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15일 토요일

성(性) 소수자들에 대한 인식에 대해

최근에는 우리 사회에서도 성소수자들에 대한 논의가 조금씩이지만 널리 퍼지고 있다.

나 또한 기존의 고지식함을 버리지도 못했고,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만큼 내 생활에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대다수의 의견을 따라가고 있었다.


언젠가 친구들과 동성애에 관한 의견을 나눈 적이 있는데, 친구들의 의견은 "치료할 수 없는" 것이니 인정해야 하지 않겠냐 정도였다.

친구들에 비해 더 고지식했던 나는, 그들의 자녀가 동성애자라면 어찌 하겠느냐는, 짖궂은 질문을 했지만, "치료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답을 들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치료"한다는 의미 자체가 당사자들에게는 매우 결례이고 부적절한 단어임을 알게 되었다. 이는 마치 "엑스맨"이라는 영화에서 돌연변이 치료에 관한 논쟁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이런 토론(?) 후에, 집중적이지는 않지만 간간이 접하게 되는 관련된 뉴스나 이슈들에 대해 조금은 더 관심을 가져 보았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본 자료에 따르면, 실제로 정확한 성(性)의 구별이 어려운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건 정신적,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의학적인 기준으로도 그렇다는 것인데, 성염색체의 이상, 성기의 존재나 발달 상태, 성호르몬의 이상 등으로 남녀의 구분이 모호한 경우들이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사람들은 매우 드문 경우라는 생각, 성(性)에 대한 사회적 금기 때문에 적극적인 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기에(치료가 가능은 한 것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하는지 알기도 어렵다고 한다.

더불어 각 사회는 성(性)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들이 있는데, 이들은 남자 혹은 여자의 둘 중 하나가 되어야만 하기에 반강제로 자신의 성향과는 다른 성역할을 맡아야만 하기도 한다.


일단, 이런 현실에 대해 인식을 하고 받아들이게 되니, 앞서의 동성애에 대한 문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해결이 된다.

그 무엇보다 인간을 남자와 여자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더 유연하게 성적인 구분도 연속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남성적인, 중석적인, 여성적인 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미래에는 누군가에게 "성(性)적 편향성"을 묻는 것 자체가 "정치적 편향성"을 묻는 것보다 더 결례가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의 상태에서는 많은 장벽들이 존재하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서양에서는 엄격한 종교의 잣대들이 이중적이거나 모호한 성에 대해 인정하기를 꺼리게 만드는 요소이며, 동양에서는 전통적인 유교적 남녀의 구별이 이를 가로 막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남성"이 지게되는 "국방의 의무"로 인해서, 이와 같은 까다로운 문제의 논의가 더욱 어려워진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고, 조금 더 용기있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하고, 조금 더 많은 사건들을 겪고 나면,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겠는가.


P.S.
어째서 조물주는 이런 조화를 부렸을까?
자연의 모든 생명을 암과 수로 나누었으면서, 어째서 인간도 모두 암과 수로 나누지 않았던 것일까?

2017년 2월 6일 월요일

이상(理想) 예상(豫想) 기대(企待)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는 말

그 '보고 싶은 것'이 이상(理想)과 같은 뜻이 아닐까?


젊은 남녀라면 누구나 자신의 이상형에 대해 술술 나열 하는 것.

상대방에게 한눈에 반한다는 것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이상형에 부합하는 어떤 면을 상대방에게서 보는 순간에 일어난 일.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이상형을 조각해서, 그 조각이 사람으로 태어나도록 신께 부탁을 한 인물.


그렇다면 과연 이런 이상형은 대체 언제 어떻게 형성이 되는 것일까?

유아기부터 무의식에 축적된 경험들?

전생의 인연?


좀 더 확대해 보면, 이성에 대한 이상형뿐이 아니라 매우 많은 곳에서 이런 이상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의 학교, 친구, 직장, 직장의 상사와 동료 부하직원, 배우자의 부모와 가족들...

내가 살 집, 자동차, 가족의 모습, 노후의 모습...

