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29일 일요일

타인에 대한 증오를 다스리는 방법

타인에 대한 증오와 분노는,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나이를 먹어 가면서 점점 늘어가는 듯 하다.

정치인과 정치권에 대한 분노들,
층간 소음과 같은 이웃에 대한 분노들,
토론이 논쟁으로 번지고 급기야는 마음까지 상해서 생기는 분노,
인터넷의 익명성 뒤에 숨어서 무차별한 악성 댓글을 남기는 누군가에 대한 분노,

나이가 들면 그러려니 이해도 하고 좀 쉽게쉽게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했더니,
아직은 그러질 못한다.
곰곰 생각해보니, 나이만 먹는다고 자연스레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었던 듯 하다.
고민하고 아파하고, 반복되는 어리석음을 벗어나기 위해 지혜로운 해결책을 스스로 만들어야만 조금씩 천천히 나아질 뿐이고, 그나마도 끊임 없이 자신을 다스려야만 가능한게 아닐까?


친구들 가운데, 유난히 나와 툭탁거리고 삐꺽대는 친구가 있다.
정말 둘이서만은 만나고 싶지도 않고, 함께 모이는 친구들 때문에 참고 있을 뿐이고, 그러고도 만나면 마찰이 생기는 경우도 많았다.
오랫동안 생각해보니, 이 친구가 나는 비슷한 면이 많았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친구의 행동이나 생각따위에서 나와 닮은 부분이 보일때면, 내가 종종 흥분하고 공격적으로 대했던게 아닌가 싶다.
어쩌면 그 친구도 내게 그랬을지 모르는 일이고, 혹은 나의 공격적 반응때문에 악감정이 쌓여서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그 친구의 행동이나 생각이 나와 닮았다고 생각해서 흥분하는 건 아니다.
단지 그 순간에는, 그 친구의 말이나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어 그랬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친구의 그 행동이나 말은 결국 나의 행동이나 말과 어딘지 닮아 있었다.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 어두운 생각, 피하고 싶은 행동 따위는, 내가 싫어하는 나의 반쪽인 하이드씨였던 셈이다.
그리고 내가 아닌 친구에게서 나의 하이드씨를 보게되면 분노했던 것일지도...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 다음이다.
내가 그 친구에게서 나의 하이드씨 단면을 보고, 거기에 분노할 수록, 나 자신이 나의 하이드씨를 증오하게 되는 것이었다.
밖에서는 지킬박사의 모습을 하고 점잖은 체 하지만, 떼어낼 수 없는 하이드씨는 언제나 내 반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나는 그 반쪽을 더욱 더 증오하게 되었다.
결국은 지킬박사이면서 하이드씨인 나는 나 자신을 더 미워하게 되는 것이었고, 극심한 자기 혐오에 빠지거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를 완전히 분리시키기 위해 자아를 분열시켜야 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분노와 증오가 나의 어두운 반쪽에 대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내 마음속에 세워둔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경계처럼, 나는 세상을 둘로 갈라 놓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며, 하이드씨를 미워하는 마음처럼 세상의 반을 미워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나의 반을 증오하는 것이고, 그건 결국 자가 자신을 증오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은 명심해 두어야 할 것이다.

문득 분노가 꿈틀댈 때, 이 점을 다시 상기하고, 하이드씨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하면, 타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도 점차 사라지지 않을까?

2019년 12월 18일 수요일

재즈에 대한 자부심? 재즈부심?

음악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이런 글을 쓴다는게 아이러니 하지만,
내가 경험했던, 겪었던 일들과의 유사한 면이 있어서 끄적여 본다.

재즈 음악이 묘한 마력과 같은 면이 있지만, 결코 쉽지 않고(듣고 즐기고 감상하기에도 그렇다는 뜻), 썩 편하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나름의 매력이 있으니 한번씩 생각나고, 젖어들고 싶기도 하곤 한다.

순전히 외부인으로써 재즈 뮤지션들을 보면, 타 쟝르에 비해 범접하기 어려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물씬 물씬 받곤 한다.
재즈야말로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연주하고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여러 쟝르를 섭렵하고 끝내 안착하게 되는 궁극의 쟝르라는...식의

그런데도 세상의 음악 중에 재즈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 크지 않다.
전문가들의 영역과 일반 대중의 영역을 나눈다면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어딘지 자기만의 깊은 심연에 빠져 있는 듯이 보인달까?


