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말들이다. 아름다운 단어들이다.
생각만 해도 푹신하고 안락한 기분이 드는 단어들 아닌가?
그리고... 치명적인 독과 같은 단어들이기도 하다.
과연 저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을까?
아마도 어떤 말로도 완벽하게 기술할 수는 없을테고,
누군가 그것을 시도해서 표현하고 나면 즉각적으로 그 표현의 허술함과 부족함에 허탈할 것이다.
과연 우리는 저 단어들을 어떻게 배웠으며, 어떻게 익혔고,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어떤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에게 전해 들었고, 온갖 미사여구로 잔뜩 부풀려진 기대감이 가득하다 못해 터질지경이며, 어느새 인생의 목표가 되어 모든 것을 바칠 대상이 되며, 그것을 위해 현재의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은 다르지만 비슷하게 이것들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조금 오랜 시간을 그것을 위해 노력하다 보면, 한번쯤은 그걸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는 순간도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
그리고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 '가짜'였는 실망을 하고, 낙심하지만 또 다시 '진짜'를 찾아 떠나게 되곤 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몇번을 반복하다보면 우리는 곧 의심을 하게 된다.
'정말 존재하는 걸까?'
'행복이란, 사랑이란, 자유란 것이?'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
'만약 내가 어떤 상황을 맞았을 때, 그것이 행복인지, 사랑인지, 자유인지 판단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정확하게 행복이, 사랑이,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게 아닐까?
그리고 곰곰이 생각을 해 보면, 외부적인 조건이나 대상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사실 외부적인 대상, 즉 물질적인 것들은 대부분 소멸하거나 변하기 마련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닌 우리의 인식 자체가 변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사랑했던 사람이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은 것은, 그 대상의 변화보다는 나 자신의 인식의 변화에 기인하는 바가 더 지대하다.
행복이라 생각했던 상태가 유지될 수 없는 것 또한 상태나 조건의 변화보다는 자신의 인식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것들을 위해 우리가 바쳐야할 노력과 정열의 방향은 외부적인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인식을 바꾸는 것임은 명백하다.
결국 꿈속에서 파랑새를 찾아 떠났던 틸틸(치르치르)과 미틸(미치르)은 파랑새를 찾는 것에 실패하고 꿈에서 깨어서야, 항상 기르던 그 새가 파랑새였음을 깨닳았던 것과 같다.
그리고, 그 새가 파랑새였음을 깨닳아 안도하고 만족할 수도 있지만,
그동안 '파랑새'라는 것에 덧씌워져 있던 부풀리고 왜곡되어 있던 기대감의 상실을 슬퍼할 수도 있으며,
결국은 세상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허무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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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사실은 저 단어들이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비어있는, 공허함 그 자체라는 것에 있다.
이 단어들은 비어있기에 사람들마다 저마다의 정의로 그 공허함을 채워 놓고 그것이 행복이라고 믿고 사랑이라 믿으며 자유라 믿는다.
그런데 사실 사람들이 채워 놓은 그 정의들은 사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결핍과 욕망, 두려움에 대한 투영의 결과이다. 혹은 누구로부터 주입당한 타인의 정의인 경우도 있다.
아마도 스스로가 정의한 행복과 사랑과 자유를 이루었을 때, 잠시나마 만족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욕망이나 결핍을 채우고 두려움을 해소할 테니까.
하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그것이 '진짜'가 아닌 '가짜'임을 알게 될 것이다.
비어있는 것을 위한 헛된 노력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 단어들이 우리 인생에서 '독약'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독약'만 마시지 않았더라면....
2020년 5월 30일 토요일
2020년 5월 5일 화요일
꼰대와 문화
나도 오래된 사람이긴 하지만, 내가 어렸을 적, 중/고등 학생이었던 시절에는 "꼰대"라는 단어가 그리 흔하지는 않았다.
아니, 실제로 그걸 쓰는 부류가 있기는 했는데, 주로 동급생 가운데 양아치나 엽전(요즘의 일진을 당시엔 엽전이라고 흔히들 불렀다)쯤 되는, 소위 "불량 학생"들이 사용하는 그들만의 은어였다.
당시에 교실에서 그런 학생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간혹 이 단어를 듣곤 했는데, 당시에는 문맥으로 그 단어의 뜻이 "아버지"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네이버 국어 사전에는 늙은이 혹은 선생님을 이르는 은어라고 나와 있다.)
왜 아버지를 꼰대라고 부르는지는 지금도 알 지 못한다.
한참이 지나, 대학교를 가고 또래의 친구들이 군대를 다녀와서 군대 얘기를 하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는 군대에서 그들끼리 사용하는 새로운 용어들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 가운데 우연히 들었던 용어는 "꼬질대다"라는 용어였는데, 대략적인 의미는 "시시때때로 간섭하거나 딴지를 걸어 사람을 괴롭히다"는 뜻으로 기억을 하고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단어이다.)
꼰대와 꼬질대다는 같은 어원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표준어도 아니고 하나는 은어이니 어원이 뭐가 중요하겠는가만, 어떤 계층에서 널리 쓰였다면 그 단어가 이리저리 변형되어 활용되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만약 같은 어원을 가졌다면 어느 정도는 이해도 될 만하지 않을까.
