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뇌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어딘가에 독후감이나 요약을 기록했을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 어딘지 저 책의 저자가 직면한 상황과 닮은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저자는 뇌출혈이 일어난 당시와 그 후의 일들을 나름대로 세세히 묘사했다.
그리고 그런 비극적(!)인 상황에서 맞아하게 되는 특이한 경험들을 매우 매력적으로 묘사했는데, 자기와 타인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저하되면서 타인과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한 체험이나,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인지력이 상실되면서 새롭게 보이는 주변의 세상들이 있었던 듯 했다.
물론 말을 하거나 글을 읽거나 자신의 몸을 생각대로 움직이는 능력도 같이 저하되면서 겪게되는 어려움도 함께 묘사했었다.
그게 사실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저자는 마지막에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수술을 하게 되면 예전과 같은 상황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게 되면 새롭게 겪었던 경험을 다시는 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에 대한 딜레마였던 것 같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좀 어이없는 고민이지만, 겪어 보지 않고서야...
꽤 오랜시간 동안에 걸쳐, 나에게 일어난 변화는 매우 크다고 느꼈다.
큰 변화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났기에, 변화를 깨달은 건 시간이 많이 지난 후였다.
그 변화란 것은,
- 거의 모든 일에 대한 욕구가 현저하게 감소했다는 것.
- 매사가 귀찮아져서 어지간하면 자꾸 미루고 미루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끝내게 된다.
- 과거의 일들이 문득문득 떠오르는데, 지금까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일들도 많다.
- 그리고 그 일들에 대한 원인과 후회가 더 크고 명확하게 보인다.
- 두려움이 많아졌다.
- 그 두려움은 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많았다.
- 그리고 그런 두려움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데 많은 장애가 된다.
- 이런 두려움은 타인을 나처럼 생각하는 마음이 더 켜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 나에 대해서 더 객관적이 되었다. 자존심은 줄어들고 고집도 약해지고 화도 덜 낸다.
- 애초에 인생이나 삶에 대해 애착이 크지 않았었기에, 이런 변화가 더해져서 아주 쉽게 놓아버릴 수 있는 준비가 된 거 같다.
그래도 산 입이라 풀칠은 해야 하니 걱정이 생기긴 한다.
과연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다고 굶어서 죽을 수 있을까.
죽지도 못하고 아프기만 하면 어쩔까.
자고 일어났는데, 갑자기 모든 걸 잊어버려서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허리나 다리가 아파서 도저히 움직일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할까?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보면 결국은 기운을 내서 일어나야 한다는 건데, 그러고 싶은 욕구마저 바닥이 난 상태.
곰곰 생각하고 몇가지 알아보고 하니, 지금 먹고 있는 약으로 인한 부작용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려움증 때문에 항히스타민제를 주기적으로 복용하는데, 그 약의 부작용 가운데 내가 겪고 있는 증상은, 소화장애, 발기부전, 권태감, 피로, 시력감소...
아주 작은 약, 작은 효과, 작은 부작용, 하지만 오랜 시간 복용으로 누적된 부작용은 돌이키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사실, 약에 의한 부작용으로만 현재의 나를 설명할 수는 없다.
어쩌면 약에 의한 부작용은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많은 부분들이 일치하고 있어 의심을 해 볼만한 가치가 있으며,
이 약을 끊는 것 만으로도 애초의 상태로 회복이 가능하다면 정말 해 볼만하지 않겠는가.
제목에서 언급한 긍정의 뇌 이야기가 어쩌다 다른쪽으로 빠진 것 같은데, 그건 아니다.
막상 약을 끊고 면역력을 키우기 위한 다른 방법을 고민하려다보니 쓸데 없는 고민이 하나 생겼다.
지금의 상태가 썩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일부는 내가 전에 경험허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 줬다. 타인에 대한 이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조금은 여유롭고 인내심을 갖는 것, 세상에 대한 감사한 마음.
내가 예전의 상태로 돌아간다면 이런 것을 잃어버리진 않을까?
그랬었지 하는 기억이야 남아 있을테지만, 다시는 똑같은 자리에서 바라볼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이런 쓰잘데 없는 고민 때문에 순한 맛의 긍정의 뇌라는 제목을 지었던 것이다.
P.S.
긍정의 뇌 저자는 망설임이 있었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고,
그래서 책을 써서 내가 읽게 되었다.
