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공석이 된 대통령직의 보궐선거가 치루어졌고,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셨다.
사회가 다변화 되고, 국민들의 욕구와 바램도 또한 다양해졌다.
예전에 비해 훨씬 많은 후보들이 선거에 출마를 했지만, 누구 하나 나의 마음과 같은 후보는 없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국민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단지, 자신의 생각과 가장 많이 비슷한 후부에게 투표하거나, 생각이 아주 다른 후보만은 피해서 투표했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지난 9년(?)의 두 정권에 대한 느낌과 10년을 뛰어넘어 다시 이어지는 진보(?) 정권에 대한 느낌이 교차했다.
MB와 503(탄핵 후에 구속 수감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수인번호가 503번 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부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하해서 표현할 때 503호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누군가에게는 아픈 일일 수도 있지만...너무 긴 호칭보다 503호가 간결하고 쓰기에 편한 건 사실이다.)의 정권이 보여준 실적이나 결과물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경제 성장률은 바닥이 어디인지 모르게 내려가고, 출산률도 점점 낮아지고 있다.
청년층의 실업률은 회복되지 못하고, 빈부의 격차는 최악의 수준이다.
엎친데 덮친걸까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내외의 악재들로 여기 저기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들의 고통이 전체 국민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구제역, 태풍, 메르스, AI, 세월호)
이 모든 것을 지난 MB와 503호 정권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대부분의 재난이나 흐름이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거니와 모범 답안이 없는 문제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아쉽게도, 정부의 대응이 잘 되었더라면 피해의 규모나 정도는 줄일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아마도 새로운 정부라고 이런 문제들을 능수능란하게 해결할 수는 없으리라고 본다.
단지, 좀 완화만 시킬 수 있어도 잘 하는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다.
흔히 조직에서 하는 말로,
"너를 잘되게 하지는 못해도, 잘 되지 못하게 막을 수는 있다."는 말이 있다.
보통은 중간 관리자 정도 되는 사람들이, 악에 받치게 되면 쓰게 되는 말이다.
사실 이런 말을 듣게 되면 매우 섬찟한 상황이다.
일이 잘되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공을 많이 들여야 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며, 또 주변에서의 도움도 있어야 한다.
그나마 주변에서 도움은 주지 못하더라도, 딴지 걸지만 않아도 감사한게 현실이다.
열심히 하려는 사람, 일을 성사시키려는 사람의 옆에서 딴지만 걸어도 그들의 성공을 한참 뒤로 미룰 수 있는 것이다.
어쩐지 MB와 503호는 대한민국이 하는 일에 딴지를 걸었던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들 자신은 딴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랬다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새로 선출된 문재인 대통령은 모쪼록 대한민국이 하는 일에 많은 도움을 주길 바란다.
하지만 제 아무리 대통령의 권력이 막강하다 해도 일을 성사시키는 것에는 많은 힘이 필요하다.
더욱이 대한민국이 좋은 나라, 잘사는 나라, 공정한 나라가 되는 그런 일은 정말 많이 힘든 일이다. 이런 일은 모두가 힘을 모아 일심동체가 되어도 여간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삐끗해서 딴 마음을 가지거나 딴지를 건다면 대한민국은 곤두박질을 치게 될 것이다.
잘되게 하기는 매우 어려우니 모두가 힘을 모아야 겨우 겨우 되겠지만,
극히 소수의 몇몇만 딴 마음을 가지고 작정한다면 잘 되지 못하게 막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일 테니까.
성공의 길은 좁고, 멸망의 길은 넓은 것이 바로 이같은 이유가 아니겠는가.
2017년 5월 17일 수요일
2017년 4월 18일 화요일
설명하지 말아라
Do not explain.
이게 무슨 뜻인지 처음에는 몰랐다.
설명하지 말라니...
타인에게 나 혼자 아는 척하며 설명해 주지 말라는 뜻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 자신에게 설명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대체 왜?
설명하지 말라는 이 말이, 말 조심해야 하는 4가지 금언(禁言) 중 하나였을까?
(나머지는, 불평하지 말아라. 남을 해하는 말을 하지 말아라. 받아들여지지 않는 충고 하지 말아라.)
사람들에겐 크고 작은 고난이 일어나곤 한다.
그게 자기 자신에게만 국한 된 일인 경우도 있고, 여러 사람과 함께 겪는 어려움인 경우도 있으며, 나에겐 고난이지만 상대방에게 행운인 경우도 있다.
그 고난이 스스로 해결이 가능하다면 별 문제가 될 것이 없겠지만,
해결하기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 한 경우에는, 고난 자체보다 더 큰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알면 쉬운데 모르면 어려운 문제들...)
이럴 경우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의 스트레스를 낮추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주로 그 고난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파악하려는 것인데,
원인을 알고 나면, 해결책을 알 수도 있고, 해결 방법은 없다 해도, 다음에 같은 어려움에 빠지지 않을 예방책을 세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러하듯...은 아니고, 인간의 지혜가 충분하지 못한 까닭에 제대로 된 원인을 알기란 매우 어렵기 마련이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낮추려는 마음의 움직임은 끊임없이 작동하고...
결국은 자기 자신만이 인정할 만한 원인을 내세우고는 그걸 자기 자신에게 설명한다.
