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0일 수요일

용기와 뻔뻔함이 동의어?

참 뜬금 없게도 취업의 기회가 왔다.
과연 이게 무슨 경우일지 의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취업을 위한 인터뷰를 볼 의향이 있느냐는 식의 이메일을 받았다.
아마도 일반적인 경력직을 채용하는 절차로 보였고, 나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는 상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조만간 생계에 어려움이 예상되고 있어 초조하던 차에 정말 좋은 기회가 온 것이었다.
무조건 채용하는 것이 아니니 험난한 면접의 과정이 있겠지만...

그리고 사전 전화 통화 일정을 잡고, 이력서를 보내는 중에 많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제 아무리 글로벌 기업이라고 할지라도, 일하는 사람들은 다 우리나라 사람들.
그들 모두의 마인드마저 글로벌하리라 생각하는 건 무리였다.
글로벌 기업에서 일하면서 모든 사고방식이 글로벌해진다면, 그들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해서, 혹은 주말에 가족과 보내면서도 글로벌한 마인드로 생활하겠는가?
결국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한국인이다.
그런 한국인의 선입견, 관습, 사회적인 편견은 피하기 어렵다.

이제 중년의 나이로 입사를 해서, 한참 젊은 이들과 거리낌 없이 생활을 해야 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나의 편견은 나의 문제이고 내가 극복해야 하는 문제겠지만, 그들이 바라 볼 나의 모습에 대한 편견은 내가 어쩔 수 없는 문제다.

사실 그런 모든 편견만이 두려운건 아니다.
그게 편견의 문제를 넘어 실제로 현실적인 나의 문제가 되리라는 것이 더 두려웠다.
그래 그 편견들이 현실로 증명되는 것을...


어쩌면 굉장한 민폐가 아닐까 싶었다.

아직 취업이 결정된 것도 아니고, 인터뷰를 보지도 않았으니, 김치국부터 마시는게 아니겠냐고 하겠지만...
취업이 된 후도 걱정이지만, 취업의 과정에서 일일이 누군가의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아가며 인터뷰를 진행하게 하는 것이 큰 민폐가 아닐까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아니면 누군가 한명이 더 취업할 수 있으며, 누군가 한명이 더 인터뷰를 볼 여지가 있지 않겠는가.


사실 난 용기가 필요했다.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능력의 한계를 다 쓸 수 있는 용기,
지금과 같은 나태함이나 여유를 과감하게 버리고 스트레스를 버텨낼 용기,
내 자신의 편견과 세상의 편견에 의연해질 용기,
그리고 나 자신의 부족함을 마주 볼 용기.

종종 사회 초년생이나 취준생들에게 이런 비슷한 식의 용기를 요구하거나 북돋우기도 하는데, 과연 이게 용기일까?
어쩌면 이건 용기가 아니라 뻔뻔함이 아닐까?
능력도 없으면서 열심히 하겠다고 말하는 뻔뻔함.
할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할 수 있다고 소리치는 뻔뻔함.
그리고 안좋은 결과에 대해서는 최선은 다했다고 말하는 뻔뻔함.


결국 뻔뻔해질 용기였던 걸까?

어쩌면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인간상은 너무나 완벽하고 무결이었던게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이 자랑하는 그들의 결과물을 속으로 비웃고 있었으며, 나 자신도 그럴 수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부끄러워했으며, 나 자신의 실수가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결국 잘못된 것은 나의 능력도 아니고, 사람들의 시선이나 편견도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잘못된 기준점(?)에서 비롯되었던 것이 아닐까?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야.
아주 잘났다고 하는 인간도 극히 일부의 분야에서, 아주 짧은 시간동안만 그 빛을 발할 뿐이고, 그 분야와 시간을 벗어나고나면 그저 다르게 생기고 다르게 생각하는 한명의 사람일 뿐.

2019년 3월 6일 수요일

나에게서 벗어나면 조금 더 행복해질까

유튜브에서 음악을 한 곡 들었다.

그리고 그 음악을 듣고 사람들이 쓴 댓글을 보았다.

누군가의 댓글.
'A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나의 ??때가 생각난다. 그때의 나는 어쩌구 저쩌구....'

그 댓글을 보면서 나랑 비슷하구나, 혹은 나는 이랬었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참으로 많이, 자주, 모든 타인들의 사건, 사고, 행위, 말, 생각, 느낌을 듣거나 보면서, 거기에 나를 대입시켜 보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지독하게 나에 대해 집착하고 있는건 아닐까 싶다.