2019년 6월 28일 금요일
2019년 5월 26일 일요일
관계의 위선
널리 퍼져 있는 x톡
특히 그 단체로 이야기하는 소위 단톡방의 오글거리는 위선은 볼 때마다 나를 좌절하게 만든다.
일정한 친분의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긴 하지만, 나와 그 구성원들과의 관계가 모두 같지 않듯이, 그들이 나머지 구성원들과의 관계가 동등하지도 않을텐데, 어떻게 그들이 나누는 대화와 그 반응들은 한결같은지...
누군가의 자랑거리같은 화제가 올라오면 칭찬과 축하, 그리고 언제나 똑같은 이모티콘들.
과연 그게 그들의 진심인건지, 실제로 만나면 모두가 실제로 할 수 있는 말들을 하는 것인지...
한편으로 보자면, 세상 사람이 모두 이와 같다면 미움도 증오도 없는 평화와 사랑과 믿음 뿐인 낙원일테지만, 어째서 내겐 그게 좋게 보아도 형식적인 인사치레이며 나쁘게 보면 본심을 숨긴 위선으로 보이는건지...
단톡방에서는 이렇듯 화목하고 행복하기만 한 듯이 하하호호하고 있지만, 정작 현실에서 만나면 안색이 싹 바뀌는 것은 아닐지...
내가 아무래도 많이 꼬였나 보다.
내가 생각해봐도, 그게 싫으면 마음에 있는대로 마음대로 그대로 얘기하는 게 좋겠는가?
- 따지고 들면 자랑할만도 못한거 아니냐,
- 겉보기만 그렇고 속은 반대 아니냐,
- 내가 듣기론 아니라던데,
- 지금은 몰라도 나중엔 후회한다
같은 악담들을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단톡방에서 꼬치꼬치 캐물어서 갑분싸 만드는 것도 좋은 게 아닐테고,
가만이나 있으면 중간이나 갈 일에 공연히 딴지 걸어 미운털 박힐 필요도 없으니,
적당히 분위기에 장단 맞춰주는 것이 제일 좋은 방편이지 싶다.
(읽씹 안읽씹 또한 예의가 아니라고 하니 뭐든 대답은 해야만 하니까...)
이러고보면, 단톡방의 위선처럼 보이거나 오글거리는 반응들 또한 각자가 가지고 있는 형식적인 반응이 대부분이 아닐까.
특히 그 단체로 이야기하는 소위 단톡방의 오글거리는 위선은 볼 때마다 나를 좌절하게 만든다.
일정한 친분의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긴 하지만, 나와 그 구성원들과의 관계가 모두 같지 않듯이, 그들이 나머지 구성원들과의 관계가 동등하지도 않을텐데, 어떻게 그들이 나누는 대화와 그 반응들은 한결같은지...
누군가의 자랑거리같은 화제가 올라오면 칭찬과 축하, 그리고 언제나 똑같은 이모티콘들.
과연 그게 그들의 진심인건지, 실제로 만나면 모두가 실제로 할 수 있는 말들을 하는 것인지...
한편으로 보자면, 세상 사람이 모두 이와 같다면 미움도 증오도 없는 평화와 사랑과 믿음 뿐인 낙원일테지만, 어째서 내겐 그게 좋게 보아도 형식적인 인사치레이며 나쁘게 보면 본심을 숨긴 위선으로 보이는건지...
단톡방에서는 이렇듯 화목하고 행복하기만 한 듯이 하하호호하고 있지만, 정작 현실에서 만나면 안색이 싹 바뀌는 것은 아닐지...
내가 아무래도 많이 꼬였나 보다.
내가 생각해봐도, 그게 싫으면 마음에 있는대로 마음대로 그대로 얘기하는 게 좋겠는가?
- 따지고 들면 자랑할만도 못한거 아니냐,
- 겉보기만 그렇고 속은 반대 아니냐,
- 내가 듣기론 아니라던데,
- 지금은 몰라도 나중엔 후회한다
같은 악담들을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단톡방에서 꼬치꼬치 캐물어서 갑분싸 만드는 것도 좋은 게 아닐테고,
가만이나 있으면 중간이나 갈 일에 공연히 딴지 걸어 미운털 박힐 필요도 없으니,
적당히 분위기에 장단 맞춰주는 것이 제일 좋은 방편이지 싶다.
