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우한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진 코로나 바이러스, 올해 음력 설을 앞두고 발생하기 시작한 이 바이러스는 [우한 바이러스]로 불리다가, WHO에서 공식 명칭으로 COVID-19 로 지정하였고, [코로나 바이러스 19]로 불리고 있다.
아직까지도 그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으며, 여전히 확진자와 사망자가 늘어나고 있는 중이다.
바로 몇해 전에 발생했던 MERS나 SARS에 비해서 더 치명적이라는 점만은 확실해 보인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음에도 어이없게 전파된 지역 감염자에 의해 방역망은 허물어졌고, 이 감염자는 수퍼 전파자가 되어 대구 지역 일대를 초토화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의 노력이 헛되이 무너졌음은 물론이고, 호미로 막던 걸 가래로 막아야 하는 상황이며, 이제는 사실 상, 전 국민이 발병 의심자가 되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우려마저 생기고 있는 실정이다.
가만히 이 상황을 보고 있노라니, 일본의 애니메이션인 에반게리온이 떠 올랐다.
"사도(使徒)"라는 정체불명의 파괴자가 지속적으로 출현하여 지구와 인류를 위협하는 것인데, 에반게리온이라 부르는 거대 로봇과 파일럿이 매번 죽을 위기를 넘기면서 사도를 제압하곤 한다.
하나의 사도를 제압하고 나면, 로봇이나 파일럿이 크게 부상 당하고 파괴되는 일은 일상적인 일이고, 얼마 지난지 않아 또 다른 사도가 출현하는데, 앞선 사도보다 더 강력하고 뛰어나기에 상황은 점점 암울해져 간다....
마치 우리가 겪고 있는 바이러스의 공포도 이와 비슷하지 않나 싶다.
새로운 바이러스의 출현, 공포...
가까스로 치료제 개발...
또 다른 더 강력한 바이러스 출현.... 기존의 치료제는 무쓸모...
....
하기사, 많은 어린이 만화들도 다 그랬다.
드래곤볼이야말로 점점 더 강해지는 적들과 주인공들, 그리고 그 규모까지 어마어마해져서, 급기야는 선을 넘었다고 욕먹기까지 하는 상황이고,
몇해전에 영화화 되었다는 퍼시픽림도 비슷한 상황들의 전개...
다시 현실로 돌아와 보면,
질병이나 바이러스 뿐 아니라, 자연 재해마저도 더 막강해져 간다는 느낌이다.
왜 태풍이나 지진의 규모나 강도가 더 세지고 있는건지, 한여름 폭염의 최고 온도나 연속 열대야 일수는 무시무시하게 늘어가고, 올해 초까지 호주에서 일어난 대규모 화재까지...
인간들이 자연을 더 많이 깊이 이해하고, 자연 현상에 대한 대처 능력이 한단계 레벨 업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자연의 횡포는 두단계 레벨 업 된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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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재미있는 상상을 해 보자.
바이러스가 인체에 들어와서 자신을 복제하면서 증식하는 것을,
우리 인간으로 비유하면 어떨까?
인간이 생각하는 지구라는 것은 기껏해야 바이러스가 보는 인간 정도의 하나의 생명체.
바이러스는 숙주 안에서 계속 복제하며 자기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는데,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숙주가 위태로운 지경까지 이르게 되고, 결국 바이러스 자신까지도 죽을 수 있지만, 과연 바이러스가 그걸 염려해서 자기 복제를 자제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지구의 환경을 염려해서 환경 보호를 해야 한다는 일부 사람들이 있지만, 과연 인간들이 그들의 탐욕을 버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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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24일 월요일
2020년 2월 19일 수요일
화 날 때 하는 습관적인 행동
화가 날 때 하는 행동이 무엇이 있는가?
소리지르기, 잠자기, 술 마시기, 폭식, 욕하기, 이불킥
내가 주로 했던 행동은 욕하기?
화를 내게 했던 대상에 대해서, 혹은 부끄러운 나 자신에 대해서, 입 속으로 혹은 입 밖으로 욕을 했다.
그런데, 욕을 한다고 해서 화가 풀리거나 부끄러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화를 풀거나 부끄러움을 잊으려고 욕을 했던 게 아니었다.
그냥, 그건 습관이었다.
화가 나거나 부끄러울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사적인 행동 같은거였다.
욕을 하고 나서는, 화나는 일, 부끄러운 일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다른 생각을 하거나, 다른 일을 하는 거였다.
사실은, 아주 단기적인 해법이지만, 다른 생각을 하거나 다른 일에 집중하는 것이, 화를 풀거나 부끄러움을 잊는 직접적인 해결법이었다.
욕은 단지 화가 나거나 부끄럽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연 반응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다른 생각을 하거나 다른 일에 집중을 하는 것은 아주 단기적인 해결 방법이라, 다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다시 화 나는 일 부끄러운 일이 생각나게 된다.
그리고는 다시 욕하기와 이어지는 다른 생각, 다른 일로 이어진다.
어쩐 일인지, 나 혼자지만, 욕을 하는게 너무 반복되다 보니 나 자신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방법을 바꿔 보기로 했다.
감사하기로 했다.
나를 화나게 했던 대상에 대해서, 내가 부끄러워졌던 일(상황)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반복해서 말했다.
그게 진심은 아닐 것 이었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게도, 마음은 아주 편해졌다.
반복을 하면 할 수록, 나 자신이 낮춰지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부끄러움은 당연한 것이 되고, 그러면서 마음이 진정이 되는 듯 했다.
아직은 시작 단계라 잘 모르겠다.
아마도 더 반복하면, 정말로 상대에게 감사한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소리지르기, 잠자기, 술 마시기, 폭식, 욕하기, 이불킥
내가 주로 했던 행동은 욕하기?
화를 내게 했던 대상에 대해서, 혹은 부끄러운 나 자신에 대해서, 입 속으로 혹은 입 밖으로 욕을 했다.
그런데, 욕을 한다고 해서 화가 풀리거나 부끄러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화를 풀거나 부끄러움을 잊으려고 욕을 했던 게 아니었다.
그냥, 그건 습관이었다.
화가 나거나 부끄러울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사적인 행동 같은거였다.
욕을 하고 나서는, 화나는 일, 부끄러운 일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다른 생각을 하거나, 다른 일을 하는 거였다.
사실은, 아주 단기적인 해법이지만, 다른 생각을 하거나 다른 일에 집중하는 것이, 화를 풀거나 부끄러움을 잊는 직접적인 해결법이었다.
욕은 단지 화가 나거나 부끄럽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연 반응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다른 생각을 하거나 다른 일에 집중을 하는 것은 아주 단기적인 해결 방법이라, 다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다시 화 나는 일 부끄러운 일이 생각나게 된다.
그리고는 다시 욕하기와 이어지는 다른 생각, 다른 일로 이어진다.
