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18일 일요일

[영화] 스토커(Stalker) 1979,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Stalker, IMDB



어쩌다 이 영화를 만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왜 이 영화를 다운로드 받았던건지, 나중에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받아둔 채로 몇달이 지난 후에 보게 되었다.

이 영화에 대해 뭐라고 얘기해야 할까.
궁금해서 IMDB를 찾아 보고, 평점도 나중에야 보게되었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라는 감독에 대해서도 찾아보고, 그 명성도 후에야 알게 되었다.
시간이 꽤나 지나서인지, 일부에선 비판적인 시각도 보일 정도...

느낌은 축축한 영화.
온통 그레이의 낮게 깔린 음습함.
뭔지 모를 상징의 범람.
모르는 것 투성이의 혼란함으로 시작해서 차츰 조금씩 뭔지 배경을 어렴풋이 알 즈음에 그냥 끝나버린 영화. 그래서 끝나고도 남는 혼란스러움과 무거움.
양 옆으로 뭔가가 나를 옥죄어 오는 듯한 화면들. 그래서 보는 내내 어떤 답답함.
(영화에 대해선 문외한이지만, 이 영화에서 보이는 자주 보이는 장면은, 화면 안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장면들, 문 하나를 지나 그 뒤의 공간, 세 남자가 만나는 바의 장면이 그렇고,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곳에 도착하기 직전의 하얀 방 = 전화기가 울리는 방이 그렇고...)


연극을 보진 않았지만, 어딘지 <고도를 기다리며>와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싶고


원작을 읽어 봐야 영화의 의미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019년 8월 13일 화요일

Before Trump & After Trump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기원전(BC, Before Chist), 기원후 (AD, Anno Domini)를 나누어 사용해 왔다.
언제, 누구에 의해 이런 표기를 사용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예수의 존재가 인류에게 (특히 서양에서) 그 의미가 크기 때문에 오랜 기간동안 사용되지 않았을까 싶다.


요즘 세계의 정세를 보고 있노라면, 예전에 극심했다던 냉전시대가 이 정도였을까 싶게 너무도 야만적(?)인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현상을 어느 누구 한사람의 책임으로 돌리는 건 너무 무책임하고 지나치게 단순화된 판단이라 생각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미국의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를 이 논의에서 뺄 수는 없을 것이다.

미중간의 무역전쟁, 미국의 이민 제한 정책, 동맹국에 대한 이익 우선 정책 등을 보노라면, 어서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려질 정도이다.
하지만 이런 막무가내식 이익 탐식의 경향이 단순히 트럼프의 개인적 성향때문이라 생각한다면 그 또한 대단한 착각이 아니겠는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트럼의 그런 행보는 다분히 미국 국민의 바람을 반영했다고 봐야 할 것이며, 중국이나 일본의 지도자들이 별로 다르지 않은 자국의 이익 추구 또한 비슷한 경향으로 봐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런 경향은 아주 서서히 증가해 왔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그 세력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섰을 때에도 인간의로써의 미덕을 지킴으로써 유지되어 왔던 문명화된 세계로서의 질서는, 어느 한 순간에 탄성한계를 넘어선 듯이 폭발해 버린 듯이 보였다.

그리고 그 기폭제는 도널드 트럼프라는 미국의 대통령으로 상징되어도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이라는 위엄이나 자제력은 찾아보기 어렵고, 자본주의에 완전히 절여져 물질만능을 신으로 섬기고 있는 듯이 보이는 지도자.
트럼프의 행동은 그동안 문명화된 인간들이 자기 안에 숨겨왔던 야만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더 이상 부끄러움 따위는 없고, 타인의 비난이나 충고따위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방식이 아주 자연스럽게 보인다.

과거의 친구나 의리나 신의도 없다.
물고 물리는 야생의 속성만이 남았다.
강한 놈이 모든 걸 가지며, 약한 자는 나름의 생존 방식을 모색해야만 한다.


