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하는 일의 종류야 무궁하고 다양하겠지만, 크게는 3가지로 나눌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하나는 한계를 넒혀 가는 일.
인간이 가진 여러 제약들. 이로 인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되고 혹은 규모가, 혹은 영향력의 범위가 제한되는데, 누군가 하는 일은 이 제약의 일부를 허물어서 한계를 넒혀 가는 일을 하고 있다.
대단히 어렵고 의미 있는 일이며, 미래에 대한 비전이 확고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꽤 많은 일들이 여기에 속할 수도 있다.
임계선 부근에서 일하는 사람들, 끊임 없는 노력으로 한계에 근접하는 사람들은 종종 우연인듯 필연인듯 이 한계를 넘게되고, 이것이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세밀함을 추구하는 일.
정밀함 또는 세심함의 한계라는 측면에서는 위의 한계를 넓히는 일과 하나로 볼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분류하기엔 곤란한 많은 일들이 여기에 속한다.
한계를 넓히고 영역을 확장하기에 몰두하다 보면, 자칫 스스로 확장시킨 부분에 대해 충분한 관심을 두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이렇게 성글어진 영역에서의 세세한 부분에 대해 다듬고 채우는 일을 해야만 한다.
어쩌면 현재의 대한민국도 수출의 한계에 막혀 내수를 살리자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 이와 유사한 상황이 아닌가 싶다.
영역을 확장하기 곤란한 경우에 관심을 내부로 돌려서, 구성원들의 성향을 좀 더 세분하여 구분하고, 그에 따른 맞춤 서비스로 만족도를 높이는 일 따위가 여기에 해당한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진정한 차이는 이러한 세세함에서 뚜렷이 드러나며, 이러한 차이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이기에, 소위 졸부가 전통의 부자를 따라가기 어려운 것과도 유사한 차이점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 하나는 순환-반복적인 일.
아마도 대부분의 일들이 여기에 속한다 생각한다.
인간이면 누구나 먹어야 살 수 있으며, 자야만 하고, 입어야 하고, 씻고 이동하는 등의 일을 반복한다. 여기에 필요한 식품, 제품,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큰 틀에서는 순환-반복적인 일들이다.
물론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는 위의 한계를 넓히는 일이나 세밀함을 추구하는 일의 속성도 지니게 된다.
이렇게 구분한 일들은 그 순서대로, 리스크가 큰 일에서 작은 일의 순서이며, 따라서 성공에 대한 보상이 큰 일에서 보상이 작은 일의 순서이며, 일의 난이도가 높은 일에서 난이도가 낮은 일의 순서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의 구분은 현재의 기업들에서 적용이 된다.
물론 대기업들은 3가지 속성의 일을 모두 영위하는 것이 보통이나, 작은 기업들은 한가지에 집중하는 비율이 높은 편이다.
2016년 8월 1일 월요일
2016년 7월 23일 토요일
다양과 획일, 공감과 차이, 생각의 모순들
인간이 진화하면서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폭이 확대되어,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든가, 동물에 대한 학대가 줄어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 반대되는 현상으로, 유럽으로 유입되는 대규모의 난민에 저항하는 자국민들의 태도이다. 어찌보면 이기주의이며,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처사로 보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것에 대한 반발일 뿐, 큰 흐름은 타인과의 공감이라고 보는게 맞을 수 있겠다.
오히려 여기에 대한 더 큰 모순은, 낙태에 대한 반대 의견이다.
낙태를 찬성하는 쪽의 의견을 들어보면, 낙태를 고려한다는 것은 아이를 제대로 키울 여력이나 형편이 되지 않음을 의미하고, 이는 부모의 경제적 사회적 기반의 부족 혹은 태아의 선천적 장애가 확실시 되는 경우에 태아나 부모 모두의 행복을 위해 최선의 선택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낙태를 반대하는 의견을 들어보면, 인간이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본능적이며, 정상인들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장애인들은 불행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인간의 진화가 타인에 대한, 타 생명에 대한 공감으로 나타났다면, 그것은 타인도 어느 정도 나와 유사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가능하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자신이 장애를 가지게 된다면 그것이 얼마나 불행해 질 지를 상상하고 낙태를 찬성하자는 쪽으로 기울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닐까? 선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 났어도 아마 그들에겐 그들이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이 있을 테니까 그걸 함부로 뺏을 권리는 없다는 생각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생각은 모든 타인에 대한, 타 생명에체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나 나름의 행동양식을 모두 이해해 줘야 하는 것이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그 다양한 생각과 행동들을 가진 타자들과의 공감은 일정 부분 버려야 함을 뜻하지 않을까?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확일화에서 벗어나 다양화로 가고 있으며, 집단에서 개인으로 가고 있으며, 규칙과 제어에서 벗어나 자유로 가고 있음이 뚜렷해 보인다.
하지만 소위 인류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나'라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이기주의를 벗어나 '우리'라는 생각의 이타주의로 가야 하며, 다름이 중시되는 차별성에서 벗어나 모두가 하나라는 단일성으로 가야만 할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것은 아서 클라크의 소설 <유년기의 끝>에서 보여준 모습으로의 진화가 될런지도 모르겠다.
원래 하나였던 우주는 빅뱅이후 엄청난 속도로 공간의 팽창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런 우주 팽창의 모습은 인간 개개인들이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분화되어 가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그리고 한편으로 인간들의 이러한 다양한 분화가, 국가와 사회라는 집단의 필요성을 파과하기에 이르고 있어 보인다.
이에 반발하여 인간들 서로가 타인의 이해의 폭을 넓혀 가자는 움직임도 있는 것이며, 서로 교감하고 이해하고 뱌려하는 것이 인간의 발전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우주의 팽창처럼 다양하게 분화될 것이며, 인간들이 교감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일시적인 반발에 그치고 말 것이다.
어쩌면 빅뱅으로 인한 우주의 팽창이 멈추고 다시 하나의 점으로 수축이 진행된다면, 인간도 점점 하나의 모습으로 동일화가 진행될 것이다. 변이는 줄어들고, 사람들은 점점 비슷해져 가고, 인구는 줄어들고, 생태계의 생물 다양성도 줄어들며, 아무런 규칙이나 법률이 없어도 될 것이며, 그리고 이기주의는 물론 이타주의도 없고, 너와 나라는 구분이 모호해지고, 결국 우리는 하나의 점으로 돌아가게 되지 않겠는가.