그런 대입으로 나는 종종 나 자신을 연민하고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고 싶어지기도 하며 긍지를 얻고 자신감을 가지며 뽐내고 싶어지기도 한다.

정작 나 자신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나 자신이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이 말이다.


결국 나는 현실의 내가 싫어서, 나를 증오하는 대신 현실을 증오하고, 타인의 이야기나 매스미디어의 꾸며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위로하기만 한다.

하지만 한발만 밖으로 내디뎌도 현실은 심비오트처럼 내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나는 이내 절규하면서 나만의 공간으로 숨어버린다.

현실과 정신의 분리된 상황은, 정신의 위로만으로 안도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끈질긴 현실에 의해 언제나 침범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공존하는 불안정한 상태이다.


이젠 정신승리만으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처절하게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궁극적으로 현실과 완전히 합체하여 끊임없이 받는 상처를 치료하고 아물기를 반복하며 살아가거나, 얄팍한 자기 위로를 넘어서는 깊은 각성이 필요하다.

흔히들 명상하고 수행하고 각성하고 깨달음을 얻기를 원하지만, 구체적으로 그게 무엇인지 실체는 모르고 있는 듯 하다.

나라고 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인간들의 왜 그것을 원하는지는 어렴풋이 알겠다.
아니, 내가 왜 오랜 세월동안 그것을 원했는지 이제는 조금 알겠다.
난 어리석으며, 사람들과 어울려 삶으로써 발생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몰랐고, 내 마음의 두려움과 슬픔과 괴로움 외로움이 싫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의 두려움과 슬픔 괴로움과 외로움을 조금은 덜어낼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건, 나에게서 나를 조금 덜어내는 것이 아닐까.

2019년 3월 1일 금요일

[상상] 인간의 본질

우연히 유튜브에서 게임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았는데, 제목은 SOMA.
지구가 소행성과의 충돌로 인간들이 모두 전멸한 가운데, 인간의 의식을 디지털로 보관하던 연구의 성과로 지구에 남은 건, 일부 인간들의 의식과 이를 행동에 옮길 수 있게 만들어진 로봇. 마지막에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기 위한 지구 엑소더스...


이 영상을 보면서, 예전에 이현세님의 만화 아마겟돈이 떠 올랐다.
그 만화의 줄거리는 생각나지 않는데(ㅠ.ㅠ), 흥미로운 가설을 전제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던 기억은 난다.
지적 존재가 우주의 여러 행성에 실험적으로 생명을 배양하고 그 생명체들이 행성에서 어떻게 생존해 나가는지 관찰하고 있는데, 지구에서는 공룡과 인간이 그 실험적인 생명체의 대표적인 예라고...


개인적으로는, 일부의 인간들이 강력하게 믿는 "영혼"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입장인데, 한편으로는 영혼이 존재한다는 증거들이 있어서 참 곤란해하곤 한다.
물론 "영혼"이 있다는 것을 반박할만한 증거는 더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건 마치 빛이 파동이냐 입자냐의 논쟁과도 유사해 보인다.)

만약 위에서 소개한 SOMA와 비슷한 예를 들어서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 설명하면 어떨까?
가령 진보한 지적 존재가 자신들의 의식을 우주에 퍼뜨려 나가던 중에, 지구에서는 인간이라는 종에게 심어진 것이 현재의 인간들을 만들어 냈다고.

인간이 본래 타고난 본성과 신체적인 제약의 문제로 인해서, 심어진 의식들은 꽤 많이 방해를 받거나 100% 발현할 수 없는데, 간혹 돌연변이처럼 인체의 제약을 풀어낸 인간들이 나타나면서 과학 기술들이 급격한 발전을 하게 되었다고.

일부의 인간들은 이 의식들의 힘에 이끌려 자신을 각성시키는 수행법을 찾기 위해 고된 수행을 하지만, 이를 해낸 인간은 극소수이며, 오히려 실패하여 비참한 결과를 맞는 경우가 많아 대대적인 의식의 각성은 억제되고 있다.

인간들이 어렴풋이 느끼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고민은, 이처럼 인간의 신체와 의식이 서로 다른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잘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상태와 비슷한 것.

한편, 신체의 주인인 인간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의식들은 오히려 연가시와 같은 기생충이며, 인간들의 일평생을 지배하고 노예처럼 부리는 악질적인 존재이다.
이 의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유일하게 인간 자신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며,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