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4일 토요일

타인을 깨닫게 하는 일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려고 시도하곤 한다.
거칠게 표현해서 강요라는 단어를 썼지만, 어쩌면 객관적인 제 3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단어가 제일 적절하다 싶어 사용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정말 옳다고 생각한다.
아주 강력하게, 의심의 여지 없이 말이다.
그렇기에 스스럼 없이 그것을 타인에게 전파하고, 설득하며, 강요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주 단순하면서도 명백한 사실 하나는,
강요하는 사람이 확신에 차 있을 수록,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만큼 더 의심스러워 한다는 점이다.

비슷하지만 다른 예를 하나 들어 볼까?

타인을 웃게 하기 위해서, 내가 알고 있는 아주 재미있는 얘기를 해 주는 경우.
아주 재미있다고 얼굴에 웃음을 잔뜩 머금어 기대감을 잔뜩 갖게 만들고,
얘기하는 내내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 얘기해 주고 나면
상대방의 반응은 대부분 기대에 미치지 못하곤 한다.
마치 빵 터져야 할 풍선의 바람이, 내가 웃을 때 마다 조금씩 빠져 나가서 풍선의 마지막 상태가 심각하게 쪼그라져 들어버린 것 같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 행위는,
타인이 행한 잘못을 지적하는 경우에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물론 이 또한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므로 어느 정도 주관적이거나 사람마다 의견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질타하고 꾸짖는 것으로 타인의 행동을 교정할 수 있을까?
꾸짖음을 받는 것이 두려워서, 꾸짖는 사람이 보는 곳에서는 그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지만, 언제든 다시 반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대부분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가장 큰 교정 방법은, 그 행동의 피해자가 되어 보는 것이다.
본인 피해자가 되었을 때 별다른 불편함이나 고통이 없다면, 가까운 사람이 피해자가 되어 고통을 겪는 것을 보면서 간접 경험을 하는 것이다.


앞서 처음에 제기했던, 타인을 깨닫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타인으로 하여금 의문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그의 제자들을 문답법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함으로써 의문을 유발했던 것이다.


너의 지식을 타인에게 주입하려 하지 말고,
너의 도덕심을 타인에게 강요하려 하지 말고,
너의 설레발로 타인의 기대감을 부풀리지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