이제 세월이 얼마나 지나면 인류가 깨달을 지 모르겠지만,
예수 탄생 2000년이 조금 지난 즈음에 세상은 크나 큰 변화를 맞아하게 되었으며,
이 시기를 기준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듯 하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그 시기를 기준으로 BT와 AT, 즉 Before Trump와 After Trump로 부를지 모르겠다.

2019년 7월 9일 화요일

인류는 진화할 수 있을까

찰스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의 의미와는 다른 진화가 가능할까?

전쟁을 종식하고 영구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으며,
인종간 차별, 성(性) 차별, 국가와 민족간의 차별, 종교에 따른 차별, 능력과 장애에 따른 차별을 없애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 수 있으며,
우리와 저들, 나와 너의 벽을 무너뜨리고 모두가 자기인 듯, 모두가 타인인 듯 살 수 있으며,
자연과 생명, 그 모두를 품은 지구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소박한것에 만족하며 일원으로써의 소임에 충실하게 살 수 있을까?

찰스 다윈의 진화론의 핵심은 "다양성의 확대를 통한 환경에의 적응"이라는, 다분히 생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양성의 확대를 위해서, 인간은 최대한 나와는 다른 상대를 찾아 짝짓기를 시도하려는 성향이 있으며, 또 최대한 다양한 상대와 짝짓기를 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놀랍게도 이 욕구는 대부분의 인간 사회의 제도에서 금기시 되고 있다!!)

이렇듯, 자연에서 진행되고 있는 찰스 다윈적 진화와 인간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을 향한 진화는 아주 다른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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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에 들어서면서 (혹은 6월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아베 총리는 한국에 대한 수출품목 규제를 선언했다.
한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생산되고 있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에 핵심으로 사용되는 필수품이라 타격이 적지 않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으며, 정부는 애써 침착한 듯이 행동하고 있지만, 각종 뉴스에서는 충격적, 당황, 긴장, 비난의 표정들이 보이고 있다.
소식을 접한 한국인들은 일본에 대한 감정적인 적대감을 드러내고,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작은 "보복"들을 꾸미고 있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인 셈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가 예견되었다는 식의 보도를 하고 있는데, 지난 수년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 인공섬의 강제 징용 노동 문제 -영화 군함도로 제작- 등으로 국내에서 일본에 대한 반감은 끊이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던 중, 박근혜 전 대통령이 갑자기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꺼내더니,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치유 재단을 설립하여 일본에서 기금을 납부하기로 했다. 하지만 위안부 피해자들 중 다수가 자신들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한일 정부가 임의로 처리한 것이라며 반발했다.
이 기사를 들었을 당시에도 나는 매우 분노했는데, 몇년동안 정의와 진실을 앞세워서 일본을 비난하던 정부가 하루 아침에 돌변해서 일본과 웃으며 악수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아도 한참을 속았구나, 정부가 국민들을 꼭두각시처럼 뒤에서 조종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 뜬금없고 국민 정서와는 동떨어진 정책이, 오히려 일본과의 관계를 더 돌이키기 어려운 수렁으로 빠뜨렸고 어쩌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에도 일조하지 않았나 싶다. (국민들의 신뢰를 져버린 하나의 실정이었다는 점에서)

문재인 정부에 들아와서는 온갖 적폐를 청산한다는 작업들이 진행되었는데, 그 가운데 일본 강제 징용 노동자들에 대한 배상 여부를 가르는 재판이 박근혜 정부 당시에 대법원에서 진행되었는데, 여기에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통해 부당하게 재판에 개입하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까지 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고 사법부의 개혁을 정당화시키는 좋은 명분이 되었다.

이 사태로 말미암아 결국은 강제 징용 노동자에 대한 배상이 정당하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졌고, 해당 기업들이 자진 배상하지 않아 국내에 출자한 법인의 자산을 강제로 매각까지 종용하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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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얼마나 비이성적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은 바로 이 시점이다.
과연 일본이 왜 분노의 극약 처방을 했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거기에 감정적인 대응을 하는 것이 이후에 얼마나 부끄러워할 행동인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30년 넘도록 정광태의 독도는 우리땅 노래 가사를 외우고 있으니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말하는 게 과연 얼마나 정당한가?

