 이 프로게이머 또한 여기에 관심을 가지는 관중들이 투자하는 금전과 시간에 비례하여 수익이 늘어나며, 실력에 비례하여 수익이 늘어나므로, 스포츠와 전혀 다르지 않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어디 이 뿐이랴,
가수와 배우 등의 연예인들 또한 같은 속성을 지닌 직업군이지 않겠는가.


단지 아직은 프로 게이머가 사회적인 위상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이는 생겨난지 얼마 되지 않은 직업군이기도 하고, 그 중심에 있는 스타들의 연령이 낮으며, 이들을 환호하는 연령층 또한 일부에 편중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이상의 얘기는 누구나 다 알고 인정하는 바가 아닐까 싶고,
정작 하고 싶었던 얘기는 여기 부터다.

어째서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처음 생겼을 때, 그걸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걸까?
어째서 아직도 프로게이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이렇게 떨어지는 것일까?
어째서 김연아는 그 성적 뿐이 아니라, 인성적인 측면까지 기사로 다루면서 호들갑을 떨고 대단한 천재이고 대단히 신뢰를 받을 만한 존재로 칭송을 하는가?
반면에 임요환 같은 선수는 아무리 잘해도 껨 잘해서 돈 많이 번 사람...정도로 끝날 뿐이다.
김연아는 나중에 나이가 좀 들어서 IOC 위원이 될지도 모르겠고, 국회의원 비례대표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임요환은 아파트 주민대표 정도나 할 수 있을까?

스포츠도 게임도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놀이에서 시작되었다.
하면 즐거운 것이고 뛰어난 사람이 하는 것은 보는 것도 즐거운 것이다.
물론 세계 정상에 서기 위해서는 어떤 분야든 뼈를 깎는 고통과 인내가 필요한 것이지만 말이다.

어린 아이가 축구가 좋아서 축구 선수가 되겠다고 하면 장차 국가대표를 꿈꾸고 각종 프로리그 선수가 될 것을 희망하며 반길 것이다.
어린 아이가 게임이 좋아서 프로게이머가 되겠다고 하면 잘 해봐야 돈 좀 벌지만 대게는 게임폐인되고 집밖에는 나가지도 않는 은둔형 외톨이가 되겠다고 걱정부터 할 것이다.

과연 스포츠와 게임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나는 그걸 즐기는 관중이 넓게 마련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상대적으로 아직은 좁다는 것이다.
하나는 주로 몸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로 머리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가 장 큰 차이는 그걸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고정관념이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는 '좋은 것' 다른 하나는 '나쁜 것'


조금만 더 의식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보자.

소위 '돈벌이'로써의 직업에 대한 관념에는 <힘든 것> <괴로운 것> <하기 싫은 것>이라는 의식이 깔려 있지는 않을까?
누군가 힘을 들이지 않고, 너무 즐거워 하면서, 아무런 강제가 없이도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돈벌이가 된다면,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은 백이면 구십구는 허탈하고 황당하며 심지어는 화가 날 것이다.
왜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그건 자신이 '돈벌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저변의 의식(힘든 것, 괴로운 것, 하기 싫은 것)과 전혀 들어맞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힘들며, 괴로우며, 하기 싫은 것을 해야 겨우 돈벌이가 되는 자신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어릴 적에, 내가 꿈꾸었던 직업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경계를 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좋아하는 것도 직업이 되면 싫어질 것이다, 좋아하는 일은 돈벌이가 되기 힘들다,는 등의 이유였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달라졌다.

근본적인 생계에 직접 연관된 일은 극히 적다.(직접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지 않는 한..)
대개의 직업을 차지하는 일은 대규모 공장의 근로자나 건설 현장의 근로자, 물건을 판매하거나 사무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등의 개성이 없고 보편적으로 즐겁지 않은 일임은 사실이다.

하지만 즐거움에 종사하는 직업군이 상당히 늘어나고 있으며, 더 이상 나의 괴로움과 돈을 맞바꾸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괴롭기 때문에 돈벌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즐거움과 괴로움, 돈벌이는 이제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세상엔 즐거운 돈벌이도 있으며, 괴로운 돈벌이도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단지 선택일 뿐이다.

2014년 1월 2일 목요일

남자에게 여자란

여성들이 들으면 분노하겠지만, 혹은 다르다고 부인하겠지만,

남성인 내가 보기엔,

남성에게 아름다운 여인은, 여성에게 새로 나온 명품 백이나 구두외 비슷한 듯 해.


여성들은 종종 자신의 배우자나 남자 친구가,

지나가는 여성들을 흘끔거린다고들 불만을 토로하지만,

그건 여성들이 백화점 쇼윈도우에 비치된,

새로 나온 명품 백과 구두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야.


어째서 남성에게 여성이란 존재는 백이나 구두 밖에 안되냐고 묻지는 말았으면 해.

그건 여성들 스스로 백이나 구두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거나,

그런 하찮은 것에 집착하는 자신들을 비하하는 것이거나,

왜 자신들은 그런 것에 집착하는지 모르면서 남성들 탓만 하는 것으로 보이니까.

남성들도 잘 모르겠어.




만약에 누군가가 미치도록 좋아진다면,

그 사랑이 오래가지는 못하리라는 건 예상해야 해.

마치 아주 잘 맞고, 잘 어울리고, 나를 한껏 빛나게 해 줄 날개와 같은 옷과 비슷하거든.

아주 좋아서 아끼고 아끼다가 몇 번 입지도 못한채로 입을 수 없는 시간이 오기도 하고,

너무 좋아서 자주 입다가 닳고 헤져서 못 입게 되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리고, 실제로 그런 옷들이 어울리는 장소는 제한적이고,

집에서 편하게 쉬거나 잠을 잘 때에 입을 수 없다는 것도 명심을 해 두어야 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