정치적인 이상,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 바람직한 공동체와 경제 구조...

인간의 존재와 신의 존재, 우주와 지구...


과연 이런 이상형은 어떻게 구축이 되는 것일까.

절망해야 희망이 생긴다.

이문열 <사람의 아들>
"이제 너는 신앙할 수 있다, 절망했으므로. 살 수 있다. 죽었으므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을까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마저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내 기준에는 참 나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좋은 사람들도 많고,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도 많지만, 많이 다르고, 이해할 수 없고, 껄끄럽고 피하고 싶은 사람들도 많다.

아니 그런 사람들이 더 많다.


과연 이런 사람들 모두와 함께 어울려서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한 적이 많았다.

아직도 많이 두렵다.


하지만 내가 많이 절망할 수록 희망이 보일거라는 '희망'이 생기기도 한다.

내가 겪을 수 있는 만큼의 한계까지 절망하고 나면, 비로소 그 자리에서 딛고 일어설 수 있으리라는 희망


간혹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부러워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의 배경에는, 그 사람은 애초에 두려움을 가지지 않고 있는 행운아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고, 나는 두려움을 많이 가지고 있는 불운아라는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지만 그건 내가 사람을 그만큼 잘 몰랐다는 증거일 것이다.

모르면 두렵운 법.

부딛혀 알아갈 수록 상상이 만들어낸 두려움도 없어질 것이며, 실망할 만큼 알고, 절망할 만큼 알았다면 충분히 알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무지로 인한 상상의 두려움도 없을 것이기에 비로소 당당해질 수 있지 않겠는가.

2017년 1월 24일 화요일

타고난 것에 대한 집착

아직까지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이 진행 중이고, 최순실 등의 국정 농단에 대한 특검의 조사와 재판이 진행 중이다.

처음엔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던 촛불 집회의 열기가 뜨겁더니, 탄핵안이 통과하면서 촛불 집회는 서서히 열기가 가라앚은 반면,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태극기 집회가 다시 열기를 뿜어 내고 있는 듯 하다.

반대편은 일명 박사모라고 불리우는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들의 모임이 주축이 되어서 대통령 탄핵안 등에 반대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

아직까지 탄핵을 찬성하는 쪽이 더 우세하다 보이기도 하고, 언론에서의 보도도 다분히 대통령의 반대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에게 알려지는 사실들이라는 것이 주로 언론에 크게 의지하는 바, 지금까지 언론을 통해 알려진 사실들로만 판단해 보면 대통령의 잘못이 많아 보이며, 일반 정치인이라면 유죄 선고가 가능할 것이라 보이지만, 대통령이라는 지위의 특수성으로 이를 모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사실이 정말 사실이 아닐 수도 있으며, 자신이 믿는 것에 따라 받아 들이는 것과 버리는 것이 달라지니, 어진간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진실을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그 모든 가능성에 대해 인정을 하고 수용한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하는 원칙은 존재하지 않나 싶다.
바로 "인간"에 대한 존중이다.
그들의 의견이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들의 말이, 행동이, 생각이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런 불확실한 자신의 생각, 말, 행동에 대해 의심할 수도 있으며, 누군가는 틀림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우리 보통 인간들의 행태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다른 생각, 말, 행동을 한다고 해도, 그들의 존재를 증오하고 파괴하려 하면 안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종북좌파'니 '수구꼴통'이니 하는 인신공격성의 발언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말은 상대방의 의견에 대한 논리적 반박이 불가능하다고 느꼈을 때, 도저히 상대방이 제기한 나의 오류를 변론할 수 없을 때 내뱉게 되는 마지막 "발악"과도 같은 것이다.
이건 상대방의 생각이나 행동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너의 존재는 글러 먹었으니, 네가 하는 모든 말과 생각이 다 글러 먹었다"는 독선적인 선언인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논리적인 설명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찌된 일인지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생각의 회로는 작동을 중지해 버리고, <선과 악>이라는 경직된 이분법으로 나뉘게 되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의 모습이다.
이게 진짜 인간들인가 싶을 정도로, 파블로프의 개처럼, 단어 하나에 즉각적인 반응을 하고 있다.