(읽씹 안읽씹 또한 예의가 아니라고 하니 뭐든 대답은 해야만 하니까...)
이러고보면, 단톡방의 위선처럼 보이거나 오글거리는 반응들 또한 각자가 가지고 있는 형식적인 반응이 대부분이 아닐까.
2019년 5월 12일 일요일
[의문] 지구의 중력은 불변인가 / 우주의 에너지 총합은 일정한가 / 블랙홀은 폭발할까
< 지구의 중력은 불변인가? >
간혹 우리들이 대단히 착각을 하고 있구나 싶은 것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크기에 대한 고정관념이다.
마치 인간의 크기가 어떤 크기의 표준인듯이 생각하는 것.
외계의 생명체가 인간과 비슷할 거라는 착각과 크기도 비슷할거라는 착각들.
그런데 왜 인간은 이 정도의 크기를 가지게 된 걸까?
이 크기와 이 정도의 질량은 지구라는 행성에 의해 조절된 결과가 아닐까?
물론 훨씬 더 작은 생명체와 훨씬 더 큰 생명체도 존재하지만...
그러고보면 과거에 살았던 공룡 따위의 생명체들은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크기를 가졌던 것이 참 의아하다.
혹시 과거의 지구는 지금보다 중력이 훨씬 작았던 것은 아닐까?
< 우주의 에너지 총합은 일정한가? >
빅뱅 혹은 인플레이션 이론에 의하면 우주의 최초 시작은 폭발과 함께였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관찰의 결과, 우주 곳곳에서 발견되는 우주 배경 복사는 이 에너지의 흔적이라고들 한다.
케플러의 관측으로 우주는 여전히 확장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러면, 애초 "빅뱅이 일어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에너지 = 현재 온 우주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라는 등식이 성립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총합은 일정한 우주의 공간이 늘어나고 있다면 단위 공간당 에너지는 감소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며, 만약 그 에너지의 감소가 전 우주에서 고르게 일어난다면, 단위 공간의 에너지 감소율로 우주의 팽창 속도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만약에 이런 에너지의 총합의 일정하지 않다면, 우주는 고립된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과 연결되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 블랙홀은 폭발할까? >
위의 의문에서 시작된 것인데, 혹시 그 빅뱅의 시초는 블랙홀의 폭발과 같은 것이 아닐까?
0에 가까운 부피와 무한대에 가까운 밀도, 이벤트 호라이즌, 어쩌면 빅뱅의 전 상태와도 같은 것이며, 폭발하면 그것은 또 우리 우주의 탄생과 같은 사건이 아닐까?
블랙홀이 폭발하면 우리 우주는 어떤 영향을 받을까?
어쩌면 이미 블랙홀은 폭발해서 또 하나의 평행 우주를 만들며 전혀 다른 공간에서 팽창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우주에도 블랙홀이 존재한다고 추정하고 있는데, 만약 그 블랙홀이 또 하나의 우주라면, 그 우주는 우리 우주와 에너지를 교환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은 이 의문의 답변은, 우리 우주가 다른 우주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의 답변이 될 것이며, 위의 질문 <우주의 에너지 총합은 일정한가>에 대한 답변을 추정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지 않을까?
간혹 우리들이 대단히 착각을 하고 있구나 싶은 것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크기에 대한 고정관념이다.
마치 인간의 크기가 어떤 크기의 표준인듯이 생각하는 것.
외계의 생명체가 인간과 비슷할 거라는 착각과 크기도 비슷할거라는 착각들.
그런데 왜 인간은 이 정도의 크기를 가지게 된 걸까?
이 크기와 이 정도의 질량은 지구라는 행성에 의해 조절된 결과가 아닐까?
물론 훨씬 더 작은 생명체와 훨씬 더 큰 생명체도 존재하지만...
그러고보면 과거에 살았던 공룡 따위의 생명체들은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크기를 가졌던 것이 참 의아하다.
혹시 과거의 지구는 지금보다 중력이 훨씬 작았던 것은 아닐까?
< 우주의 에너지 총합은 일정한가? >
빅뱅 혹은 인플레이션 이론에 의하면 우주의 최초 시작은 폭발과 함께였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관찰의 결과, 우주 곳곳에서 발견되는 우주 배경 복사는 이 에너지의 흔적이라고들 한다.