어쩐 일인지, 나 혼자지만, 욕을 하는게 너무 반복되다 보니 나 자신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방법을 바꿔 보기로 했다.
감사하기로 했다.
나를 화나게 했던 대상에 대해서, 내가 부끄러워졌던 일(상황)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반복해서 말했다.
그게 진심은 아닐 것 이었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게도, 마음은 아주 편해졌다.
반복을 하면 할 수록, 나 자신이 낮춰지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부끄러움은 당연한 것이 되고, 그러면서 마음이 진정이 되는 듯 했다.
아직은 시작 단계라 잘 모르겠다.
아마도 더 반복하면, 정말로 상대에게 감사한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2020년 1월 13일 월요일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어록(?)처럼 따라 다니는 이 문장은,
내가 알기로는 한때 전세계적으로 열풍이었던 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바로 『시크릿』이라는 책이었는데,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한치의 의심도 없으면, 그 즉시 이루어 진다는 내용이었다.
조금 황당한 주장인데, 책의 내용이라는 것도 문장보다 쓸데 없는 삽화가 더 많고, 몇가지 사례와 함께 비슷한 류의 주장이 담겨 있는 이전의 여러 출판물의 발췌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을 읽을 즈음에 읽었던 책으로 『신과 나눈 이야기』라는 책이 있었는데, 그 주제는 비슷하지만, 책의 구성은 주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쓴 것이었다.
내가 알기론 이 책도 꽤 많은 인기를 얻어서 영화화까지 된 것으로 안다.
이성주의자, 무신론자에게는 이런 류의 주장은 그저 콧방귀만 뀌게 만들 한심한 주장이긴 하지만, 그냥 무시해 버리기엔 내 안의 무언가가 저항하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나야 원래는 신비주의자에 가까워 온갖 음모론과 UFO, 오파츠(OOPARTS) 따위에 흥미를 가졌었지만, 그런것들이 나와는 거의 상관이 없더라는 경험, 그런 것들에 심취할 수록 현실의 궤도에서 이탈하여 오히려 뒤쳐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더해져, 지극히 논리적이고 명확한 증거가 아니면 믿지 않기로 "의지"를 다지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어쩌면 예전의 감성적인 경향 때문에 이런 무속신앙과도 같은 근거 없는 주장에 끌리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름의 변명을 하자면...
일부 집단 혹은 일정 정도 이상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믿음이 있다면, 그것이 정말 황당무계하고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될 지경이라해도 문득 이런 두려움이 든다.
저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면,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걸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기에 앞서서 언급한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돕는다'는 식의 구전(?)을 떠 올릴 수 밖에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실제 사례를 제시할 수는 없다.
그건 아마도 사람들의 믿음 자체를 데이터로 수집하기도 어렵고, 그것이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지, 알 수도 없으며, 그걸 기록으로 남긴 예가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례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취재를 통해 주변인이나 인근의 이웃들을 통해 듣게 되는 귀동냥, 귓속말, 소문 따위의 불분명한 형태이며, 그나마도 일이 일어나고 난 후라 사람들의 기억이 유리한 쪽으로 편향되거나 변형되었을 가능성도 많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건 어떨까?
과거 오랜 시간 동안 귀신(유령)의 존재에 대한 전래, 이야기, 믿음 같은 것들이 꽤 흔했는데, 최근에는 그런 부류의 이야기를 심각하게 듣는 사람도 점점 적어지고 있으며, 강하게 부정하는 의견들도 늘어나고 있지 않나 싶다.
그런데 그 이유를 단순히 과거의 사람들은 무지하고 겁이 많아서 믿었고, 현대인들은 많이 배우고 세상에 두려움이 줄어서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혹시, 과거에 많은 사람들이 귀신의 존재를 믿었던 시대에는 정말로 귀신이 존재했던 것이고, 현재에 귀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면서 실제로 귀신의 존재가 줄거나 흐릿해졌다고 볼 수는 없을까?
또 이런 예는 어떨까?
최근의 부동산 시세들은 무서우리만치 급등하고 있는데, 꽤나 많은 사람들이 부동산의 거품과 거품 붕괴에 따른 폭락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런 폭락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이건 또 무슨 일일까?
누군가가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닐까?
곰곰 생각해 보면, 폭락을 원하는 사람들의 바람이 그리 간절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폭락을 바라는 사람들보다 폭등이나 보합을 바라는 사람이 더 많거나 더 간절할 수도 있고, 폭락을 바라는 마음 속의 혼돈(이건 남들 다 잘되는데 나만 안되니 그냥 모두 다 망했으면 하는 마음과 그래도 최소한 그 여파가 나에게까지 미치지는 않았으면 하는 식의 상반된 마음이 공종하는 혼돈을 말한다.)이 그 간절함을 약화시켜서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어떤 간절함이란 범위가 좁고 구체적일 수록 더 강해지고, 범위가 넓고 두루뭉술해질 수록 더 약해지는 듯 하다.
그리고 우리가 항상 뭔가를 원하고 갈구하지만 그런 것들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건 몇가지 방해 요소들이 있는데,
앞서 언급한대로, 좁은 범위의 구체적인 바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간절함이 약해져서.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누군가가 있거나, 내가 원하는 것의 반대를 원하는 누군가가 있어서 충돌하는 경우.
자연의 힘과 같은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원하는 경우.
등이 있을 수 있다.
이 가운데 무엇이 가장 강력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간절하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과 정성으로, 저항하는 것들을 최대한 제거하거나 완화시킨 후에, 우주가 도와주기를 바래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까지 쓰고 보니 결국은 돌고돌아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한가지 더 첨언을 하고 싶은게 있는데, 그게 소위 말하는 사람들의 저주라는 것이다.
역사가 오래되고 비슷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뿌리내린 듯 살아온 사람이 많은 나라들은 관습이나 풍습이라 불리는 생활 방식/금기 등이 존재한다.
예의라고 하는 것들은 조금 더 체계화된 이런 생활방식을 이르는 그럴듯한 용어라 생각하는데, 이것의 핵심은, 여러 사람들이 모여살다보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고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기 위한 가이드 정도가 아닐까 싶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리고, 누군가에게 원한을 사고 미움을 받게되면, 앞서서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이 더 증가하게 된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원한이 깊은 사람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힘이 허용하는 한에서 간절하게 상대를 해꼬지 하고 싶어할 것이다.
옆에서 누군가가 도와줘도 바라는 바를 이루기 어려운 마당에, 누군가가 방해하고 딴지를 건다면...
착하게 살고, 이웃에게 친절하고, 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하고...이런게 쓸데 없는 듯 보이고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 보일지 몰라도, 적어도 중요한 시기에 내 발목을 잡을 사람을 줄여주는 것이고, 그게 어른들의 공연한 잔소리가 아닌 "예의"라는 이름의 생활의 지혜인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한때 전세계적으로 열풍이었던 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바로 『시크릿』이라는 책이었는데,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한치의 의심도 없으면, 그 즉시 이루어 진다는 내용이었다.