참 많이 고민해 보았다.
왜 그런 것일까?
안그래야겠다고 다짐하고 냉정해지려고 하지만, 나와 반대되는 정치적인 의견을 듣고 있노라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스트레스가 상승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요즘은, 일부러라도 정치와 관련된 방송이나 인터넷 사이트는 조금씩 줄여가고 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것들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인간이 저지를 수 밖에 없는 모순된 것들에 대해서 나의 사고 회로는 작동을 멈춘다. 귀여운 강아지와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소와 돼지는 도살해서 먹어야 하는 모순에 대해서 눈을 가리고 침묵한다.
남자로 태어났기에 남자로써 누리는 권리는 당연하다 여기면서, 그 권리를 위해 여성이 희생해야 하는 것에는 외면한다.
동양인으로 태어났기에, 서구 문화 중심의 사회 문화적 현상에 대해 본능적인 반감 혹은 무비판적인 호감도 존재한다.
한국인으로 태어났기에, 일본은 미워해야 할 국가이고, 공산주의는 무조건 나쁜 것이다.
모씨(某氏) 집안에 태어났기에, 나의 조상님은 훌륭한 분이시고 조상님을 위해 제사를 지내야 하고, 명절마다 성묘와 차례를 지내야 한다.
누구의 아들 혹은 딸로 태어났기에, 누구에게 복종해야 하며, 효도해야 하며, 평생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야 한다.

나의 선택과는 무관한 것들,
태어나면서부터 내게 주어지는 것들,
그것이 부드럽고 따뜻한 담요인지 혹은 습하고 차가우며 거친 거적떼기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것에 의지해 살아났으며, 그것이 전부인 세상을 살았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확실한, 그리고 어쩌면 유일한 버팀목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들에서 벗어나야 내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판단을 멈추어버린 세계는, 우리를 보호해주는 단단한 껍질의 알이지만,
우리의 세계를 제한하는 장벽이기도 한 것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자신의 알을 깨뜨려야 한다.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사람들은 참 많은 알껍질 속에 살고 있는 듯 하다.
유교라는 관습의 알
반공이라는 이념의 알
적어도 이 두개의 알을 깨기 전에는 대한민국의 발전은 요원해 보인다.

2017년 1월 18일 수요일

야만과 문명의 사이 - 인간에 대한 이해의 기준

아직까지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은 진행 중이다.

그리고 최순실, 정유라, 세월호 사건과 관련한 특별검사의 수사도 진행 중이다.

특별검사 이전에 진행되었던 검찰의 수사 결과로 기소된 사건들은 현재 재판 중이다.


지난 두달여 시간 동안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많은 국민, 시민, 이웃들에게도 그렇지만 특히 나 개인에게 있어서도 그러했다.
나 자신의 내적인 변화는 어쩌면 다른 사람들의 변화와도 잇닿아 있을지 모르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개개인의 내적 변화들이 어떤 공통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졌을 때, 그 사회가 변화해가지 않나 싶다.


그러면 나의 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처음엔 많은 놀라움, 분노, 증오와 같은 것 들이었다.
새로이 알려진 것들에 대한 놀라움이고, 그들의 편향적이고 치졸하며 사리사욕에 눈 먼것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생겼다.

다음엔 자기 반성이었다.
결국은 우리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반성, 그것을 미리 알아채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었다는 반성.

그리고는 두려움.
이렇게까지 왔는데, 그 무거운 죄를 지었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이 이번에도 아무런 벌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가끔의 의심.
법정에선 피의자들, 헌번재판소에 출석한 증인들의 반박이 계속되고 있다고 하자, 어쩌면 저들은 정말 죄가 없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번에도 언론에 속아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들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

또 다시 허무함.
과연 나라는 하나의 개인이 알 수 있는 진실의 깊이는 얼마나 되는 것일까.
우리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며, 아는 만큼에 따라 진실과 거젓이 바뀌며, 선악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과연 우리가 진실을 논하는 것, 선악을 판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에 대한 허무함.