이런 설명은, 자신의 스트레스를 낮추어서 긴장 상태를 완화하거나 종결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게 궁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왜? 원인이 틀렸기 때문에.
스스로 긴장의 끈을 풀러 놓았기에, 다시 원인을 찾을 동력은 절대적으로 감소.
그리고 이 고난을 끝난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하지만 우리는 제대로 된 원인도 찾지 못하며, 일어난 일의 현상을 똑바로 보지도 못한다.
스스로가 해결했다고는 생각하지만 사실은 문제를 회피한 셈이 되는 것이다.
2014년 4월 16일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세월호 사고는 온 국민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고, 유가족들에게는 평생의 한으로 남을 만한 사고였다.
그리고 정부는 어찌된 일인지 세월호 사고에 대한 조사를 꺼리는 듯한 행태를 넘어서, 조사를 방해했다는 정황의 증언들도 이어졌다.
어쩌면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사고에서 보여준 이해할 수 없는 대응 방식때문에 탄핵되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당시에 유가족은 물론이고 온 국민들이 동시에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를 낮추기 위해 설명이 필요했다.
왜 사고가 발생한 것인지, 왜 적극적으로 구조하지 않은 것인지, 왜 대통령은 재빨리 대응하지 못한 것인지, 왜 사고 조사를 방해한 것인지, 왜 유가족들은 시체팔이로 모함한 것인지...
하지만 대통령이 탄핵되고 여러 관료들이 구속 기소되었음에도 여전히 설명은 부족했다.
어쩌면 청와대 굿판, 밀회설, 마약 복용설, 미용 시술설 등등은 세월호 사고에 대한 대통령의 늑장 대응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되었던 각각의 예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와 따지고 보면 참 허무맹랑한 것일 수도 있으나, 청와대가 꽁꽁 숨기고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개 국민이 자신의 스트레스를 낮출 수 있는 방법은 이런 음모론을 제기하고 그것에 모든 것을 맞추어서 스스로 만족하는 것 뿐이었으리라.
만약 진실이라면 빈틈이 없이 완벽하게 모든 것이 설명될 것이다.
하지만 설명하기 위해 내 놓은 대국민 담화문은 거짓이었기에, 충분히 설명되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조각들과는 전혀 맞지 않는 모순을 낳았을 뿐이다.
언젠가부터, 고급 시계가 남성의 부와 지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부각하게 되었고, 명품 백이 여성의 가치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런 것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런 걸 차고 들고 있는 사람들은, 저 시계와 저 백이 자기 자신인 것처럼 생각하나 보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 그 심리는 모르겠으나 참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로 나 자신의 가치를 보이려고 하는 사람들.
아마도 저들 중 대대수는 명품 시계나 명품 백이 없으면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리라, 저들은 자기 자신이 너무 보잘 것 없음을 잘 알기에 물질적인 것들로 자기를 채우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내 자신에게 물었다.
그래서 너는 네가 가지고 있는 볼품 없는 옷차림이 아무렇지도 않냐.
여기 저기 긁히고 낡아서 오래된 저 차가 당당하냐.
...사실 그렇지 않았다.
부끄럽다. 너무 오래되어서 여기 저기 녹이 슬고, 찌그러져도 고칠 수 없는 내 차가 부끄럽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어둡고 답답한 옷이 부끄럽고, 아직도 목까지 올라오는 신발이 부끄럽다.
그럼 네가 명품 시계와 명품 백을 가진 이들을 흠잡았던 건, 그들의 공허함을 알았던 것이 아니라, 네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것에 대한 부러움의 다른 표현이 아니었던거냐.
어쩌면... 그래 어쩌면 나는 나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설명하고 있었던건지도 모르겠다.
아주 어릴 적, 우리 집은 가난했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매우 우울하고, 어쩌면 매우 찌질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살림이 좀 펴게 되었고, 난 예전보다는 많은 걸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난 내가 가진 것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표현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난 그 때의 내 행동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때의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바라보는 허영심의 그들, 사치의 그녀들은 어쩌면 내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었을지 모르겠다.
내가 증오하는 나의 모습이 떠오르는 게 싫어서, 내 자신에게 그럴듯한 설명으로 위안을 했을지도...
이게 무슨 뜻인지 처음에는 몰랐다.
설명하지 말라니...
타인에게 나 혼자 아는 척하며 설명해 주지 말라는 뜻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 자신에게 설명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대체 왜?
설명하지 말라는 이 말이, 말 조심해야 하는 4가지 금언(禁言) 중 하나였을까?
(나머지는, 불평하지 말아라. 남을 해하는 말을 하지 말아라. 받아들여지지 않는 충고 하지 말아라.)
사람들에겐 크고 작은 고난이 일어나곤 한다.
그게 자기 자신에게만 국한 된 일인 경우도 있고, 여러 사람과 함께 겪는 어려움인 경우도 있으며, 나에겐 고난이지만 상대방에게 행운인 경우도 있다.
그 고난이 스스로 해결이 가능하다면 별 문제가 될 것이 없겠지만,
해결하기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 한 경우에는, 고난 자체보다 더 큰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알면 쉬운데 모르면 어려운 문제들...)