인간이 대단한 존재인양 떠들고 있지만, 결국은 이런 우주적인 움직임에 따라 함께 변해가는 것이 뿐이며, 그걸 진화라고 부르던, 퇴보라고 부르던, 그 마저도 단지 인간끼리의 말에 불과한, 아무 의미 없는 자뻑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 반대되는 현상으로, 유럽으로 유입되는 대규모의 난민에 저항하는 자국민들의 태도이다. 어찌보면 이기주의이며,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처사로 보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것에 대한 반발일 뿐, 큰 흐름은 타인과의 공감이라고 보는게 맞을 수 있겠다.
오히려 여기에 대한 더 큰 모순은, 낙태에 대한 반대 의견이다.
낙태를 찬성하는 쪽의 의견을 들어보면, 낙태를 고려한다는 것은 아이를 제대로 키울 여력이나 형편이 되지 않음을 의미하고, 이는 부모의 경제적 사회적 기반의 부족 혹은 태아의 선천적 장애가 확실시 되는 경우에 태아나 부모 모두의 행복을 위해 최선의 선택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낙태를 반대하는 의견을 들어보면, 인간이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본능적이며, 정상인들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장애인들은 불행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인간의 진화가 타인에 대한, 타 생명에 대한 공감으로 나타났다면, 그것은 타인도 어느 정도 나와 유사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가능하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자신이 장애를 가지게 된다면 그것이 얼마나 불행해 질 지를 상상하고 낙태를 찬성하자는 쪽으로 기울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닐까? 선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 났어도 아마 그들에겐 그들이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이 있을 테니까 그걸 함부로 뺏을 권리는 없다는 생각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생각은 모든 타인에 대한, 타 생명에체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나 나름의 행동양식을 모두 이해해 줘야 하는 것이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그 다양한 생각과 행동들을 가진 타자들과의 공감은 일정 부분 버려야 함을 뜻하지 않을까?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확일화에서 벗어나 다양화로 가고 있으며, 집단에서 개인으로 가고 있으며, 규칙과 제어에서 벗어나 자유로 가고 있음이 뚜렷해 보인다.
하지만 소위 인류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나'라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이기주의를 벗어나 '우리'라는 생각의 이타주의로 가야 하며, 다름이 중시되는 차별성에서 벗어나 모두가 하나라는 단일성으로 가야만 할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것은 아서 클라크의 소설 <유년기의 끝>에서 보여준 모습으로의 진화가 될런지도 모르겠다.
원래 하나였던 우주는 빅뱅이후 엄청난 속도로 공간의 팽창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런 우주 팽창의 모습은 인간 개개인들이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분화되어 가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그리고 한편으로 인간들의 이러한 다양한 분화가, 국가와 사회라는 집단의 필요성을 파과하기에 이르고 있어 보인다.
이에 반발하여 인간들 서로가 타인의 이해의 폭을 넓혀 가자는 움직임도 있는 것이며, 서로 교감하고 이해하고 뱌려하는 것이 인간의 발전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우주의 팽창처럼 다양하게 분화될 것이며, 인간들이 교감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일시적인 반발에 그치고 말 것이다.
어쩌면 빅뱅으로 인한 우주의 팽창이 멈추고 다시 하나의 점으로 수축이 진행된다면, 인간도 점점 하나의 모습으로 동일화가 진행될 것이다. 변이는 줄어들고, 사람들은 점점 비슷해져 가고, 인구는 줄어들고, 생태계의 생물 다양성도 줄어들며, 아무런 규칙이나 법률이 없어도 될 것이며, 그리고 이기주의는 물론 이타주의도 없고, 너와 나라는 구분이 모호해지고, 결국 우리는 하나의 점으로 돌아가게 되지 않겠는가.
인간이 대단한 존재인양 떠들고 있지만, 결국은 이런 우주적인 움직임에 따라 함께 변해가는 것이 뿐이며, 그걸 진화라고 부르던, 퇴보라고 부르던, 그 마저도 단지 인간끼리의 말에 불과한, 아무 의미 없는 자뻑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2016년 7월 17일 일요일
[도서] 데미안의 서문
서명 : 데미안 (Demian - Die Geschichte von Emil Sinclairs Jugend)
저자 :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
출판사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역자 : 전영애
내 이야기를 하자면, 훨씬 앞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훨씬 더 이전으로 내 유년의 맨 처음까지, 또 아득한 나의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리라.
작가들은 소설을 쓸 때 자기들이 하느님이라도 되듯 그 누군가의 인생사를 훤히 내려다보고 파악하여, 하느님이 몸소 이야기하듯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이 어디서나 핵심을 집어내어 써낼 수 있는 양 굴곤 한다. 나는 그럴 수 없다, 작가들이 그래서는 안 되듯이. 그리고 내게는 내 이야기가, 어떤 작가에게든 그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내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한 인간의 이야기, 즉 그 어떤 가공의 인물, 있을 수 있는 인물, 이상적인 인물, 어떻든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일화적인, 살아 있는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현실적으로 살아 있는 인간이란 것이 무엇인지,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혼미해져 버렸다. 그 하나하나가 자연의 단 한번의 소중한 시도인 사람을 무더기로 쏘아 죽이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이제 더 이상 단 한번뿐인 소중한 목숨이 아니라면, 우리들 하나하나를 총알 하나로 정말로 완전히 세상에서 없애버릴 수도 있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쓴다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리라.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일회적이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세계의 여러 현상이 그곳에서 오직 한번 서로 교차되며, 다시 반복되는 일은 없는 하나의 점(點)인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한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든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로우며 충분히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누구 속에서든 정신은 형상이 되고, 누구 속에서든 피조물이 괴로워하고 있으며, 누구 속에서든 한 구세주가 십자가에 매달리고 있다.
사람이란 존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느끼기는 한다. 그리고 느끼는 만큼 쉽게 죽어간다. 나도 이 이야기를 다 쓰고 나면 좀더 수월하게 죽게 될 것이다.
내 자신을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라고는 감히 부를 수 없다.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는 찾는 구도자였으며, 아직도 그렇다. 그러나 이제 별을 쳐다보거나 책을 들여다보며 찾지는 않는다. 내 피가 몸 속에서 소리내고 있는 그 가르침을 듣기 시작하고 있다. 내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 꾸며낸 이야기처럼 달콤하거나 조화롭지 않다. 무의미와 혼란, 착란과 꿈의 맛이 난다. 이제 더는 자신을 기만하지 않겠다는 모든 사람들의 삶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始原)의 점액과 알 껍질을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인간이 되라고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우리 모두는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저자 :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
출판사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역자 : 전영애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내 이야기를 하자면, 훨씬 앞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훨씬 더 이전으로 내 유년의 맨 처음까지, 또 아득한 나의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리라.