조금 황당한 주장인데, 책의 내용이라는 것도 문장보다 쓸데 없는 삽화가 더 많고, 몇가지 사례와 함께 비슷한 류의 주장이 담겨 있는 이전의 여러 출판물의 발췌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을 읽을 즈음에 읽었던 책으로 『신과 나눈 이야기』라는 책이 있었는데, 그 주제는 비슷하지만, 책의 구성은 주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쓴 것이었다.
내가 알기론 이 책도 꽤 많은 인기를 얻어서 영화화까지 된 것으로 안다.
이성주의자, 무신론자에게는 이런 류의 주장은 그저 콧방귀만 뀌게 만들 한심한 주장이긴 하지만, 그냥 무시해 버리기엔 내 안의 무언가가 저항하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나야 원래는 신비주의자에 가까워 온갖 음모론과 UFO, 오파츠(OOPARTS) 따위에 흥미를 가졌었지만, 그런것들이 나와는 거의 상관이 없더라는 경험, 그런 것들에 심취할 수록 현실의 궤도에서 이탈하여 오히려 뒤쳐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더해져, 지극히 논리적이고 명확한 증거가 아니면 믿지 않기로 "의지"를 다지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어쩌면 예전의 감성적인 경향 때문에 이런 무속신앙과도 같은 근거 없는 주장에 끌리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름의 변명을 하자면...
일부 집단 혹은 일정 정도 이상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믿음이 있다면, 그것이 정말 황당무계하고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될 지경이라해도 문득 이런 두려움이 든다.
저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면,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걸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기에 앞서서 언급한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돕는다'는 식의 구전(?)을 떠 올릴 수 밖에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실제 사례를 제시할 수는 없다.
그건 아마도 사람들의 믿음 자체를 데이터로 수집하기도 어렵고, 그것이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지, 알 수도 없으며, 그걸 기록으로 남긴 예가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례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취재를 통해 주변인이나 인근의 이웃들을 통해 듣게 되는 귀동냥, 귓속말, 소문 따위의 불분명한 형태이며, 그나마도 일이 일어나고 난 후라 사람들의 기억이 유리한 쪽으로 편향되거나 변형되었을 가능성도 많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건 어떨까?
과거 오랜 시간 동안 귀신(유령)의 존재에 대한 전래, 이야기, 믿음 같은 것들이 꽤 흔했는데, 최근에는 그런 부류의 이야기를 심각하게 듣는 사람도 점점 적어지고 있으며, 강하게 부정하는 의견들도 늘어나고 있지 않나 싶다.
그런데 그 이유를 단순히 과거의 사람들은 무지하고 겁이 많아서 믿었고, 현대인들은 많이 배우고 세상에 두려움이 줄어서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혹시, 과거에 많은 사람들이 귀신의 존재를 믿었던 시대에는 정말로 귀신이 존재했던 것이고, 현재에 귀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면서 실제로 귀신의 존재가 줄거나 흐릿해졌다고 볼 수는 없을까?
또 이런 예는 어떨까?
최근의 부동산 시세들은 무서우리만치 급등하고 있는데, 꽤나 많은 사람들이 부동산의 거품과 거품 붕괴에 따른 폭락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런 폭락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이건 또 무슨 일일까?
누군가가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닐까?
곰곰 생각해 보면, 폭락을 원하는 사람들의 바람이 그리 간절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폭락을 바라는 사람들보다 폭등이나 보합을 바라는 사람이 더 많거나 더 간절할 수도 있고, 폭락을 바라는 마음 속의 혼돈(이건 남들 다 잘되는데 나만 안되니 그냥 모두 다 망했으면 하는 마음과 그래도 최소한 그 여파가 나에게까지 미치지는 않았으면 하는 식의 상반된 마음이 공종하는 혼돈을 말한다.)이 그 간절함을 약화시켜서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어떤 간절함이란 범위가 좁고 구체적일 수록 더 강해지고, 범위가 넓고 두루뭉술해질 수록 더 약해지는 듯 하다.
그리고 우리가 항상 뭔가를 원하고 갈구하지만 그런 것들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건 몇가지 방해 요소들이 있는데,
앞서 언급한대로, 좁은 범위의 구체적인 바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간절함이 약해져서.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누군가가 있거나, 내가 원하는 것의 반대를 원하는 누군가가 있어서 충돌하는 경우.
자연의 힘과 같은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원하는 경우.
등이 있을 수 있다.
이 가운데 무엇이 가장 강력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간절하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과 정성으로, 저항하는 것들을 최대한 제거하거나 완화시킨 후에, 우주가 도와주기를 바래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까지 쓰고 보니 결국은 돌고돌아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한가지 더 첨언을 하고 싶은게 있는데, 그게 소위 말하는 사람들의 저주라는 것이다.
역사가 오래되고 비슷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뿌리내린 듯 살아온 사람이 많은 나라들은 관습이나 풍습이라 불리는 생활 방식/금기 등이 존재한다.
예의라고 하는 것들은 조금 더 체계화된 이런 생활방식을 이르는 그럴듯한 용어라 생각하는데, 이것의 핵심은, 여러 사람들이 모여살다보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고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기 위한 가이드 정도가 아닐까 싶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리고, 누군가에게 원한을 사고 미움을 받게되면, 앞서서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이 더 증가하게 된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원한이 깊은 사람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힘이 허용하는 한에서 간절하게 상대를 해꼬지 하고 싶어할 것이다.
옆에서 누군가가 도와줘도 바라는 바를 이루기 어려운 마당에, 누군가가 방해하고 딴지를 건다면...
착하게 살고, 이웃에게 친절하고, 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하고...이런게 쓸데 없는 듯 보이고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 보일지 몰라도, 적어도 중요한 시기에 내 발목을 잡을 사람을 줄여주는 것이고, 그게 어른들의 공연한 잔소리가 아닌 "예의"라는 이름의 생활의 지혜인 것이다.
2019년 12월 29일 일요일
타인에 대한 증오를 다스리는 방법
타인에 대한 증오와 분노는,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나이를 먹어 가면서 점점 늘어가는 듯 하다.
정치인과 정치권에 대한 분노들,
층간 소음과 같은 이웃에 대한 분노들,
토론이 논쟁으로 번지고 급기야는 마음까지 상해서 생기는 분노,
인터넷의 익명성 뒤에 숨어서 무차별한 악성 댓글을 남기는 누군가에 대한 분노,
나이가 들면 그러려니 이해도 하고 좀 쉽게쉽게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했더니,
아직은 그러질 못한다.
곰곰 생각해보니, 나이만 먹는다고 자연스레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었던 듯 하다.
고민하고 아파하고, 반복되는 어리석음을 벗어나기 위해 지혜로운 해결책을 스스로 만들어야만 조금씩 천천히 나아질 뿐이고, 그나마도 끊임 없이 자신을 다스려야만 가능한게 아닐까?