아버지나 선생님은 늘상 나에게 훈계하고 지적하고 고치려고 드니 말이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게 반복되면 괴롭기 짝이 없는 것이고,
급기야는 저 사람만 봐도 기분이 좋지 않아지고,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고,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지고.... 한마디로 가시방석과 같은 존재가 아니겠는가.
당시에는 그래도 이런 훈계를 마땅한 것으로 여겨 받아들이는 학생들이 많았나 보다.
유독 행실이 좋지 않은 학생들만, 자꾸만 반복되는 꾸짖음과 훈계에 지쳐,
꼰대라는 단어로 자신들의 스트레스를 승화시켰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던 것이 최근에는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꼰대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심지어는 선생님이나 아버지, 혹은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 뿐이 아니라, 나이가 비슷한 또래에게도 "젊은 꼰대 = 영꼰"이라 부르며 불만을 터트리고 있다.
단지 단어가 흔해진 것도 아니고, 꼰대라는 단어에 담긴 스트레스, 짜증의 정도가 약해진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현재에도 "꼰대"라는 단어는 많은 짜증을 내포하고 있고, 일정 부분의 증오심도 담고 있다.
이런 현상을, 주로 꼰대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젊은 층에서는, 사소한 일에도 이래라 저래라 참견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여러가지 생활 관습의 변화에서 기인한 것으로서, 타인에 대한 간섭을 무례한 것으로 생각하는 관습,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해야 한다는 관습 등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이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
또 얘기가 길어졌다.
그래서 대체 "꼰대와 문화가 무슨 관련이 있는 건데?"
문화...넓게는 생활의 관습, 도덕, 예의, 생활 패턴... 이라는 것은 그 사회에서 무난하게 생활하기 위해서 지켜야할 것, 혹은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광범위한 규칙(혹은 약속)을 말한다.
이런 문화는 문헌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며, 대부분은 부모 가족 형제 친척 친구 이웃 선생님 등 자주 접하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가르치고 배우면서 전해진다.
그리고 그런 문화 중 강한 금기에 해당되는 것은, 그 만큼 강하게 전수가 되는데, 가장 흔한 방법은 "두려움"을 심어 주는 것이다.
흔한 예로, 금기가 되는 것을 모르고 범한 아동에게는 평생을 잊 못할 엄한 처벌이 내려지기도 하고, 그 모습을 다른 아동에게도 보여 줌으로써 강력한 경고로 삼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 그 처벌을 받은 아동 혹은 그런 처벌의 광경을 목격하거나 들었던 아동은, 후에 성인이 되어서도 두려움을 지울 수 없게 되고, 비슷한 금기를 다시 목격하게 되었을 때 즉각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금기를 어긴 사람에게는 강한 분노를 표하거나 비난을 하게 된다.
다시 이런 비난을 받은 사람은 강한 두려움을 가지고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게 된다.
모든 문화가 이런 식으로 전수되지는 않지만, 강력한 금기일 수록 비슷한 방식으로 전수가 된다.
어쩌면 외부에서 전혀 다른 문화 체계를 가진 사람이 보기에는, 얼핏 무엇에 세뇌된 집단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게 문화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결국 이런 넓은 의미의 문화의 전수 과정이, 이제는 꽤 폭넓게 "꼰대짓"으로 비난을 받고 있다.
한편으로는 시대에 걸맞지 않는 구태와 낡은 인습에 대한 자연스러운 거부 반응으로도 볼 수 있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전승받은 문화를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 예전만큼 쉽지 않고 용기를 내야만 하는 일이 되었다는 것, 그래서 그 폭은 줄어 들었으며, 줄어든 만큼 왜곡될 가능성은 높아지고 단절될 가능성도 높아진 것 만큼은 사실이다.
아니, 실제로 그걸 쓰는 부류가 있기는 했는데, 주로 동급생 가운데 양아치나 엽전(요즘의 일진을 당시엔 엽전이라고 흔히들 불렀다)쯤 되는, 소위 "불량 학생"들이 사용하는 그들만의 은어였다.
당시에 교실에서 그런 학생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간혹 이 단어를 듣곤 했는데, 당시에는 문맥으로 그 단어의 뜻이 "아버지"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네이버 국어 사전에는 늙은이 혹은 선생님을 이르는 은어라고 나와 있다.)
왜 아버지를 꼰대라고 부르는지는 지금도 알 지 못한다.
한참이 지나, 대학교를 가고 또래의 친구들이 군대를 다녀와서 군대 얘기를 하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는 군대에서 그들끼리 사용하는 새로운 용어들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 가운데 우연히 들었던 용어는 "꼬질대다"라는 용어였는데, 대략적인 의미는 "시시때때로 간섭하거나 딴지를 걸어 사람을 괴롭히다"는 뜻으로 기억을 하고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단어이다.)
꼰대와 꼬질대다는 같은 어원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표준어도 아니고 하나는 은어이니 어원이 뭐가 중요하겠는가만, 어떤 계층에서 널리 쓰였다면 그 단어가 이리저리 변형되어 활용되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만약 같은 어원을 가졌다면 어느 정도는 이해도 될 만하지 않을까.
