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이 때 만들어지는 <의식(意識)>이란 "나"와 "나 아닌 것"의 구분으로 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여기에서 시작된 <의식>은 수 많은 타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혹은 <나 이외의 모든 것>과의 차이를 <인식(認識)>함으로써 점차 더 확고해져 간다.
충분한(?) 과정을 거친 이러한 <의식>의 결과를 이르러 <의식>이라 해야 하는 것인지 <인식>이라 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가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두개의 단어 <의식>과 <인식>을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는 나는,
<의식>은 실체의 유무와 상관 없이 두뇌 혹은 이성의 작용에 의해서 규정된 추상적인 개념을 뜻하며, <인식>은 애초에 실체로써 존재했던 것을 감각과 경험에 의해 파악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구별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설령 원래의 <의식>과 <인식>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내가 알고 있는 바와 다르다 하더라도 나는 위의 의미로써 사용하고 있는 것이니 이해해 주기 바란다.
"나"는 <의식>인가 <인식>인가 하는 의문의 근원을 따라가면,
"나"라는 실체가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문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나"의 실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면,
거울에 보이는 "누가" 있으며,
"누군가"의 신체 일부를 볼 수 있으며,
"누군가"의 신체를 통해 느낌을 얻을 수도 있으며,
이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아는 "누구"를 통해
실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고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의문의 과정에 나온 답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귀결이 된다.
생각하는 주체로써의 "나"마저 부정한다면,
생각이라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명제로 인용되곤 한다.
과연 맞는 말인가?
(말이 맞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맞는 것이겠지. 말은 그저 말일 뿐이다. 말과 말의 의미는 또 다른 문제니까.)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보고 느끼고 아는 "누구"를 통해 "나"의 실체를 증명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부터 어디까지인가? 시작은 어디고 끝은 어디인가?
보는 것의 주체가 "나"인가?
느끼는 것의 주체가 "나"인가?
생각하는 것의 주체가 "나"인가?
"나"와 <보는 것>은 얼마나 일치하는 것이며, 그 사이에 있을지 모를 지연/왜곡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와 <느끼는 것>은 과연 일치하는가? 일치하지 않으면 그 차이는 무엇인가?
"나"와 <생각>은?
이 모든게 각각 일치하지 않는다면 "나"는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과는 일치하는가?
혹시 빠뜨린 몇가지를 더 넣으면 일체하게 되기는 할까?
데카르트의 명제는 "생각하는 주체로써의 나"를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로 간주하고 있으나, 여기에 큰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생각의 주체가 나"가 아니라 "나라는 의식의 주체가 생각"이라고 한다면 어떨까?
애초에 "나"라는 실체는 없고, "나라는 생각"만이 존재한다면?
"나"라는 생각 = "나"라는 의식이 되고,
결국 "나"라는 의식만이 존재했으며, 이 의식이 보고 느끼고 생각했던 것이라면?
처음의 의문은 또 다시 이렇게 써야 맞을 것 같다.
"나"는 <의식>인가 <인식>인가 하는 의문의 근원을 따라가면,
"나"라는 실체가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문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다음의 의문으로 귀결된다.
"나"라는 의식이 "나"라는 실체를 만들어낸 것인가,
"나"라는 실체가 "나"라는 인식을 이끌어낸 것인가.