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견이나 반려묘를 키우는 가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여러가지 사회문제를 야기할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개를 무척 좋아하는데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소위 반려견으로 인한 문제의 해결사로 방송에 자주 출연을 했던 이x종 소장이라는 분은, 문제 행동의 반려견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주어 행동을 자제하도록 훈련을 하는 방식을 주로 취했었다. 이 과정에서 쇠로 된 목줄을 강하게 다루어서 때때로 잔인하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서 강x욱 이라는 분은 반려견의 문제 행동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걸 파악해서 원인을 제거하자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전자의 방법은, 반려견을 훈련시켜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개조(?)시키는 것이었고, 후자의 방법은, 견주의 행동 양식이나 환경을 반려견에 적합하도록 바꾸는 것이었다.
후자의 방법은 어찌보면 주객이 전도된 듯이 보일 수도 있으며, 시간이나 비용이 더 많이 들 수 있지만, 여러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 방법이 반려견에게 더 좋은 방법이고, 반려견이 더 행복해지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쯤 되면, 후자를 택한 강x욱이나 그걸 호응하는 반려견주들이 매우 인정이 넘치고, 동물을 사랑하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건 혹시나 견주들의 이기적인 목적에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그 이기적 목적이란 것은, 반려견의 행복한 모습, 즐거워하는 모습, 그래서 견주를 따르고 견주를 사랑하도록 하려는 목적이며, 그것도 반려견 스스로의 의지로 그러기를 바라는...
대체 이게 무슨 황당한 말이냐 생각할 수도 있는데
약간 빗나간 듯이 보일수도 있으나, 적절한 예가 있다.
일본의 영화 가운데 완전한 사육이라는 영화가 있다.
대략의 줄거리는, 어떤 남성이 마음속으로 흠모하던 젊은 여성을 납치해서 자신의 집에 감금하고 때에 맞춰 식사를 주며 함께 사는 것이다.
그 영화를 제대로 다 봤는지 어쨌는지 결론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남성의 마음이 견주들의 마음과 어딘지 많이 닮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좋아하지만, 나만을 위해 항상 곁에 있어주지는 않을 여성을, 어떻게든 마음을 돌려놓아 자신을 좋아하도록 만들려는...
아마도 그 남성의 최종 목적은, 그 여성이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과 평생을 함께 해 주기를 바랬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런 마음이 생길 때까지만 강제로 구속하고 감금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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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애호가들이나 유기견을 구조하고 보살피는 분들의 마음은 다르리라 생각한다.
이런 분들은 동정심, 자비,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민 등이 먼저일거라 생각한다.
------------------------------------------+
그저 일반적인 애견인들 중 다수는, 내 반려견이 나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는 것, 나와 함께 있어 즐겁고 기뻐하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듯 하다.
그런 마음의 기저에는, 자기의 행복을 타인(반려견)을 통해서 채우려는 욕구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스스로 기뻐하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을 찾지 못해서, 자신의 외부에서 찾는 것 말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이것 또한 자신의 행복을 위한 고도의, 그리고 겉보기에는 꽤 점잖아 보이는, 하나의 전략에 지나지 않지 않겠는가?
견주들이 자신도 이런 부류에 속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반려견이 견주를 신뢰하지 못하고,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반항적인 모습을 보일 때 어떤 마음이 생기는지를 확인함으로써 가능하다.
일종의 배신감, 미움, 화, 슬픔 등이 생긴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견주들은 반려견을 은연중에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사실 이 얘기의 주인공은 나다. 그리고 대부분 내 경험과 내 마음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그리고 지금 그것들을 반성하는 것은 아니다. 반성한다고 없어지지 않을 걸 안다. 단지, 내 마음이 불편해질 때, 왜 그런지 알면 조금은 마음 다스리기가 쉬워진다. 오랫동안 지내던 반려견이 얼마전에 죽었다. 아마 그 때의 슬픔도 어쩌면 같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이제 더 이상 나를 즐겁게 해 줄 댕댕이가 없구나 하는 이기적 마음일지도 모른다.)
2019년 10월 15일 화요일
2019년 8월 20일 화요일
도덕성의 한계인가, 도덕성의 진화인가
최근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오르면서,
국회에서는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서의 조국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논란이 나오고 있다.
사모펀드에 거액을 투자한 것이나 친인척과의 의심스러운 채권 채무 관계도 그렇지만, 딸에 대한 여러 특혜 정황은 더욱 큰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에 여당도 꽤 당혹해 하는 눈치이고, 언론들도 눈치보기에 급급하다.
보수 언론들이야 이때다 싶어 공격 수위를 한층 끌어 올리고 있는 중이고,
확인할 수 없는 "민심"이나 "여론"이라는 좋은 칼을 꺼내어 휘두르고 있다.