꽤 오랫동안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길을 걸어왔는데, 이 직종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
OS(운영체제)에서 kernel(커널)이라는 핵심부, 통신과 관련된 소프트웨어에서는 프로토콜(통신규약)과 관련된 부분 등이 그러하다.
매우 핵심적인 부분이며, 어렵고, 전문적이다.
실제로 그런 부분의 인력은 구하기도 힘들고, 페이도 높은 편이다.(단, 실력이 따라야만 한다)
그런데, 실제 상황을 보면 전체 개발 인력 가운데, 이런 핵심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인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1% 혹은 그 미만에 그친다.
다수의 인력이 달려들어서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해봐야 그 성과가 높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혼란이 심해서 역효과가 나기 때문이다.
사실은, 똘똘한 소수만으로 운영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며, 그나마도 이런 것을 담당하는 업체에서만 제한적으로 운영된다고 볼 수도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의 마이크로 커널, 리눅스의 커널, 퀄컴의 CDMA/LTE 프로토콜 따위를 누가 개발하겠는가? 저 대기업내에서도 극소수의 사람만이 관여한다.
삼성이나 샤오미에서 안드로이드의 LTE 프로토콜을 직접 건드릴 일은 아주 드문 일이다.

이런 직무분야에서 근무하는 사람을 매우 부러워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 냉정하게 말하자면, 매우 위태로운 직무분야이기도 하다.
1%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들어둔 보험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보험료가 너무 비싸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1%의 위험은 곧잘 무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SCV와 같은 일꾼 소리를 듣는 직무 분야도 있다.
UI(User Interface)/UX(User Experience)/HCI(Human Computing Interface) 분야다.
스맛폰에서 보이는 거의 모든 화면은 누군가 구상하고 직접 그려넣은 것이다.
작동 시나리오를 짜고, 조건을 검사해서 어떤 그림을 보여줄 지, 어떤 소리를 내 줄지 따위를 만드는 작업이다.
전체적인 시나리오, 타 직무와의 소통과 연계, 아웃소싱, 상품의 기획 등등과 연관된 복잡한 업무도 있지만, 일단 이런것들을 제외하고도 시간과 노력이 많이 요구되기에 평범한 능력을 가진 다수의 엔지니어를 투입해야 하는 직무다.
개개인이 자신의 빛을 발휘하거나 독보적 역량을 뽑낼 기회는 적지만, 언제나 필요로 하는 곳은 많으며, 해야 할 일도 많다.
소프트웨어 개발직에서의 노가다라 불리는 그런...
하지만, 매우 천대받는 이런 직무 분야는 반대로 안정적이다.
이들은 필요로 하는 곳이 많으며, 많은 사람이 투입될수록 기간이 단축되는 효과가 크기때문에 고용주의 입장에서도 비용 대비 효과가 뚜렷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서로 상반되는 빛과 어둠을 가진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물론 이 와중에 최악은 존재한다.
실력은 없지만 핵심 분야만을 고집하는 엔지니어.
주어진 일도 다 못하면서 자꾸 다른 분야만 넘보는 노가다 엔지니어.

2019년 12월 11일 수요일

진보/좌파에 대한 절망

대한민국에서 좌파라는 호칭은 상당히 부정적인 인상을 준다.
(따지고보면 좌파와 우파는 양팔 저울의 한쪽씩을 담당하는, 균형의 일원임에도 말이다.)

나에게 '당신은 좌파에 속합니까 우파에 속합니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좌파에 무게 중심이 쏠려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음에도,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고, 공교육을 받으며, 여러 매스미디어를 통해 얻은 나의 관념으로도, 좌파는 부정적인 단어일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정확한 정의나 세세한 구분, 분류 따위는 알지 못하지만, 편의상 좌파 대신 진보라는 단어를 쓰도록 하겠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으로 시작된 진보 진영의 대통력과 현재의 문재인 대통령을 보면서 그 동안 내가 가졌던 희망, 기대가 많이 무너지고 퇴색되었다.