아버지나 선생님은 늘상 나에게 훈계하고 지적하고 고치려고 드니 말이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게 반복되면 괴롭기 짝이 없는 것이고,
급기야는 저 사람만 봐도 기분이 좋지 않아지고,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고,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지고.... 한마디로 가시방석과 같은 존재가 아니겠는가.
당시에는 그래도 이런 훈계를 마땅한 것으로 여겨 받아들이는 학생들이 많았나 보다.
유독 행실이 좋지 않은 학생들만, 자꾸만 반복되는 꾸짖음과 훈계에 지쳐,
꼰대라는 단어로 자신들의 스트레스를 승화시켰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던 것이 최근에는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꼰대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심지어는 선생님이나 아버지, 혹은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 뿐이 아니라, 나이가 비슷한 또래에게도 "젊은 꼰대 = 영꼰"이라 부르며 불만을 터트리고 있다.
단지 단어가 흔해진 것도 아니고, 꼰대라는 단어에 담긴 스트레스, 짜증의 정도가 약해진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현재에도 "꼰대"라는 단어는 많은 짜증을 내포하고 있고, 일정 부분의 증오심도 담고 있다.
이런 현상을, 주로 꼰대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젊은 층에서는, 사소한 일에도 이래라 저래라 참견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여러가지 생활 관습의 변화에서 기인한 것으로서, 타인에 대한 간섭을 무례한 것으로 생각하는 관습,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해야 한다는 관습 등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이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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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얘기가 길어졌다.
그래서 대체 "꼰대와 문화가 무슨 관련이 있는 건데?"
문화...넓게는 생활의 관습, 도덕, 예의, 생활 패턴... 이라는 것은 그 사회에서 무난하게 생활하기 위해서 지켜야할 것, 혹은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광범위한 규칙(혹은 약속)을 말한다.
이런 문화는 문헌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며, 대부분은 부모 가족 형제 친척 친구 이웃 선생님 등 자주 접하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가르치고 배우면서 전해진다.
그리고 그런 문화 중 강한 금기에 해당되는 것은, 그 만큼 강하게 전수가 되는데, 가장 흔한 방법은 "두려움"을 심어 주는 것이다.
흔한 예로, 금기가 되는 것을 모르고 범한 아동에게는 평생을 잊 못할 엄한 처벌이 내려지기도 하고, 그 모습을 다른 아동에게도 보여 줌으로써 강력한 경고로 삼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 그 처벌을 받은 아동 혹은 그런 처벌의 광경을 목격하거나 들었던 아동은, 후에 성인이 되어서도 두려움을 지울 수 없게 되고, 비슷한 금기를 다시 목격하게 되었을 때 즉각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금기를 어긴 사람에게는 강한 분노를 표하거나 비난을 하게 된다.
다시 이런 비난을 받은 사람은 강한 두려움을 가지고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게 된다.
모든 문화가 이런 식으로 전수되지는 않지만, 강력한 금기일 수록 비슷한 방식으로 전수가 된다.
어쩌면 외부에서 전혀 다른 문화 체계를 가진 사람이 보기에는, 얼핏 무엇에 세뇌된 집단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게 문화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결국 이런 넓은 의미의 문화의 전수 과정이, 이제는 꽤 폭넓게 "꼰대짓"으로 비난을 받고 있다.
한편으로는 시대에 걸맞지 않는 구태와 낡은 인습에 대한 자연스러운 거부 반응으로도 볼 수 있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전승받은 문화를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 예전만큼 쉽지 않고 용기를 내야만 하는 일이 되었다는 것, 그래서 그 폭은 줄어 들었으며, 줄어든 만큼 왜곡될 가능성은 높아지고 단절될 가능성도 높아진 것 만큼은 사실이다.
2020년 4월 18일 토요일
분석하고 따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습성
나에게 이런 습성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는데,
어쩌다 보니, 우연히 내가 이런 습성을 가진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직적의 포스팅에서 밝힌 바와 같이,
최근의 사회적인 현상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아져서,
그런 스트레스의 해소를 위해 원인을 따져가 보니,
문득 내가 이런 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구나 싶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주 우스운 일은, 저런 습성이 매우 이성적인 단계를 거쳐야만 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더라는 것이다.
즉, 어떤 사안에 대해서, 그것의 옳고 그름 혹은 죄측 우측, 혹은 1번 2번 하는 선택은 거의 직관적으로 일어나서 아무론 이성적 판단이나 추론이 개입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대부분의 이성적 판단이나 추론들은, 직관적 선택이 일어난 후에, 그 선택을 정당화 하거나 강화시키기 위한 부가적인 작업으로 일어날 뿐이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건 내가 내린 선택에 대해서 다른 반대 의견을 너무 두려워하기 때문에 나의 선택에 대한 최소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반복된 작업으로 생긴 습성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런 습성은 결국 다른 의견이나 반대 의견에 대해서는 강하게,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배척을 하는 반응을 강화시켰고, 내가 무언가 실패나 실수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현격하게 제한시켜 버렸다.
또 한가지의 좋지 않은 점은,
각종 전시회나 공연 등에서 그걸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에 아주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것들을 느끼기 이전에 나는 먼저 분석하고 판단하고 좋은 것 나쁜 것 가르며 채점을 먼저 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내린 가치나 점수가 나에게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느껴야 할 것들은 느끼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버렸다.