케플러의 관측으로 우주는 여전히 확장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러면, 애초 "빅뱅이 일어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에너지 = 현재 온 우주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라는 등식이 성립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총합은 일정한 우주의 공간이 늘어나고 있다면 단위 공간당 에너지는 감소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며, 만약 그 에너지의 감소가 전 우주에서 고르게 일어난다면, 단위 공간의 에너지 감소율로 우주의 팽창 속도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만약에 이런 에너지의 총합의 일정하지 않다면, 우주는 고립된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과 연결되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 블랙홀은 폭발할까? >
위의 의문에서 시작된 것인데, 혹시 그 빅뱅의 시초는 블랙홀의 폭발과 같은 것이 아닐까?
0에 가까운 부피와 무한대에 가까운 밀도, 이벤트 호라이즌, 어쩌면 빅뱅의 전 상태와도 같은 것이며, 폭발하면 그것은 또 우리 우주의 탄생과 같은 사건이 아닐까?
블랙홀이 폭발하면 우리 우주는 어떤 영향을 받을까?
어쩌면 이미 블랙홀은 폭발해서 또 하나의 평행 우주를 만들며 전혀 다른 공간에서 팽창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우주에도 블랙홀이 존재한다고 추정하고 있는데, 만약 그 블랙홀이 또 하나의 우주라면, 그 우주는 우리 우주와 에너지를 교환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은 이 의문의 답변은, 우리 우주가 다른 우주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의 답변이 될 것이며, 위의 질문 <우주의 에너지 총합은 일정한가>에 대한 답변을 추정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지 않을까?
2019년 4월 3일 수요일
삶에 익숙해지면 행복해질까
삶을 살기가 어렵다.
늘상은 아니더라도 가끔 넘어지고, 다치고, 까지고, 아프다.
그러면 슬프고 우울해지고 불행해진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누군가는 남들보다 더 나은 것을 행복으로, 누군가는 거침없는 자유를 행복으로 바랄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기본적인 행복의 시작은 불행의 제거가 아닐까 싶다.
실수하고, 그래서 미움받고 따돌림 당하고 위축되어 뒤쳐지고,
같은 일도 힘이 들어서 잘 하지 못하거나 하기를 주저하게 되어, 결국 실망하고 포기하고,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잘 하는게 뭔지 몰라서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만 하는 주변인이 되고,
이 모든 것들이 충분히 연습하고 반복해서 익숙해지면 극복이 되는 걸까.
그래서 이윽고 실수가 줄어들고 남들만큼 잘 하게되면 불행은 없어지는 걸까.
그럼 나는 두번의 삶을 살아야 하는걸까.
예습의 삶을 한번 살아야 행복해지는 걸까.
아니면,
실수하고, 그래서 미움받고 따돌림 당해도,
잘하지 못해서 실망스러워도,
인싸가 되지 못해도,
그래도 행복한 방법은 따로 있는 걸까.
늘상은 아니더라도 가끔 넘어지고, 다치고, 까지고, 아프다.
그러면 슬프고 우울해지고 불행해진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누군가는 남들보다 더 나은 것을 행복으로, 누군가는 거침없는 자유를 행복으로 바랄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기본적인 행복의 시작은 불행의 제거가 아닐까 싶다.
실수하고, 그래서 미움받고 따돌림 당하고 위축되어 뒤쳐지고,
같은 일도 힘이 들어서 잘 하지 못하거나 하기를 주저하게 되어, 결국 실망하고 포기하고,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잘 하는게 뭔지 몰라서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만 하는 주변인이 되고,
이 모든 것들이 충분히 연습하고 반복해서 익숙해지면 극복이 되는 걸까.
그래서 이윽고 실수가 줄어들고 남들만큼 잘 하게되면 불행은 없어지는 걸까.
그럼 나는 두번의 삶을 살아야 하는걸까.
예습의 삶을 한번 살아야 행복해지는 걸까.
아니면,
실수하고, 그래서 미움받고 따돌림 당해도,
잘하지 못해서 실망스러워도,
인싸가 되지 못해도,
그래도 행복한 방법은 따로 있는 걸까.
2019년 3월 20일 수요일
용기와 뻔뻔함이 동의어?
참 뜬금 없게도 취업의 기회가 왔다.