애초에 신문을 잘 보지는 않지만, 우연히 읽게된 모 신문의 사설은...
https://news.joins.com/article/23557497?cloc=joongang|home|opinion
글쎄,
이 사설로도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사실이 무엇인지 대략 알 수 있는데,
꽤 자극적이고 공격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누구 하나의 잘못을 그 세대 혹은 그 지역 혹은 그 성별 등으로 무차별 확대해서 싸잡아 비난하려는 의도가 보여 더 씁쓸하다.
저 사설에서 언급한 "영미권의 베이비 부머인척 하는 그룹"의 사례가 얼마나 일반화된 것인지, 그리고 또 우리와의 공통점을 이을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논설위원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많은 사례를 끌어들여야 한다는 건, 그만큼 자기 확신이 부족하거나 자기의 주장에 자신감이 떨어진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사건들과 그 기사들을 보면서 내가 느낀 우울감은 조금은 달랐다.
소위 도덕적으로 청렴하다고 자칭하던 세력들이 정권을 잡았으나, 까고 보니 그들이 비난하던 대상들과 전혀 다를바가 없는 동류였다...는 이 상황.
그리고 지금까지 그들이 벌인 일련의 정책이라는 것이 적폐 청산이 주된 것이었고, 경제는 조금 뒷걸음질 쳐도 올바른 나라를 세울 것이라 믿고 있었던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누가 누구를 청산할 수 있는지마저 의심스러워 진 것이다.
내가 느낀 우울감은, 결국 인간이 주창하는 도덕과 실천할 수 있는 도덕의 수준은 다르며, 조국 전 민정수석이 보여준 것이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도덕의 한계가 아닐까 하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물론 조국씨의 도덕 수준이 인간의 한계 수준이라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한계가 아닌가 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내 또 다른 희망적인 생각도 들었다.
앞서의 사설에서와 유사하게 소위 386세대의 문제로 한정을 짓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
과거에는 생각 자체도 부도덕하고 그걸 부끄러워 하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의 인식이 발전되어 가면서 많은 부분에서 옳음과 그름에 대한 논의와 비판이 퍼져갔다.
소위 386세대들은 이런 시대적인 변화의 과도기적 상태를 대표하고 있으며, 그래서 의식적인 부분에서는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도덕적이라 생각하지만 실제 행동과 실천은 그 의식을 따르지 못하는 세대일지 모른다.
따라서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더 성숙한 사회가 되고, 시민들의 의식 수준과 행동양식이 조화를 이루는 시점이 온다면 우리의 도덕성은 진정한 발전을 이루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국회에서는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서의 조국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논란이 나오고 있다.
사모펀드에 거액을 투자한 것이나 친인척과의 의심스러운 채권 채무 관계도 그렇지만, 딸에 대한 여러 특혜 정황은 더욱 큰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에 여당도 꽤 당혹해 하는 눈치이고, 언론들도 눈치보기에 급급하다.
보수 언론들이야 이때다 싶어 공격 수위를 한층 끌어 올리고 있는 중이고,
확인할 수 없는 "민심"이나 "여론"이라는 좋은 칼을 꺼내어 휘두르고 있다.
애초에 신문을 잘 보지는 않지만, 우연히 읽게된 모 신문의 사설은...
https://news.joins.com/article/23557497?cloc=joongang|home|opinion
글쎄,
이 사설로도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사실이 무엇인지 대략 알 수 있는데,
꽤 자극적이고 공격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누구 하나의 잘못을 그 세대 혹은 그 지역 혹은 그 성별 등으로 무차별 확대해서 싸잡아 비난하려는 의도가 보여 더 씁쓸하다.
저 사설에서 언급한 "영미권의 베이비 부머인척 하는 그룹"의 사례가 얼마나 일반화된 것인지, 그리고 또 우리와의 공통점을 이을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논설위원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많은 사례를 끌어들여야 한다는 건, 그만큼 자기 확신이 부족하거나 자기의 주장에 자신감이 떨어진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사건들과 그 기사들을 보면서 내가 느낀 우울감은 조금은 달랐다.
소위 도덕적으로 청렴하다고 자칭하던 세력들이 정권을 잡았으나, 까고 보니 그들이 비난하던 대상들과 전혀 다를바가 없는 동류였다...는 이 상황.
그리고 지금까지 그들이 벌인 일련의 정책이라는 것이 적폐 청산이 주된 것이었고, 경제는 조금 뒷걸음질 쳐도 올바른 나라를 세울 것이라 믿고 있었던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누가 누구를 청산할 수 있는지마저 의심스러워 진 것이다.
내가 느낀 우울감은, 결국 인간이 주창하는 도덕과 실천할 수 있는 도덕의 수준은 다르며, 조국 전 민정수석이 보여준 것이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도덕의 한계가 아닐까 하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물론 조국씨의 도덕 수준이 인간의 한계 수준이라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한계가 아닌가 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내 또 다른 희망적인 생각도 들었다.
