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역사는 승자들의 편이라고 한다.
그 시대를 이끈 승자들은 종종 논란거리마저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고, 이를 대중에게 충분하게 혹은 의도적으로 설명함으로써 타당성을 부여받기도 한다.
이에 반대했던 패자는 최소한의 변론마저 빼앗겨버리고 악(惡)으로 규정되어 역사의 교훈으로만 남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혁명이나 반란, 대규모의 전쟁을 통해 이런 과정이 반복되어 왔는데, 이에 대한 반대론자들이 꾸준히 나오기는 하지만 여전히 대중의 인식에 각인되어 있는 이상한 논리가 하나 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천명을 거스르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순리와 천리를 따랐기에 승자들이 승리한 것이며, 그들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이유조차 지극히 옳은 것이고, 마땅한 천명이라는 것이다.
과연 이런 논리가 맞는 것일까?
자본주의의 시장 경쟁 체제를 보면, 전체의 규모가 매우 크기 때문에 누군가의 욕망만으로 시장을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오래된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현재 사회에서의 양상을 보면,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면서 부의 편중 현상이 점점 늘어가는 추세이다.
이런 현상은 전체 시장의 매우 작은 부분에서부터 전체적인 부분에까지 고르게 나타나고 있는데, 마치 프랙탈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라면이나 빵과 같은 일상적인 음식에서도 시장 지배력이 높아가는 브랜드가 있으며, 그들의 시장 지배력이 언젠가는 독점적인 지위를 가지게 될 듯이 보이곤 한다.
자동차, 반도체, 전자제품,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일상적인 용품에서 큰 금액의 자산에까지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금융기관의 브랜드나 실물 화폐나 가상화폐의 가치에서도 이런 양상이 나타나며, 이런 현상은 주식시장으로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작은 기업으로 시작한 업체들은 생존이나 작은 성공을 꿈꿈며 시작하면서, 시장에서 존재하는 게임의 법칙을 따라야만 한다.
그것이 관습적인 업계의 관행일 수도 있으며, 정부의 가이드라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런 법칙을 준수하며 성장하던 기업은 어느 순간 게임의 법칙을 만들 수 있는 지배력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법칙은, 자신이 처음 사업을 시작하면서 느꼈던 소규모 업체의 어려움을 제거하기 위한 법칙이 아니다.
이제 자신의 지위를 더욱 굳건히 하고, 자신에게 도전하는 경쟁기업을 견제하기 위한 법칙이기 마련이다.
이제 무엇인가 새로 시작하려 한다면,
그 세상이 이상적이고 아름다울거라는 환상은 거두어야 할 것이다.
불리하지만 그곳의 법칙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법칙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
그것이 옳기 때문에 따라야 하는 게 아니라는 것,
언젠가는 바뀔 수 있으며 그건 게임의 지배자가 바뀌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
비트코인을 위시한 가상화폐가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그들의 시세는 미친듯이 폭발하고 있다.
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극과 극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미 가상화폐를 보유한 사람은 이것이 새로운 대체 통화로서의 권리를 획득하여 기존의 부의 형태마저 바뀌기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미처 가상화폐를 보유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이것을 사상누각이나 신기루와 같은 것이라며 애써 무시하려 한다.
과연 어느쪽이 옳은 것일까?
지금이라도 투자를 해 보려는 사람은 깊은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대체 가상화폐의 진면목은 무엇일까, 그것의 미래는 어찌될 것인가?
2)
북한의 젊은 독재자 김정은의 행보는 거침이 없어 보인다.
ICBM, SLBM, 수소핵 융합 폭발 시험 등을 해 나가며 끊임없이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어째서 북한이 미국과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지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북한을 옹호하는 나라는 점점 줄어들어 이젠 거의 없다시피 하다.
마지막 중국과 러시아의 비호를 받을 수 있을지 여부조차 불투명하다.
전세계 모든 국가를 적으로 돌리고 있는 셈이다.
자국민들에게만 지지를 받는 이런 행동은 과연 옳은 것인가?
3)
박근혜 전대통령의 탄핵 이후에 새로운 지도자가 된 문재인 대통령.
그가 시도하는 정책들은 후보 시절의 언행에 비투어 볼 때 비교적 강경해 보인다.
대기업에 대한 제재, 중소기업 보호,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부동산 투기 근절 대책, 사회 곳곳의 적폐 청산...
이런 정책들은 대부분 힘없는 다수를 위하고, 힘을 가진 소수에게 양보를 요구(?)하는 정책들이었다.
그리고 갖가지 정책들이 나오면서, 양보를 해야 하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늘어가고 있다.
가장 큰 것은 여성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남성들이 양보해야 하는 것이 늘어나는 것이고, 북한의 도발로 인한 사드(THAAD)의 배치로 인해 양보를 해야 하는 특정 지역의 주민들과 기업들이 중국으로부터 받는 불이익을 감내해야 하는 문제 등이 있다.
일부에선 원자력 발전소의 공사 중단에 따른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는 실정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일까?
단지 많은 사람이 원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소소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무시될 수 있는 것일까?
앞서 제시한 3가지 상황에 대해 사람들은 각자 어떤 견해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쪽이 옳은지를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옳은 방법은 찾기 어렵다. 아니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인류는 과연 잘 해 온 것일까?
아니면 지금까지 인류가 걸어온 길이 좋은 선택이었다고 애써 자위하는 것일까?
우리는 선택의 순간마다 아주 잘못된 선택을 했던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나마 이정도라도....라며 자기 만족에 빠져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주 먼 훗날, 어떤 선택에 대한 극적인 인과 관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우리들 중 누구도 지금의 선택이 옳은지 아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단지, 지금 어떤 선택을 했다면, 그 선택이 옳다고 자기 최면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든 성공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하면 그것은 옳은 것이 되는 것이다.
옳기 때문에 성공하고 성취하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공하고 승리하고 이루어냈기 때문에 그것이 옳아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