이럴 경우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의 스트레스를 낮추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주로 그 고난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파악하려는 것인데,
원인을 알고 나면, 해결책을 알 수도 있고, 해결 방법은 없다 해도, 다음에 같은 어려움에 빠지지 않을 예방책을 세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러하듯...은 아니고, 인간의 지혜가 충분하지 못한 까닭에 제대로 된 원인을 알기란 매우 어렵기 마련이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낮추려는 마음의 움직임은 끊임없이 작동하고...
결국은 자기 자신만이 인정할 만한 원인을 내세우고는 그걸 자기 자신에게 설명한다.
이런 설명은, 자신의 스트레스를 낮추어서 긴장 상태를 완화하거나 종결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게 궁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왜? 원인이 틀렸기 때문에.
스스로 긴장의 끈을 풀러 놓았기에, 다시 원인을 찾을 동력은 절대적으로 감소.
그리고 이 고난을 끝난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하지만 우리는 제대로 된 원인도 찾지 못하며, 일어난 일의 현상을 똑바로 보지도 못한다.
스스로가 해결했다고는 생각하지만 사실은 문제를 회피한 셈이 되는 것이다.
2014년 4월 16일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세월호 사고는 온 국민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고, 유가족들에게는 평생의 한으로 남을 만한 사고였다.
그리고 정부는 어찌된 일인지 세월호 사고에 대한 조사를 꺼리는 듯한 행태를 넘어서, 조사를 방해했다는 정황의 증언들도 이어졌다.
어쩌면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사고에서 보여준 이해할 수 없는 대응 방식때문에 탄핵되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당시에 유가족은 물론이고 온 국민들이 동시에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를 낮추기 위해 설명이 필요했다.
왜 사고가 발생한 것인지, 왜 적극적으로 구조하지 않은 것인지, 왜 대통령은 재빨리 대응하지 못한 것인지, 왜 사고 조사를 방해한 것인지, 왜 유가족들은 시체팔이로 모함한 것인지...
하지만 대통령이 탄핵되고 여러 관료들이 구속 기소되었음에도 여전히 설명은 부족했다.
어쩌면 청와대 굿판, 밀회설, 마약 복용설, 미용 시술설 등등은 세월호 사고에 대한 대통령의 늑장 대응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되었던 각각의 예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와 따지고 보면 참 허무맹랑한 것일 수도 있으나, 청와대가 꽁꽁 숨기고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개 국민이 자신의 스트레스를 낮출 수 있는 방법은 이런 음모론을 제기하고 그것에 모든 것을 맞추어서 스스로 만족하는 것 뿐이었으리라.
만약 진실이라면 빈틈이 없이 완벽하게 모든 것이 설명될 것이다.
하지만 설명하기 위해 내 놓은 대국민 담화문은 거짓이었기에, 충분히 설명되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조각들과는 전혀 맞지 않는 모순을 낳았을 뿐이다.
언젠가부터, 고급 시계가 남성의 부와 지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부각하게 되었고, 명품 백이 여성의 가치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런 것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런 걸 차고 들고 있는 사람들은, 저 시계와 저 백이 자기 자신인 것처럼 생각하나 보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 그 심리는 모르겠으나 참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로 나 자신의 가치를 보이려고 하는 사람들.
아마도 저들 중 대대수는 명품 시계나 명품 백이 없으면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리라, 저들은 자기 자신이 너무 보잘 것 없음을 잘 알기에 물질적인 것들로 자기를 채우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내 자신에게 물었다.
그래서 너는 네가 가지고 있는 볼품 없는 옷차림이 아무렇지도 않냐.
여기 저기 긁히고 낡아서 오래된 저 차가 당당하냐.
...사실 그렇지 않았다.
부끄럽다. 너무 오래되어서 여기 저기 녹이 슬고, 찌그러져도 고칠 수 없는 내 차가 부끄럽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어둡고 답답한 옷이 부끄럽고, 아직도 목까지 올라오는 신발이 부끄럽다.
그럼 네가 명품 시계와 명품 백을 가진 이들을 흠잡았던 건, 그들의 공허함을 알았던 것이 아니라, 네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것에 대한 부러움의 다른 표현이 아니었던거냐.
어쩌면... 그래 어쩌면 나는 나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설명하고 있었던건지도 모르겠다.
아주 어릴 적, 우리 집은 가난했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매우 우울하고, 어쩌면 매우 찌질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살림이 좀 펴게 되었고, 난 예전보다는 많은 걸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난 내가 가진 것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표현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난 그 때의 내 행동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때의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바라보는 허영심의 그들, 사치의 그녀들은 어쩌면 내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었을지 모르겠다.
내가 증오하는 나의 모습이 떠오르는 게 싫어서, 내 자신에게 그럴듯한 설명으로 위안을 했을지도...
2017년 4월 15일 토요일
성(性) 소수자들에 대한 인식에 대해
최근에는 우리 사회에서도 성소수자들에 대한 논의가 조금씩이지만 널리 퍼지고 있다.
나 또한 기존의 고지식함을 버리지도 못했고,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만큼 내 생활에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대다수의 의견을 따라가고 있었다.
언젠가 친구들과 동성애에 관한 의견을 나눈 적이 있는데, 친구들의 의견은 "치료할 수 없는" 것이니 인정해야 하지 않겠냐 정도였다.
