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9일 화요일

죽음충동


살짝 읽다 만 라캉의 책에 의하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구조적인 비대칭으로 결핍이 발생한다고 한다.
이러한 결핍을 메꾸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반복 강박이며, 욕망의 생성원리라고 하는 듯 하다.

하지만 이는 상징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고, 상징계에서는 절대로 이 결핍이 채워지지 못하기 때문에, 결핍이 채워지는 실재계로 가고자 하는 욕망이 죽음 충동이라 한다.
죽음에 의해서 실재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현실의 부족함을 메꿀 수 있다는, 엉켜버린 실타래 같은 현실(상징계)은 불만족스럽지만, 실재계에서는 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며, 나의 이상과 일치하게 되리라는 믿음.

한편으로 생각하면 실재계는 이상향이고 곰스크다.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이고, 죽음으로만 충족이 가능한 종착점이다.
실재계가 있어야 꿈이 있으며, 상징계의 욕망이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재계를 상징계에서 이루고자 하는 욕망, 꿈을 현실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
죽음에 의해서 충족이 가능한 꿈 때문에 현실에서의 욕구가 생성된다?

한가지, 짚어 봐야만 할 문제는, 실재계에 대한 욕망은 개개인 모두에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으로 보이는데(내 개인적인 경험 및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불분명하나 잠재적인 일반론으로 받아들 일 수 있음), 죽음에 의해 실재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지는가?

나 개인의 경우에는, 윤회를 통해서 인간의 영혼이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간다는, 다분히 불교적인 환경에서 얻은 믿음(?) 혹은 개인적인 관심이 이끈 여러 서적을 통해 쌓인 믿음(?)에 의해, 약간 다르긴 하나 죽음에 의해 실재계에 도달하려는 욕망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지만, 자연스러운 성장의 과정이나 본능적인 무언가에 의해 일반적으로 이런 믿음(죽음으로 실재계에 도달한다는)을 갖게 된다고는 볼 수 없다 생각한다.

2013년 1월 10일 목요일

황금시대에 대한 과학

지금 글을 쓰는 시점에는 오히려 진부할 수도 있으나,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보면 재미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 포스팅 해 둡니다.

http://www.youtube.com/watch?list=FLxzSDe0lqRJwB_zYjsDsWCA&feature=player_detailpage&v=nZU9reH2HqE

http://youtu.be/B1NzP3OvPBo


이 동영상의 번역을 하신 분의 블로그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blog.naver.com/sesami9/20158958857

2013년 1월 9일 수요일

의식과 무의식, 언어

언어를 통해 의식을 하고, 언어를 통해 기억을 하고, 언어로 사고를 한다.
언어는 생각의 도구이자 생각의 기반이며 언어를 넘어서는 생각은 상상할 수도 없다.
아마도 이런 언어의 광대함 혹은 유일함(언어 말고 무엇으로 가능하단 말인가)으로 인해 언어 철학이 당당한 철학의 한 부류가 된 것은 아닐런지.

하지만 이 언어로 인해 거꾸로 인식의 한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런지.
느끼고 기억하고 통찰할 수 있는 것들 가운데,
오직 언어로 표현 가능한 것만이 인식이 되며,
나머지는 무의식으로 남겨지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모든 느낌들과 현상들 가운데 언어라는 필터를 거쳐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가 만들어지고,
언어를 배우는 순간부터 인간은, 의식화 되지 못한 무의식들을 어디엔가 켜켜이 쌓아 두고만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심지어는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느낌들은 순간적으로 지나가 버리고,
오직 언어로 표현이 되는 느낌만이 유의미한 듯 받아들여지고 기억된다.

인간의 통찰력의 한계는 인식의 한계이며,
인식의 한계는 언어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깨달음이란 이러한 언어의 장벽 너머를 볼 수 있어야만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