누군가 너를 좃같이 대하거든, 좃같이 대할 이유를 만들어 줘라.
짐승에겐 몽둥이가 약이다.
이런 말이 분노한 대중에게는 속시원한 속풀이는 될 수 있지만, 그게 진짜 행동으로 표출되는 순간에 우리는 그런 좃같은 인간이 되는 것이며, 인간을 짐승처럼 패는 무뢰배 같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지킬 건 지키고 배워서 아는 건 행동으로 옮기고, 설령 마지막 순간이라고 해도 밑바닥 본능은 드러내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위에 개인적으로 일본인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조금은 이해가 쉬울텐데, 그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까?
아베가 좃같이 행동한다고 해서, 그 친분있는 사람이 좃같이 변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오히려 아베가 좃같이 행동한다고해서, 수십년 친분이 있던 사람을 아베로 여기고 분노를 표출하는 그 사람이 진정 좃같은 사람 아니겠는가.

아마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어떤 식으로 해결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상처는 깊이 남을테고, 그 트라우마도 오래 갈테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헤쳐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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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문단에서 우리가 비 이성적이라고 했던 건 사실 나 자신에게 하는 소리였다.
왜냐하면 나도 분노했으니까.
하지만 몰랐다.
왜 아베가 그런 좃같은 짓을 저질렀는지.
그들의 입장에선 뭐가 억울하고 답답했는지.

그리고 솔직히 헷갈렸다.
매번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에 맺었던 한일 청구권 협정이 어쩌구 하는데, 그에 대해서는 무슨 어두운 기억 마냥 누구하나 제대로 설명해 주지도 않고 있는지.
느낌으로는 대충,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에게 지난 2차 대전 당시의 침탈에 대한 배상으로 얼마를 받고 모든 문제에 대해 퉁치기로 했나보다...정도였다.

그런데 자꾸 위안부 문제 꺼내면서 여기 저기에 소녀상 세우고, 거기에 강제 징용 노동 배상하라고 하면서 민간 기업의 자산까지 압류하려고 하니까 욱 했던 거 아닌가...
그럼 왜 판결은 그랗게 난 걸까?

강제 징용 노동의 문제 자체가 한일 청구권 협정 당시에는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문제라, 당시의 협정에는 포함되지 않았기에 새로이 판결을 내린 것이라는 설명이다.

한일 청구권 협정이라는 게 대체 어느 정도까지의 범위를 가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논란이 많을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에상이 가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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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대립과 분열
국가와 민족간의 분쟁과 반목
비 이성적인 감정의 분출과 소모

맨 처음에 언급했던, 인간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과는 동떨어진 모습이다.
조금이라도 달라진 점이 있을까?
어쩌면...있을지도 모르겠다.

찰스 다윈적 진화는 다양성의 확대이고, 이 다양성은 서로 다른 개체간의 짝짓기에 의해 발현되며, DNA를 통해 세대간에 전파가 됨으로써 유지된다.
찰스 다윈적 진화는 시간이 지날 수록 인류를 더 다양하게 만들 것이므로 개체들간의 이질감은 더 커질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분열이다. 엔트로피의 상승이고 자유도의 폭발이다.
대립과 분열, 나누고 떨어지고 구분한다.
지금의 세계도 그렇다. 소비에트 연방이 분화되었고, 다민족 국가에서의 독립 요구는 더 커진다.