과연 이게 무슨 경우일지 의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취업을 위한 인터뷰를 볼 의향이 있느냐는 식의 이메일을 받았다.
아마도 일반적인 경력직을 채용하는 절차로 보였고, 나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는 상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조만간 생계에 어려움이 예상되고 있어 초조하던 차에 정말 좋은 기회가 온 것이었다.
무조건 채용하는 것이 아니니 험난한 면접의 과정이 있겠지만...
그리고 사전 전화 통화 일정을 잡고, 이력서를 보내는 중에 많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제 아무리 글로벌 기업이라고 할지라도, 일하는 사람들은 다 우리나라 사람들.
그들 모두의 마인드마저 글로벌하리라 생각하는 건 무리였다.
글로벌 기업에서 일하면서 모든 사고방식이 글로벌해진다면, 그들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해서, 혹은 주말에 가족과 보내면서도 글로벌한 마인드로 생활하겠는가?
결국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한국인이다.
그런 한국인의 선입견, 관습, 사회적인 편견은 피하기 어렵다.
이제 중년의 나이로 입사를 해서, 한참 젊은 이들과 거리낌 없이 생활을 해야 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나의 편견은 나의 문제이고 내가 극복해야 하는 문제겠지만, 그들이 바라 볼 나의 모습에 대한 편견은 내가 어쩔 수 없는 문제다.
사실 그런 모든 편견만이 두려운건 아니다.
그게 편견의 문제를 넘어 실제로 현실적인 나의 문제가 되리라는 것이 더 두려웠다.
그래 그 편견들이 현실로 증명되는 것을...
어쩌면 굉장한 민폐가 아닐까 싶었다.
아직 취업이 결정된 것도 아니고, 인터뷰를 보지도 않았으니, 김치국부터 마시는게 아니겠냐고 하겠지만...
취업이 된 후도 걱정이지만, 취업의 과정에서 일일이 누군가의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아가며 인터뷰를 진행하게 하는 것이 큰 민폐가 아닐까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아니면 누군가 한명이 더 취업할 수 있으며, 누군가 한명이 더 인터뷰를 볼 여지가 있지 않겠는가.
사실 난 용기가 필요했다.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능력의 한계를 다 쓸 수 있는 용기,
지금과 같은 나태함이나 여유를 과감하게 버리고 스트레스를 버텨낼 용기,
내 자신의 편견과 세상의 편견에 의연해질 용기,
그리고 나 자신의 부족함을 마주 볼 용기.
종종 사회 초년생이나 취준생들에게 이런 비슷한 식의 용기를 요구하거나 북돋우기도 하는데, 과연 이게 용기일까?
어쩌면 이건 용기가 아니라 뻔뻔함이 아닐까?
능력도 없으면서 열심히 하겠다고 말하는 뻔뻔함.
할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할 수 있다고 소리치는 뻔뻔함.
그리고 안좋은 결과에 대해서는 최선은 다했다고 말하는 뻔뻔함.
결국 뻔뻔해질 용기였던 걸까?
어쩌면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인간상은 너무나 완벽하고 무결이었던게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이 자랑하는 그들의 결과물을 속으로 비웃고 있었으며, 나 자신도 그럴 수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부끄러워했으며, 나 자신의 실수가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결국 잘못된 것은 나의 능력도 아니고, 사람들의 시선이나 편견도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잘못된 기준점(?)에서 비롯되었던 것이 아닐까?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야.
아주 잘났다고 하는 인간도 극히 일부의 분야에서, 아주 짧은 시간동안만 그 빛을 발할 뿐이고, 그 분야와 시간을 벗어나고나면 그저 다르게 생기고 다르게 생각하는 한명의 사람일 뿐.
과연 이게 무슨 경우일지 의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취업을 위한 인터뷰를 볼 의향이 있느냐는 식의 이메일을 받았다.
아마도 일반적인 경력직을 채용하는 절차로 보였고, 나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는 상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조만간 생계에 어려움이 예상되고 있어 초조하던 차에 정말 좋은 기회가 온 것이었다.
무조건 채용하는 것이 아니니 험난한 면접의 과정이 있겠지만...
그리고 사전 전화 통화 일정을 잡고, 이력서를 보내는 중에 많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제 아무리 글로벌 기업이라고 할지라도, 일하는 사람들은 다 우리나라 사람들.
