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5일 토요일

마음과 현실, 천국과 지옥

죄를 지으면 벌을 받으리라는 계율은 단지 특정 종교에 국한된 것은 아닌듯 합니다.
게다가 종교를 떠나서도 이러한 규율은 이미 법으로 제정되어 있으며,
성문법 이전의 시대에도,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면 죄를 규정하고 그에 합당한 벌을 만들어  자치적으로도 행하곤 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일 겁니다.

하지만, 인간이 규정하고 인간이 벌하는 이러한 제도가 강력하게 정착될 수록, 진정한 속죄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가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워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도화된 처벌 시스템은 한 개인의 속죄를 도와주는 방향이 아니라,
공공대중에게 범죄와 비범죄의 경계를 학습시키고 처벌에 의한 공포심을 학습시켜 잠재적인 범죄를 예방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학습이 필요한 이유는 다양한 환경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의 규칙으로 묶어야 하기에 발생한 것이며, 여기에서 자연적인 범죄(sin)와 사회적인 범죄(crime)가 일치되지 못하고 괴리되는 문제점을 여기하기도 합니다.


원래 글을 쓰려던 목적과 다른 방향으로 빠져 버렸군요.
애니웨이,

종종 전지적인 신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죄를 저질렀을 때,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은 그에 합당한 벌을 받을 것이라고 믿곤 합니다.
제도화된 기성 종교뿐 아니라 그저 신적인 존재를 믿는 사람들의 경우엔 대부분 이러한 믿음을 갖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합당한 벌은 사후에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받는다고 믿기도 하며, 내세(來世)에 죄값을 치를 운명을 지고 다시 태어난다고 믿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제도화된 종교에 반기를 드는 뉴에이지 부류들 가운데에서는 색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닐 도널드 월시(Neale Donald Walsch)의 신과 나눈 이야기를 읽어 보면 기성종교의 왜곡된 해석을 새롭게 재해석 하기도 하는데, 그는 천국과 지옥이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현재의 상태를 천국으로 만들기도 하고 지옥으로 만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불교의 일체유심조와도 같은 이야기이겠습니다만...


이것이 죄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제도화된 법률로는 처벌하기가 매우 어렵고, 양심에는 꺼려지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적인 제도와 규율이 강력해질수록, 양심에 꺼려지는지 여부를 행동의 기준으로 삼기보다는, 제도적인 법률에 위배되는지를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강해지는 듯 합니다.

그리고 한참을, 아주 한참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제는 본말이 전도되어 법률에 위배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을 받지도 않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피해자 입장에서 보면 화가 날 노릇이고, 가해자가 법의 취약점을 악용했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합니다. 점차 법률을 강화하자는 소리들이 들려오게 되고, 법이 양심까지 판단하려 들겠지만, 그럴수록 양심은 점점 쪼그라들어서 아얘 없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한참을 살다보니, 어느 날 문득, 내가 아주 몹쓸 인간으로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흔한 경우로는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제 3자에게 그 사람의 험담을 하는 경우였습니다.
이건 아주 흔한 경우인데, 그래서 아주 쉽게 자신을 객관화 시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누군가의 뒷담화를 늘어 놓는 것으로 보고, 누군가는 나를 저런 대화의 소재로 삼을 수 있으리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한두번 들고, 그런 후에는 당사자가 없는 상황에선 험담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깜빡하고 누군가의 험담을 하고, 그런 험담을 한 나를 스스로 경멸하고 부끄러워하고...

몇번을 반복해서 알게 되니, 이제는 남의 뒷담화를 하는 순간에 내 마음속이 어떤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엔 내가 아프거나 괴롭진 않았으나 조금만 지나고 보면 거기엔 어둠만이 있고 악마들이 있습니다. 그 순간의 내 마음은 지옥이었습니다.

지금은 조금만 보이고, 그 순간에는 기분이 불쾌한 정도입니다만,
조금 더 지나고, 더 잘 보게된다면 아마 매우 고통스럽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그 때에는, 내 마음이 천국과 지옥을 만든다는 것을,
그것도 마음을 먹는 바로 그 즉시 만든다는 것을 알게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3년 5월 18일 토요일

말의 의도와 내용, 그리고 실체

오래간만에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비교적 격이 없는 친구들이기에 편하게 얘기하고 신세한탄이나 치부가 될 만한 것도 가끔씩은 꺼내놓기도 하곤 합니다.

이번에도 만나서여러가지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최근에 내가 고민하고 있는 가족사와 관계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누이동생과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아, 어릴 때에는 자주 싸웠고, 커서도 다투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며, 시집가서 아이를 낳은 후에도 편하지만은 않은 사이가 되었습니다.

어찌어찌하다 이야기가 그리로 흐르게 되고, 누이동생에 대한 비난을 털어놓게 되었습니다.그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나의 편을 들어주면서 동조를 해 주었는데....

집에 돌아와 한숨 자고 다음날 일어나 생각해보니 기분이 영 찜찜하기가 이를데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하지만, 누이동생이 없는 자리에서 그녀의 험담을 한 것(뒤담화)도 그렇지만, 내가 한 얘기의 편파성을 나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에 더 그랬었나 봅니다.

과연 그 얘기를 들은 친구들은, 내 누이동생을 어떤 모습의 인격체로 상상했을까요?
그리고 그런 상상이 과연 누이동생의 실체와 얼마나 가까울까요?


어떤 관계든, 나쁜 관계의 쌍방은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책임은 양쪽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겁니다.
하지만 상대방을 비난하는 한쪽은 자신의 책임이 있는 부분은 쏙 빼고 상대방의 책임이 있는 부분만을 부각시켜 이야기를 함으로써, 제 3자가 듣고 판단하기에는 일방적으로 한쪽은 선하고 한쪽은 악하기만 한 것으로 생각될 겁니다.
그리고 이건 그 실체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이 될겁니다.

결국 누군가의 의견을 들을 때, 그 사람의 의도가 어떠한가가 실체와의 상관 정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지해야만 할 것입니다.
좌편향 의도를 가진 사람이 말하는 의견들은 실체의 왼쪽 부분에 해당하는 것들이므로, 왼쪽의 부분 모습을 상상하는 부분 자료로만 이용해야 할 것이며, 실체의 오른쪽도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나 의도를 일부러 숨기는 사람은 지탄받아 마땅한 사람이며, 이를 제외한 경우에는 상대방의 의도와 의견을 모두 존종하되 그 의견의 부분성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들 개인의 인격과, 그리고 그들이 구성원이 된 사회가 더 성숙하다면,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청자의 오해를 막기 위해 균형 있게 사실을 전할 수 있게 되리라 기대하지만, 거기에 이르기 전까지는 청자의 입장에서 부분을 전체로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