하지만 인간이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를 위한 인간의 진화는 오히려 그 반대다.
찰스 다윈적 진화를 거스르는 방향이다.
시간이 지날 수록 더 어려워지는 일이다.
더욱더 이를 힘들게 많드는 결정적인 요인은, 세대간 전파가 안된다는 점이다.
인간이 꿈꾸는 세계는 개별 인간들이 꿈꾸는 세계의 총합이고, 개별 인간들이 꿈꾸는 세계는 각자의 노력과 고민 숙고의 결과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 새로 태어난 개체는 처음부터 이 과정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
다람쥐 챗바퀴 돌 듯, 모든 개체들이 동일한 노력을 하지만, 나아지는 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나마 이 노력을 조금은 쉽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건 "교육"이다.
아마도 수십세대 이상은 "무엇"을 교육하는 가에 대해 고민할 것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이다.
교육의 효율성, 그래서 세대를 거쳐감에 따라 더 효율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방법.
첫번째 세대간의 교육이 1의 효율을 가졌다면, 두번째 세대간의 교육에는 1.1의 효율이 나타날 수 있는 방법이 나와야 한다.
이제는 교육의 효율이 발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나타나야 하고, 이건 교육 방법의 메타, 혹은 교육 방법론 자체를 발전시킬 프레임에 대한 고민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 그 때에는 인간이 꿈꾸는 방식의 진화가 언제쯤 실현될 지 예측이라도 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아마도 우리는 지금 "무엇"을 교육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수준이지만, 그 "무엇" 조차도 아주 근시안적으로 선택되었다는 걸 감안하다면...)

2019년 6월 28일 금요일

긍정의 뇌 - 순한 맛

긍정의 뇌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어딘가에 독후감이나 요약을 기록했을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 어딘지 저 책의 저자가 직면한 상황과 닮은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저자는 뇌출혈이 일어난 당시와 그 후의 일들을 나름대로 세세히 묘사했다.
그리고 그런 비극적(!)인 상황에서 맞아하게 되는 특이한 경험들을 매우 매력적으로 묘사했는데, 자기와 타인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저하되면서 타인과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한 체험이나,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인지력이 상실되면서 새롭게 보이는 주변의 세상들이 있었던 듯 했다.
물론 말을 하거나 글을 읽거나 자신의 몸을 생각대로 움직이는 능력도 같이 저하되면서 겪게되는 어려움도 함께 묘사했었다.

그게 사실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저자는 마지막에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수술을 하게 되면 예전과 같은 상황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게 되면 새롭게 겪었던 경험을 다시는 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에 대한 딜레마였던 것 같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좀 어이없는 고민이지만, 겪어 보지 않고서야...


꽤 오랜시간 동안에 걸쳐, 나에게 일어난 변화는 매우 크다고 느꼈다.
큰 변화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났기에, 변화를 깨달은 건 시간이 많이 지난 후였다.
그 변화란 것은,
- 거의 모든 일에 대한 욕구가 현저하게 감소했다는 것.
- 매사가 귀찮아져서 어지간하면 자꾸 미루고 미루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끝내게 된다.
- 과거의 일들이 문득문득 떠오르는데, 지금까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일들도 많다.
- 그리고 그 일들에 대한 원인과 후회가 더 크고 명확하게 보인다.
- 두려움이 많아졌다.
- 그 두려움은 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많았다.
- 그리고 그런 두려움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데 많은 장애가 된다.
- 이런 두려움은 타인을 나처럼 생각하는 마음이 더 켜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 나에 대해서 더 객관적이 되었다. 자존심은 줄어들고 고집도 약해지고 화도 덜 낸다.
- 애초에 인생이나 삶에 대해 애착이 크지 않았었기에, 이런 변화가 더해져서 아주 쉽게 놓아버릴 수 있는 준비가 된 거 같다.


그래도 산 입이라 풀칠은 해야 하니 걱정이 생기긴 한다.
과연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다고 굶어서 죽을 수 있을까.
죽지도 못하고 아프기만 하면 어쩔까.
자고 일어났는데, 갑자기 모든 걸 잊어버려서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허리나 다리가 아파서 도저히 움직일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할까?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보면 결국은 기운을 내서 일어나야 한다는 건데, 그러고 싶은 욕구마저 바닥이 난 상태.
곰곰 생각하고 몇가지 알아보고 하니, 지금 먹고 있는 약으로 인한 부작용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려움증 때문에 항히스타민제를 주기적으로 복용하는데, 그 약의 부작용 가운데 내가 겪고 있는 증상은, 소화장애, 발기부전, 권태감, 피로, 시력감소...