작가들은 소설을 쓸 때 자기들이 하느님이라도 되듯 그 누군가의 인생사를 훤히 내려다보고 파악하여, 하느님이 몸소 이야기하듯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이 어디서나 핵심을 집어내어 써낼 수 있는 양 굴곤 한다. 나는 그럴 수 없다, 작가들이 그래서는 안 되듯이. 그리고 내게는 내 이야기가, 어떤 작가에게든 그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내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한 인간의 이야기, 즉 그 어떤 가공의 인물, 있을 수 있는 인물, 이상적인 인물, 어떻든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일화적인, 살아 있는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현실적으로 살아 있는 인간이란 것이 무엇인지,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혼미해져 버렸다. 그 하나하나가 자연의 단 한번의 소중한 시도인 사람을 무더기로 쏘아 죽이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이제 더 이상 단 한번뿐인 소중한 목숨이 아니라면, 우리들 하나하나를 총알 하나로 정말로 완전히 세상에서 없애버릴 수도 있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쓴다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리라.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일회적이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세계의 여러 현상이 그곳에서 오직 한번 서로 교차되며, 다시 반복되는 일은 없는 하나의 점(點)인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한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든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로우며 충분히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누구 속에서든 정신은 형상이 되고, 누구 속에서든 피조물이 괴로워하고 있으며, 누구 속에서든 한 구세주가 십자가에 매달리고 있다.
사람이란 존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느끼기는 한다. 그리고 느끼는 만큼 쉽게 죽어간다. 나도 이 이야기를 다 쓰고 나면 좀더 수월하게 죽게 될 것이다.
내 자신을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라고는 감히 부를 수 없다.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는 찾는 구도자였으며, 아직도 그렇다. 그러나 이제 별을 쳐다보거나 책을 들여다보며 찾지는 않는다. 내 피가 몸 속에서 소리내고 있는 그 가르침을 듣기 시작하고 있다. 내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 꾸며낸 이야기처럼 달콤하거나 조화롭지 않다. 무의미와 혼란, 착란과 꿈의 맛이 난다. 이제 더는 자신을 기만하지 않겠다는 모든 사람들의 삶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始原)의 점액과 알 껍질을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인간이 되라고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우리 모두는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라벨:
데미안,
서문,
헤르만 헤세,
Demian,
Hermann Hesse
2016년 7월 14일 목요일
[도서] 채식주의자에 대한 단상
직전에 포스팅한 <채식주의자>는 무언가 자꾸 씹히는 느낌이다.
제대로 소화되지 않고 입안에 남아서 씹히는...
나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작품들을 좋아한다.
그게 나의 모순을 건드려서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곱씹어서 그 모순을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채식주의자>는 그렇게 불편한게 아니었다.
<채식주의자>의 불편함은, 어째서 유력한 상의 수상작품이 내게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을 주는가 하는 불편함이었다.
과연 내가 느끼는 불편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문득 떠 오른 하나의 가정은, 보편성의 부족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대부분의 소설은 구체적인 주인공과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 또는 일상을 다루고 있다.
이런 구체적이고 나와는 별개로 인식되는 주인공은, 그래서 독자의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게 만들수 있으며, 충분히 독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주인공이 독자와 일체시되는 상황에서는 독자 스스로가 매우 방어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이 주인공은 개별적인 인물에서 보편적인 인물로의 투사가 되어야 한다.
이 과정이 소설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독자 스스로 투사시키게 되며, 작가는 보편적으로 투사될 수 있는 상징이나 개연성을 제공해 주곤 한다.
이러한 보편적 인물로의 투사가 중요한 이유는,
작품에서 다룬 사건이나 교훈 또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작품에서 다룬 이야기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의 이야기, 내 주변과도 전혀 관련이 없는 이야기, 우연히라도 맞닥뜨리게 될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라면?
그건 그냥 신기한 이야기로 끝날 뿐이다.
육식이 필연적으로 폭력을 수반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지만, 거식증으로까지 이어진 영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육식과 폭력에 저항하여 스스로 나무가 되어 흙과 물로만 살 수 있을거라 믿는 영혜의 생각에 어떤 보편성이 있는 것일까?
인혜 또한 영혜와 같이 사회 관습적인 폭력을 인식했다고 해도, 영혜의 극단적인 생각이 과연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겠는가?
어째서 생각이 달리고 달려서 너무 지나치게 달려가버린 그 생각을 내가 따라 잡으려 해야 한단 말인가?
아마도 이렇게 말하겠지.
가기 싫으면 안가도 된다고.
왜 싫은데 궂이 따라가려 하는냐고.
그건.....상을 줬기 때문이야.
유력한 상을 줬다는 건, 그게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거니까.
그리고 그게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고 인정하는 거니까.
그래서 본 거라고....
어쩌면 내가 오해했는지도 모르겠다.
위대한 작품은 보편성을 갖추지 않아도 되는가 보다.
가끔은 오만한 작가와 작품을 만나게 된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주 긴 설명이 필요한 그런 작품을
하지만 친절하게 설명하지도 않는다.
이해한 사람만이 느끼고 누리라는 듯이...
그럴거라면 왜 남들에게 보여주고 읽히려고 하는 것인지?
========================================================================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작가는 인간의 본질적인 모순에 대해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끔찍한 폭력을 수반하는 육식과 육식을 하지 않고는 살아나가기 곤란한 본질적인 모순 말이다.
물론 채식만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게 인간의 본성에 적합한지는 논란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채식만으로도 충분하기에 채식주의자인 사람은 거의 보질 못했기에...
어찌할 수 없는 이 딜레마는 어쩌면 본성과 이성의 충돌이 아닐까?
결국 이성을 따르는 영혜는 인간이라는 생명의 본성을 포기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인간이 폭력적일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닐런지...
영혜의 이런 절망적인 몸부림을 보는 인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들을 나열하면서 생명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지만, 인혜야말로 본성과 이성이 충돌하는 모순을 가장 치열하게 온몸으로 부딪히는 보통 인간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여기에도 몇가지 문제는 남게 된다.