많은 서민들과 노동자들, 약자와 빈곤층, 사회의 맨 바닥에서 꼭 필요한 일을 하지만,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사람들, 최소한의 생계마저 위협을 받거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
나도 어설프게 그런 부류에 속할지는 모르겠으나, 엄격하게는 아니라 생각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정말 개선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이루어진 것이 있는지, 그래서 나는 모르겠다.

단지 내가 서있는 이 자리에서 보면, 진보 대통령들은 많이 부족하고, 미숙하고, 어설프며, 불편했다.
부동산 정책
대북 정책
대미/대일 외교 정책
청년 일자리 및 경제 정책
아마 위의 분야들에 대해서 각각을 일일이 따지지 않아도, 제대로 성과를 낸 것이 없으며, 지금까지는 그렇다 해도 앞으로 희망적인 부분이 있을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공식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항변할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반박할 자료들을 얼마든지 내 보이겠지만 말이다.)

일부는 우리의 노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 좌우되기도 하며, 단시간에 성과를 보기 어려워 장기적인 안목으로 진행해야 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그만 변수에도 삐걱대고 허둥대는 정부의 모습을 보면, 과연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인지, 플랜B는 존재하는지,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많은 논란이 있는 정책에 대해서도, 강력한 리더쉽으로 정책을 끝까지 수행해서 이뤄낼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고, 끊임 없이 국민들을 설득하는 노력이 있어야 하지만, 너무나 빈약하고 너무 근시안적이라 정부의 정책, 아니 그 이전에 정부의 의지마저 의심스럽다.

또한 진보 대통령이 재임하는 동안에는 유난히도 정치적 분쟁과 논란이 너무나 많고 소란스럽다.
어쩌면 진보라는 단어 자체가 내포하는 의미로, 기존의 것을 허물거나 고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야 하니, 당연히 기성 세력들과의 충돌이 불가피하고, 그 과정에 소란이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또한 위의 문단에서처럼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고 당근과 채찍을 과감하게 사용해야만 이룰 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재임하고 있는 현 상황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시즌2를 보는 듯 기시감이 많이 든다.
앞서 언급한 정치적 분쟁과 논란, 부동산의 폭등과 규제, 대미 대일 외교의 마찰...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는 그것이 처음이라서 그러려니 했는데, 똑같은 문제점들이 반복되는 현 시점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실망감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더구나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그 모든 과정을 똑똑히 지켜보았을 인물이었을 텐데...


너무도 무력하게 무너져가는, 아무 손도 못쓰고 있는 진보 진영의 무력감을 나 또한 너무 아프게 지켜보고 있다.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시절이라면, 대통령을 욕하고 비난하면 끝이었다.
그러면 설령 그게 그들의 책임이나 잘못이 아닐 지언정, 나의 스트레스는 많이 경감되었다.
그걸로도 위로가 되지 않으면 당시의 정부 여당을 욕하고, 보수 언론을 욕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걸로 안되었다.
그렇게 욕하고 비난한다고 내 스트레스가 줄어들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고 쓰리다.
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적어도 진보 대통령들이 내세운 공약들은 정의롭고 바르며, 약자를 보호하고, 억울함이 없이 평등하고,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던가?


.......


진보/좌파는 슬로건이고 구호이며 문장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강력한 메시지를 최대한 짧고 간결한 문장에 담는 데 애썼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 매혹되었다.

사실 그 문장들, 그 자체는 매우 정의롭고 또한 아릅답다.
그 안에 파라다이스가 있고 천국이 있고 지상낙원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 매료되어 사람들이 모여 든다.

모여든 사람들의 힘으로 권력을 잡고 막상 자신들의 낙원을 만들려고 할 때,
여기 저기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지금 있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갈아 엎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
일부는 남기고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
낙원을 건설하는 데 모두가 동참해야 한다는 주장,
낙원을 건걸하는 데 모두가 동참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
천국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주장,
천국은 저러저러해야 한다는 주장,

하나의 슬로건이었지만 꿈꾸는 파라다이스는 제 각각이었거나,
혹은 대충은 같았어도 세분에서는 달랐다.
대략적인 계획은 있었으나 실제 현실에서 적용할 때 발생하는 문제들이 여기 저기서 튀어나왔다.