친구들에 비해 더 고지식했던 나는, 그들의 자녀가 동성애자라면 어찌 하겠느냐는, 짖궂은 질문을 했지만, "치료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답을 들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치료"한다는 의미 자체가 당사자들에게는 매우 결례이고 부적절한 단어임을 알게 되었다. 이는 마치 "엑스맨"이라는 영화에서 돌연변이 치료에 관한 논쟁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이런 토론(?) 후에, 집중적이지는 않지만 간간이 접하게 되는 관련된 뉴스나 이슈들에 대해 조금은 더 관심을 가져 보았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본 자료에 따르면, 실제로 정확한 성(性)의 구별이 어려운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건 정신적,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의학적인 기준으로도 그렇다는 것인데, 성염색체의 이상, 성기의 존재나 발달 상태, 성호르몬의 이상 등으로 남녀의 구분이 모호한 경우들이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사람들은 매우 드문 경우라는 생각, 성(性)에 대한 사회적 금기 때문에 적극적인 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기에(치료가 가능은 한 것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하는지 알기도 어렵다고 한다.
더불어 각 사회는 성(性)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들이 있는데, 이들은 남자 혹은 여자의 둘 중 하나가 되어야만 하기에 반강제로 자신의 성향과는 다른 성역할을 맡아야만 하기도 한다.
일단, 이런 현실에 대해 인식을 하고 받아들이게 되니, 앞서의 동성애에 대한 문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해결이 된다.
그 무엇보다 인간을 남자와 여자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더 유연하게 성적인 구분도 연속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남성적인, 중석적인, 여성적인 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미래에는 누군가에게 "성(性)적 편향성"을 묻는 것 자체가 "정치적 편향성"을 묻는 것보다 더 결례가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의 상태에서는 많은 장벽들이 존재하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서양에서는 엄격한 종교의 잣대들이 이중적이거나 모호한 성에 대해 인정하기를 꺼리게 만드는 요소이며, 동양에서는 전통적인 유교적 남녀의 구별이 이를 가로 막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남성"이 지게되는 "국방의 의무"로 인해서, 이와 같은 까다로운 문제의 논의가 더욱 어려워진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고, 조금 더 용기있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하고, 조금 더 많은 사건들을 겪고 나면,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겠는가.
P.S.
어째서 조물주는 이런 조화를 부렸을까?
자연의 모든 생명을 암과 수로 나누었으면서, 어째서 인간도 모두 암과 수로 나누지 않았던 것일까?
나 또한 기존의 고지식함을 버리지도 못했고,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만큼 내 생활에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대다수의 의견을 따라가고 있었다.
언젠가 친구들과 동성애에 관한 의견을 나눈 적이 있는데, 친구들의 의견은 "치료할 수 없는" 것이니 인정해야 하지 않겠냐 정도였다.
친구들에 비해 더 고지식했던 나는, 그들의 자녀가 동성애자라면 어찌 하겠느냐는, 짖궂은 질문을 했지만, "치료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답을 들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치료"한다는 의미 자체가 당사자들에게는 매우 결례이고 부적절한 단어임을 알게 되었다. 이는 마치 "엑스맨"이라는 영화에서 돌연변이 치료에 관한 논쟁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이런 토론(?) 후에, 집중적이지는 않지만 간간이 접하게 되는 관련된 뉴스나 이슈들에 대해 조금은 더 관심을 가져 보았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본 자료에 따르면, 실제로 정확한 성(性)의 구별이 어려운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건 정신적,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의학적인 기준으로도 그렇다는 것인데, 성염색체의 이상, 성기의 존재나 발달 상태, 성호르몬의 이상 등으로 남녀의 구분이 모호한 경우들이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사람들은 매우 드문 경우라는 생각, 성(性)에 대한 사회적 금기 때문에 적극적인 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기에(치료가 가능은 한 것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하는지 알기도 어렵다고 한다.
더불어 각 사회는 성(性)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들이 있는데, 이들은 남자 혹은 여자의 둘 중 하나가 되어야만 하기에 반강제로 자신의 성향과는 다른 성역할을 맡아야만 하기도 한다.
일단, 이런 현실에 대해 인식을 하고 받아들이게 되니, 앞서의 동성애에 대한 문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해결이 된다.
그 무엇보다 인간을 남자와 여자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더 유연하게 성적인 구분도 연속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남성적인, 중석적인, 여성적인 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미래에는 누군가에게 "성(性)적 편향성"을 묻는 것 자체가 "정치적 편향성"을 묻는 것보다 더 결례가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의 상태에서는 많은 장벽들이 존재하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서양에서는 엄격한 종교의 잣대들이 이중적이거나 모호한 성에 대해 인정하기를 꺼리게 만드는 요소이며, 동양에서는 전통적인 유교적 남녀의 구별이 이를 가로 막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남성"이 지게되는 "국방의 의무"로 인해서, 이와 같은 까다로운 문제의 논의가 더욱 어려워진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고, 조금 더 용기있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하고, 조금 더 많은 사건들을 겪고 나면,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겠는가.
P.S.
어째서 조물주는 이런 조화를 부렸을까?
자연의 모든 생명을 암과 수로 나누었으면서, 어째서 인간도 모두 암과 수로 나누지 않았던 것일까?