앞서의 사설에서와 유사하게 소위 386세대의 문제로 한정을 짓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
과거에는 생각 자체도 부도덕하고 그걸 부끄러워 하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의 인식이 발전되어 가면서 많은 부분에서 옳음과 그름에 대한 논의와 비판이 퍼져갔다.
소위 386세대들은 이런 시대적인 변화의 과도기적 상태를 대표하고 있으며, 그래서 의식적인 부분에서는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도덕적이라 생각하지만 실제 행동과 실천은 그 의식을 따르지 못하는 세대일지 모른다.
따라서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더 성숙한 사회가 되고, 시민들의 의식 수준과 행동양식이 조화를 이루는 시점이 온다면 우리의 도덕성은 진정한 발전을 이루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2019년 8월 18일 일요일
[영화] 스토커(Stalker) 1979,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 |
| Stalker, IMDB |
어쩌다 이 영화를 만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왜 이 영화를 다운로드 받았던건지, 나중에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받아둔 채로 몇달이 지난 후에 보게 되었다.
이 영화에 대해 뭐라고 얘기해야 할까.
궁금해서 IMDB를 찾아 보고, 평점도 나중에야 보게되었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라는 감독에 대해서도 찾아보고, 그 명성도 후에야 알게 되었다.
시간이 꽤나 지나서인지, 일부에선 비판적인 시각도 보일 정도...
느낌은 축축한 영화.
온통 그레이의 낮게 깔린 음습함.
뭔지 모를 상징의 범람.
모르는 것 투성이의 혼란함으로 시작해서 차츰 조금씩 뭔지 배경을 어렴풋이 알 즈음에 그냥 끝나버린 영화. 그래서 끝나고도 남는 혼란스러움과 무거움.
양 옆으로 뭔가가 나를 옥죄어 오는 듯한 화면들. 그래서 보는 내내 어떤 답답함.
(영화에 대해선 문외한이지만, 이 영화에서 보이는 자주 보이는 장면은, 화면 안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장면들, 문 하나를 지나 그 뒤의 공간, 세 남자가 만나는 바의 장면이 그렇고,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곳에 도착하기 직전의 하얀 방 = 전화기가 울리는 방이 그렇고...)
연극을 보진 않았지만, 어딘지 <고도를 기다리며>와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싶고
원작을 읽어 봐야 영화의 의미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019년 8월 13일 화요일
Before Trump & After Trump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기원전(BC, Before Chist), 기원후 (AD, Anno Domini)를 나누어 사용해 왔다.
언제, 누구에 의해 이런 표기를 사용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예수의 존재가 인류에게 (특히 서양에서) 그 의미가 크기 때문에 오랜 기간동안 사용되지 않았을까 싶다.
요즘 세계의 정세를 보고 있노라면, 예전에 극심했다던 냉전시대가 이 정도였을까 싶게 너무도 야만적(?)인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현상을 어느 누구 한사람의 책임으로 돌리는 건 너무 무책임하고 지나치게 단순화된 판단이라 생각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미국의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를 이 논의에서 뺄 수는 없을 것이다.
미중간의 무역전쟁, 미국의 이민 제한 정책, 동맹국에 대한 이익 우선 정책 등을 보노라면, 어서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려질 정도이다.
하지만 이런 막무가내식 이익 탐식의 경향이 단순히 트럼프의 개인적 성향때문이라 생각한다면 그 또한 대단한 착각이 아니겠는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트럼의 그런 행보는 다분히 미국 국민의 바람을 반영했다고 봐야 할 것이며, 중국이나 일본의 지도자들이 별로 다르지 않은 자국의 이익 추구 또한 비슷한 경향으로 봐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런 경향은 아주 서서히 증가해 왔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그 세력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섰을 때에도 인간의로써의 미덕을 지킴으로써 유지되어 왔던 문명화된 세계로서의 질서는, 어느 한 순간에 탄성한계를 넘어선 듯이 폭발해 버린 듯이 보였다.
그리고 그 기폭제는 도널드 트럼프라는 미국의 대통령으로 상징되어도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이라는 위엄이나 자제력은 찾아보기 어렵고, 자본주의에 완전히 절여져 물질만능을 신으로 섬기고 있는 듯이 보이는 지도자.
트럼프의 행동은 그동안 문명화된 인간들이 자기 안에 숨겨왔던 야만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더 이상 부끄러움 따위는 없고, 타인의 비난이나 충고따위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방식이 아주 자연스럽게 보인다.
과거의 친구나 의리나 신의도 없다.
물고 물리는 야생의 속성만이 남았다.
강한 놈이 모든 걸 가지며, 약한 자는 나름의 생존 방식을 모색해야만 한다.
이제 세월이 얼마나 지나면 인류가 깨달을 지 모르겠지만,
예수 탄생 2000년이 조금 지난 즈음에 세상은 크나 큰 변화를 맞아하게 되었으며,
이 시기를 기준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듯 하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그 시기를 기준으로 BT와 AT, 즉 Before Trump와 After Trump로 부를지 모르겠다.