육식으로 대변되는 폭력을 사회 전반적인 구조와 관습으로까지 확대시킨 것은, 그 폭력이 본성적이라는 사실을 희미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혹은, 이 문제는 단지 인간이 만들어낸 스스로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 미화되었을 뿐이라는 간단한 결론으로 해결되지 않겠나 하는 점이다.
우리 쿨하게 인정하자. 인간도 동물의 하나다. 무언가 먹어야 하고 번식하고 생존해야 하는 거다. 스스로가 진화된 존재라는 착각에 빠져서 다른 생물과의 거리를 두려고 하지만, 단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뿐이지, 인간은 여전히 동물이다 라고...
덧붙여 마지막에 언급했던 오만한 작품에 대해서도 조금은 반성해 본다.
누군가는 치열하게 고민하고 내적 투쟁을 거쳐서 어렵게 내린 결론을, 단지 책 한권 읽는 노력으로, 혹은 전시회장을 찾는 것으로, 그렇게 쉽게 얻으려 하는 것 또한 날강도가 아니겠는가.
========================================================================
================================================================
다소 분석적이긴 하지만,
이 소설이 주었던 몇가지 의문점을 마저 해소한 듯 하다.
첫번째 의문은, <채식주의자>의 마지막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
영혜가 병원 앞 정원 벤치에 가슴을 드러내고 새를 손에 쥔 채 입에 피를 뭍히고 앉아 있다.
새나 가슴은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이미 앞서 언급했지만, 과연 치열하게 육식을 거부하던 영혜가 왜 새를 날로 뜯어 먹었을까 하는 궁금증은 풀지 못했다.
나름대로 분석해 보건데, 이 부분은 영혜의 상태가 매우 불안함을 보여주어 <몽고반점>과 <나무 불꽃>에서 보여주는 영혜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함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영혜가 육식의 본능과 채식의 이성 사에에서 마지막 갈등을 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성으로써의 채식에 실패하고 본능의 육식으로 돌아간 듯이 보이는 이 장면은 <본능>과 <이성>의 갈등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인데, 앞으로 이어질 <몽고반점>은 지나칠 정도로 감각정인 상황과 행동들로 <본능>에만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며, <나무 불꽃>은 모든 본능을 철저히 거부하고 자신의 의지로 생명마저 극복하려는 <이성>의 극한을 보여준다.
작가는 인간이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과연 그 둘이 충돌했을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과연 정답은 있을 것인가? 단지 선택의 문제일 뿐이지 않겠는가?
이런 딜레마를 다룸으로써 인간의 모순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두번째 의문은, 2번째 중편인 <몽고반점>의 생뚱맞음이었다.
채식주의자가 다루고 있는 인간의 모순과는 동떨어진 지극히 감각적이고 탐미적인 이야기가 왜 여기에 들어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의문점은 첫번째 의문에 대한 답변으로 해소된다.
가장 본능적인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본능적인 모습 또한 충분히 타당하며 의미있을 보여주는 것.
양팔 저울의 한쪽을 채우기 위함이었던 듯 하다.
================================================================
제대로 소화되지 않고 입안에 남아서 씹히는...
나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작품들을 좋아한다.
그게 나의 모순을 건드려서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곱씹어서 그 모순을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채식주의자>는 그렇게 불편한게 아니었다.
<채식주의자>의 불편함은, 어째서 유력한 상의 수상작품이 내게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을 주는가 하는 불편함이었다.
과연 내가 느끼는 불편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문득 떠 오른 하나의 가정은, 보편성의 부족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대부분의 소설은 구체적인 주인공과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 또는 일상을 다루고 있다.
이런 구체적이고 나와는 별개로 인식되는 주인공은, 그래서 독자의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게 만들수 있으며, 충분히 독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주인공이 독자와 일체시되는 상황에서는 독자 스스로가 매우 방어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이 주인공은 개별적인 인물에서 보편적인 인물로의 투사가 되어야 한다.
이 과정이 소설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독자 스스로 투사시키게 되며, 작가는 보편적으로 투사될 수 있는 상징이나 개연성을 제공해 주곤 한다.
이러한 보편적 인물로의 투사가 중요한 이유는,
작품에서 다룬 사건이나 교훈 또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작품에서 다룬 이야기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의 이야기, 내 주변과도 전혀 관련이 없는 이야기, 우연히라도 맞닥뜨리게 될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라면?
그건 그냥 신기한 이야기로 끝날 뿐이다.
육식이 필연적으로 폭력을 수반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지만, 거식증으로까지 이어진 영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육식과 폭력에 저항하여 스스로 나무가 되어 흙과 물로만 살 수 있을거라 믿는 영혜의 생각에 어떤 보편성이 있는 것일까?
인혜 또한 영혜와 같이 사회 관습적인 폭력을 인식했다고 해도, 영혜의 극단적인 생각이 과연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겠는가?
어째서 생각이 달리고 달려서 너무 지나치게 달려가버린 그 생각을 내가 따라 잡으려 해야 한단 말인가?
아마도 이렇게 말하겠지.
가기 싫으면 안가도 된다고.
왜 싫은데 궂이 따라가려 하는냐고.
그건.....상을 줬기 때문이야.
유력한 상을 줬다는 건, 그게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거니까.
그리고 그게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고 인정하는 거니까.
그래서 본 거라고....
어쩌면 내가 오해했는지도 모르겠다.
위대한 작품은 보편성을 갖추지 않아도 되는가 보다.
가끔은 오만한 작가와 작품을 만나게 된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주 긴 설명이 필요한 그런 작품을
하지만 친절하게 설명하지도 않는다.
이해한 사람만이 느끼고 누리라는 듯이...
그럴거라면 왜 남들에게 보여주고 읽히려고 하는 것인지?
========================================================================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작가는 인간의 본질적인 모순에 대해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끔찍한 폭력을 수반하는 육식과 육식을 하지 않고는 살아나가기 곤란한 본질적인 모순 말이다.
물론 채식만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게 인간의 본성에 적합한지는 논란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채식만으로도 충분하기에 채식주의자인 사람은 거의 보질 못했기에...
어찌할 수 없는 이 딜레마는 어쩌면 본성과 이성의 충돌이 아닐까?
결국 이성을 따르는 영혜는 인간이라는 생명의 본성을 포기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인간이 폭력적일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닐런지...