친구들 가운데, 유난히 나와 툭탁거리고 삐꺽대는 친구가 있다.
정말 둘이서만은 만나고 싶지도 않고, 함께 모이는 친구들 때문에 참고 있을 뿐이고, 그러고도 만나면 마찰이 생기는 경우도 많았다.
오랫동안 생각해보니, 이 친구가 나는 비슷한 면이 많았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친구의 행동이나 생각따위에서 나와 닮은 부분이 보일때면, 내가 종종 흥분하고 공격적으로 대했던게 아닌가 싶다.
어쩌면 그 친구도 내게 그랬을지 모르는 일이고, 혹은 나의 공격적 반응때문에 악감정이 쌓여서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그 친구의 행동이나 생각이 나와 닮았다고 생각해서 흥분하는 건 아니다.
단지 그 순간에는, 그 친구의 말이나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어 그랬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친구의 그 행동이나 말은 결국 나의 행동이나 말과 어딘지 닮아 있었다.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 어두운 생각, 피하고 싶은 행동 따위는, 내가 싫어하는 나의 반쪽인 하이드씨였던 셈이다.
그리고 내가 아닌 친구에게서 나의 하이드씨를 보게되면 분노했던 것일지도...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 다음이다.
내가 그 친구에게서 나의 하이드씨 단면을 보고, 거기에 분노할 수록, 나 자신이 나의 하이드씨를 증오하게 되는 것이었다.
밖에서는 지킬박사의 모습을 하고 점잖은 체 하지만, 떼어낼 수 없는 하이드씨는 언제나 내 반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나는 그 반쪽을 더욱 더 증오하게 되었다.
결국은 지킬박사이면서 하이드씨인 나는 나 자신을 더 미워하게 되는 것이었고, 극심한 자기 혐오에 빠지거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를 완전히 분리시키기 위해 자아를 분열시켜야 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분노와 증오가 나의 어두운 반쪽에 대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내 마음속에 세워둔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경계처럼, 나는 세상을 둘로 갈라 놓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며, 하이드씨를 미워하는 마음처럼 세상의 반을 미워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나의 반을 증오하는 것이고, 그건 결국 자가 자신을 증오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은 명심해 두어야 할 것이다.
문득 분노가 꿈틀댈 때, 이 점을 다시 상기하고, 하이드씨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하면, 타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도 점차 사라지지 않을까?
정치인과 정치권에 대한 분노들,
층간 소음과 같은 이웃에 대한 분노들,
토론이 논쟁으로 번지고 급기야는 마음까지 상해서 생기는 분노,
인터넷의 익명성 뒤에 숨어서 무차별한 악성 댓글을 남기는 누군가에 대한 분노,
나이가 들면 그러려니 이해도 하고 좀 쉽게쉽게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했더니,
아직은 그러질 못한다.
곰곰 생각해보니, 나이만 먹는다고 자연스레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었던 듯 하다.
고민하고 아파하고, 반복되는 어리석음을 벗어나기 위해 지혜로운 해결책을 스스로 만들어야만 조금씩 천천히 나아질 뿐이고, 그나마도 끊임 없이 자신을 다스려야만 가능한게 아닐까?
친구들 가운데, 유난히 나와 툭탁거리고 삐꺽대는 친구가 있다.
정말 둘이서만은 만나고 싶지도 않고, 함께 모이는 친구들 때문에 참고 있을 뿐이고, 그러고도 만나면 마찰이 생기는 경우도 많았다.
오랫동안 생각해보니, 이 친구가 나는 비슷한 면이 많았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친구의 행동이나 생각따위에서 나와 닮은 부분이 보일때면, 내가 종종 흥분하고 공격적으로 대했던게 아닌가 싶다.
어쩌면 그 친구도 내게 그랬을지 모르는 일이고, 혹은 나의 공격적 반응때문에 악감정이 쌓여서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그 친구의 행동이나 생각이 나와 닮았다고 생각해서 흥분하는 건 아니다.
단지 그 순간에는, 그 친구의 말이나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어 그랬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친구의 그 행동이나 말은 결국 나의 행동이나 말과 어딘지 닮아 있었다.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 어두운 생각, 피하고 싶은 행동 따위는, 내가 싫어하는 나의 반쪽인 하이드씨였던 셈이다.
그리고 내가 아닌 친구에게서 나의 하이드씨를 보게되면 분노했던 것일지도...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 다음이다.
내가 그 친구에게서 나의 하이드씨 단면을 보고, 거기에 분노할 수록, 나 자신이 나의 하이드씨를 증오하게 되는 것이었다.
밖에서는 지킬박사의 모습을 하고 점잖은 체 하지만, 떼어낼 수 없는 하이드씨는 언제나 내 반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나는 그 반쪽을 더욱 더 증오하게 되었다.
결국은 지킬박사이면서 하이드씨인 나는 나 자신을 더 미워하게 되는 것이었고, 극심한 자기 혐오에 빠지거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를 완전히 분리시키기 위해 자아를 분열시켜야 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분노와 증오가 나의 어두운 반쪽에 대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내 마음속에 세워둔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경계처럼, 나는 세상을 둘로 갈라 놓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며, 하이드씨를 미워하는 마음처럼 세상의 반을 미워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나의 반을 증오하는 것이고, 그건 결국 자가 자신을 증오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은 명심해 두어야 할 것이다.
문득 분노가 꿈틀댈 때, 이 점을 다시 상기하고, 하이드씨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하면, 타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도 점차 사라지지 않을까?
2019년 12월 18일 수요일
재즈에 대한 자부심? 재즈부심?
음악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이런 글을 쓴다는게 아이러니 하지만,
내가 경험했던, 겪었던 일들과의 유사한 면이 있어서 끄적여 본다.
재즈 음악이 묘한 마력과 같은 면이 있지만, 결코 쉽지 않고(듣고 즐기고 감상하기에도 그렇다는 뜻), 썩 편하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나름의 매력이 있으니 한번씩 생각나고, 젖어들고 싶기도 하곤 한다.
순전히 외부인으로써 재즈 뮤지션들을 보면, 타 쟝르에 비해 범접하기 어려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물씬 물씬 받곤 한다.
재즈야말로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연주하고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여러 쟝르를 섭렵하고 끝내 안착하게 되는 궁극의 쟝르라는...식의
그런데도 세상의 음악 중에 재즈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 크지 않다.
전문가들의 영역과 일반 대중의 영역을 나눈다면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어딘지 자기만의 깊은 심연에 빠져 있는 듯이 보인달까?
꽤 오랫동안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길을 걸어왔는데, 이 직종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
OS(운영체제)에서 kernel(커널)이라는 핵심부, 통신과 관련된 소프트웨어에서는 프로토콜(통신규약)과 관련된 부분 등이 그러하다.
매우 핵심적인 부분이며, 어렵고, 전문적이다.