언제, 누구에 의해 이런 표기를 사용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예수의 존재가 인류에게 (특히 서양에서) 그 의미가 크기 때문에 오랜 기간동안 사용되지 않았을까 싶다.
요즘 세계의 정세를 보고 있노라면, 예전에 극심했다던 냉전시대가 이 정도였을까 싶게 너무도 야만적(?)인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현상을 어느 누구 한사람의 책임으로 돌리는 건 너무 무책임하고 지나치게 단순화된 판단이라 생각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미국의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를 이 논의에서 뺄 수는 없을 것이다.
미중간의 무역전쟁, 미국의 이민 제한 정책, 동맹국에 대한 이익 우선 정책 등을 보노라면, 어서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려질 정도이다.
하지만 이런 막무가내식 이익 탐식의 경향이 단순히 트럼프의 개인적 성향때문이라 생각한다면 그 또한 대단한 착각이 아니겠는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트럼의 그런 행보는 다분히 미국 국민의 바람을 반영했다고 봐야 할 것이며, 중국이나 일본의 지도자들이 별로 다르지 않은 자국의 이익 추구 또한 비슷한 경향으로 봐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런 경향은 아주 서서히 증가해 왔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그 세력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섰을 때에도 인간의로써의 미덕을 지킴으로써 유지되어 왔던 문명화된 세계로서의 질서는, 어느 한 순간에 탄성한계를 넘어선 듯이 폭발해 버린 듯이 보였다.
그리고 그 기폭제는 도널드 트럼프라는 미국의 대통령으로 상징되어도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이라는 위엄이나 자제력은 찾아보기 어렵고, 자본주의에 완전히 절여져 물질만능을 신으로 섬기고 있는 듯이 보이는 지도자.
트럼프의 행동은 그동안 문명화된 인간들이 자기 안에 숨겨왔던 야만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더 이상 부끄러움 따위는 없고, 타인의 비난이나 충고따위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방식이 아주 자연스럽게 보인다.
과거의 친구나 의리나 신의도 없다.
물고 물리는 야생의 속성만이 남았다.
강한 놈이 모든 걸 가지며, 약한 자는 나름의 생존 방식을 모색해야만 한다.
이제 세월이 얼마나 지나면 인류가 깨달을 지 모르겠지만,
예수 탄생 2000년이 조금 지난 즈음에 세상은 크나 큰 변화를 맞아하게 되었으며,
이 시기를 기준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듯 하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그 시기를 기준으로 BT와 AT, 즉 Before Trump와 After Trump로 부를지 모르겠다.
2019년 7월 9일 화요일
인류는 진화할 수 있을까
찰스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의 의미와는 다른 진화가 가능할까?
전쟁을 종식하고 영구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으며,
인종간 차별, 성(性) 차별, 국가와 민족간의 차별, 종교에 따른 차별, 능력과 장애에 따른 차별을 없애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 수 있으며,
우리와 저들, 나와 너의 벽을 무너뜨리고 모두가 자기인 듯, 모두가 타인인 듯 살 수 있으며,
자연과 생명, 그 모두를 품은 지구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소박한것에 만족하며 일원으로써의 소임에 충실하게 살 수 있을까?
찰스 다윈의 진화론의 핵심은 "다양성의 확대를 통한 환경에의 적응"이라는, 다분히 생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양성의 확대를 위해서, 인간은 최대한 나와는 다른 상대를 찾아 짝짓기를 시도하려는 성향이 있으며, 또 최대한 다양한 상대와 짝짓기를 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놀랍게도 이 욕구는 대부분의 인간 사회의 제도에서 금기시 되고 있다!!)
이렇듯, 자연에서 진행되고 있는 찰스 다윈적 진화와 인간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을 향한 진화는 아주 다른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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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에 들어서면서 (혹은 6월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아베 총리는 한국에 대한 수출품목 규제를 선언했다.
한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생산되고 있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에 핵심으로 사용되는 필수품이라 타격이 적지 않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으며, 정부는 애써 침착한 듯이 행동하고 있지만, 각종 뉴스에서는 충격적, 당황, 긴장, 비난의 표정들이 보이고 있다.
소식을 접한 한국인들은 일본에 대한 감정적인 적대감을 드러내고,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작은 "보복"들을 꾸미고 있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인 셈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가 예견되었다는 식의 보도를 하고 있는데, 지난 수년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 인공섬의 강제 징용 노동 문제 -영화 군함도로 제작- 등으로 국내에서 일본에 대한 반감은 끊이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던 중, 박근혜 전 대통령이 갑자기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꺼내더니,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치유 재단을 설립하여 일본에서 기금을 납부하기로 했다. 하지만 위안부 피해자들 중 다수가 자신들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한일 정부가 임의로 처리한 것이라며 반발했다.