아주 작은 약, 작은 효과, 작은 부작용, 하지만 오랜 시간 복용으로 누적된 부작용은 돌이키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사실, 약에 의한 부작용으로만 현재의 나를 설명할 수는 없다.
어쩌면 약에 의한 부작용은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많은 부분들이 일치하고 있어 의심을 해 볼만한 가치가 있으며,
이 약을 끊는 것 만으로도 애초의 상태로 회복이 가능하다면 정말 해 볼만하지 않겠는가.


제목에서 언급한 긍정의 뇌 이야기가 어쩌다 다른쪽으로 빠진 것 같은데, 그건 아니다.
막상 약을 끊고 면역력을 키우기 위한 다른 방법을 고민하려다보니 쓸데 없는 고민이 하나 생겼다.
지금의 상태가 썩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일부는 내가 전에 경험허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 줬다. 타인에 대한 이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조금은 여유롭고 인내심을 갖는 것, 세상에 대한 감사한 마음.

내가 예전의 상태로 돌아간다면 이런 것을 잃어버리진 않을까?
그랬었지 하는 기억이야 남아 있을테지만, 다시는 똑같은 자리에서 바라볼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이런 쓰잘데 없는 고민 때문에 순한 맛의 긍정의 뇌라는 제목을 지었던 것이다.


P.S.
긍정의 뇌 저자는 망설임이 있었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고,
그래서 책을 써서 내가 읽게 되었다.

2019년 5월 26일 일요일

관계의 위선

널리 퍼져 있는 x톡
특히 그 단체로 이야기하는 소위 단톡방의 오글거리는 위선은 볼 때마다 나를 좌절하게 만든다.

일정한 친분의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긴 하지만, 나와 그 구성원들과의 관계가 모두 같지 않듯이, 그들이 나머지 구성원들과의 관계가 동등하지도 않을텐데, 어떻게 그들이 나누는 대화와 그 반응들은 한결같은지...

누군가의 자랑거리같은 화제가 올라오면 칭찬과 축하, 그리고 언제나 똑같은 이모티콘들.
과연 그게 그들의 진심인건지, 실제로 만나면 모두가 실제로 할 수 있는 말들을 하는 것인지...

한편으로 보자면, 세상 사람이 모두 이와 같다면 미움도 증오도 없는 평화와 사랑과 믿음 뿐인 낙원일테지만, 어째서 내겐 그게 좋게 보아도 형식적인 인사치레이며 나쁘게 보면 본심을 숨긴 위선으로 보이는건지...
단톡방에서는 이렇듯 화목하고 행복하기만 한 듯이 하하호호하고 있지만, 정작 현실에서 만나면 안색이 싹 바뀌는 것은 아닐지...

내가 아무래도 많이 꼬였나 보다.
내가 생각해봐도, 그게 싫으면 마음에 있는대로 마음대로 그대로 얘기하는 게 좋겠는가?
- 따지고 들면 자랑할만도 못한거 아니냐,
- 겉보기만 그렇고 속은 반대 아니냐,
- 내가 듣기론 아니라던데,
- 지금은 몰라도 나중엔 후회한다
같은 악담들을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단톡방에서 꼬치꼬치 캐물어서 갑분싸 만드는 것도 좋은 게 아닐테고,
가만이나 있으면 중간이나 갈 일에 공연히 딴지 걸어 미운털 박힐 필요도 없으니,
적당히 분위기에 장단 맞춰주는 것이 제일 좋은 방편이지 싶다.
(읽씹 안읽씹 또한 예의가 아니라고 하니 뭐든 대답은 해야만 하니까...)

이러고보면, 단톡방의 위선처럼 보이거나 오글거리는 반응들 또한 각자가 가지고 있는 형식적인 반응이 대부분이 아닐까.