실제로 그런 부분의 인력은 구하기도 힘들고, 페이도 높은 편이다.(단, 실력이 따라야만 한다)
그런데, 실제 상황을 보면 전체 개발 인력 가운데, 이런 핵심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인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1% 혹은 그 미만에 그친다.
다수의 인력이 달려들어서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해봐야 그 성과가 높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혼란이 심해서 역효과가 나기 때문이다.
사실은, 똘똘한 소수만으로 운영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며, 그나마도 이런 것을 담당하는 업체에서만 제한적으로 운영된다고 볼 수도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의 마이크로 커널, 리눅스의 커널, 퀄컴의 CDMA/LTE 프로토콜 따위를 누가 개발하겠는가? 저 대기업내에서도 극소수의 사람만이 관여한다.
삼성이나 샤오미에서 안드로이드의 LTE 프로토콜을 직접 건드릴 일은 아주 드문 일이다.
이런 직무분야에서 근무하는 사람을 매우 부러워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 냉정하게 말하자면, 매우 위태로운 직무분야이기도 하다.
1%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들어둔 보험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보험료가 너무 비싸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1%의 위험은 곧잘 무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SCV와 같은 일꾼 소리를 듣는 직무 분야도 있다.
UI(User Interface)/UX(User Experience)/HCI(Human Computing Interface) 분야다.
스맛폰에서 보이는 거의 모든 화면은 누군가 구상하고 직접 그려넣은 것이다.
작동 시나리오를 짜고, 조건을 검사해서 어떤 그림을 보여줄 지, 어떤 소리를 내 줄지 따위를 만드는 작업이다.
전체적인 시나리오, 타 직무와의 소통과 연계, 아웃소싱, 상품의 기획 등등과 연관된 복잡한 업무도 있지만, 일단 이런것들을 제외하고도 시간과 노력이 많이 요구되기에 평범한 능력을 가진 다수의 엔지니어를 투입해야 하는 직무다.
개개인이 자신의 빛을 발휘하거나 독보적 역량을 뽑낼 기회는 적지만, 언제나 필요로 하는 곳은 많으며, 해야 할 일도 많다.
소프트웨어 개발직에서의 노가다라 불리는 그런...
하지만, 매우 천대받는 이런 직무 분야는 반대로 안정적이다.
이들은 필요로 하는 곳이 많으며, 많은 사람이 투입될수록 기간이 단축되는 효과가 크기때문에 고용주의 입장에서도 비용 대비 효과가 뚜렷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서로 상반되는 빛과 어둠을 가진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물론 이 와중에 최악은 존재한다.
실력은 없지만 핵심 분야만을 고집하는 엔지니어.
주어진 일도 다 못하면서 자꾸 다른 분야만 넘보는 노가다 엔지니어.
내가 경험했던, 겪었던 일들과의 유사한 면이 있어서 끄적여 본다.
재즈 음악이 묘한 마력과 같은 면이 있지만, 결코 쉽지 않고(듣고 즐기고 감상하기에도 그렇다는 뜻), 썩 편하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나름의 매력이 있으니 한번씩 생각나고, 젖어들고 싶기도 하곤 한다.
순전히 외부인으로써 재즈 뮤지션들을 보면, 타 쟝르에 비해 범접하기 어려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물씬 물씬 받곤 한다.
재즈야말로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연주하고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여러 쟝르를 섭렵하고 끝내 안착하게 되는 궁극의 쟝르라는...식의
그런데도 세상의 음악 중에 재즈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 크지 않다.
전문가들의 영역과 일반 대중의 영역을 나눈다면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어딘지 자기만의 깊은 심연에 빠져 있는 듯이 보인달까?
꽤 오랫동안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길을 걸어왔는데, 이 직종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
OS(운영체제)에서 kernel(커널)이라는 핵심부, 통신과 관련된 소프트웨어에서는 프로토콜(통신규약)과 관련된 부분 등이 그러하다.
매우 핵심적인 부분이며, 어렵고, 전문적이다.
실제로 그런 부분의 인력은 구하기도 힘들고, 페이도 높은 편이다.(단, 실력이 따라야만 한다)
그런데, 실제 상황을 보면 전체 개발 인력 가운데, 이런 핵심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인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1% 혹은 그 미만에 그친다.
다수의 인력이 달려들어서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해봐야 그 성과가 높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혼란이 심해서 역효과가 나기 때문이다.
사실은, 똘똘한 소수만으로 운영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며, 그나마도 이런 것을 담당하는 업체에서만 제한적으로 운영된다고 볼 수도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의 마이크로 커널, 리눅스의 커널, 퀄컴의 CDMA/LTE 프로토콜 따위를 누가 개발하겠는가? 저 대기업내에서도 극소수의 사람만이 관여한다.
삼성이나 샤오미에서 안드로이드의 LTE 프로토콜을 직접 건드릴 일은 아주 드문 일이다.
이런 직무분야에서 근무하는 사람을 매우 부러워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 냉정하게 말하자면, 매우 위태로운 직무분야이기도 하다.
1%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들어둔 보험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보험료가 너무 비싸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1%의 위험은 곧잘 무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SCV와 같은 일꾼 소리를 듣는 직무 분야도 있다.
UI(User Interface)/UX(User Experience)/HCI(Human Computing Interface) 분야다.
스맛폰에서 보이는 거의 모든 화면은 누군가 구상하고 직접 그려넣은 것이다.
작동 시나리오를 짜고, 조건을 검사해서 어떤 그림을 보여줄 지, 어떤 소리를 내 줄지 따위를 만드는 작업이다.
전체적인 시나리오, 타 직무와의 소통과 연계, 아웃소싱, 상품의 기획 등등과 연관된 복잡한 업무도 있지만, 일단 이런것들을 제외하고도 시간과 노력이 많이 요구되기에 평범한 능력을 가진 다수의 엔지니어를 투입해야 하는 직무다.
개개인이 자신의 빛을 발휘하거나 독보적 역량을 뽑낼 기회는 적지만, 언제나 필요로 하는 곳은 많으며, 해야 할 일도 많다.
소프트웨어 개발직에서의 노가다라 불리는 그런...
하지만, 매우 천대받는 이런 직무 분야는 반대로 안정적이다.
이들은 필요로 하는 곳이 많으며, 많은 사람이 투입될수록 기간이 단축되는 효과가 크기때문에 고용주의 입장에서도 비용 대비 효과가 뚜렷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서로 상반되는 빛과 어둠을 가진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물론 이 와중에 최악은 존재한다.
실력은 없지만 핵심 분야만을 고집하는 엔지니어.
주어진 일도 다 못하면서 자꾸 다른 분야만 넘보는 노가다 엔지니어.
2019년 12월 11일 수요일
진보/좌파에 대한 절망
대한민국에서 좌파라는 호칭은 상당히 부정적인 인상을 준다.
(따지고보면 좌파와 우파는 양팔 저울의 한쪽씩을 담당하는, 균형의 일원임에도 말이다.)
