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5일 화요일

죄의 탄생

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죄를 저지를 사람은 애초에 정해져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은가?
혹은 환경으로 인해 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도록 강제되는 것인가?

환경적으로는 전혀 범죄를 저지를만한 동기가 없어 보이는 사람이 죄를 범하는 경우도 있으며,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 죄를 짖는 것이 불가피해 보이는 상황에도 한심하다 싶을 정도로 순박하거나 청렴함을 유지하는 사람도 있다.

전자의 경우로는, 고교생의 신분으로 <초x이의 모험>이라는 게임을 개발해 재능을 인정받아 국내 대기업 S전자에 입사했으나 자신의 꿈과 동떨어진 업무로 회사에 흥미를 잃고 위조지폐를 만드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있었다.

후자의 경우로는, 반지하 월세에 세들어 살던 세모녀가 수입이 없어 살길이 막막해지자 번개탄을 피워 자살을 한 사건이 었었다. 이들은 마지막으로 월세와 공과금을 유서와 함께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극과 극을 보여주는 경우이긴 하지만, 이들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범죄/사건/사고 등을 보면 죄를 저지르기 쉬운 유형의 사람이 있으며, 이들도 정도의 차이가 다양하여, 범죄를 유발하는 환경의 임계점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보는 것이 그나마 타당한 분석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 보다 타당한 설명을 가능하게 하려면,
사람마다 죄를 저지를 분야가 다른 것 같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돈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금전적인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높지만 권력이나 명예에는 관심이 없어 사람의 상해에 관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거의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설명한 "분야"는 앞선 <소인(素因)-환경> 가운데 <소인(素因)>과 같은 것이다.


종합하자면, 사람에 따라 죄를 저지르기 쉬운 정도의 차이가 있고, 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분야가 다르며, '정도'와 '분야'가 환경적 조건과 맞아 떨어지면 죄로 발현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해보면, 사람은 누구나 죄를 저지를 수 있는 분야가 있고, 죄를 저지를 가능성도 어느 정도는 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자신의 실체 가운데 일정 정도를 아는 방법이며,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피해야 할 환경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감정 노출증

가족들만 모여 있는 집안에서, 이웃들과 마주칠 수 있는 집 앞의 동네,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 큰 길거리와 공공 장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적절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야 한다.

적절하다는 모호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바꾸어 말하자면 최소한 가려서 남에게 보이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 사람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서 서로간에 노출이 가능한 정도가 묵시적으로 합의되어 있는 듯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친밀도에 의해 가능한 노출의 정도가 결정되곤 한다.


이와 비슷하게 사람이 드러낼 수 있는 감정의 노출 정도 또한 서로가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사실(?)이라 생각한다.
사실(?)에 물음표가 붙은 이유는, 누구도 명시적으로 그래야 한다고 가르쳐 주거나 선언하는 것을 듣거나 본 적이 없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겪어 본 바로는 그렇기 때문이다.

기쁨이나 즐거움은 비교적 넓게 노출이 허용되는 감정이긴 하지만, 이 역시 제한되는 관계가 있다.
슬픔과 분노는 훨씬 더 노출이 제한되는 감정임에 틀림없다.


서로간에 묵시적으로 합의된 감정의 노출제한이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의 당혹감은 마치...

꽤나 격식을 차리는 사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웃통을 벗어 제치고 바지를 내린다면?
아무리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중요하고 숨기고 싶어할만한 부분을 보여준다면?

마찬가지로 사무적인 관계, 공적인 관계의 사람이 지극히 내밀한 감정을 보여준다면?
최소한 표면상으로는 우호적이어야 하는 관계를 가져야 하는 관계에서 분노가 표출된다면?

허용된 노출은 쉽게 무마되고 복구된다.

하지만 제한을 넘긴 감정의 노출은 관계의 재설정을 요구한다.
상호간에 합의가 이루어지면 감정 노출의 범위가 넓어지는 효과를 가져오지만,
합의를 이루지 못한다면 아얘 관계의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다.

==============================================

감정 노출의 제한이 비대칭 적일 수 있다.

즉, 특정 쌍방이 맺고 있는 관계에서도 감정 표현의 제한이 방향에 따라 다르게 설정된다는 것.