보수와 우파는 기득권이며, 기존의 체계이다.
이미 그들의 속성으로 만들어져 있는 사회와 시스템에서는 그들의 계획이 잘 맞아 돌아간다.

하지만 진보와 좌파는 소수파이며, 그들은 기존의 시스템과 잘 맞지 않는, 기존의 체계에서는 비표준품인 것이다.
그들의 작업은 맨 바닥부터 시작해야 할 경우도 있으며, 더디고, 많은 비용이 필요하다.
그리고 더 꼼꼼한 계획과 철저한 검토가 필요하다.

어쩌면 이건 진보의 문제나 좌파의 문제가 이니었던 것이다.
기득권에 대해 변화를 요구하는 모든 새로운 세력들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소수파이면서 개혁을 꿈꾼다면, 인재의 풀이 넉넉하지도 못할 터.
필수적으로 이런 개혁 세력의 리더는 월등한 안목과 재능을 가져야하며,
권력을 쥐었을 때, 개혁을 이끌어낼 인재를 다수파로부터 영입하는 능력(카리스마와 유연함)까지 갖추지 않으면 성공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런 리더는 역사에 나올 지도자 정도일 테고...



아쉽지만, 이제는 진보와 좌파에 대한 지지를 끝내야 할 듯 하다.
이제는 더 이상, 이름다운 구호와 슬로건에 속지 않을 것이다.

5년 단임제의 대통령이 현실적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개혁은 매우 일부에 국한된 개혁일 수 밖에 없다.
조금 더 욕시을 낸다 해도, 일부에 국한된 개혁이 큰 불씨가 될 수 있는 그런 개혁인 경우, 혹은 당장은 효과가 없으나 장기적인 안목에서의 개혁 정도가 최선이 아닐까 싶다.

이제 더 이상은 허황된 미사여구와 감언이설에 속지 않고, 계산기와 삼각자로 측정해 보고나서 판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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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조만간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을 예정이다.
벌써 여당과 야당의 선거전쟁은 시작되었다.
프레임 씌우기, 흠집내기, 세 부풀리기, 이합집산, 합종연횡....
내가 아무리 계산하고 측정하고 저울질을 꼼꼼이 한다해도, 내 선택은 결국 지역구의 후보 중 하나를 찍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보들은 모두 미명이고 흐리멍텅하고 유야무야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 듯 할 것이다.
그래야 넓은 지지를 받을 것이고, 그래야 당선이 될 테니까.
내가 아무리 이성적으로 판단하겠다고 생각했어도, 양팔 저울이 한쪽으로 뚜렷하게 기울지는 않을 거라는 뜻이다.
진보/좌파가 속이 빈 강정처럼, 듣기 좋은 말로만 치장하고, 정작 이루어 내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보수/우파는 정의와 평등과 도덕과 양심 이런 가치를 아얘 포기해버린 듯이 행동하지 않는가?
눈앞의 이익과 실적만을 중시하여 장기적인 안목과 영구한 가치를 내버린 것 또한 비난 받아 마땅하지 않을 것인가.
능력이 부족해서 될지는 모르겠지만 성실하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하는 학생과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1등(합격)하겠습니다 하는 무서운 학생 중에 과연 어떤 학생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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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22일 금요일

노력과 성과에 관해서

과연 우리가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얼마나 되는 걸까?

집에서 커피를 직접 볶아서 마시곤 하는데,
처음엔 도통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방법이야 인터넷에 널리고 널렸으니 적절한 시간과 성의을 가진다면 "문장으로 이루어진 방법"은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커피라는 건, 결국은 맛과 향으로 결정되는 것인데
아직까지 인터넷이 맛과 향을 그대로 전달해 줄 수는 없기에, 이 부분들이 매우 모호할 수 밖에 없다.

사실 여러가지 조리방법 중에, 색의 변화, 향기의 변화, 질감의 변화, 맛의 변화에 따라 판단이 필요한 것들은 말이나 문자로 전달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그래서 실습이 필요한 것이고, 스승이 필요한 것이고, 도제가 필요한 것이고, 무형문화재가 필요한 것이다.