영혜의 이런 절망적인 몸부림을 보는 인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들을 나열하면서 생명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지만, 인혜야말로 본성과 이성이 충돌하는 모순을 가장 치열하게 온몸으로 부딪히는 보통 인간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여기에도 몇가지 문제는 남게 된다.
육식으로 대변되는 폭력을 사회 전반적인 구조와 관습으로까지 확대시킨 것은, 그 폭력이 본성적이라는 사실을 희미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혹은, 이 문제는 단지 인간이 만들어낸 스스로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 미화되었을 뿐이라는 간단한 결론으로 해결되지 않겠나 하는 점이다.
우리 쿨하게 인정하자. 인간도 동물의 하나다. 무언가 먹어야 하고 번식하고 생존해야 하는 거다. 스스로가 진화된 존재라는 착각에 빠져서 다른 생물과의 거리를 두려고 하지만, 단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뿐이지, 인간은 여전히 동물이다 라고...
덧붙여 마지막에 언급했던 오만한 작품에 대해서도 조금은 반성해 본다.
누군가는 치열하게 고민하고 내적 투쟁을 거쳐서 어렵게 내린 결론을, 단지 책 한권 읽는 노력으로, 혹은 전시회장을 찾는 것으로, 그렇게 쉽게 얻으려 하는 것 또한 날강도가 아니겠는가.
========================================================================
================================================================
다소 분석적이긴 하지만,
이 소설이 주었던 몇가지 의문점을 마저 해소한 듯 하다.
첫번째 의문은, <채식주의자>의 마지막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
영혜가 병원 앞 정원 벤치에 가슴을 드러내고 새를 손에 쥔 채 입에 피를 뭍히고 앉아 있다.
새나 가슴은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이미 앞서 언급했지만, 과연 치열하게 육식을 거부하던 영혜가 왜 새를 날로 뜯어 먹었을까 하는 궁금증은 풀지 못했다.
나름대로 분석해 보건데, 이 부분은 영혜의 상태가 매우 불안함을 보여주어 <몽고반점>과 <나무 불꽃>에서 보여주는 영혜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함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영혜가 육식의 본능과 채식의 이성 사에에서 마지막 갈등을 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성으로써의 채식에 실패하고 본능의 육식으로 돌아간 듯이 보이는 이 장면은 <본능>과 <이성>의 갈등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인데, 앞으로 이어질 <몽고반점>은 지나칠 정도로 감각정인 상황과 행동들로 <본능>에만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며, <나무 불꽃>은 모든 본능을 철저히 거부하고 자신의 의지로 생명마저 극복하려는 <이성>의 극한을 보여준다.
작가는 인간이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과연 그 둘이 충돌했을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과연 정답은 있을 것인가? 단지 선택의 문제일 뿐이지 않겠는가?
이런 딜레마를 다룸으로써 인간의 모순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두번째 의문은, 2번째 중편인 <몽고반점>의 생뚱맞음이었다.
채식주의자가 다루고 있는 인간의 모순과는 동떨어진 지극히 감각적이고 탐미적인 이야기가 왜 여기에 들어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의문점은 첫번째 의문에 대한 답변으로 해소된다.
가장 본능적인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본능적인 모습 또한 충분히 타당하며 의미있을 보여주는 것.
양팔 저울의 한쪽을 채우기 위함이었던 듯 하다.
================================================================
2016년 6월 30일 목요일
[도서] 채식주의자
맨부커상을 수상해서 대중에게 잘 알려진 한강씨의 소설.
3개의 중편소설인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각각의 작품을 별개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이어져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을 때에 한강씨의 이름이 매우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서가에 꽂혀있는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한강씨의 <몽고반점>이 대표작으로 수록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번째 <채식주의자>는 주인공 영혜의 채식주의 선언으로 시작되어, 점차 심해지는 채식과 무력감을 그녀의 꿈과 함께 그려가고 있다.
그녀의 다분히 잔인하고 가학적/피학적인 꿈은 육식이 가지는 필연적이지만 외면하고 싶은 면을 드러내 보이며, 먹는 인간과 먹히는 동물을 넘어서, 같은 인간 사이의 폭력에 대해서도 항변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이미지는 피다.
생고기의 피, 어린 시절 주인을 문 개가 토해낸 피, 꿈에서 누군가의 배를 갈라 낸 피, 육식을 거부하기 위해 그녀가 자신의 손목을 칼로 그어 솟구친 피, 병원에서 햇빛 아래 상의를 벗고 손에 쥐었던 새의 피...
이 작품의 주제는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육식의 폭력성에 대항하는 채식은 하나의 상징이거나 일부일 뿐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군림이 주는 폭력, 군중의 시선이 주는 무언의 압력이라는 폭력, 가슴을 가려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의 폭력.
그리고 그 폭력들에 하나 둘씩 저항하는 주인공 영혜....
두번째 <몽고반점>은 위의 사건이 일어난 후의 이야기다.
사건 이후 이혼을 하고 정신병원의 치료를 거쳐 언니의 집에서 얼마간 살다가 독립을 한 영혜와, 영상 예술을 하는 그녀의 형부 사이에 벌어지는 관능적인 사건에 대한...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이미지는 꽃이다.
사람의 나체에 그려 넣은 꽃, 그리고 꽃을 그려 넣은 두 육체의 교합, 남녀간의 섹스는 마치 아무런 도덕적 제약을 받지 않는 꽃과 꽃의 교접으로 그려지고, 이것이 원시로의 회귀를 의미했기에 유아기에만 남아 있다는 몽고반점이 그 소재로 차용되었는지 모르겠다.
무엇일까? 이 작품의 주제는?
애초에 순수한 욕망이었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섹스가, 사회적인 통념 윤리라는 명분하에 더럽고 금기시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몽고반점은 애초에 순수했던 인간의 본 모습에 대한 그림움의 상징이었을까?
문화권에서는 불륜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형부와 처제의 행위에 원시적인 욕망의 순수함 아름다움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꽃을 그려넣고, 꽃의 교접으로 상징화 했던 것일까?
잘 모르겠다.
세번째 <나무 불꽃>은 위의 모든 사건 후의 이야기이다.
영혜의 언니 인혜가 주인공이고, 남편은 위 사건으로 이혼. 혼자서 5살짜리 아들을 키우는 워킹맘.
영혜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이고 인혜는 정기적으로 면회를 간다.
어느날 영혜가 정신병원을 탈출, 다행히 병원에서 영혜를 찾아서 데려오지만 영혜의 상태는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간다.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금식주의자가 되어가는 것.