덕분에 나는 그런 전시회나 공연 등의 감상문이나 후기를 적는 것이 매우 어렵고 불편했으며, 급기야는 전시회나 공연 자체를 회피하게 되었다.
아직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참 모호한데,
내 무의식에 존재하는 것이,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않고 직관적 판단이 앞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인지,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내가 내린 선택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분석하고 판단하려는 습성이 있는 것인지,
감정적인 것은 나쁘다는 무조건적인 배척이 있는 것인지,
혹은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엮어져서 나타나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어쩌다 보니, 우연히 내가 이런 습성을 가진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직적의 포스팅에서 밝힌 바와 같이,
최근의 사회적인 현상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아져서,
그런 스트레스의 해소를 위해 원인을 따져가 보니,
문득 내가 이런 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구나 싶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주 우스운 일은, 저런 습성이 매우 이성적인 단계를 거쳐야만 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더라는 것이다.
즉, 어떤 사안에 대해서, 그것의 옳고 그름 혹은 죄측 우측, 혹은 1번 2번 하는 선택은 거의 직관적으로 일어나서 아무론 이성적 판단이나 추론이 개입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대부분의 이성적 판단이나 추론들은, 직관적 선택이 일어난 후에, 그 선택을 정당화 하거나 강화시키기 위한 부가적인 작업으로 일어날 뿐이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건 내가 내린 선택에 대해서 다른 반대 의견을 너무 두려워하기 때문에 나의 선택에 대한 최소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반복된 작업으로 생긴 습성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런 습성은 결국 다른 의견이나 반대 의견에 대해서는 강하게,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배척을 하는 반응을 강화시켰고, 내가 무언가 실패나 실수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현격하게 제한시켜 버렸다.
또 한가지의 좋지 않은 점은,
각종 전시회나 공연 등에서 그걸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에 아주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것들을 느끼기 이전에 나는 먼저 분석하고 판단하고 좋은 것 나쁜 것 가르며 채점을 먼저 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내린 가치나 점수가 나에게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느껴야 할 것들은 느끼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버렸다.
덕분에 나는 그런 전시회나 공연 등의 감상문이나 후기를 적는 것이 매우 어렵고 불편했으며, 급기야는 전시회나 공연 자체를 회피하게 되었다.
아직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참 모호한데,
내 무의식에 존재하는 것이,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않고 직관적 판단이 앞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인지,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내가 내린 선택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분석하고 판단하려는 습성이 있는 것인지,
감정적인 것은 나쁘다는 무조건적인 배척이 있는 것인지,
혹은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엮어져서 나타나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2020년 4월 14일 화요일
심어진 인식
최근의 코로나-19 바이러스에 21대 총선거가 겹치면서 네티즌들의 정치적인 언급이 부쩍 늘어난 상태다.
직접적인 정치적 의견은 이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일까,
코로나-19를 이용해서 은근슬쩍 정치적인 분열을 강요받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각종 포털과 뉴스 기사 유튜브에서는 코로나-19를 주제로 다루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그것이 대중에게 도움이 되는 자식이나 사실 경험이기 보다는,
누군가를 비웃고 조롱하거나, 누군가를 칭송하고 찬양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였다.
내가 보기에는, 지금 세상에는,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과 그걸 방해하려는 사람들만 있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인지, 최근에 단톡방에서는 지인들마저도 이런 흐름에 합류해서 정부를 비판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자신의 정치색을 드러낸다는 것이 매우 조심스러워야 할 일이지만, 워낙에 오래된 친구들이다 보니 그런 정도는 괜찮다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한쪽으로 치우친 대화에 감히 반론을 제기하기도 어렵고, 그래봐야 뭐하겠나 싶어서 가만히 보기만 할 뿐이었다.
처음엔 꽤나 짜증이 났는데, 이걸 보고 참아내는데 도움이 될 만한 몇가지 생각이 있었다.
직접적인 정치적 의견은 이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일까,
코로나-19를 이용해서 은근슬쩍 정치적인 분열을 강요받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각종 포털과 뉴스 기사 유튜브에서는 코로나-19를 주제로 다루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그것이 대중에게 도움이 되는 자식이나 사실 경험이기 보다는,
누군가를 비웃고 조롱하거나, 누군가를 칭송하고 찬양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였다.
내가 보기에는, 지금 세상에는,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과 그걸 방해하려는 사람들만 있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인지, 최근에 단톡방에서는 지인들마저도 이런 흐름에 합류해서 정부를 비판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자신의 정치색을 드러낸다는 것이 매우 조심스러워야 할 일이지만, 워낙에 오래된 친구들이다 보니 그런 정도는 괜찮다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한쪽으로 치우친 대화에 감히 반론을 제기하기도 어렵고, 그래봐야 뭐하겠나 싶어서 가만히 보기만 할 뿐이었다.
처음엔 꽤나 짜증이 났는데, 이걸 보고 참아내는데 도움이 될 만한 몇가지 생각이 있었다.
- 내가 반론을 제기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얘기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그걸 수용하고 듣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이건 오랜 시간 함께 지내 본 경험이기도 하고, 나도 그랬었구나 하는 반성을 했기에 가능했다. - 상대방이 그리 분노하고 화내는 것을 나도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이다.