이 기사를 들었을 당시에도 나는 매우 분노했는데, 몇년동안 정의와 진실을 앞세워서 일본을 비난하던 정부가 하루 아침에 돌변해서 일본과 웃으며 악수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아도 한참을 속았구나, 정부가 국민들을 꼭두각시처럼 뒤에서 조종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 뜬금없고 국민 정서와는 동떨어진 정책이, 오히려 일본과의 관계를 더 돌이키기 어려운 수렁으로 빠뜨렸고 어쩌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에도 일조하지 않았나 싶다. (국민들의 신뢰를 져버린 하나의 실정이었다는 점에서)
문재인 정부에 들아와서는 온갖 적폐를 청산한다는 작업들이 진행되었는데, 그 가운데 일본 강제 징용 노동자들에 대한 배상 여부를 가르는 재판이 박근혜 정부 당시에 대법원에서 진행되었는데, 여기에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통해 부당하게 재판에 개입하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까지 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고 사법부의 개혁을 정당화시키는 좋은 명분이 되었다.
이 사태로 말미암아 결국은 강제 징용 노동자에 대한 배상이 정당하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졌고, 해당 기업들이 자진 배상하지 않아 국내에 출자한 법인의 자산을 강제로 매각까지 종용하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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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얼마나 비이성적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은 바로 이 시점이다.
과연 일본이 왜 분노의 극약 처방을 했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거기에 감정적인 대응을 하는 것이 이후에 얼마나 부끄러워할 행동인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30년 넘도록 정광태의 독도는 우리땅 노래 가사를 외우고 있으니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말하는 게 과연 얼마나 정당한가?
누군가 너를 좃같이 대하거든, 좃같이 대할 이유를 만들어 줘라.
짐승에겐 몽둥이가 약이다.
이런 말이 분노한 대중에게는 속시원한 속풀이는 될 수 있지만, 그게 진짜 행동으로 표출되는 순간에 우리는 그런 좃같은 인간이 되는 것이며, 인간을 짐승처럼 패는 무뢰배 같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지킬 건 지키고 배워서 아는 건 행동으로 옮기고, 설령 마지막 순간이라고 해도 밑바닥 본능은 드러내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위에 개인적으로 일본인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조금은 이해가 쉬울텐데, 그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까?
아베가 좃같이 행동한다고 해서, 그 친분있는 사람이 좃같이 변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오히려 아베가 좃같이 행동한다고해서, 수십년 친분이 있던 사람을 아베로 여기고 분노를 표출하는 그 사람이 진정 좃같은 사람 아니겠는가.
아마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어떤 식으로 해결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상처는 깊이 남을테고, 그 트라우마도 오래 갈테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헤쳐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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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문단에서 우리가 비 이성적이라고 했던 건 사실 나 자신에게 하는 소리였다.
왜냐하면 나도 분노했으니까.
하지만 몰랐다.
왜 아베가 그런 좃같은 짓을 저질렀는지.
그들의 입장에선 뭐가 억울하고 답답했는지.
그리고 솔직히 헷갈렸다.
매번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에 맺었던 한일 청구권 협정이 어쩌구 하는데, 그에 대해서는 무슨 어두운 기억 마냥 누구하나 제대로 설명해 주지도 않고 있는지.
느낌으로는 대충,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에게 지난 2차 대전 당시의 침탈에 대한 배상으로 얼마를 받고 모든 문제에 대해 퉁치기로 했나보다...정도였다.
그런데 자꾸 위안부 문제 꺼내면서 여기 저기에 소녀상 세우고, 거기에 강제 징용 노동 배상하라고 하면서 민간 기업의 자산까지 압류하려고 하니까 욱 했던 거 아닌가...
그럼 왜 판결은 그랗게 난 걸까?
강제 징용 노동의 문제 자체가 한일 청구권 협정 당시에는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문제라, 당시의 협정에는 포함되지 않았기에 새로이 판결을 내린 것이라는 설명이다.
한일 청구권 협정이라는 게 대체 어느 정도까지의 범위를 가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논란이 많을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에상이 가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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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대립과 분열
국가와 민족간의 분쟁과 반목
비 이성적인 감정의 분출과 소모
맨 처음에 언급했던, 인간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과는 동떨어진 모습이다.
조금이라도 달라진 점이 있을까?
어쩌면...있을지도 모르겠다.
찰스 다윈적 진화는 다양성의 확대이고, 이 다양성은 서로 다른 개체간의 짝짓기에 의해 발현되며, DNA를 통해 세대간에 전파가 됨으로써 유지된다.
찰스 다윈적 진화는 시간이 지날 수록 인류를 더 다양하게 만들 것이므로 개체들간의 이질감은 더 커질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분열이다. 엔트로피의 상승이고 자유도의 폭발이다.
대립과 분열, 나누고 떨어지고 구분한다.
지금의 세계도 그렇다. 소비에트 연방이 분화되었고, 다민족 국가에서의 독립 요구는 더 커진다.
하지만 인간이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를 위한 인간의 진화는 오히려 그 반대다.
찰스 다윈적 진화를 거스르는 방향이다.