2017년 2월 6일 월요일
이상(理想) 예상(豫想) 기대(企待)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는 말
그 '보고 싶은 것'이 이상(理想)과 같은 뜻이 아닐까?
젊은 남녀라면 누구나 자신의 이상형에 대해 술술 나열 하는 것.
상대방에게 한눈에 반한다는 것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이상형에 부합하는 어떤 면을 상대방에게서 보는 순간에 일어난 일.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이상형을 조각해서, 그 조각이 사람으로 태어나도록 신께 부탁을 한 인물.
그렇다면 과연 이런 이상형은 대체 언제 어떻게 형성이 되는 것일까?
유아기부터 무의식에 축적된 경험들?
전생의 인연?
좀 더 확대해 보면, 이성에 대한 이상형뿐이 아니라 매우 많은 곳에서 이런 이상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의 학교, 친구, 직장, 직장의 상사와 동료 부하직원, 배우자의 부모와 가족들...
내가 살 집, 자동차, 가족의 모습, 노후의 모습...
정치적인 이상,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 바람직한 공동체와 경제 구조...
인간의 존재와 신의 존재, 우주와 지구...
과연 이런 이상형은 어떻게 구축이 되는 것일까.
좀 더 확대해 보면, 이성에 대한 이상형뿐이 아니라 매우 많은 곳에서 이런 이상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의 학교, 친구, 직장, 직장의 상사와 동료 부하직원, 배우자의 부모와 가족들...
내가 살 집, 자동차, 가족의 모습, 노후의 모습...
정치적인 이상,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 바람직한 공동체와 경제 구조...
인간의 존재와 신의 존재, 우주와 지구...
과연 이런 이상형은 어떻게 구축이 되는 것일까.
절망해야 희망이 생긴다.
이문열 <사람의 아들>
"이제 너는 신앙할 수 있다, 절망했으므로. 살 수 있다. 죽었으므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을까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마저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내 기준에는 참 나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좋은 사람들도 많고,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도 많지만, 많이 다르고, 이해할 수 없고, 껄끄럽고 피하고 싶은 사람들도 많다.
아니 그런 사람들이 더 많다.
과연 이런 사람들 모두와 함께 어울려서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한 적이 많았다.
아직도 많이 두렵다.
하지만 내가 많이 절망할 수록 희망이 보일거라는 '희망'이 생기기도 한다.
내가 겪을 수 있는 만큼의 한계까지 절망하고 나면, 비로소 그 자리에서 딛고 일어설 수 있으리라는 희망
간혹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부러워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의 배경에는, 그 사람은 애초에 두려움을 가지지 않고 있는 행운아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고, 나는 두려움을 많이 가지고 있는 불운아라는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지만 그건 내가 사람을 그만큼 잘 몰랐다는 증거일 것이다.
모르면 두렵운 법.
부딛혀 알아갈 수록 상상이 만들어낸 두려움도 없어질 것이며, 실망할 만큼 알고, 절망할 만큼 알았다면 충분히 알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무지로 인한 상상의 두려움도 없을 것이기에 비로소 당당해질 수 있지 않겠는가.
"이제 너는 신앙할 수 있다, 절망했으므로. 살 수 있다. 죽었으므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을까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마저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내 기준에는 참 나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좋은 사람들도 많고,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도 많지만, 많이 다르고, 이해할 수 없고, 껄끄럽고 피하고 싶은 사람들도 많다.
아니 그런 사람들이 더 많다.
과연 이런 사람들 모두와 함께 어울려서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한 적이 많았다.
아직도 많이 두렵다.
하지만 내가 많이 절망할 수록 희망이 보일거라는 '희망'이 생기기도 한다.
내가 겪을 수 있는 만큼의 한계까지 절망하고 나면, 비로소 그 자리에서 딛고 일어설 수 있으리라는 희망
간혹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부러워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의 배경에는, 그 사람은 애초에 두려움을 가지지 않고 있는 행운아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고, 나는 두려움을 많이 가지고 있는 불운아라는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지만 그건 내가 사람을 그만큼 잘 몰랐다는 증거일 것이다.
모르면 두렵운 법.
부딛혀 알아갈 수록 상상이 만들어낸 두려움도 없어질 것이며, 실망할 만큼 알고, 절망할 만큼 알았다면 충분히 알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무지로 인한 상상의 두려움도 없을 것이기에 비로소 당당해질 수 있지 않겠는가.
2017년 1월 24일 화요일
타고난 것에 대한 집착
아직까지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이 진행 중이고, 최순실 등의 국정 농단에 대한 특검의 조사와 재판이 진행 중이다.
처음엔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던 촛불 집회의 열기가 뜨겁더니, 탄핵안이 통과하면서 촛불 집회는 서서히 열기가 가라앚은 반면,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태극기 집회가 다시 열기를 뿜어 내고 있는 듯 하다.