그들 모두의 마인드마저 글로벌하리라 생각하는 건 무리였다.
글로벌 기업에서 일하면서 모든 사고방식이 글로벌해진다면, 그들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해서, 혹은 주말에 가족과 보내면서도 글로벌한 마인드로 생활하겠는가?
결국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한국인이다.
그런 한국인의 선입견, 관습, 사회적인 편견은 피하기 어렵다.
이제 중년의 나이로 입사를 해서, 한참 젊은 이들과 거리낌 없이 생활을 해야 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나의 편견은 나의 문제이고 내가 극복해야 하는 문제겠지만, 그들이 바라 볼 나의 모습에 대한 편견은 내가 어쩔 수 없는 문제다.
사실 그런 모든 편견만이 두려운건 아니다.
그게 편견의 문제를 넘어 실제로 현실적인 나의 문제가 되리라는 것이 더 두려웠다.
그래 그 편견들이 현실로 증명되는 것을...
어쩌면 굉장한 민폐가 아닐까 싶었다.
아직 취업이 결정된 것도 아니고, 인터뷰를 보지도 않았으니, 김치국부터 마시는게 아니겠냐고 하겠지만...
취업이 된 후도 걱정이지만, 취업의 과정에서 일일이 누군가의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아가며 인터뷰를 진행하게 하는 것이 큰 민폐가 아닐까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아니면 누군가 한명이 더 취업할 수 있으며, 누군가 한명이 더 인터뷰를 볼 여지가 있지 않겠는가.
사실 난 용기가 필요했다.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능력의 한계를 다 쓸 수 있는 용기,
지금과 같은 나태함이나 여유를 과감하게 버리고 스트레스를 버텨낼 용기,
내 자신의 편견과 세상의 편견에 의연해질 용기,
그리고 나 자신의 부족함을 마주 볼 용기.
종종 사회 초년생이나 취준생들에게 이런 비슷한 식의 용기를 요구하거나 북돋우기도 하는데, 과연 이게 용기일까?
어쩌면 이건 용기가 아니라 뻔뻔함이 아닐까?
능력도 없으면서 열심히 하겠다고 말하는 뻔뻔함.
할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할 수 있다고 소리치는 뻔뻔함.
그리고 안좋은 결과에 대해서는 최선은 다했다고 말하는 뻔뻔함.
결국 뻔뻔해질 용기였던 걸까?
어쩌면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인간상은 너무나 완벽하고 무결이었던게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이 자랑하는 그들의 결과물을 속으로 비웃고 있었으며, 나 자신도 그럴 수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부끄러워했으며, 나 자신의 실수가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결국 잘못된 것은 나의 능력도 아니고, 사람들의 시선이나 편견도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잘못된 기준점(?)에서 비롯되었던 것이 아닐까?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야.
아주 잘났다고 하는 인간도 극히 일부의 분야에서, 아주 짧은 시간동안만 그 빛을 발할 뿐이고, 그 분야와 시간을 벗어나고나면 그저 다르게 생기고 다르게 생각하는 한명의 사람일 뿐.
2019년 3월 6일 수요일
나에게서 벗어나면 조금 더 행복해질까
유튜브에서 음악을 한 곡 들었다.
그리고 그 음악을 듣고 사람들이 쓴 댓글을 보았다.
누군가의 댓글.
'A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나의 ??때가 생각난다. 그때의 나는 어쩌구 저쩌구....'
그 댓글을 보면서 나랑 비슷하구나, 혹은 나는 이랬었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참으로 많이, 자주, 모든 타인들의 사건, 사고, 행위, 말, 생각, 느낌을 듣거나 보면서, 거기에 나를 대입시켜 보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지독하게 나에 대해 집착하고 있는건 아닐까 싶다.
그런 대입으로 나는 종종 나 자신을 연민하고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고 싶어지기도 하며 긍지를 얻고 자신감을 가지며 뽐내고 싶어지기도 한다.
정작 나 자신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나 자신이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이 말이다.
결국 나는 현실의 내가 싫어서, 나를 증오하는 대신 현실을 증오하고, 타인의 이야기나 매스미디어의 꾸며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위로하기만 한다.
하지만 한발만 밖으로 내디뎌도 현실은 심비오트처럼 내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나는 이내 절규하면서 나만의 공간으로 숨어버린다.