나에게 '당신은 좌파에 속합니까 우파에 속합니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좌파에 무게 중심이 쏠려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음에도,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고, 공교육을 받으며, 여러 매스미디어를 통해 얻은 나의 관념으로도, 좌파는 부정적인 단어일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정확한 정의나 세세한 구분, 분류 따위는 알지 못하지만, 편의상 좌파 대신 진보라는 단어를 쓰도록 하겠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으로 시작된 진보 진영의 대통력과 현재의 문재인 대통령을 보면서 그 동안 내가 가졌던 희망, 기대가 많이 무너지고 퇴색되었다.
많은 서민들과 노동자들, 약자와 빈곤층, 사회의 맨 바닥에서 꼭 필요한 일을 하지만,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사람들, 최소한의 생계마저 위협을 받거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
나도 어설프게 그런 부류에 속할지는 모르겠으나, 엄격하게는 아니라 생각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정말 개선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이루어진 것이 있는지, 그래서 나는 모르겠다.
단지 내가 서있는 이 자리에서 보면, 진보 대통령들은 많이 부족하고, 미숙하고, 어설프며, 불편했다.
부동산 정책
대북 정책
대미/대일 외교 정책
청년 일자리 및 경제 정책
아마 위의 분야들에 대해서 각각을 일일이 따지지 않아도, 제대로 성과를 낸 것이 없으며, 지금까지는 그렇다 해도 앞으로 희망적인 부분이 있을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공식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항변할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반박할 자료들을 얼마든지 내 보이겠지만 말이다.)
일부는 우리의 노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 좌우되기도 하며, 단시간에 성과를 보기 어려워 장기적인 안목으로 진행해야 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그만 변수에도 삐걱대고 허둥대는 정부의 모습을 보면, 과연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인지, 플랜B는 존재하는지,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많은 논란이 있는 정책에 대해서도, 강력한 리더쉽으로 정책을 끝까지 수행해서 이뤄낼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고, 끊임 없이 국민들을 설득하는 노력이 있어야 하지만, 너무나 빈약하고 너무 근시안적이라 정부의 정책, 아니 그 이전에 정부의 의지마저 의심스럽다.
또한 진보 대통령이 재임하는 동안에는 유난히도 정치적 분쟁과 논란이 너무나 많고 소란스럽다.
어쩌면 진보라는 단어 자체가 내포하는 의미로, 기존의 것을 허물거나 고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야 하니, 당연히 기성 세력들과의 충돌이 불가피하고, 그 과정에 소란이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또한 위의 문단에서처럼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고 당근과 채찍을 과감하게 사용해야만 이룰 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재임하고 있는 현 상황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시즌2를 보는 듯 기시감이 많이 든다.
앞서 언급한 정치적 분쟁과 논란, 부동산의 폭등과 규제, 대미 대일 외교의 마찰...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는 그것이 처음이라서 그러려니 했는데, 똑같은 문제점들이 반복되는 현 시점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실망감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더구나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그 모든 과정을 똑똑히 지켜보았을 인물이었을 텐데...
너무도 무력하게 무너져가는, 아무 손도 못쓰고 있는 진보 진영의 무력감을 나 또한 너무 아프게 지켜보고 있다.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시절이라면, 대통령을 욕하고 비난하면 끝이었다.
그러면 설령 그게 그들의 책임이나 잘못이 아닐 지언정, 나의 스트레스는 많이 경감되었다.
그걸로도 위로가 되지 않으면 당시의 정부 여당을 욕하고, 보수 언론을 욕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걸로 안되었다.
그렇게 욕하고 비난한다고 내 스트레스가 줄어들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고 쓰리다.
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적어도 진보 대통령들이 내세운 공약들은 정의롭고 바르며, 약자를 보호하고, 억울함이 없이 평등하고,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던가?
.......
진보/좌파는 슬로건이고 구호이며 문장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강력한 메시지를 최대한 짧고 간결한 문장에 담는 데 애썼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 매혹되었다.
사실 그 문장들, 그 자체는 매우 정의롭고 또한 아릅답다.
그 안에 파라다이스가 있고 천국이 있고 지상낙원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 매료되어 사람들이 모여 든다.
모여든 사람들의 힘으로 권력을 잡고 막상 자신들의 낙원을 만들려고 할 때,
여기 저기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지금 있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갈아 엎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
일부는 남기고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
낙원을 건설하는 데 모두가 동참해야 한다는 주장,
낙원을 건걸하는 데 모두가 동참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
천국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주장,
천국은 저러저러해야 한다는 주장,
하나의 슬로건이었지만 꿈꾸는 파라다이스는 제 각각이었거나,
혹은 대충은 같았어도 세분에서는 달랐다.
대략적인 계획은 있었으나 실제 현실에서 적용할 때 발생하는 문제들이 여기 저기서 튀어나왔다.
보수와 우파는 기득권이며, 기존의 체계이다.
이미 그들의 속성으로 만들어져 있는 사회와 시스템에서는 그들의 계획이 잘 맞아 돌아간다.
하지만 진보와 좌파는 소수파이며, 그들은 기존의 시스템과 잘 맞지 않는, 기존의 체계에서는 비표준품인 것이다.
그들의 작업은 맨 바닥부터 시작해야 할 경우도 있으며, 더디고, 많은 비용이 필요하다.
그리고 더 꼼꼼한 계획과 철저한 검토가 필요하다.
어쩌면 이건 진보의 문제나 좌파의 문제가 이니었던 것이다.
기득권에 대해 변화를 요구하는 모든 새로운 세력들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소수파이면서 개혁을 꿈꾼다면, 인재의 풀이 넉넉하지도 못할 터.
필수적으로 이런 개혁 세력의 리더는 월등한 안목과 재능을 가져야하며,
권력을 쥐었을 때, 개혁을 이끌어낼 인재를 다수파로부터 영입하는 능력(카리스마와 유연함)까지 갖추지 않으면 성공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런 리더는 역사에 나올 지도자 정도일 테고...
아쉽지만, 이제는 진보와 좌파에 대한 지지를 끝내야 할 듯 하다.
이제는 더 이상, 이름다운 구호와 슬로건에 속지 않을 것이다.
5년 단임제의 대통령이 현실적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개혁은 매우 일부에 국한된 개혁일 수 밖에 없다.
조금 더 욕시을 낸다 해도, 일부에 국한된 개혁이 큰 불씨가 될 수 있는 그런 개혁인 경우, 혹은 당장은 효과가 없으나 장기적인 안목에서의 개혁 정도가 최선이 아닐까 싶다.
이제 더 이상은 허황된 미사여구와 감언이설에 속지 않고, 계산기와 삼각자로 측정해 보고나서 판단할 것이다.
=========================================================
또 조만간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을 예정이다.
벌써 여당과 야당의 선거전쟁은 시작되었다.