반대편은 일명 박사모라고 불리우는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들의 모임이 주축이 되어서 대통령 탄핵안 등에 반대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
아직까지 탄핵을 찬성하는 쪽이 더 우세하다 보이기도 하고, 언론에서의 보도도 다분히 대통령의 반대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에게 알려지는 사실들이라는 것이 주로 언론에 크게 의지하는 바, 지금까지 언론을 통해 알려진 사실들로만 판단해 보면 대통령의 잘못이 많아 보이며, 일반 정치인이라면 유죄 선고가 가능할 것이라 보이지만, 대통령이라는 지위의 특수성으로 이를 모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사실이 정말 사실이 아닐 수도 있으며, 자신이 믿는 것에 따라 받아 들이는 것과 버리는 것이 달라지니, 어진간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진실을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그 모든 가능성에 대해 인정을 하고 수용한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하는 원칙은 존재하지 않나 싶다.
바로 "인간"에 대한 존중이다.
그들의 의견이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들의 말이, 행동이, 생각이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런 불확실한 자신의 생각, 말, 행동에 대해 의심할 수도 있으며, 누군가는 틀림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우리 보통 인간들의 행태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다른 생각, 말, 행동을 한다고 해도, 그들의 존재를 증오하고 파괴하려 하면 안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종북좌파'니 '수구꼴통'이니 하는 인신공격성의 발언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말은 상대방의 의견에 대한 논리적 반박이 불가능하다고 느꼈을 때, 도저히 상대방이 제기한 나의 오류를 변론할 수 없을 때 내뱉게 되는 마지막 "발악"과도 같은 것이다.
이건 상대방의 생각이나 행동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너의 존재는 글러 먹었으니, 네가 하는 모든 말과 생각이 다 글러 먹었다"는 독선적인 선언인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논리적인 설명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찌된 일인지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생각의 회로는 작동을 중지해 버리고, <선과 악>이라는 경직된 이분법으로 나뉘게 되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의 모습이다.
이게 진짜 인간들인가 싶을 정도로, 파블로프의 개처럼, 단어 하나에 즉각적인 반응을 하고 있다.
참 많이 고민해 보았다.
왜 그런 것일까?
안그래야겠다고 다짐하고 냉정해지려고 하지만, 나와 반대되는 정치적인 의견을 듣고 있노라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스트레스가 상승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요즘은, 일부러라도 정치와 관련된 방송이나 인터넷 사이트는 조금씩 줄여가고 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것들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인간이 저지를 수 밖에 없는 모순된 것들에 대해서 나의 사고 회로는 작동을 멈춘다. 귀여운 강아지와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소와 돼지는 도살해서 먹어야 하는 모순에 대해서 눈을 가리고 침묵한다.
남자로 태어났기에 남자로써 누리는 권리는 당연하다 여기면서, 그 권리를 위해 여성이 희생해야 하는 것에는 외면한다.
동양인으로 태어났기에, 서구 문화 중심의 사회 문화적 현상에 대해 본능적인 반감 혹은 무비판적인 호감도 존재한다.
한국인으로 태어났기에, 일본은 미워해야 할 국가이고, 공산주의는 무조건 나쁜 것이다.
모씨(某氏) 집안에 태어났기에, 나의 조상님은 훌륭한 분이시고 조상님을 위해 제사를 지내야 하고, 명절마다 성묘와 차례를 지내야 한다.
누구의 아들 혹은 딸로 태어났기에, 누구에게 복종해야 하며, 효도해야 하며, 평생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야 한다.
나의 선택과는 무관한 것들,
태어나면서부터 내게 주어지는 것들,
그것이 부드럽고 따뜻한 담요인지 혹은 습하고 차가우며 거친 거적떼기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것에 의지해 살아났으며, 그것이 전부인 세상을 살았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확실한, 그리고 어쩌면 유일한 버팀목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들에서 벗어나야 내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판단을 멈추어버린 세계는, 우리를 보호해주는 단단한 껍질의 알이지만,
우리의 세계를 제한하는 장벽이기도 한 것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자신의 알을 깨뜨려야 한다.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사람들은 참 많은 알껍질 속에 살고 있는 듯 하다.
유교라는 관습의 알
반공이라는 이념의 알
적어도 이 두개의 알을 깨기 전에는 대한민국의 발전은 요원해 보인다.
처음엔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던 촛불 집회의 열기가 뜨겁더니, 탄핵안이 통과하면서 촛불 집회는 서서히 열기가 가라앚은 반면,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태극기 집회가 다시 열기를 뿜어 내고 있는 듯 하다.
반대편은 일명 박사모라고 불리우는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들의 모임이 주축이 되어서 대통령 탄핵안 등에 반대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
아직까지 탄핵을 찬성하는 쪽이 더 우세하다 보이기도 하고, 언론에서의 보도도 다분히 대통령의 반대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에게 알려지는 사실들이라는 것이 주로 언론에 크게 의지하는 바, 지금까지 언론을 통해 알려진 사실들로만 판단해 보면 대통령의 잘못이 많아 보이며, 일반 정치인이라면 유죄 선고가 가능할 것이라 보이지만, 대통령이라는 지위의 특수성으로 이를 모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사실이 정말 사실이 아닐 수도 있으며, 자신이 믿는 것에 따라 받아 들이는 것과 버리는 것이 달라지니, 어진간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진실을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그 모든 가능성에 대해 인정을 하고 수용한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하는 원칙은 존재하지 않나 싶다.
바로 "인간"에 대한 존중이다.