현실과 정신의 분리된 상황은, 정신의 위로만으로 안도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끈질긴 현실에 의해 언제나 침범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공존하는 불안정한 상태이다.
이젠 정신승리만으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처절하게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궁극적으로 현실과 완전히 합체하여 끊임없이 받는 상처를 치료하고 아물기를 반복하며 살아가거나, 얄팍한 자기 위로를 넘어서는 깊은 각성이 필요하다.
흔히들 명상하고 수행하고 각성하고 깨달음을 얻기를 원하지만, 구체적으로 그게 무엇인지 실체는 모르고 있는 듯 하다.
나라고 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인간들의 왜 그것을 원하는지는 어렴풋이 알겠다.
아니, 내가 왜 오랜 세월동안 그것을 원했는지 이제는 조금 알겠다.
난 어리석으며, 사람들과 어울려 삶으로써 발생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몰랐고, 내 마음의 두려움과 슬픔과 괴로움 외로움이 싫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의 두려움과 슬픔 괴로움과 외로움을 조금은 덜어낼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건, 나에게서 나를 조금 덜어내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음악을 듣고 사람들이 쓴 댓글을 보았다.
누군가의 댓글.
'A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나의 ??때가 생각난다. 그때의 나는 어쩌구 저쩌구....'
그 댓글을 보면서 나랑 비슷하구나, 혹은 나는 이랬었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참으로 많이, 자주, 모든 타인들의 사건, 사고, 행위, 말, 생각, 느낌을 듣거나 보면서, 거기에 나를 대입시켜 보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지독하게 나에 대해 집착하고 있는건 아닐까 싶다.
그런 대입으로 나는 종종 나 자신을 연민하고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고 싶어지기도 하며 긍지를 얻고 자신감을 가지며 뽐내고 싶어지기도 한다.
정작 나 자신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나 자신이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이 말이다.
결국 나는 현실의 내가 싫어서, 나를 증오하는 대신 현실을 증오하고, 타인의 이야기나 매스미디어의 꾸며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위로하기만 한다.
하지만 한발만 밖으로 내디뎌도 현실은 심비오트처럼 내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나는 이내 절규하면서 나만의 공간으로 숨어버린다.
현실과 정신의 분리된 상황은, 정신의 위로만으로 안도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끈질긴 현실에 의해 언제나 침범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공존하는 불안정한 상태이다.
이젠 정신승리만으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처절하게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궁극적으로 현실과 완전히 합체하여 끊임없이 받는 상처를 치료하고 아물기를 반복하며 살아가거나, 얄팍한 자기 위로를 넘어서는 깊은 각성이 필요하다.
흔히들 명상하고 수행하고 각성하고 깨달음을 얻기를 원하지만, 구체적으로 그게 무엇인지 실체는 모르고 있는 듯 하다.
나라고 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인간들의 왜 그것을 원하는지는 어렴풋이 알겠다.
아니, 내가 왜 오랜 세월동안 그것을 원했는지 이제는 조금 알겠다.
난 어리석으며, 사람들과 어울려 삶으로써 발생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몰랐고, 내 마음의 두려움과 슬픔과 괴로움 외로움이 싫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의 두려움과 슬픔 괴로움과 외로움을 조금은 덜어낼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건, 나에게서 나를 조금 덜어내는 것이 아닐까.
2019년 3월 1일 금요일
[상상] 인간의 본질
우연히 유튜브에서 게임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았는데, 제목은 SOMA.
지구가 소행성과의 충돌로 인간들이 모두 전멸한 가운데, 인간의 의식을 디지털로 보관하던 연구의 성과로 지구에 남은 건, 일부 인간들의 의식과 이를 행동에 옮길 수 있게 만들어진 로봇. 마지막에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기 위한 지구 엑소더스...
이 영상을 보면서, 예전에 이현세님의 만화 아마겟돈이 떠 올랐다.
그 만화의 줄거리는 생각나지 않는데(ㅠ.ㅠ), 흥미로운 가설을 전제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던 기억은 난다.
지적 존재가 우주의 여러 행성에 실험적으로 생명을 배양하고 그 생명체들이 행성에서 어떻게 생존해 나가는지 관찰하고 있는데, 지구에서는 공룡과 인간이 그 실험적인 생명체의 대표적인 예라고...