스스로가 나무가 되어 간다며, 물과 햇빛만 있으면 된다고...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자신의 팔이 뿌리가 되고 다리가 가지라고 말하는 영혜
급기야 단식으로 인해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
이 작품의 이미지는 나무....라고 해야겠지만 어쩐지 그 보다는 나무같이 말라버린 영혜의 육신이 아닐까.
사실 이미지가 앞서의 두 작품보다 약하다.
이 작품에서 영혜의 퇴화(?)가 주로 그려지고 있지만, 동시에 인혜 또한 영혜와 같은 절망감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다.
언니로써의 영혜에 대한 책임감, 스스로 경제적 기반을 이루어야 한다는 의무감, 아들에 대한 엄마로써의 책임감 따위가 인혜가 흔들릴 여지를 주지 않았지만,
어느날 문득 찾아온 생각...살아본 적이 없고 단지 견뎌 왔을 뿐이라는...이 인혜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주변의 관계에서 지워진 의무감이 그녀를 살아가지 않고 견디게 만들었지만, 또한 영혜와 같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주었던 건 아닐런지.
결국은 영혜의 선택이 매우 극단적이고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인혜가 영혜를 이해하게 되면서 영혜의 퇴화(?)가 보편성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잘 모르겠다.
왜 하필 나무였을까?
한자리에 붙박혀 모진 비바람과 눈보라와 따가운 햇빛을 견뎌내야 하는 그런 존재?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위의 세 작품에 공통적으로 묘사되는 이미지가 하나 있는데, 새다.
첫번째 <채식주의자>에서는 마지막에 영혜가 상의를 벗고 손에 새를 쥐고 있다.
두번째 <몽고반점>에서는 형부가 좋아하는 피사체가 날아가는, 날개가 달린 것들이라고 나오고, 마지막에 베란다에서 마치 새가 날아 오를 듯한 자세를 취한다.
마지막 <나무 불꽃>에서는 영혜를 태우고 가는 앰뷸런스 안에서 인혜가 바라본 하늘에 솔개가 날아가는 것을 본다.
날아가는 것이 자유에 대한 의미였을까?
꺾인 자유, 자유에 대한 희구, 자유의 댓가 등을 의미하는.....
3개의 중편소설인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각각의 작품을 별개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이어져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을 때에 한강씨의 이름이 매우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서가에 꽂혀있는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한강씨의 <몽고반점>이 대표작으로 수록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번째 <채식주의자>는 주인공 영혜의 채식주의 선언으로 시작되어, 점차 심해지는 채식과 무력감을 그녀의 꿈과 함께 그려가고 있다.
그녀의 다분히 잔인하고 가학적/피학적인 꿈은 육식이 가지는 필연적이지만 외면하고 싶은 면을 드러내 보이며, 먹는 인간과 먹히는 동물을 넘어서, 같은 인간 사이의 폭력에 대해서도 항변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이미지는 피다.
생고기의 피, 어린 시절 주인을 문 개가 토해낸 피, 꿈에서 누군가의 배를 갈라 낸 피, 육식을 거부하기 위해 그녀가 자신의 손목을 칼로 그어 솟구친 피, 병원에서 햇빛 아래 상의를 벗고 손에 쥐었던 새의 피...
이 작품의 주제는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육식의 폭력성에 대항하는 채식은 하나의 상징이거나 일부일 뿐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군림이 주는 폭력, 군중의 시선이 주는 무언의 압력이라는 폭력, 가슴을 가려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의 폭력.
그리고 그 폭력들에 하나 둘씩 저항하는 주인공 영혜....
두번째 <몽고반점>은 위의 사건이 일어난 후의 이야기다.
사건 이후 이혼을 하고 정신병원의 치료를 거쳐 언니의 집에서 얼마간 살다가 독립을 한 영혜와, 영상 예술을 하는 그녀의 형부 사이에 벌어지는 관능적인 사건에 대한...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이미지는 꽃이다.
사람의 나체에 그려 넣은 꽃, 그리고 꽃을 그려 넣은 두 육체의 교합, 남녀간의 섹스는 마치 아무런 도덕적 제약을 받지 않는 꽃과 꽃의 교접으로 그려지고, 이것이 원시로의 회귀를 의미했기에 유아기에만 남아 있다는 몽고반점이 그 소재로 차용되었는지 모르겠다.
무엇일까? 이 작품의 주제는?
애초에 순수한 욕망이었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섹스가, 사회적인 통념 윤리라는 명분하에 더럽고 금기시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몽고반점은 애초에 순수했던 인간의 본 모습에 대한 그림움의 상징이었을까?
문화권에서는 불륜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형부와 처제의 행위에 원시적인 욕망의 순수함 아름다움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꽃을 그려넣고, 꽃의 교접으로 상징화 했던 것일까?
잘 모르겠다.
세번째 <나무 불꽃>은 위의 모든 사건 후의 이야기이다.
영혜의 언니 인혜가 주인공이고, 남편은 위 사건으로 이혼. 혼자서 5살짜리 아들을 키우는 워킹맘.
영혜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이고 인혜는 정기적으로 면회를 간다.
어느날 영혜가 정신병원을 탈출, 다행히 병원에서 영혜를 찾아서 데려오지만 영혜의 상태는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간다.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금식주의자가 되어가는 것.
스스로가 나무가 되어 간다며, 물과 햇빛만 있으면 된다고...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자신의 팔이 뿌리가 되고 다리가 가지라고 말하는 영혜
급기야 단식으로 인해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
이 작품의 이미지는 나무....라고 해야겠지만 어쩐지 그 보다는 나무같이 말라버린 영혜의 육신이 아닐까.
사실 이미지가 앞서의 두 작품보다 약하다.
이 작품에서 영혜의 퇴화(?)가 주로 그려지고 있지만, 동시에 인혜 또한 영혜와 같은 절망감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다.
언니로써의 영혜에 대한 책임감, 스스로 경제적 기반을 이루어야 한다는 의무감, 아들에 대한 엄마로써의 책임감 따위가 인혜가 흔들릴 여지를 주지 않았지만,
어느날 문득 찾아온 생각...살아본 적이 없고 단지 견뎌 왔을 뿐이라는...이 인혜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주변의 관계에서 지워진 의무감이 그녀를 살아가지 않고 견디게 만들었지만, 또한 영혜와 같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주었던 건 아닐런지.