그리고 다시 의문점들
어째서 자연계와는 대치되는 <정의> <평등>과 같은 가치를 인간이 추구하는 것인지, 그게 정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
그것이 자연계의 흐름이라면,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들이 애초에 "가치"로써 추구되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렇게 힘들여 추구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자연스럽지 못한 가치를 힘 들여가며 추구하는 인간.
하지만 자연스럽지 않기에 그 가치는 자꾸 스러져가고,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각성하고 힘쓰고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리라.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아주 원초적인 시원으로부터 출발하면 명확하게 보이는 듯 하다.

태초에 별 경쟁력이 없던 하나의 종족으로써의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 수를 늘려야 했던 것이고, 보다 많은 수의 개체들이 어울려서 살아나가며 그 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간의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규율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평등>과 <정의>는 매우 중요한 가치가 되었을 것임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생존에 필연적인 가치마저도, 자연스러운 본능적 욕구에 의해서 자꾸만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스스로를 가장 영리한 종족이라 칭하는 인간들이, 스스로를 지켜줄 가치를 허물어 버리는 우매한 짓을 반복하는 것이다.
과연 이게 가장 영리한 종족이 하는 짓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다양한 종교와 믿음을 통해서 존재하지도 않는 영혼, 자아를 얘기하고 윤회와 해탈을 말하며, 진화와 각성을 믿는다.
스스로가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소명을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자기 신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맞닥들인 이 사건을 통해서도 극명하게 드러난 바, 인간은 아직도 야만의 때를 벗어나지 못한 원숭이에 가까운 존재일 때름이다.
지금까지 이룬 문명의 업적을 증거로 내민다 한들, 딱 그만큼만 야만에서 벗어난 정도일 뿐이다.

인간이 과연 야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지만, 스스로에 대한 근거 없는 자존감은 자기 자신의 발판을 딛지 못함과 같기에, 자신에 대한 인식의 불가함과 발전의 불가함만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2016년 12월 21일 수요일

진보와 보수의 이념

좌우, 진보 보수는 단지 이념의 문제일까?

변화와 안정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쓸 수 있지만, 그게 그렇게 큰 차이일까?

각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도, 진보와 보수는 다른 입장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나름대로 양 진영의 논리는 그럴듯 해 보인다.

어쩌면 단지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가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선택된 진영의 예상과 반대 진영의 우려에 대해서도, 그 결과는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러기에 논의는 충분히 하되, 일단 결정이 되면 예상되는 결과를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우려되는 부작용을 막기위한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

여기까지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며, 나머지는 운명을 따라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의 논의 과정에서 가장 소모적인 것은, 이념 자체에 대한 논쟁이다.

개별 사안에 대한 선택을 두고, 그 사안에 대한 논의가 아닌, 그걸 추진하는 진영의 이념 혹은 반대하는 진영의 이념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는 것이야말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는 감정적 대립을 야기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주로 자신의 선택보다는 상대방의 선택이 보다 나을 수 있음을 인지한 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택을 관철시키려는 억지스러운 욕심에서 표출되곤 한다.



과연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으로 갈라놓으면, 모든 사안에 대한 선택은 미리 예측이 가능할까?
절대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미리 예측이 가능할 정도로 절대적인 보수와 절대적인 진보는 존재할 수도 없는 이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예측이 가능하다면, 정당을 이루는 국회의원들이 왜 필요하겠는가.
개별 사안에 대해 논의하고 표결하는 절차가 왜 필요하겠는가.
예측 가능한 진보의 의견과 예측 가능한 보수의 의견이 이미 나와 있는 셈이다.
의견의 당위성을 설명할 필요도 없다.
최종 결정만 남을 뿐이다.

진보적이지 않는 보수는 고여서 썩은 물이며, 보수적이지 않은 진보는 정처없이 떠도는 거렁뱅이에 지난지 않는다.
보수라도 잘못된 것은 고치고,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하는 것을 두려워 해서는 안되는 법이다. 보수가 경계해야 할 것은 보수 그 자체이다.
진보라 할지라도 내가 가진 것의 가치를 볼 줄 알고 지켜내는 강직함이 필요하다. 진보가 경계해야 할 것은 진보 그 자체이다.