시간이 지날 수록 더 어려워지는 일이다.
더욱더 이를 힘들게 많드는 결정적인 요인은, 세대간 전파가 안된다는 점이다.
인간이 꿈꾸는 세계는 개별 인간들이 꿈꾸는 세계의 총합이고, 개별 인간들이 꿈꾸는 세계는 각자의 노력과 고민 숙고의 결과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 새로 태어난 개체는 처음부터 이 과정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
다람쥐 챗바퀴 돌 듯, 모든 개체들이 동일한 노력을 하지만, 나아지는 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나마 이 노력을 조금은 쉽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건 "교육"이다.
아마도 수십세대 이상은 "무엇"을 교육하는 가에 대해 고민할 것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이다.
교육의 효율성, 그래서 세대를 거쳐감에 따라 더 효율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방법.
첫번째 세대간의 교육이 1의 효율을 가졌다면, 두번째 세대간의 교육에는 1.1의 효율이 나타날 수 있는 방법이 나와야 한다.
이제는 교육의 효율이 발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나타나야 하고, 이건 교육 방법의 메타, 혹은 교육 방법론 자체를 발전시킬 프레임에 대한 고민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 그 때에는 인간이 꿈꾸는 방식의 진화가 언제쯤 실현될 지 예측이라도 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아마도 우리는 지금 "무엇"을 교육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수준이지만, 그 "무엇" 조차도 아주 근시안적으로 선택되었다는 걸 감안하다면...)
2019년 6월 28일 금요일
긍정의 뇌 - 순한 맛
긍정의 뇌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어딘가에 독후감이나 요약을 기록했을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 어딘지 저 책의 저자가 직면한 상황과 닮은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저자는 뇌출혈이 일어난 당시와 그 후의 일들을 나름대로 세세히 묘사했다.
그리고 그런 비극적(!)인 상황에서 맞아하게 되는 특이한 경험들을 매우 매력적으로 묘사했는데, 자기와 타인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저하되면서 타인과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한 체험이나,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인지력이 상실되면서 새롭게 보이는 주변의 세상들이 있었던 듯 했다.
물론 말을 하거나 글을 읽거나 자신의 몸을 생각대로 움직이는 능력도 같이 저하되면서 겪게되는 어려움도 함께 묘사했었다.
그게 사실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저자는 마지막에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수술을 하게 되면 예전과 같은 상황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게 되면 새롭게 겪었던 경험을 다시는 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에 대한 딜레마였던 것 같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좀 어이없는 고민이지만, 겪어 보지 않고서야...
꽤 오랜시간 동안에 걸쳐, 나에게 일어난 변화는 매우 크다고 느꼈다.
큰 변화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났기에, 변화를 깨달은 건 시간이 많이 지난 후였다.
그 변화란 것은,
- 거의 모든 일에 대한 욕구가 현저하게 감소했다는 것.
- 매사가 귀찮아져서 어지간하면 자꾸 미루고 미루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끝내게 된다.
- 과거의 일들이 문득문득 떠오르는데, 지금까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일들도 많다.
- 그리고 그 일들에 대한 원인과 후회가 더 크고 명확하게 보인다.
- 두려움이 많아졌다.
- 그 두려움은 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많았다.
- 그리고 그런 두려움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데 많은 장애가 된다.
- 이런 두려움은 타인을 나처럼 생각하는 마음이 더 켜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 나에 대해서 더 객관적이 되었다. 자존심은 줄어들고 고집도 약해지고 화도 덜 낸다.
- 애초에 인생이나 삶에 대해 애착이 크지 않았었기에, 이런 변화가 더해져서 아주 쉽게 놓아버릴 수 있는 준비가 된 거 같다.
그래도 산 입이라 풀칠은 해야 하니 걱정이 생기긴 한다.
과연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다고 굶어서 죽을 수 있을까.
죽지도 못하고 아프기만 하면 어쩔까.
자고 일어났는데, 갑자기 모든 걸 잊어버려서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허리나 다리가 아파서 도저히 움직일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할까?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보면 결국은 기운을 내서 일어나야 한다는 건데, 그러고 싶은 욕구마저 바닥이 난 상태.
곰곰 생각하고 몇가지 알아보고 하니, 지금 먹고 있는 약으로 인한 부작용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려움증 때문에 항히스타민제를 주기적으로 복용하는데, 그 약의 부작용 가운데 내가 겪고 있는 증상은, 소화장애, 발기부전, 권태감, 피로, 시력감소...
아주 작은 약, 작은 효과, 작은 부작용, 하지만 오랜 시간 복용으로 누적된 부작용은 돌이키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사실, 약에 의한 부작용으로만 현재의 나를 설명할 수는 없다.
어쩌면 약에 의한 부작용은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많은 부분들이 일치하고 있어 의심을 해 볼만한 가치가 있으며,
이 약을 끊는 것 만으로도 애초의 상태로 회복이 가능하다면 정말 해 볼만하지 않겠는가.