결국은 영혜의 선택이 매우 극단적이고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인혜가 영혜를 이해하게 되면서 영혜의 퇴화(?)가 보편성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잘 모르겠다.
왜 하필 나무였을까?
한자리에 붙박혀 모진 비바람과 눈보라와 따가운 햇빛을 견뎌내야 하는 그런 존재?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위의 세 작품에 공통적으로 묘사되는 이미지가 하나 있는데, 새다.
첫번째 <채식주의자>에서는 마지막에 영혜가 상의를 벗고 손에 새를 쥐고 있다.
두번째 <몽고반점>에서는 형부가 좋아하는 피사체가 날아가는, 날개가 달린 것들이라고 나오고, 마지막에 베란다에서 마치 새가 날아 오를 듯한 자세를 취한다.
마지막 <나무 불꽃>에서는 영혜를 태우고 가는 앰뷸런스 안에서 인혜가 바라본 하늘에 솔개가 날아가는 것을 본다.
날아가는 것이 자유에 대한 의미였을까?
꺾인 자유, 자유에 대한 희구, 자유의 댓가 등을 의미하는.....
2016년 6월 27일 월요일
용서와 속죄
중국에 살던 한국인 위안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뉴스를 들었다.
작년까지도 꽤나 시끄러웠던 위안부 할머니들과 일본과의 공방들...
진정한 사과와 합당한 배상을 요구하는 위안부 할머니들과 어물쩡 유감 표명으로 국면을 넘어가려는 일본 정부 사이에서, 정작 우리의 정부는 가면을 바꾸어 써가면서 편리하게 입장을 바꾸곤 하였다.
이 끝나지 않는 싸움에는, 정치적으로 이용 가치가 높은 이슈를 계속 가져가고 싶은 우리 정부의 더러운 욕심이 있지 않나 생각될 뿐이다.
아마도 작년까지 시끄러었던 위안부 이슈는, 무언가 국민의 시선을 돌리고 싶어하는 정부의 작전(?)이었던 듯.
올해는 갑자기 모든 일이 다 해결된 듯이 너무나도 조용할 따름인데, 정말 본질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었을까?
설마...
언제든지 다시 써먹을 수 있도록 잠시 휴식기를 가지고 있을 따름이리라.
진실 여부를 알 수는 없으니, 이런 정치 논리는 이 정도로 마무리를 하고,
제목인 용서와 속죄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자.
위안부 할머니들은 일본 정부를 용서하고자 한다.
너무도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그래서 피해 당사자들이 고령으로 한분 두분 세상을 떠나시고 있으니,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한편으로는 일본이 제대로된 사과를 하면 그 사과를 제대로 받아 줄 시간이 많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제대로 된 속죄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별로 급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은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과연 저 분들이 살아 생전에 만족할만한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여기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은 "만족할만한"이 대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며, 그게 과연 객관적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기에 더더욱 어려워 보인다는 것이다.
어째서 피해자가 용서를 구걸하는 모양새인가 말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용서와 속죄에 대한 질문과 답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딸을 잃은 엄마와 가해자인 살인범.
살인범은 검거되어 교도소에서 징역을 살고 있지만, 죽은 딸은 돌아오지 않는다.
슬픔과 절망, 분노를 종교에 기대어 참아 보지만 쉽지 않다.
고민 끝에 살인범을 용서하기 마음 먹고 교도소에 찾아갔지만,
살인범은 그녀에게 사죄를 하지는 않고, 종교에 귀의해 신으로부터 속죄를 받았다고 말한다.
허망하게 돌아오던 그녀는 혼절해 쓰러지고,
깨어나서 울부짖는다.
그가 내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내가 용서해 주지도 않았는데, 신이 무슨 권리로 그에게 용서를 주었느냐고...
과연 엄마는 살인범을 용서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녀의 용서에는 조건이 붙었다. 그가 충분히 사죄를 한다면...이라는.
나의 용서가 내가 아닌 상대의 행동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엄마의 용서는 불안한 것이었고, 설령 이번에는 용서했다 하더라도, 다음에는 용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반면에 살인범의 속죄는 너무도 완벽했다.
피해자가 용서해 준다면...이라는 조건도 없다.
자신이 스스로 모든 죄를 깨닫고 어떤 벌이라도 마땅히 받겠다고, 한줌의 거짓도 없이 진심으로 뉘우쳤다면 그 순간 그는 완전히 속죄를 한 것이리라.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용서 또한 이러해야 할 것이다.
가해자가 어떤 행동을 보이던, 어떤 마음을 가지던, 그것에 상관 없이 내가 받은 피해와 고통을 모두 잊어버리고, 그리하여 복수심, 분노, 증오 어떤 마음도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비로소 용서가 완벽해 지는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시간이 촉박한 것은 사실이다.
그 분들이 진정한 용서를 하기 위한 시간이 촉박하다는 뜻이다.
진정한 용서는 일본 정부나 우리나라 정부의 조치, 행동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끔찍했던 일들에 대해 어떤 증오나 분노도 갖지 않도록 저들의 모든 행위를 잊어버리는 것, 아니 잊지는 않더라도 담담하게 스쳐지나갈 수 있는 평정을 찾는 것이다.
모쪼록 이 세상을 떠나실 때에는 분노에 휩싸여서가 아니라 평안하게 가실 수 있기를 바라기에....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순간적이지만, 증오심이나 분노심은 아주 오랬동안 우리 자신을 더 많이 괴롭힌다.)
작년까지도 꽤나 시끄러웠던 위안부 할머니들과 일본과의 공방들...
진정한 사과와 합당한 배상을 요구하는 위안부 할머니들과 어물쩡 유감 표명으로 국면을 넘어가려는 일본 정부 사이에서, 정작 우리의 정부는 가면을 바꾸어 써가면서 편리하게 입장을 바꾸곤 하였다.
이 끝나지 않는 싸움에는, 정치적으로 이용 가치가 높은 이슈를 계속 가져가고 싶은 우리 정부의 더러운 욕심이 있지 않나 생각될 뿐이다.
아마도 작년까지 시끄러었던 위안부 이슈는, 무언가 국민의 시선을 돌리고 싶어하는 정부의 작전(?)이었던 듯.
올해는 갑자기 모든 일이 다 해결된 듯이 너무나도 조용할 따름인데, 정말 본질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었을까?
설마...
언제든지 다시 써먹을 수 있도록 잠시 휴식기를 가지고 있을 따름이리라.