: 만약 지금 다른 대통령이 행정부 수반이라고 생각하면 나도 같은식으로 분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화내는 그 감정은 이해하지만,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 그들을 향해 다시 분노를 쏟아내면, 나 또한 마찬가지가 같은 수준이 되기 때문이다.
- 내가 상대에게 분노하는 이유가, 사실은 나 자신에 대한 분노라는 생각 때문이다.
: 이건 다분히 개인적인 경우인데, 똑같은 반대 의견을 내놓는 사람이라 해도, 누군가가 더 미워보이거나 하는 것이다. 즉,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를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인데, 그건.. 어쩌면... 그에게서 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우리들이 무언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들이 대단한 이성적 판단이나 충분한 경험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저항할 수 없는 시기에 심어졌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 중에 마지막에 대해서 우연히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씨름 경기가 전국적으로 흥행을 했었다.
체급을 금강, 한라, 백두 등으로 나누었고, 추석같은 명절에 맞추어서 온가족이 함께 봤던 기억이 난다.
백두급이 가장 큰 체급이었고, 천하장사 타이틀은 그야말로 강자 중의 강자를 가려내는 것이었다.
당시에 이준희라는 장사가 있었는데, 나의 모친은 이준희 선수에 대해서 칭찬을 많이 하셨다.
이런 전국 씨름대회 이전부터 명성이 자자했던 모양인데, 모친이 그리 말씀하시니 나는 당연히 이준희가 최고야 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쩐지 전국 씨름대회를 하면 천하장사는 항상 이만기였다.
대체 어찌된걸까? 이준희는 항상 결승에서 이만기에게 무릎을 꿇었고, 나중에는 결승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나는 항상 이준희가 올라오는 경기만을 기대했고, 한동안은 역시 이준희야 하는 만족을 했지만, 언제나 마지막엔 실망했고, 나중엔 만족보다 실망이 많아져갔다.
그러면 지고 난 후에는 항상 분노에 차서 무언가 이유를 갖다 대곤 했다.
상대방이 샅바 싸움으로 비열하게 이겼네, 저렇게 이긴 건 천하장사도 아니야 하면서...
어린 내가 무엇을 알겠는가.
누구의 실력이나 체력이나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얼마나 잘 알겠는가.
그저 모친의 말만 들었고, 그건 진리라 생각했으며, 그것과 빗나간 현실에서는 무언가 음모론과 같은 이유를 생각하거나 했다.
어쩌면 모친도 그런 음모론적 이야기를 해서 내가 배운 걸 수도 있으며, 뉴스 따위에서 승패의 분석을 하면 그 가운데에서 내 입맛에 맞는 원인만 쏙쏙 빼서 들었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모친에게 왜 이준희가 천하장사가 안되는지 묻지 않았던 것은 아직도 의문이다.
정치적인 견해와 편향성 또한 이와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위 TK라 불리는 지역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사랑이 유다르니 그런 어른들의 얘기를 항상 듣고 자라난 어린이들은 이것이 진리이고 거스를 수 없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말을 듣게 되면 자동 반사처럼 분노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리라.
광주와 호남도 다르지는 않겠다.
특히나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인해 만들어진 반정부 의식은 그 지역민들에게 트라우마 처럼 남아서 대대로 이어지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면, 대부분은 집안의 정치적 편향성이 대체로 일치하는 것이 일반적일 수도 있지만, 나는 왜.... 나는 왜 부모님과 정치적 의견을 달리 하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국민은 지역에 구애없이 반일과 혐일이 기본 장착되어 있는데, 이것을 위의 사례와 비슷하게 본다면, 어쩌면 우리는 한가지 경직된 사고(반일)에서는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보다는 먼저, 박정희와 5.18로부터 야기된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면 한다.
2020년 4월 9일 목요일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인류의 나이테
전례 없는 흉폭한 바이러스로 인한 공포와 갖가지 사회적 기 현상들이 매일 속출하고 있다.
누군가는 위험의 한가운데서 용기를 외치고 있으며, 누군가는 멀찌감치 떨어져 그들을 비웃는다.
묵묵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내는 사람들,
인내와 내핍을 경험하는 사람들,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인 사람들,
누군가의 탓을 하고 원인자를 향해 분노를 내뱉는 사람들,
천태만상의 인간 군상들이 벌이는 이 사회상은 참말로 겪어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조금은 태풍이 잦아들었다 싶고 보니, 이것이 몇해전부터 회자되었던 블랙스완이었던 것이었다.
물론 블랙스완이라는 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알 수 없기에, 그걸 대비하고 준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랬다면 그것은 이미 블랙스완이 아닐 것이었다.
이번의 사태는 또 어떤 식으로든 해결될거라 믿어 의심하지는 않지만,
최근의 신종플루, 조류독감, MERS, SARS와는 다르게 인류의 역사에 큰 나이테를 하나 남길만한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멀리, 이제는 많이 희미해졌고, 사회초년생들은 말로만 들어봤을 IMF사태...외환위기는 대한민국의 유래없는 위기와 충격이었다.
이미 20여년이 지나서 완치되었다 생각할 지는 몰라도, 그건 살아남은 사람들의, 피해가 적었던 사람들의 생각일지 모른다.