진보도 변화해 왔으며, 보수도 변화해 왔다.
지금의 진보/보수도 과거의 진보/보수가 보면 사이비라고 비난할 것이며, 미래의 진보/보수가 보면 구태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것이 딱 우리의 현재 수준이다.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기와 동족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전쟁을 벌이는 아픔을 겪었다.
그리고 그 전쟁의 과정을 지켜본 많은 국민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깟 이념이 뭐라고..."
이념으로 다투어 서로의 목숨을 빼앗고 상처를 입히고 재산을 파괴했다.
그리고 이념이란 머리속에서 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무가치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아직도 이념으로 다투고 있다.
그깟 이념이 뭐라고...
역사를 통해 배웠어여 할 교훈은 어디로 갔을까.


P.S.
이념은 단지 명분이었을 뿐.
영토 전쟁의 명분이었고, 정치인들의 야망을 채우기 위한 명분이었을 뿐.
더 이상 이념의 희생양이 되지 말기를 갈망한다.

2016년 12월 17일 토요일

내부자의 증언이 어려운 이유

여전히 한참 진행 중인 대통령 탄핵정국에서 아주 흥미로운 볼거리는 국정조사 청문회이다.

이른바 최순실 국정조사(정식 명칭은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규명 국정조사")에서는 그 동안 '찌라시'라고 치부되거나, '~카더라'는 시중의 출처 없는 소문과 괴담들이 망라되어 있어서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국정조사의 법률적 한계로 인해, 증인의 출석을 강제할 수 없고, 강제적인 수사의 권한이 없어서 진실을 밝히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었다.


국정조사 위원들과 언론들이 한목소리로 "내부자의 양심적인 증언"을 호소하는 것은 바로 이런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고, 결정적인 진실의 봉인을 푸는 실마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첫번째,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의 행적을 밝히는 것은 아마도 내부자의 용기와 결단이 없다면 불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두번째, 김영재 성형외과의원 원장의 세월호 당일 행적 또한 내부자의 자발적 증언이 없다면 밝혀내기가 쉽지 않으리라 본다.


청와대의 경우에는 청와대 직원들, 김영재 원장의 경우엔 알리바이로 내세운 장모, 골프 상대, 병원 간호사 정도가 내부자가 될 것이다.

자, 만약에 김영재 원장의 병원 간호사가 원장의 증언 내용이 사실과 다름을 알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간호사가 알고 있는 원장의 의심스러운 언행은, 단지 원장이 밝힌 행선지이거나 원장이 병원을 비운 시간이거나 한, 극히 일부라고 말이다.
이 사실을 국정조사위원에게 폭로하거나 언론에 공대한다면?
간호사는 병원에서 근무할 수 없게 될 것은 명백하다. 원장으로부터 파면 당하거나, 병원이 문을 닫거나.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소한 사실로 인해서 진실이 드러날 확률이 매우 미미하다고 생각된다면 굳이 이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양심의 문제?
내가 아는 것보다, 아마 장모나 골프 상대가 알고 있는 사실이 진실을 밝힐 더 확실한 증거이고, 양심의 가책이라면 자신보다 그 사람들이 더 커야 한다고 위안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비밀을 가지고 있는 한, 원장은 자신을 해고할 수 없다는 보장까지 확보한다.

청와대의 의무실에 근무했다는 의무장교들 또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들이 비밀을 폭로해서 얻을 수 있는 잇점은, 비밀을 유지해서 얻을 수 있는 잇점에 비해 터무니 없이 보잘 것 없다.


결국은 '좋은 경찰 나쁜 경찰'과 같은 방법만이 남는다.
비밀을 폭로하지 않았을 경우에 처해질 공포를 극대화 해서 공포스럽게 만듦으로써, 비밀을 폭로했을 경우에 공포에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하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