종종 부모와 자식간에 이런 경우가 많으며, 상하 종속적인 관계에서도 흔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선생님과 학생간에 이루어지는 감정의 노출 제한은 다른 경우가 많다.
매우 엄한 선생님과 순종적인 학생과 같은 전통적인 스승-제자의 관계에서,
스승은 제자에게 애착과 분노를 보일 수 있지만 슬픔과 기쁨을 보여주는 것은 제한될 수 있고, 제자는 스승에게 기쁨과 슬픔은 허용되지만 분노는 제한될 수 있는 것과 같다.

감정의 노출 제한이 비대칭적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를 두고 상하관계, 지배-종속의 관계라고 일괄적으로 말하기는 곤란한 것 같다.
하지만 지배-종속관계에서는 감정의 노출 제한이 비대칭적이 된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듯 하다.

2014년 11월 3일 월요일

금언(禁言)

R. F. Scott

1. 남을 해롭게 하는 말을 하지 말라.
2. 불평하지 말라.
3. 설명하지 말라.
4. 받아 들여지지 않는 충고를 하지 말라.


이 금언(禁言)은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었던 글인데,
기억을 되짚어 보고, 인터넷에서 다시 검색을 해 보니 정말 여러 사람들에 의해 퍼져 있었다.
영국의 탐험가인 Robert Falcon Scott이라는 분이 한 말이라고 들 하는 것도 다 똑같다.

처음에 들었을 때엔 4번의 "받아 들여지지 않는 충고"의 쓸모 없음에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고, 다시 생각을 해 보니 3번의 "설명하지 말라"는 말의 의미가 사뭇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것을 혼자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는 아는 척 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실생활에서는 '이미 일어난 일을 직시하고 받아들여야지 공연히 부연 설명을 해서 회피하지 말라.'는 것이 더 교훈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이 말을 한 Scott 선생의 의도는 뭐였을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검색을 해 보았다.

한글로 된 검색 결과에서는 모두가 달랑 4가지 말만 써 놓았을 뿐이었다.(내가 못 찾았는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영어로 검색을 해 보았다.

R. F. Scott's sayings
R. F. Scott's Quotes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Scott 선생께서 이런 말을 했다는 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
명언들만 모아 놓은 사이트도 있는데, 거기서 R. F. Scott의 말들을  찾아봐도 이런 금언은 없었다.
http://www.brainyquote.com/quotes/authors/r/robert_falcon_scott.html

이번에는 저 금언을 대략 영역을 해서 검색해 보았다.
1. Do not speak ill of others
2. Do not complain
3. Do not explain
4. Do not advise ...

영역이 맞는지도 모르겠고 1번과 4번은 문장이 좀 길어져서 2번과 3번을 먼저 타이핑 하자 검색창에서 바로 자동 완성이 되는 게 아닌가?

실제 검색한 단어는 "do not complain do not explain"이었는데, 참 많은 결과들이 나왔다.
대부분은 누가 한 말인지 언급도 없이 인용해서 사용하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작가가 한 말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디에서는 헨리 포드가 한 말이라고도 했다.
참....실제로 누가 한 말인지는 아무도 모르는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2번과 3번의 금언에 대한 설명은 대략 일치하는 듯 하다.
"불평을 하거나 장황하게 설명을 하는 것은 벌어진 일에 당당히 맞서지 않고 회피하기 위함이거나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함이니 그런 비겁한 짓 하지 말고 당당하게 인정할 것은 인정하라."는 뜻이라는 것.

인간이라면 자기 보호 본능이 있기에, 자신이 상처받을 상황이 되면 거짓말도 하고 핑계도 대고 이유도 갖다 붙이곤 한다. 이건 유치원정도 다니는 어린 아이들도 그러는 것이니 어쩌면 당연하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거짓말을 인식하지 못하고 반복하는 사이에 나는 현실과 괴리되어 나만의 울타리에 갇혀버린 것은 아닐까? 그리고 자꾸 더 많은 현실의 상황을 회피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누가 한 말인지 모르지만 이 4개의 금언은 인간의 본성을 인식하고, 다시 이것을 극복하라고 다그치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 4개의 금언(禁言)은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명령하는 언명(言命)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