진실 여부를 알 수는 없으니, 이런 정치 논리는 이 정도로 마무리를 하고,
제목인 용서와 속죄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자.
위안부 할머니들은 일본 정부를 용서하고자 한다.
너무도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그래서 피해 당사자들이 고령으로 한분 두분 세상을 떠나시고 있으니,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한편으로는 일본이 제대로된 사과를 하면 그 사과를 제대로 받아 줄 시간이 많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제대로 된 속죄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별로 급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은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과연 저 분들이 살아 생전에 만족할만한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여기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은 "만족할만한"이 대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며, 그게 과연 객관적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기에 더더욱 어려워 보인다는 것이다.
어째서 피해자가 용서를 구걸하는 모양새인가 말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용서와 속죄에 대한 질문과 답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딸을 잃은 엄마와 가해자인 살인범.
살인범은 검거되어 교도소에서 징역을 살고 있지만, 죽은 딸은 돌아오지 않는다.
슬픔과 절망, 분노를 종교에 기대어 참아 보지만 쉽지 않다.
고민 끝에 살인범을 용서하기 마음 먹고 교도소에 찾아갔지만,
살인범은 그녀에게 사죄를 하지는 않고, 종교에 귀의해 신으로부터 속죄를 받았다고 말한다.
허망하게 돌아오던 그녀는 혼절해 쓰러지고,
깨어나서 울부짖는다.
그가 내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내가 용서해 주지도 않았는데, 신이 무슨 권리로 그에게 용서를 주었느냐고...
과연 엄마는 살인범을 용서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녀의 용서에는 조건이 붙었다. 그가 충분히 사죄를 한다면...이라는.
나의 용서가 내가 아닌 상대의 행동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엄마의 용서는 불안한 것이었고, 설령 이번에는 용서했다 하더라도, 다음에는 용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반면에 살인범의 속죄는 너무도 완벽했다.
피해자가 용서해 준다면...이라는 조건도 없다.
자신이 스스로 모든 죄를 깨닫고 어떤 벌이라도 마땅히 받겠다고, 한줌의 거짓도 없이 진심으로 뉘우쳤다면 그 순간 그는 완전히 속죄를 한 것이리라.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용서 또한 이러해야 할 것이다.
가해자가 어떤 행동을 보이던, 어떤 마음을 가지던, 그것에 상관 없이 내가 받은 피해와 고통을 모두 잊어버리고, 그리하여 복수심, 분노, 증오 어떤 마음도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비로소 용서가 완벽해 지는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시간이 촉박한 것은 사실이다.
그 분들이 진정한 용서를 하기 위한 시간이 촉박하다는 뜻이다.
진정한 용서는 일본 정부나 우리나라 정부의 조치, 행동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끔찍했던 일들에 대해 어떤 증오나 분노도 갖지 않도록 저들의 모든 행위를 잊어버리는 것, 아니 잊지는 않더라도 담담하게 스쳐지나갈 수 있는 평정을 찾는 것이다.
모쪼록 이 세상을 떠나실 때에는 분노에 휩싸여서가 아니라 평안하게 가실 수 있기를 바라기에....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순간적이지만, 증오심이나 분노심은 아주 오랬동안 우리 자신을 더 많이 괴롭힌다.)
2016년 6월 25일 토요일
자신을 보완하는 방법들
보완....보다 완벽하게 하는 것?
한강의 채식주의자라는 책을 읽으며 문득 떠 오른 생각의 고리들.
나는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육식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구제역 파동으로 소와 돼지들을 산채로 매장하는 장면을 방송으로 보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가축을 기르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행위가 될 수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철저히 계획된 살생의 의도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
사자가 영양을 가두고 보살피며 물과 먹이를 제공해 주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인간의 식습관 중 기이하고 미개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아직까지도 널리 퍼져 있는 것은,
특정 생물의 특정 부위를 먹음으로써 자신에게도 같은 능력이 부여된다는 믿음이다.
특히나 남성의 정력에 좋은 음식으로 꼽히는 해구신, 우신 등이 이에 해당하며,
움직이는 모습이나 형태가 유사하다 하여 뱀이나 미꾸라지가 남성의 정력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믿음 또한 얼마나 어리석어 보이는가.
(실제 효과와는 별개로 생각의 발상 자체가 어이 없지 아니한가)
하지만, 이들이 인간의 신체를 보완하는 방편이라면 인간의 마음을 보완하는 방편 또한 존재한다.
소위 존재냐 소유냐라는 질문처럼 자신의 존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을 보완하기 위해 소유물에 집착을 하는 것이며, 자신의 소유한 것이 자기 자신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남성들이 고급 자동차에 집착하는 것, 여성들이 명품 의류나 액세서리에 집착하는 것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먹음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보완할 수 있다는 믿음,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보완할 수 있다는 믿음,
무엇이 다를 것이며, 그게 과연 올바른 믿음인지는 자명하지 않을까?
한강의 채식주의자라는 책을 읽으며 문득 떠 오른 생각의 고리들.
나는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육식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구제역 파동으로 소와 돼지들을 산채로 매장하는 장면을 방송으로 보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가축을 기르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행위가 될 수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철저히 계획된 살생의 의도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
사자가 영양을 가두고 보살피며 물과 먹이를 제공해 주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인간의 식습관 중 기이하고 미개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아직까지도 널리 퍼져 있는 것은,
특정 생물의 특정 부위를 먹음으로써 자신에게도 같은 능력이 부여된다는 믿음이다.
특히나 남성의 정력에 좋은 음식으로 꼽히는 해구신, 우신 등이 이에 해당하며,
움직이는 모습이나 형태가 유사하다 하여 뱀이나 미꾸라지가 남성의 정력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믿음 또한 얼마나 어리석어 보이는가.
(실제 효과와는 별개로 생각의 발상 자체가 어이 없지 아니한가)
하지만, 이들이 인간의 신체를 보완하는 방편이라면 인간의 마음을 보완하는 방편 또한 존재한다.
소위 존재냐 소유냐라는 질문처럼 자신의 존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을 보완하기 위해 소유물에 집착을 하는 것이며, 자신의 소유한 것이 자기 자신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남성들이 고급 자동차에 집착하는 것, 여성들이 명품 의류나 액세서리에 집착하는 것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먹음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보완할 수 있다는 믿음,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보완할 수 있다는 믿음,
무엇이 다를 것이며, 그게 과연 올바른 믿음인지는 자명하지 않을까?
피드 구독하기:
글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