2019년 5월 12일 일요일

[의문] 지구의 중력은 불변인가 / 우주의 에너지 총합은 일정한가 / 블랙홀은 폭발할까

< 지구의 중력은 불변인가? >

간혹 우리들이 대단히 착각을 하고 있구나 싶은 것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크기에 대한 고정관념이다.
마치 인간의 크기가 어떤 크기의 표준인듯이 생각하는 것.
외계의 생명체가 인간과 비슷할 거라는 착각과 크기도 비슷할거라는 착각들.

그런데 왜 인간은 이 정도의 크기를 가지게 된 걸까?
이 크기와 이 정도의 질량은 지구라는 행성에 의해 조절된 결과가 아닐까?
물론 훨씬 더 작은 생명체와 훨씬 더 큰 생명체도 존재하지만...

그러고보면 과거에 살았던 공룡 따위의 생명체들은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크기를 가졌던 것이 참 의아하다.
혹시 과거의 지구는 지금보다 중력이 훨씬 작았던 것은 아닐까?



< 우주의 에너지 총합은 일정한가? >

빅뱅 혹은 인플레이션 이론에 의하면 우주의 최초 시작은 폭발과 함께였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관찰의 결과, 우주 곳곳에서 발견되는 우주 배경 복사는 이 에너지의 흔적이라고들 한다.
케플러의 관측으로 우주는 여전히 확장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러면, 애초 "빅뱅이 일어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에너지 = 현재 온 우주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라는 등식이 성립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총합은 일정한 우주의 공간이 늘어나고 있다면 단위 공간당 에너지는 감소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며, 만약 그 에너지의 감소가 전 우주에서 고르게 일어난다면, 단위 공간의 에너지 감소율로 우주의 팽창 속도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만약에 이런 에너지의 총합의 일정하지 않다면, 우주는 고립된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과 연결되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 블랙홀은 폭발할까? >

위의 의문에서 시작된 것인데, 혹시 그 빅뱅의 시초는 블랙홀의 폭발과 같은 것이 아닐까?
0에 가까운 부피와 무한대에 가까운 밀도, 이벤트 호라이즌, 어쩌면 빅뱅의 전 상태와도 같은 것이며, 폭발하면 그것은 또 우리 우주의 탄생과 같은 사건이 아닐까?

블랙홀이 폭발하면 우리 우주는 어떤 영향을 받을까?
어쩌면 이미 블랙홀은 폭발해서 또 하나의 평행 우주를 만들며 전혀 다른 공간에서 팽창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우주에도 블랙홀이 존재한다고 추정하고 있는데, 만약 그 블랙홀이 또 하나의 우주라면, 그 우주는 우리 우주와 에너지를 교환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은 이 의문의 답변은, 우리 우주가 다른 우주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의 답변이 될 것이며, 위의 질문 <우주의 에너지 총합은 일정한가>에 대한 답변을 추정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지 않을까?

2019년 4월 3일 수요일

삶에 익숙해지면 행복해질까

삶을 살기가 어렵다.
늘상은 아니더라도 가끔 넘어지고, 다치고, 까지고, 아프다.
그러면 슬프고 우울해지고 불행해진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누군가는 남들보다 더 나은 것을 행복으로, 누군가는 거침없는 자유를 행복으로 바랄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기본적인 행복의 시작은 불행의 제거가 아닐까 싶다.


실수하고, 그래서 미움받고 따돌림 당하고 위축되어 뒤쳐지고,
같은 일도 힘이 들어서 잘 하지 못하거나 하기를 주저하게 되어, 결국 실망하고 포기하고,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잘 하는게 뭔지 몰라서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만 하는 주변인이 되고,

이 모든 것들이 충분히 연습하고 반복해서 익숙해지면 극복이 되는 걸까.
그래서 이윽고 실수가 줄어들고 남들만큼 잘 하게되면 불행은 없어지는 걸까.
그럼 나는 두번의 삶을 살아야 하는걸까.
예습의 삶을 한번 살아야 행복해지는 걸까.


아니면,
실수하고, 그래서 미움받고 따돌림 당해도,
잘하지 못해서 실망스러워도,
인싸가 되지 못해도,
그래도 행복한 방법은 따로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