그들의 의견이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들의 말이, 행동이, 생각이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런 불확실한 자신의 생각, 말, 행동에 대해 의심할 수도 있으며, 누군가는 틀림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우리 보통 인간들의 행태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다른 생각, 말, 행동을 한다고 해도, 그들의 존재를 증오하고 파괴하려 하면 안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종북좌파'니 '수구꼴통'이니 하는 인신공격성의 발언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말은 상대방의 의견에 대한 논리적 반박이 불가능하다고 느꼈을 때, 도저히 상대방이 제기한 나의 오류를 변론할 수 없을 때 내뱉게 되는 마지막 "발악"과도 같은 것이다.
이건 상대방의 생각이나 행동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너의 존재는 글러 먹었으니, 네가 하는 모든 말과 생각이 다 글러 먹었다"는 독선적인 선언인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논리적인 설명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찌된 일인지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생각의 회로는 작동을 중지해 버리고, <선과 악>이라는 경직된 이분법으로 나뉘게 되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의 모습이다.
이게 진짜 인간들인가 싶을 정도로, 파블로프의 개처럼, 단어 하나에 즉각적인 반응을 하고 있다.
참 많이 고민해 보았다.
왜 그런 것일까?
안그래야겠다고 다짐하고 냉정해지려고 하지만, 나와 반대되는 정치적인 의견을 듣고 있노라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스트레스가 상승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요즘은, 일부러라도 정치와 관련된 방송이나 인터넷 사이트는 조금씩 줄여가고 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것들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인간이 저지를 수 밖에 없는 모순된 것들에 대해서 나의 사고 회로는 작동을 멈춘다. 귀여운 강아지와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소와 돼지는 도살해서 먹어야 하는 모순에 대해서 눈을 가리고 침묵한다.
남자로 태어났기에 남자로써 누리는 권리는 당연하다 여기면서, 그 권리를 위해 여성이 희생해야 하는 것에는 외면한다.
동양인으로 태어났기에, 서구 문화 중심의 사회 문화적 현상에 대해 본능적인 반감 혹은 무비판적인 호감도 존재한다.
한국인으로 태어났기에, 일본은 미워해야 할 국가이고, 공산주의는 무조건 나쁜 것이다.
모씨(某氏) 집안에 태어났기에, 나의 조상님은 훌륭한 분이시고 조상님을 위해 제사를 지내야 하고, 명절마다 성묘와 차례를 지내야 한다.
누구의 아들 혹은 딸로 태어났기에, 누구에게 복종해야 하며, 효도해야 하며, 평생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야 한다.
나의 선택과는 무관한 것들,
태어나면서부터 내게 주어지는 것들,
그것이 부드럽고 따뜻한 담요인지 혹은 습하고 차가우며 거친 거적떼기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것에 의지해 살아났으며, 그것이 전부인 세상을 살았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확실한, 그리고 어쩌면 유일한 버팀목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들에서 벗어나야 내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판단을 멈추어버린 세계는, 우리를 보호해주는 단단한 껍질의 알이지만,
우리의 세계를 제한하는 장벽이기도 한 것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자신의 알을 깨뜨려야 한다.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사람들은 참 많은 알껍질 속에 살고 있는 듯 하다.
유교라는 관습의 알
반공이라는 이념의 알
적어도 이 두개의 알을 깨기 전에는 대한민국의 발전은 요원해 보인다.
2017년 1월 18일 수요일
야만과 문명의 사이 - 인간에 대한 이해의 기준
아직까지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은 진행 중이다.
그리고 최순실, 정유라, 세월호 사건과 관련한 특별검사의 수사도 진행 중이다.
특별검사 이전에 진행되었던 검찰의 수사 결과로 기소된 사건들은 현재 재판 중이다.
지난 두달여 시간 동안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많은 국민, 시민, 이웃들에게도 그렇지만 특히 나 개인에게 있어서도 그러했다.
나 자신의 내적인 변화는 어쩌면 다른 사람들의 변화와도 잇닿아 있을지 모르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개개인의 내적 변화들이 어떤 공통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졌을 때, 그 사회가 변화해가지 않나 싶다.
그러면 나의 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처음엔 많은 놀라움, 분노, 증오와 같은 것 들이었다.
새로이 알려진 것들에 대한 놀라움이고, 그들의 편향적이고 치졸하며 사리사욕에 눈 먼것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생겼다.
다음엔 자기 반성이었다.
결국은 우리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반성, 그것을 미리 알아채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었다는 반성.
그리고는 두려움.
이렇게까지 왔는데, 그 무거운 죄를 지었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이 이번에도 아무런 벌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가끔의 의심.
법정에선 피의자들, 헌번재판소에 출석한 증인들의 반박이 계속되고 있다고 하자, 어쩌면 저들은 정말 죄가 없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번에도 언론에 속아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들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
또 다시 허무함.
과연 나라는 하나의 개인이 알 수 있는 진실의 깊이는 얼마나 되는 것일까.
우리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며, 아는 만큼에 따라 진실과 거젓이 바뀌며, 선악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과연 우리가 진실을 논하는 것, 선악을 판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에 대한 허무함.
그리고 다시 의문점들
어째서 자연계와는 대치되는 <정의> <평등>과 같은 가치를 인간이 추구하는 것인지, 그게 정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
그것이 자연계의 흐름이라면,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들이 애초에 "가치"로써 추구되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렇게 힘들여 추구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자연스럽지 못한 가치를 힘 들여가며 추구하는 인간.