아직도 아픈 과거를 회상하는 사람들 가운데, 외환 위기로 인해 몰락한 가정의 상처를 끄집어 내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전세계를 강타한 신용위기, 미국의 리만브라더스가 파산하면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난 이 사건도 전 인류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아마도 아직도 이 여파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과 기업들이 존재할 것이며, 그 상처를 진하게 품고 있고 있는 이들은 더 많으리라 생각한다.
나무의 나이테는 성장통의 증거이지만, 인류의 나이테도 그런 것일까?
이 나이테의 이전과 이후에는 무엇이 달라질까?
인류는 이 사건을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이며, 새로이 인류를 지배하는 새로운 불문률은 무엇이 될까?
공포에 맞서는 사람들,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종교에 의지하는 사람들,
공포를 외면하고 애써 태연한 척 하는 사람들,
이들 모두가 공포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
블랙스완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쓴 사람은
레바논 태생의 미국 경제학자.
2007년에 자신의 저서 "블랙스완"에서 처음 이 용어를 썼다고 한다.
이번의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해서 그 자신은 "이것은 블랙스완이 아니다"라고 밝혔다고 한다.
블랙스완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아주 낮은 가능성의 일이 발생해서 막대한 영향을 일으키는 것.
반면에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이미 예견되었던 사태인 만큼 블랙스완이 아닌 화이트스완이라고...
https://mothership.sg/2020/04/covid-19-black-swan/
https://youtu.be/Tb2pXXUSz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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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위험의 한가운데서 용기를 외치고 있으며, 누군가는 멀찌감치 떨어져 그들을 비웃는다.
묵묵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내는 사람들,
인내와 내핍을 경험하는 사람들,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인 사람들,
누군가의 탓을 하고 원인자를 향해 분노를 내뱉는 사람들,
천태만상의 인간 군상들이 벌이는 이 사회상은 참말로 겪어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조금은 태풍이 잦아들었다 싶고 보니, 이것이 몇해전부터 회자되었던 블랙스완이었던 것이었다.
물론 블랙스완이라는 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알 수 없기에, 그걸 대비하고 준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랬다면 그것은 이미 블랙스완이 아닐 것이었다.
이번의 사태는 또 어떤 식으로든 해결될거라 믿어 의심하지는 않지만,
최근의 신종플루, 조류독감, MERS, SARS와는 다르게 인류의 역사에 큰 나이테를 하나 남길만한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멀리, 이제는 많이 희미해졌고, 사회초년생들은 말로만 들어봤을 IMF사태...외환위기는 대한민국의 유래없는 위기와 충격이었다.
이미 20여년이 지나서 완치되었다 생각할 지는 몰라도, 그건 살아남은 사람들의, 피해가 적었던 사람들의 생각일지 모른다.
아직도 아픈 과거를 회상하는 사람들 가운데, 외환 위기로 인해 몰락한 가정의 상처를 끄집어 내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전세계를 강타한 신용위기, 미국의 리만브라더스가 파산하면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난 이 사건도 전 인류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아마도 아직도 이 여파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과 기업들이 존재할 것이며, 그 상처를 진하게 품고 있고 있는 이들은 더 많으리라 생각한다.
나무의 나이테는 성장통의 증거이지만, 인류의 나이테도 그런 것일까?
이 나이테의 이전과 이후에는 무엇이 달라질까?
인류는 이 사건을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이며, 새로이 인류를 지배하는 새로운 불문률은 무엇이 될까?
공포에 맞서는 사람들,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종교에 의지하는 사람들,
공포를 외면하고 애써 태연한 척 하는 사람들,
이들 모두가 공포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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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쓴 사람은
레바논 태생의 미국 경제학자.
2007년에 자신의 저서 "블랙스완"에서 처음 이 용어를 썼다고 한다.
이번의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해서 그 자신은 "이것은 블랙스완이 아니다"라고 밝혔다고 한다.
블랙스완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아주 낮은 가능성의 일이 발생해서 막대한 영향을 일으키는 것.
반면에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이미 예견되었던 사태인 만큼 블랙스완이 아닌 화이트스완이라고...
https://mothership.sg/2020/04/covid-19-black-swan/
https://youtu.be/Tb2pXXUSz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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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14일 토요일
타인을 깨닫게 하는 일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려고 시도하곤 한다.
거칠게 표현해서 강요라는 단어를 썼지만, 어쩌면 객관적인 제 3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단어가 제일 적절하다 싶어 사용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정말 옳다고 생각한다.
아주 강력하게, 의심의 여지 없이 말이다.
그렇기에 스스럼 없이 그것을 타인에게 전파하고, 설득하며, 강요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주 단순하면서도 명백한 사실 하나는,
강요하는 사람이 확신에 차 있을 수록,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만큼 더 의심스러워 한다는 점이다.
비슷하지만 다른 예를 하나 들어 볼까?
타인을 웃게 하기 위해서, 내가 알고 있는 아주 재미있는 얘기를 해 주는 경우.
아주 재미있다고 얼굴에 웃음을 잔뜩 머금어 기대감을 잔뜩 갖게 만들고,
얘기하는 내내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 얘기해 주고 나면
상대방의 반응은 대부분 기대에 미치지 못하곤 한다.