이젠 2년 정도 커피를 볶아보니 대략적인 감은 생겼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커피는 내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 볶아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는 맛과 향기의 특성이 존재하더란 것이다.
물론 로스팅을 망쳐버리면 좋은 맛과 향기를 모두 잃을 수도 있기에 나쁘게 바꾸는 것에는 한계가 없는 셈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한계가 나름 명확하다.
그 커피가 원래 가지고 있지 않은 맛과 향기를 나게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더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자 한다면, 더 좋은 커피 생두를 찾아야지, 똑같은 커피 생두에 노력을 더한다고 갑자기 맛이 좋아지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또, 그 커피 생두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 경우에도, 그 노력이 허사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마련이다.
그게 그 커피 생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일 수도 있고, 외부적인 요인이 될 수도 있는데, 노력으로 개선된 장점을 우습게 잡아먹어 버리는 월등한 단점이 부각되는 경우이다.
커피의 경우에는 진한 커피를 위해서 많이 볶으면 향미를 잃고, 향미를 살리기 위해 살짝 볶으면 커피가 가벼워지거나 덜 익은 떫은 맛이 나기 쉽기고 하다.

이처럼 어떤 일의 성과를 내기에는 많은 어려움들이 도사리고 있다.


어쩌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노력이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꾸준히 노력하는 것과, 노력해도 성과가 나오지 않는 이유를 모르니 그냥 포기해버리는 차이를 만드는 정도일 지도 모르겠다.

2019년 11월 21일 목요일

공수처(고위 공직자 범죄 수사처)를 두고 벌이는 싸움 (feat. 어벤저스 시빌워)

어제인가, 자유한국당의 황교안 대표가 단식투쟁을 선언했다.
단식 투쟁을 벌이며 정부에 요구하는 사항은 3가지라고 한다.
1. 지소미아 종료시한 전에 연장 요구
2. 공수처법 추진 철폐
3. 선거법 패스트 트랙 상정 철회
https://news.joins.com/article/23637605

1번의 지소미아 연장에 관한 문제는 한미일의 3국간의 외교적인 협상 카드로서 활용하는 것이기에, 그 문제 하나만을 떼어놓고 옳다 그르다 하기엔 어려운 문제다.
당장에 한미 양국의 방위비 협상 문제가 이슈로 떠오르는 상황이고, 여기에 어떤 식으로든 지소미아 관련 문제도 함께 논의 될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나머지 2번과 3번의 경우에는 국민들과는 하등 관련이 없다.
선거법은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관련되어 있고, 공수처법은 고위 공직자들에 국한된 부분이니 국민들과는 더더욱 관련이 없는 사안이 아닌가.

아무튼, 저 단식투쟁에 관해 얘기하려는게 아니고, 공수처법이라는 것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한다.

아직은 공수처법에 대해 별 관심도 없어서 이리 되건 저리 되건 내 알바 아니라 생각했는데, 대체 뭐길래 단식까지 하면서 저걸 막고 있는지 참 알쏭달쏭하다.
뭔가 내막이 있는걸까?

마블의 영화들 중, 시빌워라는 작품이 있었다.
이게 캡틴 아메리카 시빌워인지, 어벤저스 시빌워인지 모르겠다.
사실 난 마블 만화에 별 관심이 없으니까.
하지만, 이 시빌워의 영화는 안 봤어도 만화는 봤더랬다.
어벤저스의 히어로들이 양편으로 갈라지는 과정, 그 분열과 팽팽한 정당성 시비, 과연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비슷한 영화, 아니 만화로 왓치맨이 있다.
앨런 무어의 왓치맨.
자경단원들의 고뇌와 딜레마들.
왓치맨은 누가 감시하는가? 라는 조롱의 낙서는 또 다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오지맨디아스와 닥터 맨해튼 중 누가 옳은가, 닥터 맨해튼과 로르샤흐(로어세크) 중 누가 옳은가는 끝나지 않을 논쟁거리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왓치맨의 딜레마를 마블에서 가져다 쓴 것이 시빌워가 아닐까 싶다.)