제목에서 언급한 긍정의 뇌 이야기가 어쩌다 다른쪽으로 빠진 것 같은데, 그건 아니다.
막상 약을 끊고 면역력을 키우기 위한 다른 방법을 고민하려다보니 쓸데 없는 고민이 하나 생겼다.
지금의 상태가 썩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일부는 내가 전에 경험허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 줬다. 타인에 대한 이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조금은 여유롭고 인내심을 갖는 것, 세상에 대한 감사한 마음.
내가 예전의 상태로 돌아간다면 이런 것을 잃어버리진 않을까?
그랬었지 하는 기억이야 남아 있을테지만, 다시는 똑같은 자리에서 바라볼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이런 쓰잘데 없는 고민 때문에 순한 맛의 긍정의 뇌라는 제목을 지었던 것이다.
P.S.
긍정의 뇌 저자는 망설임이 있었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고,
그래서 책을 써서 내가 읽게 되었다.
어딘가에 독후감이나 요약을 기록했을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 어딘지 저 책의 저자가 직면한 상황과 닮은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저자는 뇌출혈이 일어난 당시와 그 후의 일들을 나름대로 세세히 묘사했다.
그리고 그런 비극적(!)인 상황에서 맞아하게 되는 특이한 경험들을 매우 매력적으로 묘사했는데, 자기와 타인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저하되면서 타인과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한 체험이나,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인지력이 상실되면서 새롭게 보이는 주변의 세상들이 있었던 듯 했다.
물론 말을 하거나 글을 읽거나 자신의 몸을 생각대로 움직이는 능력도 같이 저하되면서 겪게되는 어려움도 함께 묘사했었다.
그게 사실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저자는 마지막에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수술을 하게 되면 예전과 같은 상황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게 되면 새롭게 겪었던 경험을 다시는 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에 대한 딜레마였던 것 같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좀 어이없는 고민이지만, 겪어 보지 않고서야...
꽤 오랜시간 동안에 걸쳐, 나에게 일어난 변화는 매우 크다고 느꼈다.
큰 변화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났기에, 변화를 깨달은 건 시간이 많이 지난 후였다.
그 변화란 것은,
- 거의 모든 일에 대한 욕구가 현저하게 감소했다는 것.
- 매사가 귀찮아져서 어지간하면 자꾸 미루고 미루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끝내게 된다.
- 과거의 일들이 문득문득 떠오르는데, 지금까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일들도 많다.
- 그리고 그 일들에 대한 원인과 후회가 더 크고 명확하게 보인다.
- 두려움이 많아졌다.
- 그 두려움은 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많았다.
- 그리고 그런 두려움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데 많은 장애가 된다.
- 이런 두려움은 타인을 나처럼 생각하는 마음이 더 켜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 나에 대해서 더 객관적이 되었다. 자존심은 줄어들고 고집도 약해지고 화도 덜 낸다.
- 애초에 인생이나 삶에 대해 애착이 크지 않았었기에, 이런 변화가 더해져서 아주 쉽게 놓아버릴 수 있는 준비가 된 거 같다.
그래도 산 입이라 풀칠은 해야 하니 걱정이 생기긴 한다.
과연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다고 굶어서 죽을 수 있을까.
죽지도 못하고 아프기만 하면 어쩔까.
자고 일어났는데, 갑자기 모든 걸 잊어버려서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허리나 다리가 아파서 도저히 움직일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할까?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보면 결국은 기운을 내서 일어나야 한다는 건데, 그러고 싶은 욕구마저 바닥이 난 상태.
곰곰 생각하고 몇가지 알아보고 하니, 지금 먹고 있는 약으로 인한 부작용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려움증 때문에 항히스타민제를 주기적으로 복용하는데, 그 약의 부작용 가운데 내가 겪고 있는 증상은, 소화장애, 발기부전, 권태감, 피로, 시력감소...
아주 작은 약, 작은 효과, 작은 부작용, 하지만 오랜 시간 복용으로 누적된 부작용은 돌이키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사실, 약에 의한 부작용으로만 현재의 나를 설명할 수는 없다.
어쩌면 약에 의한 부작용은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많은 부분들이 일치하고 있어 의심을 해 볼만한 가치가 있으며,
이 약을 끊는 것 만으로도 애초의 상태로 회복이 가능하다면 정말 해 볼만하지 않겠는가.
제목에서 언급한 긍정의 뇌 이야기가 어쩌다 다른쪽으로 빠진 것 같은데, 그건 아니다.
막상 약을 끊고 면역력을 키우기 위한 다른 방법을 고민하려다보니 쓸데 없는 고민이 하나 생겼다.
지금의 상태가 썩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일부는 내가 전에 경험허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 줬다. 타인에 대한 이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조금은 여유롭고 인내심을 갖는 것, 세상에 대한 감사한 마음.
내가 예전의 상태로 돌아간다면 이런 것을 잃어버리진 않을까?