프레임 씌우기, 흠집내기, 세 부풀리기, 이합집산, 합종연횡....
내가 아무리 계산하고 측정하고 저울질을 꼼꼼이 한다해도, 내 선택은 결국 지역구의 후보 중 하나를 찍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보들은 모두 미명이고 흐리멍텅하고 유야무야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 듯 할 것이다.
그래야 넓은 지지를 받을 것이고, 그래야 당선이 될 테니까.
내가 아무리 이성적으로 판단하겠다고 생각했어도, 양팔 저울이 한쪽으로 뚜렷하게 기울지는 않을 거라는 뜻이다.
진보/좌파가 속이 빈 강정처럼, 듣기 좋은 말로만 치장하고, 정작 이루어 내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보수/우파는 정의와 평등과 도덕과 양심 이런 가치를 아얘 포기해버린 듯이 행동하지 않는가?
눈앞의 이익과 실적만을 중시하여 장기적인 안목과 영구한 가치를 내버린 것 또한 비난 받아 마땅하지 않을 것인가.
능력이 부족해서 될지는 모르겠지만 성실하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하는 학생과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1등(합격)하겠습니다 하는 무서운 학생 중에 과연 어떤 학생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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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보면 좌파와 우파는 양팔 저울의 한쪽씩을 담당하는, 균형의 일원임에도 말이다.)
나에게 '당신은 좌파에 속합니까 우파에 속합니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좌파에 무게 중심이 쏠려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음에도,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고, 공교육을 받으며, 여러 매스미디어를 통해 얻은 나의 관념으로도, 좌파는 부정적인 단어일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정확한 정의나 세세한 구분, 분류 따위는 알지 못하지만, 편의상 좌파 대신 진보라는 단어를 쓰도록 하겠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으로 시작된 진보 진영의 대통력과 현재의 문재인 대통령을 보면서 그 동안 내가 가졌던 희망, 기대가 많이 무너지고 퇴색되었다.
많은 서민들과 노동자들, 약자와 빈곤층, 사회의 맨 바닥에서 꼭 필요한 일을 하지만,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사람들, 최소한의 생계마저 위협을 받거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
나도 어설프게 그런 부류에 속할지는 모르겠으나, 엄격하게는 아니라 생각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정말 개선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이루어진 것이 있는지, 그래서 나는 모르겠다.
단지 내가 서있는 이 자리에서 보면, 진보 대통령들은 많이 부족하고, 미숙하고, 어설프며, 불편했다.
부동산 정책
대북 정책
대미/대일 외교 정책
청년 일자리 및 경제 정책
아마 위의 분야들에 대해서 각각을 일일이 따지지 않아도, 제대로 성과를 낸 것이 없으며, 지금까지는 그렇다 해도 앞으로 희망적인 부분이 있을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공식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항변할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반박할 자료들을 얼마든지 내 보이겠지만 말이다.)
일부는 우리의 노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 좌우되기도 하며, 단시간에 성과를 보기 어려워 장기적인 안목으로 진행해야 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그만 변수에도 삐걱대고 허둥대는 정부의 모습을 보면, 과연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인지, 플랜B는 존재하는지,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많은 논란이 있는 정책에 대해서도, 강력한 리더쉽으로 정책을 끝까지 수행해서 이뤄낼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고, 끊임 없이 국민들을 설득하는 노력이 있어야 하지만, 너무나 빈약하고 너무 근시안적이라 정부의 정책, 아니 그 이전에 정부의 의지마저 의심스럽다.
또한 진보 대통령이 재임하는 동안에는 유난히도 정치적 분쟁과 논란이 너무나 많고 소란스럽다.
어쩌면 진보라는 단어 자체가 내포하는 의미로, 기존의 것을 허물거나 고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야 하니, 당연히 기성 세력들과의 충돌이 불가피하고, 그 과정에 소란이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또한 위의 문단에서처럼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고 당근과 채찍을 과감하게 사용해야만 이룰 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재임하고 있는 현 상황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시즌2를 보는 듯 기시감이 많이 든다.
앞서 언급한 정치적 분쟁과 논란, 부동산의 폭등과 규제, 대미 대일 외교의 마찰...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는 그것이 처음이라서 그러려니 했는데, 똑같은 문제점들이 반복되는 현 시점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실망감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더구나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그 모든 과정을 똑똑히 지켜보았을 인물이었을 텐데...
너무도 무력하게 무너져가는, 아무 손도 못쓰고 있는 진보 진영의 무력감을 나 또한 너무 아프게 지켜보고 있다.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시절이라면, 대통령을 욕하고 비난하면 끝이었다.
그러면 설령 그게 그들의 책임이나 잘못이 아닐 지언정, 나의 스트레스는 많이 경감되었다.
그걸로도 위로가 되지 않으면 당시의 정부 여당을 욕하고, 보수 언론을 욕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걸로 안되었다.
그렇게 욕하고 비난한다고 내 스트레스가 줄어들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고 쓰리다.
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적어도 진보 대통령들이 내세운 공약들은 정의롭고 바르며, 약자를 보호하고, 억울함이 없이 평등하고,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던가?
.......
진보/좌파는 슬로건이고 구호이며 문장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강력한 메시지를 최대한 짧고 간결한 문장에 담는 데 애썼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 매혹되었다.
사실 그 문장들, 그 자체는 매우 정의롭고 또한 아릅답다.
그 안에 파라다이스가 있고 천국이 있고 지상낙원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 매료되어 사람들이 모여 든다.
모여든 사람들의 힘으로 권력을 잡고 막상 자신들의 낙원을 만들려고 할 때,
여기 저기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지금 있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갈아 엎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
일부는 남기고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
낙원을 건설하는 데 모두가 동참해야 한다는 주장,
낙원을 건걸하는 데 모두가 동참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
천국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주장,
천국은 저러저러해야 한다는 주장,
하나의 슬로건이었지만 꿈꾸는 파라다이스는 제 각각이었거나,
혹은 대충은 같았어도 세분에서는 달랐다.
대략적인 계획은 있었으나 실제 현실에서 적용할 때 발생하는 문제들이 여기 저기서 튀어나왔다.
보수와 우파는 기득권이며, 기존의 체계이다.
이미 그들의 속성으로 만들어져 있는 사회와 시스템에서는 그들의 계획이 잘 맞아 돌아간다.
하지만 진보와 좌파는 소수파이며, 그들은 기존의 시스템과 잘 맞지 않는, 기존의 체계에서는 비표준품인 것이다.
그들의 작업은 맨 바닥부터 시작해야 할 경우도 있으며, 더디고, 많은 비용이 필요하다.
그리고 더 꼼꼼한 계획과 철저한 검토가 필요하다.
어쩌면 이건 진보의 문제나 좌파의 문제가 이니었던 것이다.
기득권에 대해 변화를 요구하는 모든 새로운 세력들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소수파이면서 개혁을 꿈꾼다면, 인재의 풀이 넉넉하지도 못할 터.