아직 잘은 모르지만, 이 공수처법이라는 걸 두고 싸우는 여야, 혹은 국회와 정부, 검찰과 국회의 대립이 어딘지 모르게 왓치맨과 시빌워의 대립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내가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일수 도 있다.
만약 대의적 명분에서 공수처법이 압도적인 우의를 점하고 있다면 말이다.

그러면 이 문제는 영국의 경제학자인 하이에크과 케인즈의 대립과 비슷해 진다.
거시적인 관점과 원칙적인 관점에서는 하이에크가, 실용적인 측면과 현실적인 대안에서는 케인즈가 우월했다는 식의 대립 말이다.


어떤 식의 대립인지는 좀 더 살펴봐야 할테지만, 양쪽 모두 여론의 힘을 얻어서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기는 어려우므로, 명분으로 정당성을 얻거나, 실제 현실에서의 적용에 대한 효용성 혹은 부작용으로 이해득실을 따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2019년 10월 15일 화요일

반려동물에 대한 모순된 감정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키우는 가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여러가지 사회문제를 야기할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개를 무척 좋아하는데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소위 반려견으로 인한 문제의 해결사로 방송에 자주 출연을 했던 이x종 소장이라는 분은, 문제 행동의 반려견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주어 행동을 자제하도록 훈련을 하는 방식을 주로 취했었다. 이 과정에서 쇠로 된 목줄을 강하게 다루어서 때때로 잔인하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서 강x욱 이라는 분은 반려견의 문제 행동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걸 파악해서 원인을 제거하자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전자의 방법은, 반려견을 훈련시켜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개조(?)시키는 것이었고, 후자의 방법은, 견주의 행동 양식이나 환경을 반려견에 적합하도록 바꾸는 것이었다.

후자의 방법은 어찌보면 주객이 전도된 듯이 보일 수도 있으며, 시간이나 비용이 더 많이 들 수 있지만, 여러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 방법이 반려견에게 더 좋은 방법이고, 반려견이 더 행복해지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쯤 되면, 후자를 택한 강x욱이나 그걸 호응하는 반려견주들이 매우 인정이 넘치고, 동물을 사랑하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건 혹시나 견주들의 이기적인 목적에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그 이기적 목적이란 것은, 반려견의 행복한 모습, 즐거워하는 모습, 그래서 견주를 따르고 견주를 사랑하도록 하려는 목적이며, 그것도 반려견 스스로의 의지로 그러기를 바라는...


대체 이게 무슨 황당한 말이냐 생각할 수도 있는데
약간 빗나간 듯이 보일수도 있으나, 적절한 예가 있다.
일본의 영화 가운데 완전한 사육이라는 영화가 있다.
대략의 줄거리는, 어떤 남성이 마음속으로 흠모하던 젊은 여성을 납치해서 자신의 집에 감금하고 때에 맞춰 식사를 주며 함께 사는 것이다.
그 영화를 제대로 다 봤는지 어쨌는지 결론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남성의 마음이 견주들의 마음과 어딘지 많이 닮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좋아하지만, 나만을 위해 항상 곁에 있어주지는 않을 여성을, 어떻게든 마음을 돌려놓아 자신을 좋아하도록 만들려는...
아마도 그 남성의 최종 목적은, 그 여성이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과 평생을 함께 해 주기를 바랬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런 마음이 생길 때까지만 강제로 구속하고 감금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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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애호가들이나 유기견을 구조하고 보살피는 분들의 마음은 다르리라 생각한다.
이런 분들은 동정심, 자비,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민 등이 먼저일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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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일반적인 애견인들 중 다수는, 내 반려견이 나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는 것, 나와 함께 있어 즐겁고 기뻐하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듯 하다.
그런 마음의 기저에는, 자기의 행복을 타인(반려견)을 통해서 채우려는 욕구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스스로 기뻐하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을 찾지 못해서, 자신의 외부에서 찾는 것 말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이것 또한 자신의 행복을 위한 고도의, 그리고 겉보기에는 꽤 점잖아 보이는, 하나의 전략에 지나지 않지 않겠는가?

