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6일 월요일

이상(理想) 예상(豫想) 기대(企待)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는 말

그 '보고 싶은 것'이 이상(理想)과 같은 뜻이 아닐까?


젊은 남녀라면 누구나 자신의 이상형에 대해 술술 나열 하는 것.

상대방에게 한눈에 반한다는 것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이상형에 부합하는 어떤 면을 상대방에게서 보는 순간에 일어난 일.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이상형을 조각해서, 그 조각이 사람으로 태어나도록 신께 부탁을 한 인물.


그렇다면 과연 이런 이상형은 대체 언제 어떻게 형성이 되는 것일까?

유아기부터 무의식에 축적된 경험들?

전생의 인연?


좀 더 확대해 보면, 이성에 대한 이상형뿐이 아니라 매우 많은 곳에서 이런 이상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의 학교, 친구, 직장, 직장의 상사와 동료 부하직원, 배우자의 부모와 가족들...

내가 살 집, 자동차, 가족의 모습, 노후의 모습...

정치적인 이상,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 바람직한 공동체와 경제 구조...

인간의 존재와 신의 존재, 우주와 지구...


과연 이런 이상형은 어떻게 구축이 되는 것일까.

절망해야 희망이 생긴다.

이문열 <사람의 아들>
"이제 너는 신앙할 수 있다, 절망했으므로. 살 수 있다. 죽었으므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을까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마저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내 기준에는 참 나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좋은 사람들도 많고,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도 많지만, 많이 다르고, 이해할 수 없고, 껄끄럽고 피하고 싶은 사람들도 많다.

아니 그런 사람들이 더 많다.


과연 이런 사람들 모두와 함께 어울려서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한 적이 많았다.

아직도 많이 두렵다.


하지만 내가 많이 절망할 수록 희망이 보일거라는 '희망'이 생기기도 한다.

내가 겪을 수 있는 만큼의 한계까지 절망하고 나면, 비로소 그 자리에서 딛고 일어설 수 있으리라는 희망


간혹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부러워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의 배경에는, 그 사람은 애초에 두려움을 가지지 않고 있는 행운아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고, 나는 두려움을 많이 가지고 있는 불운아라는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지만 그건 내가 사람을 그만큼 잘 몰랐다는 증거일 것이다.

모르면 두렵운 법.

부딛혀 알아갈 수록 상상이 만들어낸 두려움도 없어질 것이며, 실망할 만큼 알고, 절망할 만큼 알았다면 충분히 알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무지로 인한 상상의 두려움도 없을 것이기에 비로소 당당해질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