필수적으로 이런 개혁 세력의 리더는 월등한 안목과 재능을 가져야하며,
권력을 쥐었을 때, 개혁을 이끌어낼 인재를 다수파로부터 영입하는 능력(카리스마와 유연함)까지 갖추지 않으면 성공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런 리더는 역사에 나올 지도자 정도일 테고...
아쉽지만, 이제는 진보와 좌파에 대한 지지를 끝내야 할 듯 하다.
이제는 더 이상, 이름다운 구호와 슬로건에 속지 않을 것이다.
5년 단임제의 대통령이 현실적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개혁은 매우 일부에 국한된 개혁일 수 밖에 없다.
조금 더 욕시을 낸다 해도, 일부에 국한된 개혁이 큰 불씨가 될 수 있는 그런 개혁인 경우, 혹은 당장은 효과가 없으나 장기적인 안목에서의 개혁 정도가 최선이 아닐까 싶다.
이제 더 이상은 허황된 미사여구와 감언이설에 속지 않고, 계산기와 삼각자로 측정해 보고나서 판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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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조만간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을 예정이다.
벌써 여당과 야당의 선거전쟁은 시작되었다.
프레임 씌우기, 흠집내기, 세 부풀리기, 이합집산, 합종연횡....
내가 아무리 계산하고 측정하고 저울질을 꼼꼼이 한다해도, 내 선택은 결국 지역구의 후보 중 하나를 찍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보들은 모두 미명이고 흐리멍텅하고 유야무야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 듯 할 것이다.
그래야 넓은 지지를 받을 것이고, 그래야 당선이 될 테니까.
내가 아무리 이성적으로 판단하겠다고 생각했어도, 양팔 저울이 한쪽으로 뚜렷하게 기울지는 않을 거라는 뜻이다.
진보/좌파가 속이 빈 강정처럼, 듣기 좋은 말로만 치장하고, 정작 이루어 내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보수/우파는 정의와 평등과 도덕과 양심 이런 가치를 아얘 포기해버린 듯이 행동하지 않는가?
눈앞의 이익과 실적만을 중시하여 장기적인 안목과 영구한 가치를 내버린 것 또한 비난 받아 마땅하지 않을 것인가.
능력이 부족해서 될지는 모르겠지만 성실하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하는 학생과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1등(합격)하겠습니다 하는 무서운 학생 중에 과연 어떤 학생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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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22일 금요일
노력과 성과에 관해서
과연 우리가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얼마나 되는 걸까?
집에서 커피를 직접 볶아서 마시곤 하는데,
처음엔 도통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방법이야 인터넷에 널리고 널렸으니 적절한 시간과 성의을 가진다면 "문장으로 이루어진 방법"은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커피라는 건, 결국은 맛과 향으로 결정되는 것인데
아직까지 인터넷이 맛과 향을 그대로 전달해 줄 수는 없기에, 이 부분들이 매우 모호할 수 밖에 없다.
사실 여러가지 조리방법 중에, 색의 변화, 향기의 변화, 질감의 변화, 맛의 변화에 따라 판단이 필요한 것들은 말이나 문자로 전달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그래서 실습이 필요한 것이고, 스승이 필요한 것이고, 도제가 필요한 것이고, 무형문화재가 필요한 것이다.
이젠 2년 정도 커피를 볶아보니 대략적인 감은 생겼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커피는 내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 볶아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는 맛과 향기의 특성이 존재하더란 것이다.
물론 로스팅을 망쳐버리면 좋은 맛과 향기를 모두 잃을 수도 있기에 나쁘게 바꾸는 것에는 한계가 없는 셈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한계가 나름 명확하다.
그 커피가 원래 가지고 있지 않은 맛과 향기를 나게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더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자 한다면, 더 좋은 커피 생두를 찾아야지, 똑같은 커피 생두에 노력을 더한다고 갑자기 맛이 좋아지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또, 그 커피 생두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 경우에도, 그 노력이 허사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마련이다.
그게 그 커피 생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일 수도 있고, 외부적인 요인이 될 수도 있는데, 노력으로 개선된 장점을 우습게 잡아먹어 버리는 월등한 단점이 부각되는 경우이다.
커피의 경우에는 진한 커피를 위해서 많이 볶으면 향미를 잃고, 향미를 살리기 위해 살짝 볶으면 커피가 가벼워지거나 덜 익은 떫은 맛이 나기 쉽기고 하다.
이처럼 어떤 일의 성과를 내기에는 많은 어려움들이 도사리고 있다.
어쩌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노력이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꾸준히 노력하는 것과, 노력해도 성과가 나오지 않는 이유를 모르니 그냥 포기해버리는 차이를 만드는 정도일 지도 모르겠다.
집에서 커피를 직접 볶아서 마시곤 하는데,
처음엔 도통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방법이야 인터넷에 널리고 널렸으니 적절한 시간과 성의을 가진다면 "문장으로 이루어진 방법"은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커피라는 건, 결국은 맛과 향으로 결정되는 것인데
아직까지 인터넷이 맛과 향을 그대로 전달해 줄 수는 없기에, 이 부분들이 매우 모호할 수 밖에 없다.
사실 여러가지 조리방법 중에, 색의 변화, 향기의 변화, 질감의 변화, 맛의 변화에 따라 판단이 필요한 것들은 말이나 문자로 전달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그래서 실습이 필요한 것이고, 스승이 필요한 것이고, 도제가 필요한 것이고, 무형문화재가 필요한 것이다.
이젠 2년 정도 커피를 볶아보니 대략적인 감은 생겼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커피는 내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 볶아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는 맛과 향기의 특성이 존재하더란 것이다.
물론 로스팅을 망쳐버리면 좋은 맛과 향기를 모두 잃을 수도 있기에 나쁘게 바꾸는 것에는 한계가 없는 셈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한계가 나름 명확하다.
그 커피가 원래 가지고 있지 않은 맛과 향기를 나게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더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자 한다면, 더 좋은 커피 생두를 찾아야지, 똑같은 커피 생두에 노력을 더한다고 갑자기 맛이 좋아지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또, 그 커피 생두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 경우에도, 그 노력이 허사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마련이다.
그게 그 커피 생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일 수도 있고, 외부적인 요인이 될 수도 있는데, 노력으로 개선된 장점을 우습게 잡아먹어 버리는 월등한 단점이 부각되는 경우이다.
커피의 경우에는 진한 커피를 위해서 많이 볶으면 향미를 잃고, 향미를 살리기 위해 살짝 볶으면 커피가 가벼워지거나 덜 익은 떫은 맛이 나기 쉽기고 하다.
이처럼 어떤 일의 성과를 내기에는 많은 어려움들이 도사리고 있다.
어쩌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노력이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꾸준히 노력하는 것과, 노력해도 성과가 나오지 않는 이유를 모르니 그냥 포기해버리는 차이를 만드는 정도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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