견주들이 자신도 이런 부류에 속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반려견이 견주를 신뢰하지 못하고,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반항적인 모습을 보일 때 어떤 마음이 생기는지를 확인함으로써 가능하다.
일종의 배신감, 미움, 화, 슬픔 등이 생긴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견주들은 반려견을 은연중에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사실 이 얘기의 주인공은 나다. 그리고 대부분 내 경험과 내 마음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그리고 지금 그것들을 반성하는 것은 아니다. 반성한다고 없어지지 않을 걸 안다. 단지, 내 마음이 불편해질 때, 왜 그런지 알면 조금은 마음 다스리기가 쉬워진다. 오랫동안 지내던 반려견이 얼마전에 죽었다. 아마 그 때의 슬픔도 어쩌면 같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이제 더 이상 나를 즐겁게 해 줄 댕댕이가 없구나 하는 이기적 마음일지도 모른다.)

2019년 8월 20일 화요일

도덕성의 한계인가, 도덕성의 진화인가

최근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오르면서,
국회에서는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서의 조국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논란이 나오고 있다.
사모펀드에 거액을 투자한 것이나 친인척과의 의심스러운 채권 채무 관계도 그렇지만, 딸에 대한 여러 특혜 정황은 더욱 큰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에 여당도 꽤 당혹해 하는 눈치이고, 언론들도 눈치보기에 급급하다.
보수 언론들이야 이때다 싶어 공격 수위를 한층 끌어 올리고 있는 중이고,
확인할 수 없는 "민심"이나 "여론"이라는 좋은 칼을 꺼내어 휘두르고 있다.

애초에 신문을 잘 보지는 않지만, 우연히 읽게된 모 신문의 사설은...
https://news.joins.com/article/23557497?cloc=joongang|home|opinion

글쎄,
이 사설로도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사실이 무엇인지 대략 알 수 있는데,
꽤 자극적이고 공격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누구 하나의 잘못을 그 세대 혹은 그 지역 혹은 그 성별 등으로 무차별 확대해서 싸잡아 비난하려는 의도가 보여 더 씁쓸하다.
저 사설에서 언급한 "영미권의 베이비 부머인척 하는 그룹"의 사례가 얼마나 일반화된 것인지, 그리고 또 우리와의 공통점을 이을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논설위원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많은 사례를 끌어들여야 한다는 건, 그만큼 자기 확신이 부족하거나 자기의 주장에 자신감이 떨어진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사건들과 그 기사들을 보면서 내가 느낀 우울감은 조금은 달랐다.

소위 도덕적으로 청렴하다고 자칭하던 세력들이 정권을 잡았으나, 까고 보니 그들이 비난하던 대상들과 전혀 다를바가 없는 동류였다...는 이 상황.

그리고 지금까지 그들이 벌인 일련의 정책이라는 것이 적폐 청산이 주된 것이었고, 경제는 조금 뒷걸음질 쳐도 올바른 나라를 세울 것이라 믿고 있었던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누가 누구를 청산할 수 있는지마저 의심스러워 진 것이다.

내가 느낀 우울감은, 결국 인간이 주창하는 도덕과 실천할 수 있는 도덕의 수준은 다르며, 조국 전 민정수석이 보여준 것이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도덕의 한계가 아닐까 하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물론 조국씨의 도덕 수준이 인간의 한계 수준이라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한계가 아닌가 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내 또 다른 희망적인 생각도 들었다.

앞서의 사설에서와 유사하게 소위 386세대의 문제로 한정을 짓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
과거에는 생각 자체도 부도덕하고 그걸 부끄러워 하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의 인식이 발전되어 가면서 많은 부분에서 옳음과 그름에 대한 논의와 비판이 퍼져갔다.
소위 386세대들은 이런 시대적인 변화의 과도기적 상태를 대표하고 있으며, 그래서 의식적인 부분에서는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도덕적이라 생각하지만 실제 행동과 실천은 그 의식을 따르지 못하는 세대일지 모른다.

따라서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더 성숙한 사회가 되고, 시민들의 의식 수준과 행동양식이 조화를 이루는 시점이 온다면 우리의 도덕성은 진정한 발전을 이루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