마치 빵 터져야 할 풍선의 바람이, 내가 웃을 때 마다 조금씩 빠져 나가서 풍선의 마지막 상태가 심각하게 쪼그라져 들어버린 것 같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 행위는,
타인이 행한 잘못을 지적하는 경우에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물론 이 또한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므로 어느 정도 주관적이거나 사람마다 의견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질타하고 꾸짖는 것으로 타인의 행동을 교정할 수 있을까?
꾸짖음을 받는 것이 두려워서, 꾸짖는 사람이 보는 곳에서는 그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지만, 언제든 다시 반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대부분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가장 큰 교정 방법은, 그 행동의 피해자가 되어 보는 것이다.
본인 피해자가 되었을 때 별다른 불편함이나 고통이 없다면, 가까운 사람이 피해자가 되어 고통을 겪는 것을 보면서 간접 경험을 하는 것이다.
앞서 처음에 제기했던, 타인을 깨닫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타인으로 하여금 의문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그의 제자들을 문답법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함으로써 의문을 유발했던 것이다.
너의 지식을 타인에게 주입하려 하지 말고,
너의 도덕심을 타인에게 강요하려 하지 말고,
너의 설레발로 타인의 기대감을 부풀리지 말아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려고 시도하곤 한다.
거칠게 표현해서 강요라는 단어를 썼지만, 어쩌면 객관적인 제 3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단어가 제일 적절하다 싶어 사용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정말 옳다고 생각한다.
아주 강력하게, 의심의 여지 없이 말이다.
그렇기에 스스럼 없이 그것을 타인에게 전파하고, 설득하며, 강요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주 단순하면서도 명백한 사실 하나는,
강요하는 사람이 확신에 차 있을 수록,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만큼 더 의심스러워 한다는 점이다.
비슷하지만 다른 예를 하나 들어 볼까?
타인을 웃게 하기 위해서, 내가 알고 있는 아주 재미있는 얘기를 해 주는 경우.
아주 재미있다고 얼굴에 웃음을 잔뜩 머금어 기대감을 잔뜩 갖게 만들고,
얘기하는 내내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 얘기해 주고 나면
상대방의 반응은 대부분 기대에 미치지 못하곤 한다.
마치 빵 터져야 할 풍선의 바람이, 내가 웃을 때 마다 조금씩 빠져 나가서 풍선의 마지막 상태가 심각하게 쪼그라져 들어버린 것 같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 행위는,
타인이 행한 잘못을 지적하는 경우에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물론 이 또한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므로 어느 정도 주관적이거나 사람마다 의견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질타하고 꾸짖는 것으로 타인의 행동을 교정할 수 있을까?
꾸짖음을 받는 것이 두려워서, 꾸짖는 사람이 보는 곳에서는 그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지만, 언제든 다시 반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대부분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가장 큰 교정 방법은, 그 행동의 피해자가 되어 보는 것이다.
본인 피해자가 되었을 때 별다른 불편함이나 고통이 없다면, 가까운 사람이 피해자가 되어 고통을 겪는 것을 보면서 간접 경험을 하는 것이다.
앞서 처음에 제기했던, 타인을 깨닫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타인으로 하여금 의문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그의 제자들을 문답법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함으로써 의문을 유발했던 것이다.
너의 지식을 타인에게 주입하려 하지 말고,
너의 도덕심을 타인에게 강요하려 하지 말고,
너의 설레발로 타인의 기대감을 부풀리지 말아라.
2020년 2월 24일 월요일
점점 강력해지는 적들
중국의 우한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진 코로나 바이러스, 올해 음력 설을 앞두고 발생하기 시작한 이 바이러스는 [우한 바이러스]로 불리다가, WHO에서 공식 명칭으로 COVID-19 로 지정하였고, [코로나 바이러스 19]로 불리고 있다.
아직까지도 그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으며, 여전히 확진자와 사망자가 늘어나고 있는 중이다.
바로 몇해 전에 발생했던 MERS나 SARS에 비해서 더 치명적이라는 점만은 확실해 보인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음에도 어이없게 전파된 지역 감염자에 의해 방역망은 허물어졌고, 이 감염자는 수퍼 전파자가 되어 대구 지역 일대를 초토화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의 노력이 헛되이 무너졌음은 물론이고, 호미로 막던 걸 가래로 막아야 하는 상황이며, 이제는 사실 상, 전 국민이 발병 의심자가 되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우려마저 생기고 있는 실정이다.
가만히 이 상황을 보고 있노라니, 일본의 애니메이션인 에반게리온이 떠 올랐다.
"사도(使徒)"라는 정체불명의 파괴자가 지속적으로 출현하여 지구와 인류를 위협하는 것인데, 에반게리온이라 부르는 거대 로봇과 파일럿이 매번 죽을 위기를 넘기면서 사도를 제압하곤 한다.
하나의 사도를 제압하고 나면, 로봇이나 파일럿이 크게 부상 당하고 파괴되는 일은 일상적인 일이고, 얼마 지난지 않아 또 다른 사도가 출현하는데, 앞선 사도보다 더 강력하고 뛰어나기에 상황은 점점 암울해져 간다....
마치 우리가 겪고 있는 바이러스의 공포도 이와 비슷하지 않나 싶다.
새로운 바이러스의 출현, 공포...