하지만 자연스럽지 않기에 그 가치는 자꾸 스러져가고,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각성하고 힘쓰고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리라.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아주 원초적인 시원으로부터 출발하면 명확하게 보이는 듯 하다.
태초에 별 경쟁력이 없던 하나의 종족으로써의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 수를 늘려야 했던 것이고, 보다 많은 수의 개체들이 어울려서 살아나가며 그 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간의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규율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평등>과 <정의>는 매우 중요한 가치가 되었을 것임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생존에 필연적인 가치마저도, 자연스러운 본능적 욕구에 의해서 자꾸만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스스로를 가장 영리한 종족이라 칭하는 인간들이, 스스로를 지켜줄 가치를 허물어 버리는 우매한 짓을 반복하는 것이다.
과연 이게 가장 영리한 종족이 하는 짓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다양한 종교와 믿음을 통해서 존재하지도 않는 영혼, 자아를 얘기하고 윤회와 해탈을 말하며, 진화와 각성을 믿는다.
스스로가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소명을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자기 신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맞닥들인 이 사건을 통해서도 극명하게 드러난 바, 인간은 아직도 야만의 때를 벗어나지 못한 원숭이에 가까운 존재일 때름이다.
지금까지 이룬 문명의 업적을 증거로 내민다 한들, 딱 그만큼만 야만에서 벗어난 정도일 뿐이다.
인간이 과연 야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지만, 스스로에 대한 근거 없는 자존감은 자기 자신의 발판을 딛지 못함과 같기에, 자신에 대한 인식의 불가함과 발전의 불가함만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최순실, 정유라, 세월호 사건과 관련한 특별검사의 수사도 진행 중이다.
특별검사 이전에 진행되었던 검찰의 수사 결과로 기소된 사건들은 현재 재판 중이다.
지난 두달여 시간 동안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많은 국민, 시민, 이웃들에게도 그렇지만 특히 나 개인에게 있어서도 그러했다.
나 자신의 내적인 변화는 어쩌면 다른 사람들의 변화와도 잇닿아 있을지 모르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개개인의 내적 변화들이 어떤 공통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졌을 때, 그 사회가 변화해가지 않나 싶다.
그러면 나의 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처음엔 많은 놀라움, 분노, 증오와 같은 것 들이었다.
새로이 알려진 것들에 대한 놀라움이고, 그들의 편향적이고 치졸하며 사리사욕에 눈 먼것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생겼다.
다음엔 자기 반성이었다.
결국은 우리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반성, 그것을 미리 알아채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었다는 반성.
그리고는 두려움.
이렇게까지 왔는데, 그 무거운 죄를 지었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이 이번에도 아무런 벌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가끔의 의심.
법정에선 피의자들, 헌번재판소에 출석한 증인들의 반박이 계속되고 있다고 하자, 어쩌면 저들은 정말 죄가 없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번에도 언론에 속아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들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
또 다시 허무함.
과연 나라는 하나의 개인이 알 수 있는 진실의 깊이는 얼마나 되는 것일까.
우리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며, 아는 만큼에 따라 진실과 거젓이 바뀌며, 선악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과연 우리가 진실을 논하는 것, 선악을 판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에 대한 허무함.
그리고 다시 의문점들
어째서 자연계와는 대치되는 <정의> <평등>과 같은 가치를 인간이 추구하는 것인지, 그게 정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
그것이 자연계의 흐름이라면,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들이 애초에 "가치"로써 추구되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렇게 힘들여 추구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자연스럽지 못한 가치를 힘 들여가며 추구하는 인간.
하지만 자연스럽지 않기에 그 가치는 자꾸 스러져가고,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각성하고 힘쓰고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리라.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아주 원초적인 시원으로부터 출발하면 명확하게 보이는 듯 하다.
태초에 별 경쟁력이 없던 하나의 종족으로써의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 수를 늘려야 했던 것이고, 보다 많은 수의 개체들이 어울려서 살아나가며 그 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간의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규율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평등>과 <정의>는 매우 중요한 가치가 되었을 것임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생존에 필연적인 가치마저도, 자연스러운 본능적 욕구에 의해서 자꾸만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스스로를 가장 영리한 종족이라 칭하는 인간들이, 스스로를 지켜줄 가치를 허물어 버리는 우매한 짓을 반복하는 것이다.
과연 이게 가장 영리한 종족이 하는 짓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다양한 종교와 믿음을 통해서 존재하지도 않는 영혼, 자아를 얘기하고 윤회와 해탈을 말하며, 진화와 각성을 믿는다.
스스로가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소명을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자기 신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맞닥들인 이 사건을 통해서도 극명하게 드러난 바, 인간은 아직도 야만의 때를 벗어나지 못한 원숭이에 가까운 존재일 때름이다.
지금까지 이룬 문명의 업적을 증거로 내민다 한들, 딱 그만큼만 야만에서 벗어난 정도일 뿐이다.
인간이 과연 야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지만, 스스로에 대한 근거 없는 자존감은 자기 자신의 발판을 딛지 못함과 같기에, 자신에 대한 인식의 불가함과 발전의 불가함만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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