그랬었지 하는 기억이야 남아 있을테지만, 다시는 똑같은 자리에서 바라볼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이런 쓰잘데 없는 고민 때문에 순한 맛의 긍정의 뇌라는 제목을 지었던 것이다.
P.S.
긍정의 뇌 저자는 망설임이 있었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고,
그래서 책을 써서 내가 읽게 되었다.
2019년 5월 26일 일요일
관계의 위선
널리 퍼져 있는 x톡
특히 그 단체로 이야기하는 소위 단톡방의 오글거리는 위선은 볼 때마다 나를 좌절하게 만든다.
일정한 친분의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긴 하지만, 나와 그 구성원들과의 관계가 모두 같지 않듯이, 그들이 나머지 구성원들과의 관계가 동등하지도 않을텐데, 어떻게 그들이 나누는 대화와 그 반응들은 한결같은지...
누군가의 자랑거리같은 화제가 올라오면 칭찬과 축하, 그리고 언제나 똑같은 이모티콘들.
과연 그게 그들의 진심인건지, 실제로 만나면 모두가 실제로 할 수 있는 말들을 하는 것인지...
한편으로 보자면, 세상 사람이 모두 이와 같다면 미움도 증오도 없는 평화와 사랑과 믿음 뿐인 낙원일테지만, 어째서 내겐 그게 좋게 보아도 형식적인 인사치레이며 나쁘게 보면 본심을 숨긴 위선으로 보이는건지...
단톡방에서는 이렇듯 화목하고 행복하기만 한 듯이 하하호호하고 있지만, 정작 현실에서 만나면 안색이 싹 바뀌는 것은 아닐지...
내가 아무래도 많이 꼬였나 보다.
내가 생각해봐도, 그게 싫으면 마음에 있는대로 마음대로 그대로 얘기하는 게 좋겠는가?
- 따지고 들면 자랑할만도 못한거 아니냐,
- 겉보기만 그렇고 속은 반대 아니냐,
- 내가 듣기론 아니라던데,
- 지금은 몰라도 나중엔 후회한다
같은 악담들을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단톡방에서 꼬치꼬치 캐물어서 갑분싸 만드는 것도 좋은 게 아닐테고,
가만이나 있으면 중간이나 갈 일에 공연히 딴지 걸어 미운털 박힐 필요도 없으니,
적당히 분위기에 장단 맞춰주는 것이 제일 좋은 방편이지 싶다.
(읽씹 안읽씹 또한 예의가 아니라고 하니 뭐든 대답은 해야만 하니까...)
이러고보면, 단톡방의 위선처럼 보이거나 오글거리는 반응들 또한 각자가 가지고 있는 형식적인 반응이 대부분이 아닐까.
특히 그 단체로 이야기하는 소위 단톡방의 오글거리는 위선은 볼 때마다 나를 좌절하게 만든다.
일정한 친분의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긴 하지만, 나와 그 구성원들과의 관계가 모두 같지 않듯이, 그들이 나머지 구성원들과의 관계가 동등하지도 않을텐데, 어떻게 그들이 나누는 대화와 그 반응들은 한결같은지...
누군가의 자랑거리같은 화제가 올라오면 칭찬과 축하, 그리고 언제나 똑같은 이모티콘들.
과연 그게 그들의 진심인건지, 실제로 만나면 모두가 실제로 할 수 있는 말들을 하는 것인지...
한편으로 보자면, 세상 사람이 모두 이와 같다면 미움도 증오도 없는 평화와 사랑과 믿음 뿐인 낙원일테지만, 어째서 내겐 그게 좋게 보아도 형식적인 인사치레이며 나쁘게 보면 본심을 숨긴 위선으로 보이는건지...
단톡방에서는 이렇듯 화목하고 행복하기만 한 듯이 하하호호하고 있지만, 정작 현실에서 만나면 안색이 싹 바뀌는 것은 아닐지...
내가 아무래도 많이 꼬였나 보다.
내가 생각해봐도, 그게 싫으면 마음에 있는대로 마음대로 그대로 얘기하는 게 좋겠는가?
- 따지고 들면 자랑할만도 못한거 아니냐,
- 겉보기만 그렇고 속은 반대 아니냐,
- 내가 듣기론 아니라던데,
- 지금은 몰라도 나중엔 후회한다
같은 악담들을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단톡방에서 꼬치꼬치 캐물어서 갑분싸 만드는 것도 좋은 게 아닐테고,
가만이나 있으면 중간이나 갈 일에 공연히 딴지 걸어 미운털 박힐 필요도 없으니,
적당히 분위기에 장단 맞춰주는 것이 제일 좋은 방편이지 싶다.
(읽씹 안읽씹 또한 예의가 아니라고 하니 뭐든 대답은 해야만 하니까...)
이러고보면, 단톡방의 위선처럼 보이거나 오글거리는 반응들 또한 각자가 가지고 있는 형식적인 반응이 대부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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