개인적으로는, 일부의 인간들이 강력하게 믿는 "영혼"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입장인데, 한편으로는 영혼이 존재한다는 증거들이 있어서 참 곤란해하곤 한다.
물론 "영혼"이 있다는 것을 반박할만한 증거는 더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건 마치 빛이 파동이냐 입자냐의 논쟁과도 유사해 보인다.)
만약 위에서 소개한 SOMA와 비슷한 예를 들어서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 설명하면 어떨까?
가령 진보한 지적 존재가 자신들의 의식을 우주에 퍼뜨려 나가던 중에, 지구에서는 인간이라는 종에게 심어진 것이 현재의 인간들을 만들어 냈다고.
인간이 본래 타고난 본성과 신체적인 제약의 문제로 인해서, 심어진 의식들은 꽤 많이 방해를 받거나 100% 발현할 수 없는데, 간혹 돌연변이처럼 인체의 제약을 풀어낸 인간들이 나타나면서 과학 기술들이 급격한 발전을 하게 되었다고.
일부의 인간들은 이 의식들의 힘에 이끌려 자신을 각성시키는 수행법을 찾기 위해 고된 수행을 하지만, 이를 해낸 인간은 극소수이며, 오히려 실패하여 비참한 결과를 맞는 경우가 많아 대대적인 의식의 각성은 억제되고 있다.
인간들이 어렴풋이 느끼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고민은, 이처럼 인간의 신체와 의식이 서로 다른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잘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상태와 비슷한 것.
한편, 신체의 주인인 인간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의식들은 오히려 연가시와 같은 기생충이며, 인간들의 일평생을 지배하고 노예처럼 부리는 악질적인 존재이다.
이 의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유일하게 인간 자신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며,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방법이다.
지구가 소행성과의 충돌로 인간들이 모두 전멸한 가운데, 인간의 의식을 디지털로 보관하던 연구의 성과로 지구에 남은 건, 일부 인간들의 의식과 이를 행동에 옮길 수 있게 만들어진 로봇. 마지막에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기 위한 지구 엑소더스...
이 영상을 보면서, 예전에 이현세님의 만화 아마겟돈이 떠 올랐다.
그 만화의 줄거리는 생각나지 않는데(ㅠ.ㅠ), 흥미로운 가설을 전제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던 기억은 난다.
지적 존재가 우주의 여러 행성에 실험적으로 생명을 배양하고 그 생명체들이 행성에서 어떻게 생존해 나가는지 관찰하고 있는데, 지구에서는 공룡과 인간이 그 실험적인 생명체의 대표적인 예라고...
개인적으로는, 일부의 인간들이 강력하게 믿는 "영혼"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입장인데, 한편으로는 영혼이 존재한다는 증거들이 있어서 참 곤란해하곤 한다.
물론 "영혼"이 있다는 것을 반박할만한 증거는 더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건 마치 빛이 파동이냐 입자냐의 논쟁과도 유사해 보인다.)
만약 위에서 소개한 SOMA와 비슷한 예를 들어서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 설명하면 어떨까?
가령 진보한 지적 존재가 자신들의 의식을 우주에 퍼뜨려 나가던 중에, 지구에서는 인간이라는 종에게 심어진 것이 현재의 인간들을 만들어 냈다고.
인간이 본래 타고난 본성과 신체적인 제약의 문제로 인해서, 심어진 의식들은 꽤 많이 방해를 받거나 100% 발현할 수 없는데, 간혹 돌연변이처럼 인체의 제약을 풀어낸 인간들이 나타나면서 과학 기술들이 급격한 발전을 하게 되었다고.
일부의 인간들은 이 의식들의 힘에 이끌려 자신을 각성시키는 수행법을 찾기 위해 고된 수행을 하지만, 이를 해낸 인간은 극소수이며, 오히려 실패하여 비참한 결과를 맞는 경우가 많아 대대적인 의식의 각성은 억제되고 있다.
인간들이 어렴풋이 느끼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고민은, 이처럼 인간의 신체와 의식이 서로 다른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잘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상태와 비슷한 것.
한편, 신체의 주인인 인간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의식들은 오히려 연가시와 같은 기생충이며, 인간들의 일평생을 지배하고 노예처럼 부리는 악질적인 존재이다.
이 의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유일하게 인간 자신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며,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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