가까스로 치료제 개발...
또 다른 더 강력한 바이러스 출현.... 기존의 치료제는 무쓸모...
....
하기사, 많은 어린이 만화들도 다 그랬다.
드래곤볼이야말로 점점 더 강해지는 적들과 주인공들, 그리고 그 규모까지 어마어마해져서, 급기야는 선을 넘었다고 욕먹기까지 하는 상황이고,
몇해전에 영화화 되었다는 퍼시픽림도 비슷한 상황들의 전개...
다시 현실로 돌아와 보면,
질병이나 바이러스 뿐 아니라, 자연 재해마저도 더 막강해져 간다는 느낌이다.
왜 태풍이나 지진의 규모나 강도가 더 세지고 있는건지, 한여름 폭염의 최고 온도나 연속 열대야 일수는 무시무시하게 늘어가고, 올해 초까지 호주에서 일어난 대규모 화재까지...
인간들이 자연을 더 많이 깊이 이해하고, 자연 현상에 대한 대처 능력이 한단계 레벨 업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자연의 횡포는 두단계 레벨 업 된 것처럼 보인다.
-----------------------------------------------------------------------------------
잠깐 재미있는 상상을 해 보자.
바이러스가 인체에 들어와서 자신을 복제하면서 증식하는 것을,
우리 인간으로 비유하면 어떨까?
인간이 생각하는 지구라는 것은 기껏해야 바이러스가 보는 인간 정도의 하나의 생명체.
바이러스는 숙주 안에서 계속 복제하며 자기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는데,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숙주가 위태로운 지경까지 이르게 되고, 결국 바이러스 자신까지도 죽을 수 있지만, 과연 바이러스가 그걸 염려해서 자기 복제를 자제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지구의 환경을 염려해서 환경 보호를 해야 한다는 일부 사람들이 있지만, 과연 인간들이 그들의 탐욕을 버릴 수 있을까?
-----------------------------------------------------------------------------------
아직까지도 그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으며, 여전히 확진자와 사망자가 늘어나고 있는 중이다.
바로 몇해 전에 발생했던 MERS나 SARS에 비해서 더 치명적이라는 점만은 확실해 보인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음에도 어이없게 전파된 지역 감염자에 의해 방역망은 허물어졌고, 이 감염자는 수퍼 전파자가 되어 대구 지역 일대를 초토화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의 노력이 헛되이 무너졌음은 물론이고, 호미로 막던 걸 가래로 막아야 하는 상황이며, 이제는 사실 상, 전 국민이 발병 의심자가 되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우려마저 생기고 있는 실정이다.
가만히 이 상황을 보고 있노라니, 일본의 애니메이션인 에반게리온이 떠 올랐다.
"사도(使徒)"라는 정체불명의 파괴자가 지속적으로 출현하여 지구와 인류를 위협하는 것인데, 에반게리온이라 부르는 거대 로봇과 파일럿이 매번 죽을 위기를 넘기면서 사도를 제압하곤 한다.
하나의 사도를 제압하고 나면, 로봇이나 파일럿이 크게 부상 당하고 파괴되는 일은 일상적인 일이고, 얼마 지난지 않아 또 다른 사도가 출현하는데, 앞선 사도보다 더 강력하고 뛰어나기에 상황은 점점 암울해져 간다....
마치 우리가 겪고 있는 바이러스의 공포도 이와 비슷하지 않나 싶다.
새로운 바이러스의 출현, 공포...
가까스로 치료제 개발...
또 다른 더 강력한 바이러스 출현.... 기존의 치료제는 무쓸모...
....
하기사, 많은 어린이 만화들도 다 그랬다.
드래곤볼이야말로 점점 더 강해지는 적들과 주인공들, 그리고 그 규모까지 어마어마해져서, 급기야는 선을 넘었다고 욕먹기까지 하는 상황이고,
몇해전에 영화화 되었다는 퍼시픽림도 비슷한 상황들의 전개...
다시 현실로 돌아와 보면,
질병이나 바이러스 뿐 아니라, 자연 재해마저도 더 막강해져 간다는 느낌이다.
왜 태풍이나 지진의 규모나 강도가 더 세지고 있는건지, 한여름 폭염의 최고 온도나 연속 열대야 일수는 무시무시하게 늘어가고, 올해 초까지 호주에서 일어난 대규모 화재까지...
인간들이 자연을 더 많이 깊이 이해하고, 자연 현상에 대한 대처 능력이 한단계 레벨 업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자연의 횡포는 두단계 레벨 업 된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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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재미있는 상상을 해 보자.
바이러스가 인체에 들어와서 자신을 복제하면서 증식하는 것을,
우리 인간으로 비유하면 어떨까?
인간이 생각하는 지구라는 것은 기껏해야 바이러스가 보는 인간 정도의 하나의 생명체.
바이러스는 숙주 안에서 계속 복제하며 자기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는데,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숙주가 위태로운 지경까지 이르게 되고, 결국 바이러스 자신까지도 죽을 수 있지만, 과연 바이러스가 그걸 염려해서 자기 복제를 자제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지구의 환경을 염려해서 환경 보호를 해야 한다는 일부 사람들이 있지만, 과연 인간들이 그들의 탐욕을 버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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